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LDC(2022)Research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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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연구 목적
본 연구는 성북동의 세 누정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공간들에 대해 써진 한문학 텍스트 (에 나오는 개념어, 표현, 사람이나 자연물, 또는 누정의 이름), 관련된 사람이나 이벤트 등을 분석하여, 이 공간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공간의 이면을 발견함으로서, 세 누정이라는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성북동이라는 공통 분모를 가진 세 누정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알아보고, 성북동이라는 지리적 속성이 세 누정의 배경에 각각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도 알아보고자 한다. 이를 수행하는 데 데이터 큐레이션을 통한 분석을 활용하고자 한다.
이 연구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북동의 세 누정이라는 공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여, 사람들이 간편하게 그 공간의 의미와 역사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데이터 모델을 통한 데이터 시각화로서, 일반인들에게 친근히 접근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스토리텔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처럼 재미가 있거나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하는데, 구체적인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한문학과 데이터라는 두 분야의 융합으로서 일반인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한다.
연구 대상
이 연구는 성북동에 있는 다섯 누정들 일휴당(日休堂), 천석정(泉石亭), 삼인대(三人臺), 성락원(城樂園), 음벽정(飮碧亭) 을 연구 대상으로 합니다.
한문 텍스트는 日休堂, 泉石亭, 三人臺 이 세 누정들에 대한 텍스트들이 남아 있어서, 아래서 보실 수 있습니다.
일휴당기 1은 교수님께서 번역해 주셨고, 일휴당기 2는 고전종합DB에 번역이 되어 있어, 해당 번역본의 도움을 받아 번역했습니다.
일휴당기 3, 성북동천석정 병인, 제삼인대 병서 이 세 작품은 번역본이 없어서 직접 번역하였습니다.
다음 부분은 수정과 보완이 필요합니다.
- 일휴당기 3, 성북동천석정 병인, 제삼인대 병서 이 세 작품은 직접 번역하여서, 번역에 있어 미진한 부분이 있습니다. (번역이 어려운 부분은 ???로 표기) 세 작품에 대한 번역 교정이 필요합니다.
- 원문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 원문에 나오는 고유명사가, 아무리 조사를 해도 안 나오는 경우가 있어, 그래프 제작에 어려움이 많아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품석산이라는 산이나 불영각이라는 물 위의 건물이 나오는데, 어떻게 찾아도 나오지를 않습니다. (일단 그래프에 추가는 해 둠)
- 원문의 내용을 어떻게 마크업하고 그래프로 옮길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요합니다. 예를 들자면, 일휴당기 1, 2, 3 세 작품에서 쉬다(休)가 중요한 개념어로 등장하고, 나머지 텍스트들은 지역이나 풍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런 "개념" 이나 "묘사"를 어떻게 그래프로 옮길지가 어렵습니다. (일단 attribute 를 활용해서 그래프에는 넣어 둠)
日休堂記
華嶽之下, 多淸邃之境, 城北洞其一. 洞有一小亭, 背巖臨流, 卽蓉庵金相國舊庄別業也. 相國扁之曰:‘日休堂’, 相公早歲立揚, 歷踐內外, 位躋將相, 民憂國計, 一念憧憧, 有可休之日乎? 북한산(華嶽)아래에, 맑고 깊은 경계가 많은데, 성북동城北洞이 그중에 하나이다. 동네에 작은 누정樓亭이 하나 있는데, 큰 바위를 등뒤로 하고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니, 바로 용암蓉庵 김金 상국相國의 옛 전장田庄의 별업別業이다. 상국相國께서 편액을 써서 걸기를 ‘일휴당日休堂’이라 하였는데, 상공相公이 이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면서 장상將相의 자리까지 올라, 민생에 대한 걱정과 국가를 위한 계책에 있어 일관되게 마음을 놓지 않으셨으니, 이제는 쉬실 때가 된 것인가? 坐於草樹招提之裏, 而私意馳騖則身逸而心勞, 處於牒訴倥傯之中, 而公心周徧則身勞而心逸. 身雖逸而心勞則非所謂休也, 身雖勞而心逸則乃所謂休也. 服食器用, 適可而止, 不役於物, 辭受取予, 隨幾而行, 惟當於理, ‘無入而不自得’, 此心常休. 초수草樹가 초제招提한 속에 앉아 있으면서 사사로운 마음이 분주하게 치달으면, 몸은 편안한데 마음이 수고롭고, 첩소牒訴가 공총倥傯한 중에 처해 있으면서 공변된 마음이 두루 퍼지면, 몸은 수고로운데 마음이 편안하다. 몸은 편안한데 마음이 수고로우면 소위 ‘쉼(休)’이 아니고, 몸은 수고롭다 하더라도 마음이 편안해야 이른바 ‘쉼(休)’이라 할 것이다. 의복과 음식과 그릇과 사용하는 물건(服食器用)은 적당한 정도로 그쳐 외물에 휘둘리지 않으시며, 사양하고 받고 취하고 주는 것(辭受取予)은 기미를 따라 행하여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으시니, ‘어떤 상황에서도 자득하지 않음이 없음(無入而不自得)’[15], 이런 마음이야말로 늘 쉼이다.
