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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가 이대를 거울삼았다"에 대하여, 공안국이 말하기를, "監은 보다의 뜻이다."라 하였다. 황간과 형병의 소에서는 이로써 비겨 보아 돌아보다로 해석하였다. 나의 생각에는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삼아야 한다."의 監이어서 대개 이대로 경계를 삼아서 잘못된 것을 예방하고 제도를 상세하고 정밀히 하여 이로써 문을 삼는 것이다. 공자가 이를 따라서 이로써 갖추고 이로써 때에 맞게 하였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은 매양 사치를 미워하고 검소함을 좇았으니 지금 주나라의 예에 대해서 유독 그 문의 번성함을 따른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도는 마땅함을 얻음을 귀하게 여기니 스스로 다스리는 도는 검소하지 않을 수 없지만 조정의 예는 갖추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는 질박하되 갖추어지지 않았고 주나라의 예는 문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이것이 공자가 특별히 주나라를 따른 까닭이다."라 하였으니 알기 어려우며 억지로 해석한 것이라 할 만하다.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음에 어찌 그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예임을 알겠으며 주나라가 이대를 봄에 어찌 그것이 조정의 예라 알 수 있겠는가? 본문에 없는 것을 취하여 생각하니 어찌 망령되지 않겠는가? 예에는 재물이 드는데 사치와 검소가 모두 재물을 씀으로 이를 말하니 어찌 문질로 이를 이르겠는가? 계씨가 태산으로 여행간 것이 조정의 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임방을 인용한 것이 어찌 사치를 미워해서가 아니겠는가? 대저 조정의 예는 그 재물을 씀이 어찌 광범위하지 않겠는가? 조정의 예가 검소함을 귀히 여기지 않음이 어찌 성인의 마음이겠는가? 삼베로 만든 면류관을 어찌 조정에서 쓰지 않았겠는가? | "주나라가 이대를 거울삼았다"에 대하여, 공안국이 말하기를, "監은 보다의 뜻이다."라 하였다. 황간과 형병의 소에서는 이로써 비겨 보아 돌아보다로 해석하였다. 나의 생각에는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삼아야 한다."의 監이어서 대개 이대로 경계를 삼아서 잘못된 것을 예방하고 제도를 상세하고 정밀히 하여 이로써 문을 삼는 것이다. 공자가 이를 따라서 이로써 갖추고 이로써 때에 맞게 하였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은 매양 사치를 미워하고 검소함을 좇았으니 지금 주나라의 예에 대해서 유독 그 문의 번성함을 따른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도는 마땅함을 얻음을 귀하게 여기니 스스로 다스리는 도는 검소하지 않을 수 없지만 조정의 예는 갖추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는 질박하되 갖추어지지 않았고 주나라의 예는 문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이것이 공자가 특별히 주나라를 따른 까닭이다."라 하였으니 알기 어려우며 억지로 해석한 것이라 할 만하다.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음에 어찌 그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예임을 알겠으며 주나라가 이대를 봄에 어찌 그것이 조정의 예라 알 수 있겠는가? 본문에 없는 것을 취하여 생각하니 어찌 망령되지 않겠는가? 예에는 재물이 드는데 사치와 검소가 모두 재물을 씀으로 이를 말하니 어찌 문질로 이를 이르겠는가? 계씨가 태산으로 여행간 것이 조정의 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임방을 인용한 것이 어찌 사치를 미워해서가 아니겠는가? 