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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이야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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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불리는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하였고 집안이 멸문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그러나 김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게만 묻고 가문을 폐문한다는 조정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모친과 함께 황해도 곡산을 떠나 할머니가 계시는 광주를 거쳐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걸쳐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양반가의 기풍을 갖춘 김병연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에 대한 소상한 진상을 알지 못한채 학업에 열중한 김병연은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에 대한 일들을 전해 듣고, 과문에서 자신이 비판한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병연은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다. 그는 전국을 방랑하면서 곳곳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불리는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하였고 집안이 멸문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그러나 김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게만 묻고 가문을 폐문한다는 조정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모친과 함께 황해도 곡산을 떠나 할머니가 계시는 광주를 거쳐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걸쳐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양반가의 기풍을 갖춘 김병연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에 대한 소상한 진상을 알지 못한채 학업에 열중한 김병연은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에 대한 일들을 전해 듣고, 과문에서 자신이 비판한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병연은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다. 그는 전국을 방랑하면서 곳곳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김삿갓이 전국을 돌아다니던 가운데 이곳 인근의 석탑사를 가다가 나무 아래 잠시 쉬었다가 간 뒤로 소나무의 모양이 삿갓 모처럼 변했다고 하는 것이 김삿갓 소나무의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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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이 전국을 돌아다니던 가운데 이곳 인근의 석탑사를 가다가 나무 아래 잠시 쉬었다가 간 뒤로 소나무의 모양이 삿갓 모처럼 변했다고 하는 것이 김삿갓 소나무의 구전 전설이다.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뢰할만한 근거가 매우 부족하기는 하나, 소나무의 모양과 함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묘한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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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15일 (일) 16:40 판


사용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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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시

Quote-left green.png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기 전 오른쪽 길가에 안내 표지판이 보인다. 바로 김삿갓 소나무 안내판이다. 안내판에서 50m 정도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김삿갓 나무를 만날 수 있다. 김삿갓 소나무는 2009년 안동시에 의해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당시 수령은 약 400년, 높이는 10m, 나무 둘레는 3m로서 두 사람이 손을 맞잡기에도 어려울 정도로 컸다고 한다. 거리를 두고 나무를 바라보면 수많은 가지들이 팔방으로 늘어뜨려져 있어 마치 삿갓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 아래로 들어가면, 하단의 뿌리쪽을 돌무덤이 덮어싸고 있어 그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 나무에 김삿갓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마치 삿갓을 쓰고 있는 것 같은 나무의 외형도 한 몫을 하였지만, 그 전에 김삿갓이 이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탓이 더욱 크다.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이라고 불리는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반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하였고 집안이 멸문되었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김병하(金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그러나 김익순에 대한 문제는 본인에게만 묻고 가문을 폐문한다는 조정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모친과 함께 황해도 곡산을 떠나 할머니가 계시는 광주를 거쳐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걸쳐 영월에 정착하게 된다. 양반가의 기풍을 갖춘 김병연의 어머니 함평 이씨는 자식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가문의 내력에 대한 소상한 진상을 알지 못한채 학업에 열중한 김병연은 훗날 영월도호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급제를 하였으나 김병연은 어머니로부터 집안내력에 대한 일들을 전해 듣고, 과문에서 자신이 비판한 김익순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이에 충격을 받은 김병연은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는데,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긴 것이다. 그는 전국을 방랑하면서 곳곳에서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김삿갓이 전국을 돌아다니던 가운데 이곳 인근의 석탑사를 가다가 나무 아래 잠시 쉬었다가 간 뒤로 소나무의 모양이 삿갓 모처럼 변했다고 하는 것이 김삿갓 소나무의 구전 전설이다.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신뢰할만한 근거가 매우 부족하기는 하나, 소나무의 모양과 함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묘한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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