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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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688(숙종 14)∼1724(경종 4). 조선 제20대 왕

내용

생애

이름 이윤(李昀), 자 휘서(輝瑞). 숙종의 아들. 어머니는 희빈 장씨이다.

경종의 비(妃)는 청은부원군 심호의 딸 단의왕후, 계비는 어유구의 딸 선의왕후이다.

단의왕후는 경종이 세자로 있을 때 사망하여 동구릉 혜릉에 안장되었고 계비 선의왕후 또한 소생이 없이 1730년(영조 6년)에 사망하였다.[1]

경종은 세자 때부터 신변상으로나 정치상으로 갖은 수난과 곤욕을 겪었으며, 재위 4년 동안 당쟁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신병과 당쟁의 와중에서 불운한 일생을 마쳤다.[2]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호대왕(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이다.[3]

경종의 가계도

경종 가계도.PNG

[4]

장희빈의 방패이자 환국의 불씨 경종

경종은 1689년(숙종 15) 원자(元子)로 정호되자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에 속한다는 점 때문에 송시열 등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서인 세력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숙종에 의해 세자에 책봉되었다. 이 사건으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몰락하게 되고 인현왕후가 폐출되었다.

이듬해 경종은 세자로 책봉되고 생모 희빈 장씨는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숙빈 최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이복동생인 연잉군 (뒤의 영조)이 출생하였고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경종 또한 숙종의 관심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파되면서

숙빈 최씨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고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희빈 장씨가 폐출되어 사사되면서 경종은 점차 내성적인 성격으로 변모했고 숙종으로 부터도 견제와 미움을 받아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고 전해진다.

1717년 숙종은 세자의 다병무자를 걱정해 몰래 이이명을 불러 이복 동생인 연잉군(뒤의 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그 해 세자 대리청정을 명했는데, 소론 측은 세자의 흠을 잡아 바꾸려 한다 하여 반대하였다.

이후로 세자를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의 당쟁이 격화되었다.

이런 정국의 혼란과 비정한 살육의 정치는 경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1724년 즉인 4년이 되던 해 그의 건강은 갑자기 나빠지기 시작하였고 자리에 누운지 단 며칠 만에 급서하고 말았다.

그의 사망을 두고 세간에는 게장을 먹고 독살되었다는 등 무수한 추측이 난무하였는데 영조에 이르러 경종의 사망에 대한 해명을 하기도 하였다.[5]

관련 사건

능묘

능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懿陵)으로 경종과 동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1970년 05월 26일에 사적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쌍릉은 좌우로 조성하나 이 능은 앞뒤로 비껴 능역을 조성하였다.

왕릉과 왕비릉이 각각 단릉의 상설을 모두 갖추고, 뒤에 있는 왕릉에만 곡장을 둘러 쌍릉임을 나타낸 배치이다.

능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를 택하였는데

이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6]

의릉의 모습

의릉.PNG

[7]

네트워크 그래프

참고문헌

기여

주석

  1. 경종
  2. 경종
  3. 경종
  4. 경종 가계도
  5. 경종
  6. 의릉
  7. 의릉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