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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병원 장례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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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현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6월 24일 (수) 19:3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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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장례식장황순원 장례식장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 믿기지 않네."[1]


황순원의 죽음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황순원의 죽음 관련 인터뷰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

서덕순: 지금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얘길 하지만, 사실은 얘기하라면 밤새도록도 할 수 있어. 그게 몇 해에 걸쳐서 선생님을 옆에서 쭉 봤고, 또 평소에도 선생님 소설을 늘 읽고 얘기를 많이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도현(*인터뷰어)이한테 얘기를 하다가 생각을 하니까,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 믿기지 않네. 20년 넘었네. 내가, 선생님 돌아가신(*돌아가신 지가). 선생님이 주무시는 것처럼(*주무시는 것처럼 돌아가셨다), 저녁때 방에 나는 들어가겠다고 주무시러 들어가고, 그러고 나서 새벽에 가보니까 돌아가셨다던가? 새벽에 조금 이상해서 선생님이, 사모님이 이렇게 들어가셨다가, 두 분이 (같이) 사셨거든, (*황순원의 죽음 이후로)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사셨고. 그래서 자다가 주무시듯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가 굉장히, 8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당시로도 오래 사셨던 거고, 장수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장례식 때 빈소에 모여서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조세희 선생님이, 조세희 선생님은 영문과 출신이에요. 경희대학교. 영문과 출신인데, 선생님의 제자니까. 그래도. 선생님이 아끼던 사람이고 그러니까, 오셔서 조세희 선생님이, 아닌가? 조세희 선생님도 국문과 출신인가? 야, 진짜 기억이 이러냐…. 아, 조세희 선생님이 국문과 출신이고 한수선 선생님이 영문과 출신이었네. 한수선이라고 또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오시고 그래서 그때 거기 빈소에는 진짜 유명한 작가님들 다 왔었어요. 어, 그리고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도 다 오고. 그래서 선생님이 이제 안 계시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밥을 먹는 그 모임은 더는 할 수 없는데 그 때 조세희 선생님이, '그러면 내가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조금 힘이 돼서 같이 후배들하고 계속 경희 문인들이 모일 그런 기회를 마련해 보면 좋겠다. 그렇게 하자.' 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셨어요.


황순원의 죽음 관련 글

오성찬, 「고가도로 위에서 나부끼던 두루마기 고름」, 제민일보, 2000.09.16

황순원 선생님 영전에 20대후반 문청 시절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읽던 작품…술자리서 조차 흐트러짐 없는 꼿꼿하면서도 소탈했던 선생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신지, 신문이나 잡지에 가끔씩 나는 동정만 살피는 새 6 ~ 7년을 버텨 오셨는데, 어제 저녁 TV 뉴스를 보다가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나무들 비탈에서다」의 첫회가 「사상계」에 연재가 될 무렵, 나는 20대 후반의 문학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주인공이 진격해 나가며 ‘건드리기만 하면 파삭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긴박한 상황을 작품으로 읽으며 숨이 막힐 정 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후 이 작품을 통독한 것은 물론 그 후 발표된 「일월」은 물론 창우사판 문학전집을 구해서는 언더라인을 그어가며 그 고결한 문장들을 익혔다. 주인공들 감정까지도 극히 절제된 「소나기」 속의 여러 상황과 문장은 마땅히 문학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이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 그 후 나도 문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선생님은 그야말로 태산같은 어른이셨다. 그런데 상경하는 기회에 소설 쓰는 동료와 함께 만나뵌 선생님은 그리도 소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건 우리에게 물으셨다. “너희들 있는 데가 어디냐?”고. 그리곤 선생님께서 계신 곳과 우리가 있는 거리의 중간쯤에 장소를 정해 놓고, 지금부터 움직여서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그 장소에서 오늘 사진에서 뵌 것과 마찬가지 베레모를 쓰신 선생님을 될 수 있었고 그날 처음 만났지만 아주 친숙한 것처럼 소탈하신 성격의 선생님과 음식도 나누고, 술도 마셨다. 그때 인상으로 선생님은 술을 많이 드시지는 않았지만 퍽 즐기시는 것 같았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제주도 사람들이 내가 「비바리」를 쓴 때문에 혼을 내려고 한다면서?” 사실 나도 선생님의 「비바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그런 내색을 바로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평안도 출신의 선생님이 한차례와 보고 쓰신 작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덮어두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두 번째도 처음과 꼭 같은 방법으로 만났는데, 그때도 그 말씀을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그 작품을 쓰시고 나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이라고 속으로 치부했다. 그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선생님은 그 후로 한번도 제주엘 오시지 않았다. 대학의 제자고 원정이 선생님의 염결성에 대해 증언하거니와, 선생님의 그런 점에서도 성격을 선생님은 그런 성격을 느끼게 한다. 어느 신문이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 “정결한 문장… 꼿꼿한 인품”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데, 사실 그는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우리가 마지막 만나던 날은 아마 정초 무렵이었는지 그날 선생님은 검은 두루마기에 베레 모. 차림이셨다. 늦도록 마시고 우리와 헤어져 가실 때 가도로 위를 건너 가실 때 나부끼던 두루마기 자락과 고름은 이제도 나의 망막에 남아 있는 매우 아름다운 영상이다. 그리고 그 후 이 몽매한 제자는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뵙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부음을 접하다니…. 다만 엎드려 명복을 빌 따름이다.