日休堂記2
勞思休情也。有莫之然而爲者。有有所爲而爲者。有不可已而爲者。君子勞心。小人勞力。萬物勞於氣。心無休時。力有時而休。氣有休有不休。希有鳥摶扶搖九萬里而以六月息。鳶傅于天而或止於林樊。川之流不舍晝夜。不至海則不止。其在於人也。農休于秋。行旅休于夕。士之學也。俛焉日有孶孶。其仕也鞠躬盡瘁。皆畢其生而後已。然冥行者有鍾漏之譏。勇退者有江湖之憂。是知所休者力。所不能休者心也。 수고로우면 쉴 생각을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다. 군자는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소인은 힘을 수고롭게 하며, 만물은 기를 수고롭게 한다. 마음은 쉬는 때가 없으나, 힘은 쉬는 때가 있고, 기는 쉴 때가 있고 쉬지 않을 때가 있다. 드물지만 새 중에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구만 리나 가며 6개월을 가서야 쉬는 것이 있다. 솔개는 하늘로 날아오르지만 때로 숲에서 멈추기도 한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은 낮과 밤을 쉬지 아니하며, 바다에 이르지 아니하면 멈추지 않는다. (이런 것은 사람에도 있는데,) 농부는 가을에 쉬고, 나그네는 저녁에 쉬고, 선비는 날마다 부지런히 배움에 힘쓰고, 벼슬할 때에는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랏일에 이바지하다, 그 생을 다 마친 후에야 그친다. 그러하니, 벼슬길에 나가 어두운 길 가는 자들은 벼슬살이를 한다는 비웃음이 있으며, 용감히 물러난 자에게는 강호의 근심이 있으니, 이에 쉬는 것이 힘이고, 쉬지 못하는 것은 마음임을 알겠다. 丞相蓉庵公枚卜數月。力辭去位。退居于東墅舊築。有泉一絃。有峰數笏。有書一束。怡然有出塵之想。以書命章錫曰吾日日休於此。以是名吾堂。子其記之。 승상 용암공 (金炳始)은 몇 달간 매복(枚卜)되어 있었으나, 애써 사양하고 그 자리를 떠나고 물러서서 동쪽의 옛 별장에서 지냈다. 한 줄기 샘이 있고, 몇 개의 홀처럼 생긴 산봉우리가 있고, 한 묶음의 책이 있었기에, 기쁘게 세속 세계를 벗어난 생각이 있었으니, 이에 편지글을 써서 나에게 명령하시기를, "내가 날마다 이곳에서 쉬고 있으니, 이것으로서 내 집 이름으로 하고자 하네. 자네가 기문을 써 주게." 라 하시었다. 嗚呼。公契合明良。身都將相。憂虞之會。百責埤益。盖未甞一日休也。而亦未甞一日忘退也。今几舃少暇而戀主之心。如川流之赴海。憂世之志。如農夫之望秋。顧安能浩然若行旅之得歸乎。況公之不宜休者有五。年未至矣。時方艱矣。用未究矣。主知隆矣。蒼生之望切矣。將恐謝傅之棊局。未了於東山。而君實之手板。蹶然於中夜。心之勞矣。休於何有。 하아. 공께서는 자신을 알아주시는 어진 임금을 만나서 몸소 장수와 재상을 다 하시어, 근심과 걱정이 모이며 많은 책임이 더해졌으니 대개 일찍이 하루도 쉰 날이 없었지만, 또한 일찍이 하루도 물러날 생각을 잊은 적이 없으셨다. 