대저 조정의 예는 그 재물을 씀이 어찌 광범위하지 않겠는가? 조정의 예가 검소함을 귀히 여기지 않음이 어찌 성인의 마음이겠는가? 삼베로 만든 면류관을 어찌 조정에서 쓰지 않았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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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且聖人之道, 文也, 夏以夏禮爲文, 殷以殷禮爲文, 周以周禮爲文, 皆以其時也. 當夏殷之時, 豈有意於爲質乎? 自後觀之而後以周爲文耳. 文即中也. 非比並文質而取其中也. 且以周爲文者, 非就殷之質而加之以爲文也. 且“道以當爲貴”者, 出於何典? 是朱子以當然之理, 訓道之見也. 孰謂仁齋先生知道也? 又曰, “孔子於自治之道不取周禮, 於朝廷之禮則取之, 聖人處事之權衡也. ”夫禮豈事之倫哉? 其人不知禮, 故輕視禮爾. 古曰, “先王制禮, 不敢不至”, 是孔門之教也. 不然, 子思何謂“憲章文武”? | + | ○且聖人之道, 文也, 夏以夏禮爲文, 殷以殷禮爲文, 周以周禮爲文, 皆以其時也. 當夏殷之時, 豈有意於爲質乎? 自後觀之而後以周爲文耳. 文即中也. 非比並文質而取其中也. 且以周爲文者, 非就殷之質而加之以爲文也. 且“道以當爲貴”者, 出於何典? 是朱子以當然之理, 訓道之見也. 孰謂仁齋先生知道也? 又曰, “孔子於自治之道不取周禮, 於朝廷之禮則取之, 聖人處事之權衡也. ”夫禮豈事之倫哉? 其人不知禮, 故輕視禮爾. 古曰, “先王制禮, 不敢不至”, 是孔門之教也. 不然, 子思何謂“憲章文武”? 大氐後儒動輒曰, “萬世不易之禮”, 斯見錮其胸中耳. 仁齋嘗謂“宋儒死定”, 豈非操戈入其室邪? 此章之言, 孔子自言制作之意, 當其時, 俾孔子制作, 則從周者獨多也. 亦如答顏子爲邦之問焉.<br/> |
− | 또 성인의 도는 문이다. 하나라는 하나라의 예가 문이 되고 은나라는 은나라의 예가 문이 되며 주나라는 주나라의 예가 문이 되니 모두 그 때에 맞기 때문이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때에 어찌 질박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이후로 이를 보아 뒤에 주나라를 문이라 하였을 따름이다. 문은 곧 중이니 문질을 견주어 그 가운데를 취한 것이 아니다. 또 주나라를 문으로 여겼다 하여 나아가 은나라의 질박함에 이를 더하여 문으로 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또 "도는 마땅함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말은 어떤 전고에서 나왔는가? 이는 주자의 당연한 이치로 도를 가르치는 견해이니 누가 진사이 선생이 도를 알았다 일렀는가? 또 말하기를, "공자가 스스로 다스리는 도로는 주나라의 예를 취하지 않고, 조정의 예로 이를 취하였으니 성인이 일을 처리하는 잣대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예가 어찌 일의 인륜이겠는가? 그 사람들은 예를 잘 몰라서 예를 경시할 뿐이다. 옛말에, "선왕이 예를 제정하니 감히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으니 이는 공문의 가르침이다. | + | 또 성인의 도는 문이다. 하나라는 하나라의 예가 문이 되고 은나라는 은나라의 예가 문이 되며 주나라는 주나라의 예가 문이 되니 모두 그 때에 맞기 때문이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때에 어찌 질박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이후로 이를 보아 뒤에 주나라를 문이라 하였을 따름이다. 문은 곧 중이니 문질을 견주어 그 가운데를 취한 것이 아니다. 또 주나라를 문으로 여겼다 하여 나아가 은나라의 질박함에 이를 더하여 문으로 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또 "도는 마땅함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말은 어떤 전고에서 나왔는가? 이는 주자의 당연한 이치로 도를 가르치는 견해이니 누가 진사이 선생이 도를 알았다 일렀는가? 