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대공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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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민국 경찰청 산하의 대공 수사 기관이었다. 1976년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 건축되었다.[1]

내용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사회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었다가 경찰의 과거사 청산 사업의 일환으로 경찰청 남영동 인권센터로 역할을 바꾸어 운영되었다.
2018년 12월 26일 법적 관리권이 경찰청에서 행정안전부로 이관되었으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운영중이다.[2]

관련 사건

박종철열사는 불법 체포 된 후 고문을 받다가 사망한다. 박종철 열사 사망 다음날인 15일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박종철 열사 사망에 대해 “‘탁’ 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 고문에 의한 사망이 아닌, 단순 쇼크사라는 주장이었다. 결국, 묻힐 것 같던 진실은 우연히 사건의 단서를 접하게 된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의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짧은 기사 이후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3]

1985년 9월4일 새벽 5시30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에 속해있던 김근태는 7명의 정사복 경찰에게 끌려가 차에 타게 됐다. 차는 30여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닿았고,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갔다. 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무릎·허벅지·배·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9월 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고,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 고문실을 벗어난 9월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아내 인재근을 만난 김근태는 스쳐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검찰이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기 때문에 인재근은 남편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이야기를 들은 인재근은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유인물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 를 통해 이런 과정을 세상에 알렸다. 김근태가 공개적인 육성으로 세상에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은 12월19일의 첫공판 모두(冒頭)진술을 통해서였다.[4]

멀티미디어

이미지

동영상

  • <6.10 민주항쟁의 도화선 “남영동 대공분실”>

  • <뉴스데스크 - "끝나지 않는 고통"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자들>

장소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남영동 대공분실위키백과
  2. 남영동 대공분실위키백과
  3. 박종철 사망 30주기, 사진과 글로 정리해보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경향신문
  4. 경향신문, "김근태 고문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