지금 궤석(정승 벼슬아치가 신는 신발)에서도 잠깐 한가할 때가 있을 때에도 임금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시냇물이 흘러 바다로 향해 가는 것과 같고, 세상에 대해 걱정하는 뜻은 농부가 가을때(추수)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생각컨데 어찌 능히 호연하게 나그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게다가) 공께서 쉬시기가 마땅하지 않은 이유가 다섯이 있다. 나이가 아직 때(물러나야 할 때)에 다다르지 않았고, 시국이 바야흐로 어려우며, 자신의 도를 다 쓰지 못하였으며, 임금님으로부터 대우를 성대하게 받고 계시고, 백성들이 거는 기대가 간절하기 때문이다. 장차 아마도 사부의 바둑이, 동산에서 끝나기도 전에, 군실의 수판이 한밤중에 뛰어 벌떡 일어날 것인데, 마음을 수로곱게 하심에 쉼이 어디 있으시겠는가? 周書曰作德心逸日休。名其在玆乎。公曰否否。公雖不自居。其指有相近者。休之爲美。取義乎安息。心苟安矣。安往而不休。安之如何。物來順應。事去則已。金革百萬。飮水曲肱。隨遇而一致。則是金門黃閣。亦猶綠野平泉。用舍行藏。無所處而不休休矣。用是爲公祝。 주서에 이르시길, "덕을 베풀고 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져 나날이 아름다워진다"고 하였으니, 그(이 집의) 이름이 아마도 이 말에서 온 것인가. 공께서는 "아니다, 아니야."라고 하셨다. 공께서 비록 자처하지는 않으시지만, 그 취지가 서로 가까운 점이 있다. 쉰다 (休)라는 글자가 아름답다(美)라는 의미가 되는 것은, 안식(安息)에서 뜻을 취하여서이다. 마음이 참으로 편안하다면, 어디를 간들 쉬지 못하겠는가? 편안한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물이 다가오면 순응하고, 일이 지나가면 곧 그만두어서, 병사 백만을 거느리는 것과 홀로 물을 마시고 팔뚝을 베고 자는 것을 각각 처하게 되는 경우를 따라 하나의 이치로 실천하면, 이는 즉 금문과 황각이 녹야와 평천 같으리니, 용사행장 (벼슬에 나아가 도를 행하거나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함)에 있어 처하는 곳마다 아름답고 평온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日休堂記3
日休堂記3
人之恒言曰:“老則休”. 此以休身而言, 非休其心之謂也. 心之休, 何待乎老, 而苟得其休, 亦可以樂而忘老矣. 傳云:‘仁者壽’, 又云:‘愷悌君子, 求福不回’, 其道未嘗不由於休其心, 而其身之休不休, 固不足論也.
사람들은 늘 말하기를, “늙으면 쉰다”고들 한다. 그것은 몸을 쉬는 것에 대한 말이지 마음을 쉼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쉼이 어찌 늙음을 기다리겠으며, 진실로 그 쉼을 얻으면 또한 즐기면서 늙음을 잊어버릴 수 있다. 전하는 말로, ‘인자한 사람은 오래 산다’고 했고, 또 『시경』에 이르기를 ‘용모와 기상이 화평하고 단아한 군자는, 복을 구하는 것이 간사하지 않다’고 하였으니, 그 도는 일찍이 마음을 쉬게 하는 데서 연유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그 몸의 쉼과 쉬지 않음은 진실로 (도를) 논하기에 부족하다.