또 말하기를, "공자가 스스로 다스리는 도로는 주나라의 예를 취하지 않고, 조정의 예로 이를 취하였으니 성인이 일을 처리하는 잣대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예가 어찌 일의 인륜이겠는가? 그 사람들은 예를 잘 몰라서 예를 경시할 뿐이다. 옛말에, "선왕이 예를 제정하니 감히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으니 이는 공문의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사가 어찌 "문왕과 무왕을 법으로 삼았다"라 하였겠는가? 대저 후세의 유자들이 걸핏하면 말하기를, "만세토록 바뀌지 않는 예"라 하여 이 견해가 그 흉중을 막았을 따름이다. 진사이 선생은 항상 "송나라 유자들이 정한 것은 틀렸다宋儒死定"이라 하였는데 어찌 창을 들고 그 방에 들어가지 않는가? 이 장의 말은 공자가 스스로 정하여 만든 뜻을 말한 것이니 그 때에 공자가 스스로 정한 것을 좇아 주나라를 따르는 사람이 유독 많았다. 또 안자의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냐는 질문에 대답한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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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일 (화) 14:37 판
목차
「八佾」
一章
○“八佾舞於庭” ‘八佾舞’連讀. 世人佾下斷句, 非也. 『春秋』隱公五年九月, “考仲子之宮, 初獻六羽.” 『左氏傳』, “公問羽數於衆仲, 對曰, ‘天子用八, 諸侯用六, 大夫四, 士二. 夫舞所以節八音, 而行八風, 故自八以下.’, 公從之, 於是初獻六羽, 始用六佾也.”, 『公羊傳』, “初者何? 始也. 六羽者何? 舞也. 初獻六羽, 何以書? 譏, 何譏爾? 譏始僭諸公也. 六羽之爲僭奈何? 天子八佾, 諸公六. 諸侯四. 諸公者何? 諸侯者何? 天子三公稱公, 王者之後稱公, 其餘大國稱侯, 小國稱伯子男. 始僭諸公, 昉於此乎? 前此矣. 前此則曷爲始乎此? 僭諸公, 猶可言也, 僭天子, 不可言也.”『穀梁傳』, “穀梁子曰, ‘舞夏, 天子八佾, 諸公六佾, 諸候四佾. 初獻六羽, 始僭樂矣.’ 尸子曰, ‘舞夏, 自天子, 至諸侯, 皆用八佾. 初獻六羽, 始厲樂矣.’” 何休杜預皆謂, “八八六十四人, 六六三十六人, 四四十六人, 二二四人.” 服虔謂, “六八四十八人, 四八三十二人, 二八十六人.” 服虔蓋以, “襄十一年, 鄭人賂晋侯以女樂二八”, 誤爲一佾也. 何杜以爲舞勢宜方, 是或然矣. 且天子六十四人, 則大夫三十二人, 爲太過矣. 况士豈能辨十六人乎? 故何杜於理爲優. 諸公六佾, 諸侯四佾, 恐傳譌也. 『左傳』尸子爲可據已. 杜預曰, “魯惟文王周公廟得用八, 而他公遂因仍僭而用之. 今隱公特立此婦人之廟, 詳問衆仲, 因明大典, 故傳亦因言始用六佾. 其後季氏舞八佾於庭, 知惟在仲子廟用六.”由比觀之, 他公僭用, 而季氏遂僭之也. 但「明堂位」無文王, 則杜預亦誤矣.
○“於庭”, 古來無解. 邢昺以爲“家廟之庭”, 殊爲不通. 竊疑成王賜伯禽, 以天子禮樂祀周公. 天子之廟, 八佾舞於庭, 伯禽迺造臺以舞之, 所以尊天子之樂也. 後世有舞臺, 或昉于是邪? 是誠臆說, 別無所據. 然於庭二字, 非此不通, 姑錄以俟後君子也.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邢昺曰, “季氏以陪臣, 而僭天子, 最難容忍.” 『集註』范氏因之, 是於忍字之義爲得之, 然非聖人之言矣. 小人唆人激變者, 其言率如此, 不可從也. 謝氏曰, “季氏忍此矣, 則雖弒父與君, 亦何所憚而不爲乎?” 是忍字, 本諸孟子. 孟子創言性善, 而與楊氏之徒爭仁內外. 故引不忍人之心, 以爲仁之端, 遂又有不忍人之政. 然求諸古言, 以忍爲美德, 而未有以不忍爲貴者矣. 求諸理, 聖人亦有不忍之心, 而聖人之思深遠焉, 故未有以不忍爲教者矣. 蓋其究必成婦人之仁故也. “小不忍, 亂大謀.” 此先王之法言. 『孝經』曰, “非先王之法言不敢道”, 故知非孔子之言矣. 且責季氏以心術, 豈不妄哉?
◎此章之義, 蓋爲昭公發之. 昭公亦小不忍, 以致乾候之禍, 故云爾. 季氏之僭, 不啻一世, 從前魯君所忍, 是尙可忍也, 僭之大者, 尙可忍也, 則無不可忍之事矣. 魯君能以此爲心, 季氏之僭可正, 而魯可治焉. 聖人之言, 皆有作用, 宋儒迺以理以心而已矣, 不可不察.
