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서는 대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심사평의 일부를 발췌했음을 알린다.)
수상작
『손풍금』
“『손풍금』을 읽고 있노라면, 두 가지 점에서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하나는 이 과제에 대한 작가의 지속성. 『어둠의 혼』(1973)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단 없이 매달린 작가의 놀라운 일관성은 유레를 찾기 어려울 정도. 다른 하나는, 실은 이 점이 중요한데, 실험성이 그것. 이런 일관성과 실험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바로 치열성이겠는데.”
“적절한 사례가 아닐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흔히 지독한 충격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든 그 사건을 되풀이하여 그 사건을 타인에게 말하고 있음을 자주 보아왔는데, 『손풍금』의 작가의 경우도 이와 방불한지 모르겠습니다. 제 말씀은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근원적인 의미에서 사건의 주체라는 것.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말함으로써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결과에서 자기를 해방하는 한편 그 사건을 객관화하고자 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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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작
『시취』
“시취란 사전적 뜻은, 시체에서 풍기는 냄새 아닙니까. 그런데 그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이 아니군요. ‘의식’의 냄새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치매스러움’의 냄새이겠는데요.”
“잘 보셨군요. 정확히는,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에 저항하는 노인성 ‘현기증’. 이 현기증이 작품 도입부에서 비석모양 버티고 있습니다. ‘7월 24일에 특급 열차 탈선과 화재 사고가 났다.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휴가……’에서 보듯 ‘분명하지는 않았지만’이 작품 속에 무수히 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P가 그 열차를 탔든 타지 않았든 P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로 변주곡을 이루어냅니다. P가 사고 열차를 탔을지도 모르며 안 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열차를 P가 탔든 안 탔든 관계없이 P가 죽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는 것. 이런 ‘의식’이야말로 시체 냄새라는 것. 그러니까 헤겔 투로 하면 ‘의식’이 주인공인 셈이겠지요.”
“확실한 자기의 소유물 속에 완고히 자폐될 때,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비틀거리며 타자라는 이질성에 마음을 닫는다면 창조적 자유란 나올 수 없는 법. 이러한 실존적 형식을 기독교의 전통은 ‘죄’라 불렀던 것. 어째서 타자를 거부하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 않지요. 과도하게 자기 존재에 기울어져 불안 속에 내쫓기는 지금의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근원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말미암지요. 죽음의 불안 속에 흔들리면서 자기의 존재를 자각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니까. 죽음에 대한 불안이 만일 인간의 보편적 느낌이라면 그 구제 방법은 무엇일까. 『시취』는 아직 거기까지 이른 것은 아니겠지요. 다만 그 입구에 가까이 갔다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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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랍 호숫가로의 여행』
“『밀랍 호숫가로의 여행』은 약국을 업으로 하는 노부부 사이에 벌어진 사건 하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단편이 갖추어야 될 미덕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이겠지요. 특히 구성과 결말의 돌연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뚜렷한 지적 통제력이 강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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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함께 자다』
“『책과 함께 자다』는, 갈데없는 관념형 소설입니다그려. ‘첫장까지 온통 책으로 뒤덮여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는 방 안에 잠든 듯 죽어 있는 한 남자에 대한 기사가 11월 16일 아침 배달된 지방신문에 실렸다’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책’인데. 그러니까 ‘책’으로 상징되는 것에 관련되어 있지요. 책이란 무엇인가. 그 책 틈에서 죽은 사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책’과 ‘죽음’이겠는데요.”
“그렇소. 말을 바꾸면 추리적 흥미일 수도 있긴 해도, 벌써 ‘대답’(해결)이 처음부터 나버린 형국.”
“책과 더불어 시작된 인류사의 어떤 양질의 부분이 소멸된 상태라고 하면 좀 거창해질까요.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인데, 책의 종말이란 곧 ‘인간다움’의 종말인지 모른다는 것. ‘나’의 성목경 되기가 그것. 만일 이런 식의 해석을 두고 답이 먼저 나와 있음이라 하겠지요. 관념성 소설이 지닌 초대의 난점이라고나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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