蓉庵傅相於東山別墅, 新搆小堂, 顔之以日休. 或疑之曰:“今吾君待公而爲政, 吾民恃公而爲生, 使公而年已至, 尙不可以言休, 况年未至乎? 且以公體國之誠, 處調元之地, 宜其急病讓夷, 以光世篤之業, 而乃反謙退不居, 以休爲志, 甚非朝野所望於公者也.”
재상 용암(蓉庵) 김병시는 동쪽 산의 별서에 작은 집을 새로 짓고, 그 이름을 ‘일휴(日休)’라고 하였다. 혹자는 의구심이 들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는 공을 의지해 정사를 펼치고 계시며, 우리나라 백성들은 공에게 기대어 살아가기에, 공이 연세가 이미 많음에도 오히려 쉰다는 말을 못하게 하였으니, 하물며 연세가 지극하지 않았을 때에라야? 장차 나라를 제 몸처럼 여기는 정성에 공변됨과 국정을 주관하는 재상의 위치에 처함으로, 의당 그 어려운 일을 해소하고 쉬운 일은 남에게 양보하여 대대로 두터운 업적을 빛냈음에도, 곧 도리어 겸손히 물러나 거하지 않고 쉬는 것으로 그 뜻을 삼았으니, 조야(朝野)가 공에게 바라는 바는 절대 아니다.”
昌煕曰:
“否. 今夫晝而作者夕而休, 春而作者冬而休, 作與休相爲循環. 其作也勞, 其休也怠, 而不得其節, 皆凡民也. 賢士大夫亦多不能免焉, 惟公則不然, 其平居無日而不休, 亦無日而不作也. 進思贊襄, 而自守恬靜, 故有至淸不撓之德, 退思調養, 而常存憂愛, 故有至誠無息之功. 凡所以彌綸默運, 匡濟時艱者, 其爲術莫不本之於作與休爲一致也. 是以銓衡絲綸金穀卒乘之泛應曲當, 而未嘗爲勞, 則公雖作焉而其休固自在也. 圖書琴尊園林泉石之隨境取適, 而亦不足爲佚, 則公雖休焉而其作尙未已也. 且公之優閒於此堂, 晩節淸福之所由完也, 可以模楷一世而坐鎭雅俗矣. 公之安慮於此堂, 嘉猷碩畫之所由得也, 可以膏澤斯民而對揚聖化矣. 噫, 子之謂公志已决於釋負而已者, 淺之乎知公之日休也夫。
나(창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지 않다. 지금 대저 낮에 일하는 자는 저녁이 되어 쉬고, 봄에 일하는 자는 겨울이 되어 쉬니, 무언가를 하는 것과 쉬는 것은 서로 순환한다. 일함은 수고로움이고 쉼은 게으름인데, 그 알맞은 정도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 평범한 인민들이다. 현사와 대부 역시 대부분 그것을 면치 못하는데, 오직 공께서는 그렇지 않아서, 그 평소 거처하심에 쉬지 않으시는 날이 없으며, 또한 일하지 않으시는 날이 없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임금을 보좌함에 여념 없으면서도 평온함과 고요함으로 스스로를 지켰기에, 지극히 맑고 흔들리지 않는 덕이 있었으며, 조정에서 물러나서는 자신의 몸을 보살피는 데 여념 없으면서도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늘 품었으므로, 끊임없는 지극한 정성과 쉼 없는 공이 있다. 무릇 미륜(彌綸)하고 묵운(默運)하여 세상의 어려움을 바로잡고 구제하는 것은, 그 방술됨이 일함과 쉼이 일치가 되는 것으로부터 근본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조정에 계시면서) 이조(銓衡)와 승정원(絲綸)과 호조(金穀)와 병조(卒乘)의 업무에 널리 응하고 세세히 잘 대처하시면서도 일찍이 수고롭게 여기지 않으셨으니, 공께서 비록 일을 하시는 와중에도 그 쉼은 참으로 자유자재했던 것이다. (조정에서 나와) 도서(圖書)와 금준(琴尊)과 원림(園林)과 천석(泉石) 사이에서 선경을 따라 유유자적하시면서도 또한 편안히 여기시기에 충분치 않았으니, 공께서 비록 쉬시는 와중에도 그 일함이 오히려 그치지 않으셨던 것이다. 장차 공께서 이 집에서 한가로이 지내심은 만년의 청복이 완연할 연유라, 당세의 모범으로 가만히 앉아서 아속을 진정 시키실만 하다. 공께서 이 집에 편안히 계시면서도 세속을 걱정하심은 훌륭한 계책을 터득하실 연유라, 백성들에게 은택을 내려 성상의 교화를 널리 알리실만 하다. 아! 그대가 공의 뜻이 의정(議政)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이미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한 것은, 공이 의도하신 ‘일휴(日休)’의 뜻을 겉핥기 정도로 아는 것일 뿐이다.”
