신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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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와 활동

신헌(申櫶)은 1810년 충청북도 진천에서 부사 신의직(申義直)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자 국빈(國賓). 호 위당(威堂). 초명 관호(觀浩). 시호 장숙(壯肅)이다. 조선말 무인 집안 출신으로 조부 신홍주는 무과에 급제하여 어영대장과 훈련대장, 병조참판을 역임했으며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시문에도 밝았으며 효명세자의 총애를 받았다. 이러한 배경이 바탕이 되어 1827년 음직으로 관직에 등용될 수 있었고 전라우수사를 거쳐 1849년 금위영대장(禁衛營大將)에 올랐다. 1849년(철종 즉위) 헌종(憲宗)이 위독하였을 때 사사로이 의사를 데리고 들어가 진찰하였다는 죄로 충남 녹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854년(철종 5) 무주(茂朱)로 이배(移配)되었으며, 1857년 풀려나 좌승지에 임명되었다. 그 후 우포도대장, 삼도수군통제사,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지냈고 1862년 진주민란 때 삼군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있으면서, 민란의 원인이 되는 군포를 양반과 상민 구분없이 평등하게 징수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주장하였다.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그의 정책을 보좌했던 중심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으로 조정의 주요 요직을 맡았으며 형조를 시작으로 병조 ·공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무관으로서 군사조직의 정비와 신무기 제조에 노력하였으며 1866년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摠戎使)가 되어 강화(江華)의 염창(鹽倉)을 수비하였다. 난이 끝난 후 좌참찬(左參贊) 겸 훈련대장을 지냈고, 신무기 개발에 관심을 쏟아 수뢰포(水雷砲), 마반포차(磨盤砲車), 불랑기동차(佛狼機動車), 쌍포합이(雙砲合耳) 등 조선군의 대표적인 화차를 개발하였다. 특히 수뢰포는 일종의 기뢰로 잠수부가 수중에 폭약을 설치하면 일정한 시간이 지나 폭발하는 장치이다. 자신이 구상하고 개발한 신무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상세하게 서술한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說)》, 《훈국신조기계도설(訓局新造器械圖說)》로 편찬하였다.

1868년 어영대장(御營大將) ·행지삼군부사(行知三軍府事)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874년 진무사(鎭撫使)가 되어 강화 연안에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의 3진에 포대를 구축했다. 1875년 운요호[雲揚號]사건이 일어나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서 전권대관(全權大官)이 되어 1876년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또 1882년 경리통리기무아문사(經理統理機務衙門事)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와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각각 체결하고 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가 되었다. 74세에 고향인 진천으로 낙향하여 그곳에서 사망했다. 예서(隸書)를 잘 썼으며, 문장에도 뛰어나고 묵란(墨蘭)을 잘했다. [1]

클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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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항목

이 문서 관계 관련 문서
신관호 A는 B의 무신이다. 조선시대
신관호 A의 '관호'는 B의 초명이다. 신헌
신관호 A는 B의 현판을 썼다. 삼군부 청헌당
신관호 A는 B의 현판을 썼다. 삼군부 총무당

기여

출처

  1.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신헌 [申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