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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호곡장론(好哭場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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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left.png 초8일 갑신(甲申). 맑음.

정사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三流河)를 건너서, 냉정(冷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10여 리를 가서 한 산모롱이를 돌아들자, 태복(泰卜)이가 갑자기 몸을 굽히며 말 앞으로 달려 나와 땅에 엎드려 큰 소리로 말하기를,

백탑(白塔)이 보입니다.”

라고 했다. 태복은 정 진사(鄭進士)의 마두다. 그러나 산모롱이에 가려 백탑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말을 채찍질하여 수 십 보를 가서 산모롱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어른하며 눈에 헛것이 오르락내리락하여 현란했다. 나는 오늘에야 처음으로 인생(人生)이란 아무런 의지하거나 붙일 곳 없이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을 밟으며 떠도는 것임을 알았다. 말을 세우고 시방을 둘러보다가 나도 모르게 손을 이마에 얹고 말하기를,

“아! 울기 좋은 곳이로구나,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 진사가 말하기를,

“이렇게 천지간에 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큰 세계를 만나서 별안간 울음을 생각하는 것은 어찌된 일입니까?”

라고 물었다. 내가 말하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천고의 영웅들은 울기를 잘 하였고, 미인들도 눈물이 많았다지요. 그러나 그들은 몇 줄기 눈물을 소리 없이 옷깃에 굴려 떨어뜨렸을 뿐이지요. 그래서 천지에 가득 찬 울음, 쇠나 돌 같은 것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울음소리는 듣지 못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다만 칠정(七情: 喜·怒·哀·樂·愛·惡·欲의 일곱 가지 감정) 가운데 슬플 때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는 줄은 모릅니다.

기쁨이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노여움도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즐거움도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사랑도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미움[惡]도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욕심[欲]도 극에 이르면 울게 되고, 가슴이 답답함을 풀어버림에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빠른 것이 없으니, 울음은 천지간에 우레와도 같은 것이지요. 지극한 정(情)이 우러나오는 것, 이것이 능히 이치에 맞는다면 울음과 웃음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살아가면서 일상의 감정(感情)이 모이더라도 이러한 지극한 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하고서, 칠정을 교묘히 늘어놓으면서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했으니, 이런 까닭으로 죽음에 임했을 때 비로소 억지로 울부짖는 목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진실로 칠정에 감응(感應)하여 내는 지극하고 진실된 소리는 저 천지 사이에 참고 눌러서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서 감히 펴내지 못하지요.가생은 울고 싶으나 울 곳을 얻지 못하고 참다가 별안간 선실(宣室 : 한나라 궁전)을 향해 한 마디 길게 울부짖었으니, 이 어찌 사람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리오.”

라고 하니, 정 진사가 말하기를,

“지금 울음의 터가 저토록 넓으니, 나도 마땅히 그대를 따라 한 번 슬피 울어야 할 것인데, 우는 까닭을 칠종 중에서 구한다면 어느 것이라야 할까요?”

라고 하니, 내가 말하기를,

“저 갓난아기에게 물어보시오. 갓난아기가 처음 태어날 때 느낀 것은 무슨 정이었을까요? 그가 처음 본 것은 해와 달이었을 것이요, 그 다음으로는 부모를 보았을 것이며, 친척들이 그의 앞에 가득했을 것이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늙도록 변함이 없다면 슬퍼하거나 분노할 이유가 없을 것이니, 마땅히 즐겁고 웃어야 할 정만 있어야 하겠지만, 도리어 울부짖기를 한없이 하며 분하고 한스러움이 흉중에 가득 찬 듯하니, 이것은 곧 인생이란 신성(神聖)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한결같이 죽어야 하고, 또 그 사이에 모든 근심 걱정거리를 골고루 겪어야 함으로 이 아기가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저절로 울음보를 터뜨려서 스스로를 조상(弔喪: 죽음에 대하여 조의를 나타냄)하는 것인가.

그러나 갓난아기의 본래의 정(情)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무릇 그 아이가 태중에 있을 때 캄캄하고 막혀서 갑갑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넓고 훤한 곳으로 터져 나와 손발을 폄에 그 마음이 시원한 까닭입니다. 그 마음이 시원하니 어찌 한 마디 진실된 (울음)소리를 내어 마음껏 울지 않으리오.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 저 갓난아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저 비로봉(毘盧峰) 꼭대기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며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長淵) 바닷가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도하며, 지금 요동 벌판에 왔으니, 여기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으며 하늘 끝과 땅 변두리가 맞닿아 아교풀로 붙인 듯 실로 꿰맨듯하고, 예로부터 비구름만 지금까지 다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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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지원, 『열하일기』조선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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