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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0년 3월 24일 (화) 22:53 판 (이야기)

앟아

이야기

Quote-left.png ‘열매가 쥐똥같이 생겼다하여 쥐똥나무, 잎으로 떡을 싸는데 쓴다하여 떡갈나무…’

이렇듯 나무는 모양에 따라 이름이 붙기도 하고, 생김새나 색깔, 생태나 냄새에 따라 이름이 붙기도 합니다. 그 중 안동시에는 특이한 이름의 나무가 있습니다. 바로 김삿갓 소나무이죠.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마을 입구를 따라 들어서면 수많은 가지들이 서로 얽혀 늘어진 모습이 마치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은 소나무가 보입니다. 이 나무에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마치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은 나무의 외형도 한 몫을 하였지만, 그 전에 김삿갓이 이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삿갓으로 하늘을 가리고 한평생을 돌아다닌 방랑시인으로 알려진 김삿갓. 그의 본래 이름은 김병연(金炳淵)으로, 호는 난고(蘭皐)입니다. 어려서부터 글공부를 좋아했던 그는 장원급제를 한 조선 후기의 인재이기도 합니다. 김삿갓이 과거시험을 보러갔을 때, 글의 주제는 ‘홍경래의 난’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조선 후기 최대의 민란이었고, 나라 전체를 뿌리째 흔든 사건이었죠. 이에 김삿갓은 반란군에 맞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은 정가산과 무관임에도 불구하고 싸움을 포기하고 항복해 버린 김익순을 비교하였고, 김익순은 ‘백 번 죽여도 아깝지 않은 비겁자’라는 생각으로 글을 써내려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글로 장원을 받은 것이죠. 하지만 장원급제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김삿갓의 어머니는 김익순이 바로 김삿갓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죠. 어머니로부터 집안의 내력을 알게 된 김삿갓은 자신이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것도, 할아버지를 욕보이며 장원급제를 한 것도 괴로운 사실이었을 겁니다. 이에 김삿갓은 자신이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큰 삿갓을 쓰고 다니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시작을 한 김삿갓은 수많은 시를 남겼습니다. 그런 김삿갓이 전국을 돌아다니던 가운데 안동 인근의 석탑사를 가다가 나무 아래 잠시 쉬었다가 간 뒤로 소나무의 모양이 삿갓처럼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 전설이 안동 김삿갓 나무 이름의 유래입니다. 영월에서 안동의 소산마을로 향하던 김삿갓은 학가산 자락에 저녁노을이 질 무렵 소백산 높은 고개를 넘어 영주 부석사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성천을 지나, 석탑골로 접어 들어, 학가산 북쪽 연화봉 기슭에 자리 잡은 석탑사(石塔寺)의 방단형적석탑(方壇形積石塔) 또한 둘러보았을 것입니다. 이어 고개를 넘어 신전마을로 들어서는 가운데 오른편에 자리한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 감탄사를 절로 터뜨렸을 김삿갓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풍류가객 김삿갓은 바람처럼 이 땅의 산수를 넘나들며 백성들의 어렵고 힘든 삶을 보고, 백성의 벗이 되어 그들과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시를 썼습니다. 또 백성을 괴롭히는 양반들을 풍자하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소나무의 모양과 함께 이러한 김삿갓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묘한 재미를 일으킬 것입니다. 마을의 수호신처럼 자리하고 있는 안동 김삿갓 소나무는 2009년 안동시가 지정한 보호수로, 당시 수령은 약 400년, 높이는 10m, 나무 둘레는 3m로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컸다고 하죠. 그래서인지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매해 정월마다 김삿갓 소나무를 신목으로 삼아 마을의 안녕과 가족들의 건강을 빌며 마을동제를 지냈다고도 합니다. 김삿갓의 시가 백성들을 위로한 것처럼, 김삿갓 소나무는 마을의 신목으로 자리해 마을의 평안을 살펴왔습니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자취가 스며든 안동의 김삿갓 소나무는 불의를 몰아내고, 백성들의 애환을 위로한 인간 김삿갓을 닮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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