城北洞泉石亭 幷引
城北洞泉石亭 幷引
城北洞泉石亭, 謁容齋尹議政告退. 相公挽執携筇, 同翫泉石之勝, 指點景槩. 亭之北扁萬松窩, 水閣曰不盈閣. 閣之前, 大石平舖, 可十餘間. 石之南, 詎巖特立, 高數丈, 廣可六七間. 巖之上, 老松二株大可數抱, 長亦數十丈, 枝幹廣達, 全覆石面. 杜鵑躑躅之屬, 雜錯於萬松之間, 閣下溪流, 水通石罅. 鏦錚之韻, 與松籟合奏笙簧琵琶之聲, 眞別洞天也。
성북동(城北洞) 천석정(泉石亭)에서 조정에서 물러난 용재(容齋) 윤 의정(尹議政, 윤용선)을 배알하였다. 상공은 지팡이를 짚는 것을 만류하고, 전원의 승경을 함께 완상하며 그림 같은 경치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정자의 북쪽 편액은 만송와(萬松窩)이고, 물가의 누각은 불영각(不盈閣)이라 이름 하였다. 누각 앞에는 큰 돌이 평평하게 펼쳐져 있는데, 10여 칸 즈음 된다. 돌 남쪽에는 얼마큼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몇 장이며 넓이는 6~7칸 즈음 된다. 바위 위에는 늙은 소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크기가 몇 아름은 되고 길이도 수십 장은 되며, 가지와 줄기가 넓게 뻗어 돌 표면을 모조리 덮고 있다. 두견과 척촉 따위가 온갖 소나무 사이에 섞여 있고, 누각 아래로는 시내가 흐르며 물은 돌 틈으로 통한다. 잘그랑 잘그랑대는 울림과 함께 소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생황과 비파와 합주하는 소리는, 그야말로 별세계 그 자체다.
城闉咫尺闢桃源。丞相菟裘爰處爰。 一道飛泉松底出。千羣啼鳥石頭喧。 桑楡縱趁懸車限。葵藿猶應戀闕恩。 爲賀玆區遭遇盛。偏因卜築世知尊。
성곽의 지척에 무릉도원이 열렸으니, 승상이 은거해 여기 산다네 한 줄기 폭포아래 소나무 돋아났는데, 뭇 모여 우는 새들은 돌머리에 지저귀네 뽕나무와 느릅나무 현거(懸車)의 경계를 좇는데, 해바라기 오히려 연궐(戀闕)의 은덕에 응하네 (*해석: 늙어버린 몸뚱이는 은거하길 바라는데, 임금님 향한 마음은 대궐로 향하도록 하네) 이 터를 만나 성대해질 것을 경하드리니, 여기 집을 지었기에 세상이 높일 줄 알게 되리라.
題三人臺 幷序
題三人臺 幷序
臺在城北洞品石山房之後, 壁鐫三人臺三字, 傍有辛亥二字. 傳說正廟時有新進學士三人, 讀書于此, 各欲占宅於此, 末乃以三人名臺而刻之云. 園今爲宜石金尙書別業. 壬戌秋。宜石公邀海藏及冕, 徜徉泉石之間, 冕率題焉.