二章
○“三家者”, 者字語助, 無意義, 如三子者[1]之者. 古者歌詩, 皆有所取其義, 而「雍」詩於三家之堂, 莫有所取焉, 於魯君之堂, 亦莫有所取焉. 孔子不斥其非禮, 但以詩言之, 若訝之者然, 所以開喩也. 『集註』迺曰“譏其無知妄作, 以取僭竊之罪. ”大失聖人之辭氣也. 且“無知妄作”, 本作者之謂聖之作[2], 豈可引於此乎? 相, 儐相也, 訓助者, 字義耳. 其實相自相, 助自助, 不可混矣. 辟公, 王肅以爲國君諸公, 爲是. 鄭玄以辟爲卿士, 公謂諸侯, 『書』“惟辟玉食[3]”, 豈卿士之謂乎? 邢昺疏, “毛萇以爲諸侯及二王之後”, 然『毛傳』無之, 可謂妄矣. 「曲禮」“天子穆穆”, 『爾雅』“穆穆、美也”. 穆穆蓋深遠意. 天子行禮, 有辟公, 爲之儐相, 則天子迺若無所爲者, 唯見其穆穆然美已, 是「雍」詩之義也.
○程子曰, “周公之功, 固大矣, 皆臣子之分所當爲. 魯安得獨用天子禮樂哉? 成王之賜, 伯禽之受,皆非也.[4] 弇州先生曰, “叔子之爲此語也, 語於秦之君臣也, 非三代之君臣也. 唐虞之世, 其爲帝者, 茅茨不剪, 土階三尺而已. 都兪吁咈于其內, 得一言則君臣交相拜而相咏嗟, 非截然而不相及也. 堯得舜而三載, 命之陟位受終, 類上帝, 禋六宗, 望山川, 徧群神, 輯五瑞, 狩四獄. 不聞其以疑堯議也. 舜得禹而命之終陟, 受命於神宗, 率百官, 若帝之初. 不聞其以疑舜義也. 堯舜之於舜禹, 臣之者也. 成王之於周公, 師之者也. 以尊則叔父也, 以親則爲其父弟者也. 存而負扆以行天子之事, 沒而崇以天子之禮樂. 夫誰曰不可? 且以周公之功與舜禹並, 而尊親過之. 不復子則禪而帝, 復子則祀而王[5] 聖人之所以崇德報功也. 而曰非者何也? 夫秦而始君朕也, 君父皇考也, 而臣弗與也. 其尊若天而臣若草芥也. 吾故曰, ‘叔子之爲此語也, 語於秦之君臣也. ’”
◎茂卿曰, “大氐後儒謂禮萬世不易者, 是其心有自以爲禮者. 故妄意成王伯禽皆非矣. 夫禮爲一代之典, 周禮周公作, 而成王伯禽親受之. 故成王伯禽非禮歟, 則孰爲禮? 豈不肆乎? 故孔子所謂非禮者, 謂其後也. ”
三章
○禮樂者, 先王之道也. 先王之道, 安民之道也. 仁, 安民之德也. 故苟非仁人, 則禮樂不爲之用. 故曰“如禮何? 如樂何? ”此以在上之人言之也.
예악은 선왕의 도이고 선왕의 도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도이며 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덕이니 그러므로 진실로 인한 사람이 아니면 예악이 그에게 쓰임새가 없다. 그러므로 예로 무엇을 하며 악으로 무엇을 하겠는가라 하였으니 이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이다.[6]
○游氏曰, “人而不仁, 則人心亡矣. ”程子曰, “仁者天下之正理, 失正理, 則無序而不和. ”皆不知聖人之道爲先王之道也. 不知此章之言爲在上者發之也. 仁齋先生曰, “慈愛惻怛之心, 衆德之所由生, 萬事之所由立. 仁人之於天下, 何事不成, 何行不得? 況於禮樂乎? ”此不知禮樂者之言已.
유초는 사람으로서 인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이 없는 것이라 하였고 정자는 인이란 천하의 바른 이치이니 바른 이치를 잃으면 질서가 없어져 조화롭지 못하게 된다라 하였으니 이는 모두 성인의 도가 선왕의 도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고 이 장의 말이 윗사람을 위해 말한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진사이 선생은 자애 측달의 마음은 모든 덕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나고 모든 일이 그로 말미암아 세워지니 인한 사람이 천하에 대하여 무슨 일을 이루지 못할 것이며 무슨 행동이든 결과를 얻지 못하겠는가? 하물며 예악은 어떠하겠는가? 라하니 이는 예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말이다.
