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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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이후락은 미국CIA 한국지국장에게 김덕현의 서울 체류를 설명하며 “처음에는 냉혈적이던 그가 시시각각 녹아나서 떠날 때는 여심에 도취되는 등 매우 재미를 보고 갔다”고 했다. 북의 적십자 대표단이 왔을 때도 양상이 비슷했다. 북의 대표단을 워커힐호텔로 데려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고고클럽에 데려가기도 했다. 남쪽의 ‘자유’를 맛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당시 남측이 북쪽에 불어넣으려고 한 ‘자유’는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남쪽 인사들은 이처럼 다분히 속물적인 자유의 분위기를 북에 보이려 했고, 북쪽 사람들이 이를 맛보면 이념적인 세뇌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본성과 감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이는 남북대화의 쟁점이었던 인도주의와 통일(정치)논쟁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종종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265-26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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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재임기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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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 1964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
남북적십자회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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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장소 |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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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 통일로 | 조선호텔 | |
창덕궁 |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現 국립민속박물관) | ||
워커힐 호텔 | 현충사 | 청와대 영빈관 |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적십자회담은 1000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인간적 고통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재결합을 주선해 주기 위하여 남·북적십자사 간에 열린 회담이다.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
▲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 영상
본회담은 조선호텔에서 진행되었다가->창덕궁, 경복궁 이동->국립박물관->워커힐 호텔 이동 만찬 진행
워커힐 호텔에서 진행되었다.
- 이범석 수석대표가 베푼 만찬회(워커힐).
- 김태희 북한 수석단장, 윤기복씨, 한국측 정희경 여사 등과 담소.
- 양측대표 건배, 만찬회장 스케치.
- 민속예술(화관무 등) 등을 관람.
- 북한 대표들 아산 현충사 참배,유물 전시관 참배, 경내를 살펴봄.
- 이범석 수석 대표와 북한 김태희 단장 합의문서 교환.
- 3차 본회담은 72년 10월 24일 평양에서 , 4차 본회담은 72년 11월 22일 서울에서 하기로 합의.
- 이후락 남북조절위원회 위원장 북한측 대표들 초청 만찬(영빈관).
- 이후락 위원장 환영인사(남북으로 갈라져 4반세기를 살았던 한민족이 재결합을 이룩했다면서 20세기 인류문명사를 장식하자고 말함).
- 양측 대표들 축하건배.
- 서울 야경모습.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