삼인대(三人臺)는 성북동 품석산방 뒤에 있는데, 벽에 ‘삼인대(三人臺)’ 세 글자를 새기고, 옆에는 ‘신해(辛亥, 1791)’ 두 글자를 새겨 놓았다. 전하는 말로는, 정조 임금 때 새로 벼슬에 오른 학사 세 사람이 여기서 글을 읽다가 각자 이곳에 집을 마련하고 싶어 했는데, 나중에는 세 사람의 이름을 가지고 대(臺)로 삼아 새겼다고 한다. 지금은 의석(宜石) 김 상서(金尙書, 김응근)의 별업이다. 임술년(1862) 가을, 의석공이 해장(海藏, 신석우)과 나(조면호)를 맞이해 이곳 전원에서 노닐었는데, 내가 삼인대로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近廓塵無到, 入山境愈新. 主翁與海叟, 對我成三人.
가까이에 먼지조차 닿지 않는데, 산 속이라 경계가 더욱 새롭구나. 주인옹과 해장옹 그리고, 나까지 마주하니 딱 세 사람이 되었구나.
성락원 (城樂園)
이칭: 서울 성북동 별서 (이 이름으로 명승으로 재지정됨) 1921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지형도에 ‘이강공별저(李堈公別邸)라고 표기되어 있음, 이해경 선생(이강공의 5녀)의 저서에 '성북동별장' , '이강공별저' 라고 불렀다고 함 춘파유고에는 쌍괴당(雙槐堂), 쌍괴누옥(雙槐陋屋), 쌍괴실(雙槐室)이라고 언급이 됨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VdkVgwKey=15,00350000,11&pageNo=1_1_2_0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9288
(이거 설명 상세해서 좋은데, 해외 DH사례때 봤던것처럼 게임처럼 한번 만들어볼까?)
조선시대의 정원이며, 경관이 아름답다.
안에 시냇물이 있는데, 이 시냇물을 기준으로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뉘어진다.
입구(앞뜰)에는 두 줄기의 계곡이 있는데, 앞뜰에서 그 두 줄기가 하나로 모이며, 그 계곡의 암벽에는 雙流洞天(쌍류동천)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그 안에는 안뜰{내원(內園)} 이 있고, 안뜰은 용두가산(龍頭假山)이 감싸고 있는데, 이는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산이며 안뜰을 감싸서 깊이를 주기 위한 목적이며, 오래된 각종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숲이 울창하다. 다만, 1921년의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지형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아, 그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뜰에는 계곡의 암벽 아래에 작은 소(沼)(웅덩이)를 조성하였는데, 이름은 영벽지(影碧池)이다. 영벽지 안에는 괴석 하나가 물 안에 있다. 그 주위의 바위에는 청산일조(靑山壹條), 장외가(檣外家),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 등 글씨가 새겨져 있다. 16미터*12미터 크기에 깊이는 약 1.5미터이며, 북쪽 암벽에는 물이 흘러내리는데, 그곳에 수로를 인공적으로 파고 3단 폭포를 만들었다. 폭포의 물들은 다 석구(돌절구)로 떨어지는데, 밑 폭포의 낙차가 제일 크다.
이 폭포 옆의 바위에는 전서체로 ‘靑山壹條(청산일조)’ 라고 새겨져 있으며, 웅덩이의 서쪽에 있는 암벽에는 ‘檣氷家 阮堂(장빙가 완당)’이라고 해서체로 새겨져 있는데, 이는 김정희(金正喜)가 쓴 것으로, 장빙가란 겨울에 고드름이 매달린 집이라는 뜻이다. 그 암벽 위에 “影碧池 海生(영벽지 해생)”, “百泉會不流 爲沼碧闌頭 自吾得此水 少作江湖遊 癸卯五月 孫文鶴書(온갖 샘물을 모아 고이게 하니 푸른 난간머리에 소가 되었네. 내가 이 물을 얻은 뒤부터 약간의 강호놀이를 하네. 계묘(1843년, 헌종9년) 5월 손문학 씀).” 이라고 새겨져 있는데, 해생(海生)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황윤명)이 쓴 것이다. 그 바로 위에는 “明月松間照 靑泉石上流 靑山數疊 吾愛吾盧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은 돌 위에 흐르며 푸른 산이 몇 겹 싸여 나는 내 농막을 사랑한다).” 이라고 새겨져 있다.
