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신환국
정의
1680년(숙종 6)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서인에 의해 대거 축출된 사건[1]
인물
내용
이 사건은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라고도 한다.
1674년 남인은 2차 갑인예송 문제로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나 경신환국으로 다시 실각하였다.
1680년 남인의 영수인 영의정 허적의 집에 조부의 시호를 맞이하는 잔치가 있는데, 그날 비가 왔다.
숙종이 잔치에 쓰게 하려고 유악(기름 먹인 천막으로, 임금만 사용하던 것)을 허적의 집에 보내려 하였으나
이미 가져가서 사용한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남인이 장악하고 있던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는 인사 조치를 단행하였다. [2]
패초(나라에 급한 일이 있을 때 국왕이 신하를 불러들이는 데 사용하던 패)로 군권의 책임자들을 불러 서인에게 군권을 넘기는 전격적인 인사조처를 단행하였다.
즉, 훈련대장직을 남인계의 유혁연에서 서인계의 김만기로 바꾸고, 총융사에는 신여철, 수어사에는 김익훈등 모두 서인을 임명하였다. [3]
이로써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음달인 4월 정원로의 고변으로 허견의 역모가 적발되었다.
이른바 ‘삼복의 변[三福之變]’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복선군·복평군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하여 역모하였다는 것이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서 병력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었고 허견·복창군·복선군 등은 귀양갔다가 다시 잡혀와 죽고,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였으나, 뒤에 악자를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고변자 정원로 또한 원래의 공모자의 한 사람으로 처형되었다.
이 사건의 연루자들에 대해서는 “장사꾼들에게 뇌물을 받고 시장을 옮겼다.”거나, “각 사 공물(貢物)을 많이 시장 사람들에게 내어주어 통용하게 하여 그 값을 나누어 먹었다.”는 등
상인 및 상업과의 관계를 지적한 것이 많은데, 이것은 정파의 어느 쪽이건 간에 당시의 정치가 경제의 새로운 변동에 영향을 받게 되는 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중요시된다.
이 시기 이후로 붕당정치가 일당전제(一黨專制)의 성향을 보이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대적 변모이다.[4]
결과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5]
이후 서인은 남인을 철저히 탄압하여 붕당의 기본 원리(상호 견제와 비판)를 무너트리고 일당 전제화 정치를 실시하였다.
인물들과의 연관성
경신환국은 숙종 외에 서오릉 속 인물들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숙종대에 환국의 주 세력인 서인과 남인의 정권교체가 처음 시작되는 사건이다.
숙종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불러 최상의 예우를 베풀었다(10월 12일).
공교롭게 국혼의 변화도 비슷한 때 일어났다. 1680년(숙종 6) 10월 인경왕후가 별세하자 이듬해 5월 민유중의 딸을 계비(인현왕후)로 맞은 것인데,
그녀 또한 대표적인 서인 가문 출신이었다. 이로써 서인은 국혼과 주요 관직을 대부분 장악했다.
이런 상황은 10년 가까이 이어졌다.[6]
경신환국을 시작으로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경종이 연관된 사건인 기사환국과 갑술환국이 차례로 일어났다.
경신환국 동영상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 경신환국 (두산백과)
- 경신환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경신환국 (Basic 고교생을 위한 국사 용어사전, 2001. 12. 10., 황병석)
- 숙종 - 환국 정치의 명암 (인물한국사, 김범, 장선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