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장영희의 「미안합니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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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서양 사람들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단연코 인색한 말이 있다면 아마도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땡큐, 쏘리(Thank you, Sorry)’를 되뇌는 외국인들에 비해 우리는 여간해서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 듯하다. 오랜 유학 생활 덕분에 나는 그나마 ‘고맙다’는 말은 꽤 자주 하는 편이다. 조교나 학생들이 심부름을 해 주거나 시중을 들어주면 곧잘 ‘고마워’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미안해’라는 말은 여간 어렵지 않다. 분명히 내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안해’라는 말을 하려면 목소리가 기어들거나 가능하면 슬쩍 얼버무려 버린다. 마음속으로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다. 너무나 미안하다고 생각할 때도 그렇다. 게다가 가끔씩은 그런말을 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적도 있다.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오해는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거만하게 보이거나 못된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나의 성격적 결함을 머릿속으로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미안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쨌거나 그 말이 목에 딱 걸려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기까지 한다. 왜 ‘미안해요’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과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체득한 내 삶의 법칙은 슬프게도 ‘삶은 투쟁이고, 투쟁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승부 근성이 투철한 내게 ‘미안해’라는 말은 결국 내가 졌다는 뜻이고,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경쟁 심리가 그 말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존심 탓일 수도 있다. ‘미안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나의 결함과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아니, 좀 더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가 보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쩌면 잘못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애당초 남에게 사과할 일을 했으며, 그것도 미리 예견 못했다는 것은 지독한 오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남보다 못났다는 데 대한 열등의식이거나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면, 내가 잘못했고,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는가. 지난주, 19세기 미국 소설 강의 시간에, 나는 한 학생에게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의 첫 장면을 읽도록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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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서양 사람들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단연코 인색한 말이 있다면 아마도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땡큐, 쏘리(Thank you, Sorry)’를 되뇌는 외국인들에 비해 우리는 여간해서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 듯하다. 오랜 유학 생활 덕분에 나는 그나마 ‘고맙다’는 말은 꽤 자주 하는 편이다. 조교나 학생들이 심부름을 해 주거나 시중을 들어주면 곧잘 ‘고마워’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이에 비해 ‘미안해’라는 말은 여간 어렵지 않다. 분명히 내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안해’라는 말을 하려면 목소리가 기어들거나 가능하면 슬쩍 얼버무려 버린다. 마음속으로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다. 너무나 미안하다고 생각할 때도 그렇다. 게다가 가끔씩은 그런말을 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적도 있다.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오해는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거만하게 보이거나 못된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나의 성격적 결함을 머릿속으로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미안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쨌거나 그 말이 목에 딱 걸려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기까지 한다. 왜 ‘미안해요’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과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체득한 내 삶의 법칙은 슬프게도 ‘삶은 투쟁이고, 투쟁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승부 근성이 투철한 내게 ‘미안해’라는 말은 결국 내가 졌다는 뜻이고,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경쟁 심리가 그 말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존심 탓일 수도 있다. ‘미안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나의 결함과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아니, 좀 더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가 보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쩌면 잘못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애당초 남에게 사과할 일을 했으며, 그것도 미리 예견 못했다는 것은 지독한 오판이기 때문이다 .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남보다 못났다는 데 대한 열등의식이거나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면, 내가 잘못했고,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는가. 지난주, 19세기 미국 소설 강의 시간에, 나는 한 학생에게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143118&cid=40942&categoryId=40507‘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의 첫 장면을 읽도록 시켰다.
 
“김영수, 23페이지 첫째 단락을 읽어 보세요.”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되풀이했다.
 
“김영수, 23페이지 첫째 단락을 읽어 보세요.”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되풀이했다.
 
“23페이지 첫째 문단 말이야.”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의아해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학기 시작하고 두어 달이 지났으니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 또한 내가 자기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호명한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나에 대한 반항이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욕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화를 눌러 참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
 
“23페이지 첫째 문단 말이야.”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의아해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학기 시작하고 두어 달이 지났으니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 또한 내가 자기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호명한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나에 대한 반항이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모욕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화를 눌러 참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

2019년 11월 13일 (수) 13: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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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자분, 『미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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