영벽지의 동쪽 언덕에는 오래된 집 한 채가 남아 있는데, 농막 (농지 옆에 건설하는 작은 주택)의 본채이며,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이 살았다.
이 집으로부터, 숲 속에 돌계단이 하나 있는데, 그 계단을 올라가면 또 하나의 못이 있다. 그 못의 동쪽에는 최근에 지어진 ‘송석정(松石亭)’이라는 누각이 있으며, 못의 북쪽의 시냇물 곁에는 ‘松石(송석)’ 이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못 바위 사이에 큰 소나무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못으로 흘러내리는 계곡물은 중간에 작은 폭포들을 이루며, 그 계곡물의 상류에는 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물을 집수하는 목적으로 못이 하나 더 있다. 성락원 안에는 이렇게 총 3개의 못이 있으며,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활용하였다.
성락원은 주로 경승지로 오랫동안 이용되었다. 별서로 조성한 것은 조선 고종 때의 내관인 황윤명(黃允明, 1844∼1916)이며, 육교시사(六橋詩社)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하고,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가 피난을 오기도 하며,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 이 별궁으로도 사용하였다. 다만, 1927년 화재로 상당 부분이 손실되어서 현재는 그 별궁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현재의 모습은 1961년 사실상 재탄생된 정원이다.
문화재청 보도자료 (2020.6.24)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https://www.korea.kr/news/pressReleaseView.do?newsId=156397516
명승 제35호였던 성락원을 지정 해제하고, 서울 성북동 별서라는 새 이름으로 재지정을 고려하였다.
과거에는, 성락원의 조성자가 조선시대 철종 때의 이조판서를 한 심상응이라는 사람이라고 알려졌었으나, 이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문헌기록으로서는 황윤명의 춘파유고(春坡遺稿, 오횡묵의 총쇄록(叢瑣錄), 명성황후의 일편단충(一片丹忠) (명성황후가 직접 써서 갑신정변 이후 황윤명, 김규복 등에게 나누어 줌)의 김규복 발문이 있다. 문헌기록을 살펴 보면 조선 고종 때의 내관이자 문인인 황윤명이 성북동을 조성하였다는 것이 밝혀졌으며, 갑신정변(1884) 때 명성황후가 황윤명의 별서를 피난처로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일편단충의 김규복 발문에 있는데, 이로서 성락원이 1884년 이전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춘파유고(春坡遺稿): 황윤명의 시문을 모아서 황윤명의 차손 안호영이 발간한 문집인데, 춘파유고에 수록된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 시문이 성락원 내 영벽지에 새겨진 각자와 일치함
총쇄록(叢瑣錄): 오횡묵이 자신이 관리로 있던 곳을 일기처럼 기록한 것인데, 황윤명이 조성한 정원을 1887년 방문하였다고 기록함
일편단충(一片丹忠)의 김규복 발문: 명성황후가 직접 써서 갑신정변 이후 황윤명, 김규복 등에게 나누어 준 것에다 김규복이 발문을 붙인 것인데, 갑신정변 당시 '혜화문으로 나가서 성북동의 황윤명 집으로 향했다, 태후,왕비, 세자께서 이미 어가에 머무르고 있었다'고 기록함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F&nNewsNumb=201912100060
- 다만, 추가 조사가 필요함. 성락원은 의혹으로 인해 사적지정과 명승지정이 되었지만 취소되기도 하고 다시 복권되기도 한 곳이라, 자료조사에 한계가 있고 옳은 자료와 틀린 자료가 혼재되어 있음. (한 자료에서 옳다고 한 사실을, 자료조사를 더 해 보니 또 다른 자료에서는 틀렸다고 하는 등)
또한, 관련서적으로 고려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한 춘파유고(春坡遺稿)가 있으나(마지막 링크), 200장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에, 번역이 안 되어 있어 (찾지 못함) 마크업 및 조사를 하기 어려움. 어떻게 추가 조사를 해야 할 지 고민이 필요함.