◎辟諸搏埴作器, 雖器皆埴也. 先王作禮樂, 以仁而已矣. 故孔子曰, “夫仁者制禮者也.[7] ”又曰, “道二, 仁與不仁而已矣.[8] ”故不仁之人, 不能用禮樂也.
진흙을 치대 그릇을 만드는 것에 비교하자면 비록 그릇이지만 모두 진흙이기도 하다. 선왕이 예악을 만듬에 인을 가지고 할 뿐이니 그러므로 공자가 말하기를 대저 인한 사람이 예를 제정하였다 하였고 또 도는 인과 불인 두 가지일 뿐이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인하지 못한 사람은 예악을 쓸 수 없다.
四章
○孔子大林放之問. 蓋世人所見者小, 故徒以禮爲美觀, 林放獨能疑禮之意本不在是而問之. 是其所見者大, 孔子所以嘆也. 朱註, “蓋得其本, 則禮之全體, 無不在其中矣. ”是不得大哉之解. 以全體言之, 理學者流哉. 又其言曰, “世之爲禮者, 專事繁文”云云, 殊不知禮之有繁文, 乃其所以“物爲之制, 曲爲之防”. 豈可以爲非乎? 大氐後儒迫急之見, 未免直情徑行. 戎狄之道, 貴質賤文, 亦本諸二精粗耳.
공자가 임방의 물음을 크게 여겼다. 대개 세상 사람들의 소견이 작으므로 한갓 예를 아름답게 보이는 것으로 여기지만 임방이 홀로 예의 뜻이 본래 여기에 있지 않다고 의심하여 물은 것이다. 그 소견이 크므로 공자가 이를 탄식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 “대개 그 근본을 얻으면 예의 전체가 그 가운데 있지 않음이 없다”라 하였는데 이것은 “크도다”라 한 것의 해석이 될 수 없으며 전체로 말한 것은 이학자의 류이다. 또 그 말에 “세상의 예를 행하는 자가 오로지 번잡한 꾸밈을 일삼아” 운운하였는데, 예에 (이미) 번잡한 꾸밈이 있어, 이에 이른바 “사물에 대해서는 절제가 되고 곡진함에 대해서는 방비가 되었다.”[9]라 한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니 어찌 이를 잘못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대저 후세 유학자들의 급박한 견해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행동을 지름길로 가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융적의 도가 질박함을 귀하게 여기고 꾸밈을 천하게 여긴다 한 것 또한 정밀하고 거침을 둘로 나눈 것에 근본할 뿐이다.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蓋古語, 孔子不直語其本而引此, 使放思而得之. 孔子之教皆爾. 何以知其爲古語? 答與問不正相値也. 它如“忠信爲禮之本”, 以人學禮言之, 如恭敬, 以行禮之心言, 如上章“人而不仁”, 以在上之人言之. 至於此章, 則以人所行之禮言之. 奢謂其心以禮爲美觀, 務求備其財物, 而不知侈其用也. 儉謂其心在節財用, 而不知物不稱其義也. 易去聲. 包咸曰, “和易也”, 非矣. 朱註訓治, 得之. 但其說曰, “節文習熟而無哀痛慘怛之實者也”, 非矣. 蓋謂富貴之家, 助喪之人多, 而百官皆備, 衣衾棺椁之用不乏, 一切治辨也. 戚謂貧賤之家, 無助喪之人, 衣衾棺椁不備, 事事艱難, 轉增哀戚之甚也. 夫喪之爲禮, 所以致哀也. 節文之詳, 豈損哀乎? 且喪不可屢, 豈有所謂習熟者哉? 大氐宋儒忽略字義, 遷就以成其說. 如儉字, 本謂節用也. 朱子以溫良恭儉讓爲聖人威儀, 遂解儉爲節制. 至於此章, 亦以質勝而文不足爲儉, 遂引「禮運」“汙尊杯飲”爲說. 夫任口言理, 莫不可言者, 然字失其義, 亦影耳.
“예는 사치스럽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하여야 하며, 상은 성대히 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여야 한다.”