김명인, 「[문학칼럼]한 노작가의 죽음 앞에서...」, 한겨레, 2000.09.25

황순원 선생이 타계했다.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사람의 일이지만 모든 떠남이 그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황순원 선생의 부음을 접하고 나는 스치듯 흘러나오는 짧은 탄식을 어찌할 수 없었다. 고인의 생전에 무슨 개인적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고인과 일면식도 없었다. 나의 탄식은 그의 삶과 문학과 관련하여 한 사람의 후인이자 어쩌면 넓은 의미의 동시대인으로서 느낀, 연민과 존경이 착종하는 복잡한 심사의 한 표현일 뿐이다.

황순원 선생의 타계에 즈음하여 도하 각 신문의 문화면은 일제히 그의 삶과 문학을 돌이키는 기사를 실었는데 약속이나 한 듯 '염결한 삶' '학 같이 살다간 삶' 등으로 고인의 삶을 표현했다. 작품세계에 관해서도 순수문학의 화신인 양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저 그렇게만 평가될 사람일 뿐이었을까.

나는 수년 전 고인의 해방기 소설작품들을 검토해 볼 기회를 가진 적이 있다. 1945년부터 49년, 이른바 해방공간 혹은 좌우대립기라 일컬어지는 그 시기에 쓰여진 (술), (황소들), (아버지), (목넘이 마을의 개) 등 적지 않은 수의 단편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는 주로 분단 이후 작품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고인에 대한 평가들, 이를테면 개인주의적이라거나 실존주의적이라는 평가들이 대단히 피상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읽은 이 해방기의 작품들을 쓴 작가 황순원은 당시 주어진 '해방'과 그 이후의 전개과정이 지닌 반민족성과 반민중성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진보적 리얼리스트이자 점차로 반동화되어 가는 남한 현실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용납할 수 없었던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물론 그의 한국전쟁 이후의 작품세계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격동의 시기에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당시에 단지 한 사람의 작가이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주는, 그리고 결국은 결코 그가 바라지 않았던 세계에서 눌러앉아 살게 되기까지 그가 겪었을 정신적 물리적 곤욕에 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알려주는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생전에 선생은 그 무렵에 관한 그 어떤 진술도 완강히 거부해왔다고 한다.

경희대 교수직과 예술원 회원직 외의 어떤 직함도 거부했고, 시와 소설 이외의 일체의 잡문을 쓰지 않았고 정부가 주는 알량한 훈장의 서훈을 거부한 고인의 결벽증이 내게는 '순수'로 읽히기보다는 침묵의 저항이나 혹은 그가 어쩌면 평생 시달렸을 마음의 빚을 갚는 행동으로 읽힌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한 노작가의 가슴 속 깊은 심연에 빗장처럼 가로세로 질러놓였을 분단의 질곡을 본다. 이 반성 없는 시대를 말없이 거부하며 살아내면서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 짧은 글을 쓴 술잔 삼아 고인의 영전에 삼가 바친다.


각주

  1.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