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이상의 「권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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맵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데는 그런 웅덩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왔으니까 그저 들었을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10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蓬髮)이 작소(作巢)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겸손한 겁장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장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나그네들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은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약한 새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랫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이제는 나무 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아무런 대상도 없으니까이다. 최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미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는 길, 그 길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푹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 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의 수위를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혀 알 길이 없다.
 
맵싸리 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덩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데는 그런 웅덩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아무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왔으니까 그저 들었을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이 동리 사람 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렇건만 내가 아무 그런 위험한 짓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10리나 먼 데서 온 외인, 더구나 안면이 이처럼 창백하고 봉발(蓬髮)이 작소(作巢)를 이룬 기이한 풍모를 쳐다보면서도 짖지 않는다. 참 이상하다. 어째서 여기 개들은 나를 보고 짖지를 않을까? 세상에도 희귀겸손한 겁장이 개들도 다 많다. 이 겁장이 개들은 이런 나를 보고도 짖지를 않으니 그럼 대체 무엇을 보아야 짖으랴.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나그네들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은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도적이 없다. 인정있는 도적이면 여기 너무나 빈약한 새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개들은 너무나 오랫동안―아마 그 출생 당시부터―짖는 버릇을 포기한 채 지내왔다. 몇대를 두고 짖지 않는 이곳 견족들은 드디어 짖는다는 본능을 상실하고 만 것이리라. 이제는 나무 토막으로 얻어맞아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야 겨우 짖는다. 그러나 그와 같은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으니 특히 개의 특징으로 쳐들 것은 못되리라. 개들은 대개 제가 길리우고 있는 집 문간에 앉아서 밤이면 밤잠 낮이면 낮잠을 잔다. 왜? 그들에게는 지켜야 할 아무런 대상도 없으니까이다. 최서방네 집 개가 이리로 온다. 그것을 김서방네 집 개가 발견하고 일어나서 영접한다. 그러나 영접해 본댔자 할 일이 없다. 미구에 그들은 헤어진다. 설레설레 길을 걸어 본다. 밤낮 다니는 길, 그 길엔 아무것도 떨어진 것이 없다. 촌민들은 한여름 보리와 조를 먹는다. 반찬은 날된장 푹고추다. 그러니 그들의 부엌에조차 남는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길가에 무엇이 족히 떨어져 있을 수 있으랴. 길을 걸어 본댔자 소득이 없다. 낮잠이나 자자. 그리하여 개들은 천부의 수위를 망각하고 낮잠에 탐닉하여 버리지 않을 수 없을만큼 타락하고 말았다.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바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전혀 알 길이 없다.
  