대개 옛 말이니 공자가 그 근본을 바로 말하지 않고 이를 인용하여 임방으로 하여금 생각하여 이를 얻도록 한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이 모두 이러할 뿐이다. 어떻게 그것이 옛 말임을 아는가? 답과 질문이 바로 서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충신이 예의의 근본이다.”와 같은 것은 사람이 예를 배우는 것으로 말한 것이고 “공경”과 같은 것은 예를 행하는 것으로 말했다. 앞 장에서 “사람이 인하지 못하면”과 같은 것은 윗자리에 있는 사람을 위해 말한 것이며 이 장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행하는 바의 예로 말한 것이다. 사란 그 마음이 예를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고 그 재물을 구비하기 힘쓰나 그 쓰임을 호사스럽게 할 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검이란 그 마음이 재용을 절약하는 데 있으나 물건을 그 뜻에 걸맞도록 할 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거성이다. 포함은 “화이함이다.”라 하였는데 틀렸다. 주자의 주석에서 “다스리다”라 풀이한 것이 뜻을 얻었다. 다만 그 설에 “절문만을 숙달되게 익혀서 애통해하고 참담해하는 실상이 없는 것이다.”라 하였는데 이는 옳지 않다. 대개 부귀한 집에서 상을 돕는 사람이 많고 백관이 모두 갖추어지고 옷과 이불과 관과 곽의 사용이 모자라지 않아 일체를 다스려 분별함을 이른 것이다. 척은 가난한 집에서 상을 돕는 사람이 없고 옷과 이불과 관과 곽이 갖추어지지 않아 일마다 어려워서 슬퍼하는 마음이 더욱 증폭되어 심해지는 것을 말한다.
대저 상에서 예를 하는 것은 슬픔을 다하기 위함이다. 절문을 상세히 함이 어찌 슬픔을 덜어 주겠는가? 또한 상이란 여러 번 있는 것이 아닌데 어찌 숙달되게 익히는 것이 있겠는가? 대저 송나라 유학자들은 글자의 뜻을 홀연 생략하고 뜻을 비틀어 부합시켜 그 설을 이루곤 하였다. 예컨대 검이라는 글자는 본래 절용을 말하는데, 주자가 “온화하고 훌륭하고 공손하고 검소하며 사양함으로 성인의 위의가 된다” 하였으며 드디어 검을 절제로 풀이하였다. 이 장에 이르러서도 또한 바탕이 우세하고 문체가 모자란 것으로 검을 삼아 드디어 「예운」의 “웅덩이를 파서 그릇으로 삼고 손으로 움켜 마시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대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이치를 말하면 말하지 못할 것이 없으나 이 때문에 글자가 그 뜻을 잃었으니 또한 그림자와 같을 따름이다.
○『易』「象」曰, “山上有雷小過, 君子以行過乎恭, 喪過乎哀, 用過乎儉. ”正與此章相發. 儉以用言之, 豈非財用乎? 戚易與奢儉對, 豈徒以節文言之哉? 夫“禮以敎中[10]”, 本文曰與其曰寧. 亦不得已以取儉戚者, 而非儉戚爲至也. 而孔子所以言之者, 何也? 「禮器」曰, “昔先王之制禮也, 因其財物而致其義焉. ”故君子之行禮, 亦必視其財物, 爲之進退, 古之道爲爾. 如“今也純儉, 吾從衆”, 豈不然乎?