국회 도서관 -성락원 명승지정, 무엇이 문제인가 토론 자료집 https://docviewer.nanet.go.kr/reader/viewer 지금으로서는 제일 신빙성 있는 자료로 보여짐. 이 자료를 기반으로 하여 춘파유고를 번역한 것으로 추가 조사를 할 예정 신빙성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제가 하고자 하는 걸 사실상 다 해놓은 것처럼 보입니다! ㅠ 춘파유고 번역문으로 비교분석 해봐야겠습니다..
오횡묵: 제삼인대병서와 총쇄록의 공통 저자
음벽정(飮碧亭)
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849.do
민영환(閔泳煥) (1861~ 1905)의 별장이다. 민영환은 19세기 말부터 관료로 활동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조카이며, 을사늑약에 반대하며 자결한 순국지사이다. 음벽정은 민영환이 많은 명사들과 교류하는 데 쓰였으며, 당시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도 음벽정을 방문하였다. 위안스카이는 민영환과의 교류뿐 아니라 외교 또한 목적으로 음벽정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위안스카이는 민영환 사망 후 음벽정에 다시 찾아와 추도시를 읊기도 하였다. 민영환 사망 후, 그의 동생이 소유하다가 1931년 일본인(五味安太郞)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후 1934년 한택수(韓澤洙)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때부터(1935년) 요정으로 운영되었는데,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많았다.(1936년 8월 6일, 성북동 주민들이 음벽정의 요정 운영에 대해 진정 접수) 1939년 화재가 있었으나 한옥 건물 한 채가 타서 없어지는 데 그쳤다. 한국전쟁 이후, 온돌불을 너무 과하게 때다 화재가 나서 없어졌고, 현재는 연화사라는 사찰이 그 터에 있다.
사방이 숲과 나무로 둘려 있으며, 99칸 양옥과 한옥이 두루 지어진 곳이다. 마당과 정원에는 정원석과 괴석이 여러 개 놓여 있고, 숲에서 내려오는 물로 연못도 있었다고 한다. 안의 언덕 쪽에는 양옥들이 지여 있었다고 한다.
이름의 유래는 푸르름(碧)을 마시는(飮) 누정이라고 한다.
- 한문 자료를 찾지 못함. 전반적으로 마크업할 만한 충분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음, 추가 조사가 필요함 (링크의 근거자료 원문이 유용해 보이나, 한문 자료 더 찾아봐야 할 듯)
연구 방법
세 누정이 각각 어떠한 속성/관련/개체 등을 가지는지 분석한 후, 각각 누정들이 가지는 속성/관련/개체를 비교하고 서로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고, 성북동이라는 지리적 공통 분모가 어떻게 그러한 속성/관련/개체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분석하고자 한다.
개념어로는 쉴 휴(休)가 일휴당기 1,2,3에 모두 큰 비중을 가지고 등장하는데, 나머지 텍스트에도 개념어를 추출해 봐야겠다. 또, 누정 이름에 대해서도 추가로 조사할 예정이다. (누정 이름 관련된 경전 reference가 일휴당기 1에 하나, 2에 하나 있음)
일단 고려하고 있는 건 누정 이름을 따온 구절의 의미로써 공간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 그리고 누정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이것도 일휴당기 2에 언급이 있음, 저자 생각일뿐이긴하지만) , 그래서 옛날사람들이 이 집에 부여한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파 보는 것이다. 글들의 작가와 언급이 되는 사람들도 누정의 개체로서 비교해보려고 하는데, 뭔가 뾰족한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일단 사람들의 생년 조사해서 그래프에는 추가해놓음) 답사 갔을 때 편액이나 기문들의 텍스트를 분석해서 마크업해보는 것도 고려중이다.
- 이 프로젝트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도 조금 의문이 있다. 뭔가 연구를 해서 결론이 나야 하는데, 어떤 결론을 목표로 잡고 연구와 조사를 계속해야 할 지 감이 잘 안 온다... (이쪽에 흥미가 생겨서, 발전시켜서 졸업논문으로 쓰는 것도 고려 중인데...)
데이터 모델링
(내용 서술)
데이터 샘플링
연구 데이터
(내용 서술)
연구 결과
(내용 서술)
참고 자료
(내용 서술)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