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https://blog.naver.com/mimlove77/221675083601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 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대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忙殺)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 폐쇄되었다. '''이렇게 한산인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일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조차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덩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몸을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면? 밴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위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아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레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덩굴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덩굴의 뿌리 돋힌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해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 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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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는 신문도 오지 않는다. '''[https://blog.naver.com/mimlove77/221675083601 소위 승합 자동차라는 것도 통과하지 않으니 도회의 소식을 무슨 방법으로 알랴?]''' 오관이 모조리 박탈된 것이나 다름없다. 답답한 하늘, 답답한 지평선,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경, 답답한 풍속 가운데서 나는 이리 디굴 저리 디굴 굴고 싶을 만치 답답해 하고 지내야만 된다.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태 이상으로 괴로운 상대가 또 있을까. 인간은 병석에서도 생각한다. 병석에서는 더욱 많이 생각하는 법이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忙殺)할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그러나 지금 이 개울가에 앉은 나에게는 자의식 과잉조차 폐쇄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vuFyHXecPE&feature=share 이렇게 한산인데, 이렇게 극도의 권태가 있는데 동공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기를 주저한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다.]''' 어제까지도 죽는 것을 생각하는 일 하나만은 즐거웠다. 그러나 오늘은 그것조차 귀찮다. 그러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눈뜬 채 졸기로 하자. 더워 죽겠는데 목욕이나 할까? 그러나 웅덩이 물은 썩었다. 썩지 않은 물을 찾아가는 것은 귀찮은 일이고. 썩지 않은 물이 여기 있다기로서니 나는 목욕하지 않았으리라. 옷을 벗기가 귀찮다. 아니! 그보다도 그 창백하고 앙상한 몸을 백일 아래 널어 말리는 파렴치를 나는 견디기 어렵다. 땀이 옷에 배면? 밴 채 두자. 그렇다 하더라도 이 더위는 무슨 더위냐. 나는 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와서 세수를 하기로 한다. 나는 일어나서 오던 길을 돌치는 도중에서 교미하는 개 한 쌍을 만났다. 그러나 인공의 기교가 없는 축류의 교미는, 풍경이 권태 그것인 것같이 권태 그것이다. 동리 아이들에게도 젊은 촌부들에게도 흥미의 대상이 못되는 이 개들의 교미는 또한 내게 있어서도 흥미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함석 대야는 그 본연의 빛을 일찍이 잃어버리고 그들의 피부색과 같이 붉고 검다. 아마 이 집 주인 아주머니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것이리라. 세수를 해 본다. 물조차가 미지근하다. 물조차 이 무지한 더위에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러나 세수의 관레대로 세수를 마친다. 그리고 호박덩굴이 축 늘어진 울타리 밑, 호박덩굴의 뿌리 돋힌 데를 찾아서 그 물을 준다. 좀 생기를 내라고, 땀내 나는 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툇마루에 걸터앉았자니까, 내가 세수할 때 내 곁에 늘어섰던 주인집 아이들 넷이 제각기 나를 본받아 그 대야를 사용해 세수를 한다. 저 애들도 더워서 저러는구나, 하였더니 그렇지 않다. 그 애들도 나처럼 일거수 일투족을 어찌 하였으면 좋을까 당황해 하고 있는 권태들이었다. 다만 내가 세수하는 것을 보고 그럼 우리도 저 사람처럼 세수나 해볼까 하고 따라서 세수를 해보았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댑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는 중의 웅덩이 속을 들여다 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격한다. 무수한 오점들이 방향을 정돈해 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작은 연못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버러지를 먹겠지. 그러나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버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 늘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를 향하여 군중적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하류로만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도중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덩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덩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덩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野牛)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 하는 마치 폐병(廢兵)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숫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 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자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 소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원숭이가 사람의 흉내를 내는 것이 내 눈에는 참 밉다. 어쩌자고 여기 아이들이 내 흉내를 내는 것일까? 귀여운 촌동들을 원숭이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나는 다시 개울가로 가 본다. 썩은 물, 늘어진 댑싸리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거기 앉아서 이번에는 그 썩는 중의 웅덩이 속을 들여다 본다. 순간 나는 진기한 현상을 목격한다. 무수한 오점들이 방향을 정돈해 가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생물임에 틀림없다. 송사리 떼임에 틀림없다. 이 부패한 작은 연못 속에 이런 앙증스러운 어족이 서식하리라고는 나는 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요리 몰리고 조리 몰리고 역시 먹을 것을 찾음이리라 무엇을 먹고 사누. 버러지를 먹겠지. 그러나 송사리보다도 더 작은 버러지라는 것이 있을까! 잠시를 가만 있지 않는다. 저무도록 움직인다. 대략 같은 동기와 같은 모양으로 늘 그러는 것 같다. 동기! 역시 송사리의 세계에도 시급한 목적이 있는 모양이다. 차츰차츰 하류를 향하여 군중적으로 이동한다. 저렇게 하류로 하류로만 가다가 또 어쩔 작정인가. 아니, 그들은 도중에서 또 상류를 향하여 거슬러 올라올른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장 하류로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하류로 하류로! 5분 후에는 그들의 모양이 보이지 않을 만치 그들은 멀리 하류로 내려갔다. 그리고 웅덩이는 아까와 같이 도로 썩은 물의 웅덩이로 조용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풀밭으로 가 보기로 한다. 풀밭에는 암소 한 마리가 있다. 고 웅덩이 속에 고런 맹랑한 현상이 잠복해 있을 수 있다니, 하고 나는 적잖이 흥분했다. 그 현상도 소낙비처럼 지나가고 말았으니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수밖에.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지이다. 야우(野牛)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돌격한 일도 있습니다, 하는 마치 폐병(廢兵)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숫소의 그것보다도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 놓고 그 곁 풀밭에 가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우선 소를 본다. 소는 잠시 반추를 그치고 나를 응시한다. 「이 사람의 얼굴이 왜 이리 창백하냐. 아마 병자인가 보다. 내 생명에 위해를 가하려는 거나 아닌지, 나는 조심해야 되지」 이렇게 소는 속으로 나를 심리하였으리라. 그러나 5분 후에 소는 다시 반추를 계속하였다. 소보다도 내가 마음을 놓는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를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렸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세균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 본다.

2019년 10월 11일 (금) 22:0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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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상, 『권태』(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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