『주역』「상전」에, "산 위에 우레가 있는 것이 소과이니, 군자가 이로써 행실은 공손함을 지나치게 하고 상례는 슬픔을 지나치게 하고 쓰는 것은 검소함을 지나치게 한다."라 하였으니 바로 이 장과 서로 밝혀주는 것이다. '검소함'을 쓰는 것으로 말하였으니 어찌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슬픔'과 '넉넉함'은 '사치'와 '검소함'과 대를 이루니 어찌 한갓 절문으로 이를 말했겠는가? 대저 예의는 중을 가르치는 것이다."라 말하였고 본문에서 "~보다", "차라리"라 말한 것 역시 부득이하게 검소함과 슬픔을 취한 것이지 검소함과 슬픔을 지극하게 여김이 아니다. 공자가 이로써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예기』「예기」에, "옛날 선왕이 예를 만든 것은 그 재물로 인하여 그 뜻이 지극해지도록 함이다."라 하였으니 군자가 예를 행하는 것도 또한 반드시 그 재물을 보아 진퇴를 정하였으니 옛날의 도가 그러하였을 뿐이다. "지금 생사로 만든 천을 쓰니 검소하다. 나는 다수를 따르겠다."와 같은 말이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檀弓」曰, “曾子曰, ‘晏子可謂知禮也已, 恭敬之有焉. ’有若曰, ‘晏子一狐裘三十年, 遣車一乘, 及墓而反. 國君七个, 遣車七乘, 大夫五个, 遣車五乘, 晏子焉知禮? ’曾子曰, ‘國無道, 君子恥盈禮焉. 國奢, 則示之以儉, 國儉, 則示之以禮. ’”“子游問喪具. 夫子曰, ‘稱家之有亡. ’子游曰, ‘有亡惡乎齊? ’夫子曰, ‘有毋過禮, 苟亡矣, 斂首足形, 還葬縣棺而封, 人豈有非之者哉? ’”“子路曰, ‘傷哉, 貧也. 生無以爲養, 死無以爲禮也. ’孔子曰, ‘啜菽飮水盡其歡, 斯之謂孝. 斂首足形, 還葬而無椁, 稱其財, 斯之謂禮. ’”‘子思之母死於衛, 柳若謂子思曰, 子聖人之後也. 四方於子乎觀禮, 子蓋愼諸. ’子思曰, ‘吾何愼哉? 吾聞之, 有其禮無其財, 君子弗行地, 有其禮有其財無其時, 君子弗行也. 吾何愼哉? ’”是皆言君子行禮, 視財物與世進退之, 有時乎取儉與戚也. 「曲禮」曰, “貧者不以貨財爲禮, 老者不以筋力爲禮. ”「禮器」曰, “故天不生, 地不養, 君子不以爲禮, 鬼神弗饗也. 居山以魚鼈爲禮, 居澤以鹿豕爲禮. 君子謂之不知禮. 故必擧其定國之數, 以爲禮之大經. 禮之大倫, 以地廣狹, 禮之厚薄, 與年之上下. ”是皆言先王制禮時, 亦已視財物之所出, 定其度數也.
『예기』「단궁」에, "증자가 말하기를, '안자는 예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니 공경이 있다.'라 하니 유약이 말하기를, '안자는 한 벌의 여우 갖옷으로 삼십 년을 썼고 장례 때 수레 한 대를 썼으며 묘에 이르자마자 돌아갔다. 나라의 임금은 희생물이 일곱 개이므로 수레 일곱 대를 쓰고 대부는 희생물이 다섯 개이므로 수레 다섯 대를 써야 하니 안자가 어찌 예를 안다 하겠는가?'라 하였다. 증자가 말하기를, '나라에 도가 없으면 군자는 예를 넘치게 갖추기를 부끄러워한다. 나라가 사치하면 검소함을 보여 주고 나라가 검소하면 예에 맞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라 하였다. 또 "자유가 상례에 갖추어야 할 물건을 묻자 공자가 말하기를, '집안의 있고 없는 것에 맞추어야 한다.'라 하였다. 자유가 '있고 없는 것으로 어떻게 가지런히 합니까?'라 하자 공자가 '있어도 예를 넘지 말고 만약 없다면 머리와 발의 형체를 염하여 바로 장례를 지내고 관을 매달아 내려 봉하더라도 사람들이 어찌 그를 비난하겠는가?"라 하였다. 또 "자로가 '슬프구나, 가난함이여. 살아서는 봉양할 것이 없고 죽어서는 예를 갖출 만한 것이 없구나.'라 하자 공자가 '콩을 씹고 물을 마시더라도 그 기뻐하시기를 다하도록 할 수 있으니 이것을 효라 이른다. 머리와 발의 형체를 염하여 곧 장례를 치르되 관이 없더라도 그 재물에 맞도록 하여야 하니 이것을 예라 이른다."라 하였고 또 "자사의 어머니가 위나라에서 죽자 유약이 자사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성인의 후손입니다. 사방 사람들이 그대에게서 예를 보니 그대는 대개 신중하게 하여야 합니다.'라 하니 자사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신중하여야 하는가? 내 듣기로 예가 있으되 재물이 없다면 군자는 행하지 않으며 예가 있고 재물이 있어도 그 때가 맞지 않으면 군자는 행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가 어찌 신중하여야 하는가?'"라 하였다. 이는 모두 군자가 예를 행함에 재물과 세상을 보아 나아가고 물러나며 때에 맞추어 검소함과 슬픔을 취한다는 말이다. 『예기』「곡례」에, "가난한 사람은 재화로 예를 삼지 않고 늙은 사람은 근력으로 예를 삼지 않는다."라 하였고, 『예기』「예기」에, "그러므로 하늘이 낳지 않고 땅이 기르지 않으면 군자가 예를 하지 못하고 귀신이 흠향을 하지 않는다. 산에 살면서 물고기와 자라로 예를 삼고 연못에 살면서 사슴과 돼지로 예를 삼으면 군자는 예를 알지 못한다고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나라의 일정한 수를 들어서 이것으로 예의 큰 법도를 삼으니, 예의 큰 도리는 땅의 넓고 좁음으로 하고 예의 두텁고 박함은 당년의 풍흉으로 한다."라 하였다. 이는 모두 선왕이 예를 제정할 때에 또한 이미 재물이 나오는 바를 보고 그 정도와 수량을 정했다는 말이다.
