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힐 하니비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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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니비쇼의 라인댄스
하니비쇼란?
- 하니비쇼 Honey Bee Show
둥근 무대가 발밑에서 기어오른다. 바로 그 앞에서 두서너 테이블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 되어 꿈쩍 안 할 수 없다. 다리통들이 쭉쭉 뻗은 것, 말같은 궁둥이에 닭털을 치뽑은 것, 머리에도 닭털, 새털로 감고 팬티만 살짝 입은 것이 모두 손을 치켜들고 한발을 꿇고 엎드리고 서고 한 자세를 만들어 치솟아 오르고 있는 거다. 지하실에서 지상으로 오르는 미녀도 이 정도로 살덩이를 노출시켜 놓으면 식상에 걸린다. 그것도 하나둘이 발가벗어야지 서른개나 발가벗고 보면 흥미고 나발이고 하기 전에 여자에 대한 공포가 생긴다. 훨씬 남자들보다 아니 나보다 완력들이 강해보인다. 한 대 맞으면 터질 것같이 팡팡하다. 그게 일제히 흔들흔들하기 시작한다. 원형무대가 빙글빙글 도는데 따라 손과 발의 흔들리는 속도가 빨라진다. 나중에는 발을, 다리를, 허벅지를 짝짝 올려 공간을 찬다. 하얀 구두가 번쩍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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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집권 이후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진 박정희 정권은 정치 자금 마련이 시급해졌고, 정치 자금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가 무의미한 건설 사업을 벌여 공사비를 착복하는 것이었다. 공사판을 벌이기 위한 명분을 찾기 위해 골몰하던 군사정권은 마침 당시 미군들이 휴가 때가 되면 휴양지를 찾아 대부분 일본으로 여행하는 것에 주목했다. 당시 한국엔 이렇다 할 윤락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휴가를 맞이한 주한 미군들은 한국에 남아 달러를 소비하는 대신 일본 등 해외로 나가 달러를 소비하였다. 미군은 미군 나름대로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 정부도 정부 나름대로 미군의 달러가 자국에서 소비되지 못하고 해외에서 소비되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 정부는 외화벌이의 명분을 내세워 윤락시설을 구상한다. 윤락시설의 이름은 미 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로 정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에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하며, 그 대신 박정희가 유흥 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하게 된다.
입단 조건
하니비쇼단의 입단조건은 매우 까다로워서 우선 신체적인 조건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용모와 춤 기능에 뛰어난다 할지라도 입단할 수 없었다. 거의 같은 키와 몸매를 우선조건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조건 |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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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 162cm 이상 |
학력 | 고등학교 졸업 이상 |
나이 | 18세~21세 |
- 하니비는 선발과 함께 연구생이 돼 6개월에 걸쳐 발레, 고전무용, 국악 등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배우고 이것이 숙달되고 1년이 지나면 허니비 가무단에 편성돼 1시간 동안 민속, 라인댄스, 뮤지컬 등 다양한 쇼를 보여줬던 것이다. 이런 허니비 가무단은 연구생이 70여 명이고 무대에 서는 현역은 35명 정도 규모였다. 하니비쇼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단원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동남아 순회공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 워커힐호텔의 나이트클럽에 출연한다는 것은 일급 연예인이라는 징표가 됐기에 한국의 연예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펄시스터즈, 윤복희, 김상희, 패티김, 정훈희, 조애희, 쟈니브라더스 등도 워커힐호텔 무대를 이용해 자신의 몸값을 높여나갔다.
하니쇼의 쇠퇴
워커힐호텔은 애초의 기대만큼 경영의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아래와 같다.
- 유엔군 장병들은 워커힐에서 휴가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
- 일본 언론에 의한 과장보도로 워커힐은 몸을 파는 색시들로 채워져 있다고 오해한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워커힐에서의 휴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국제적 규모의 현대식 호텔이었기 때문에 방값도 술값도 비쌌고 무엇보다 같이 할 아가씨가 없었다. 반나체로 춤을 추는 화려한 쇼를 보고난 뒤에는 외로운 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 바, 카지노, 쇼무대, 풀장 이외에는 이렇다 할 위락시설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 계획 당시에 구상된 한강의 뱃놀이와 낚시터, 궁술사격장, 사이클링 등 레저스포츠 시설과 부유한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경비행기장의 건설은 4대 의혹 사건이 말썽이 되면서 축소되고 중단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아직 한국관광이 널리 홍보되지 않았고 따라서 외국인이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 워커힐을 이용한 외국인은 1965년에는 10만 명을 넘겼으나 1970년에도 겨우 12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 접근이 어려웠다.
- 1960년대는 강변도로도 아직 없었고 천호대로는 착수도 되지 않았다. 워커힐을 가려면 일단 도심부로 들어가서 을지로, 왕십리, 성동교, 광나루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워커힐이 준공 개관될 당시 지금 한양대학교 앞에 있는 성동교는 넓이가 5.6m밖에 안되었다. 거기서 광나루까지 가는 광나루길은 넓이가 겨우 10m이었으며 그것도 워커힐 개관에 맞추어 부랴부랴 포장될 정도였으니 교통사정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웠다.
- 19만평이라는 광대한 부지에 30개에 달하는 건물과 각종 시설이 흩어져있어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1963년 개관 당시 직원 수가 555명이나 되었으니 그 연간 인건비만 따져 봐도 엄청난 액수였다
출처
- ↑ 박승희, 『서울의 밤』, 라이온북스, 27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