◎孔子曰, “夫仁者制禮者也.[11] ”言先王之制禮, 求以安民也. “仁者愛物”, 謂其節用而不傷民也. 今林放苟知君子有時乎取儉與戚, 而思以求之, 則知先王所以制禮之意在仁焉. 是所謂本也, 是林放問本之所以爲大也. 宋儒昧乎字義而不知道, 乃以文質釋之, 謬之大者也. 遂至或謂, 孔子欲損周之文以就夏之質, 殊不知奢儉皆謂同行斯禮, 而其所以用財不同已. 豈有文質之異哉? 且林放豈與顔子同科, 而足以語制作之意哉? 可謂妄已. 又仁齋先生以禮貴得中, 非聖人之意. 蓋禮所以敎中也. 禮者先王所立以爲極也. 所以使賢者俯就, 不肖者企及也. 是乃以聖人所立禮爲中也, 非使人以己意取夫中也. 世多欲以己意求夫中, 則仁齋先生言之者是矣. 然儉自用財之道, 不與中相關, 而乃以儉與中對論者, 非矣.
공자가 말하기를, "대저 인한 사람이 예를 제정하였다."라 하였으니 선왕이 예를 제정할 때에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를 구하였다는 말이다. "인한 사람이 재물을 아낀다."라 하였으니 쓰는 것을 아껴서 백성을 슬프게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금 임방이 만약 군자가 때에 맞추어 검소함과 슬퍼함을 취한다는 것을 알고 이로써 생각하여 구한다면 선왕이 예를 제정한 뜻이 인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근본이며 이것이 임방이 근본을 물음이 큰 것이 되는 까닭이다. 송나라 유학자들은 글자의 뜻에 어두워 도를 알지 못하여 이에 이를 문과 질의 문제로 주석하였으니 오류가 크다. 드디어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공자가 주나라의 문을 덜어서 하나라의 질로 나아가고자 하였다고까지 이르렀으니 사치와 검소가 모두 이 예를 함께 행하는 것이며 그 재물의 사용만 같지 않을 따름인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어찌 문질의 다름이 있겠는가? 또 임방이 어찌 안자와 같은 급에서 족히 예의를 만든 뜻에 대해 말하겠는가? 가히 망령되다 말할 만하다. 또 진사이 선생은 '예에서 중을 얻음이 귀하다'라는 말이 성인의 뜻이 아니라 하였다. 대개 예란 중을 가르치는 것이고 예는 선왕이 세워 근본으로 삼은 것이다. 현명한 사람들로 하여금 굽혀 나아가게 하고 불초한 사람들로 하여금 발돋움하여 미치도록 한 것이니 이것은 성인이 세운 예의가 중이 된다는 것이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뜻으로 저 중을 취하도록 한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이 대체로 자신의 뜻으로 저 중을 구하고자 하니 진사이 선생의 말이 옳다. 그러나 검소함은 재물을 쓰는 도에 관한 것으로 중과는 상관이 없는데 이에 검소함과 중을 대비하여 논하였으니 잘못이다.
五章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亡, 無也. 諸夏, 諸侯之國也, 是聖人之貴禮義也. 雖有君而無禮義, 是其去禽獸不遠焉. 孔子之時, 諸夏雖有君乎猶亡之然, 然先王之澤不斬, 禮義尙存, 故孔子以爲勝之矣. 程子解, 失於不如之詁, 不可從也.
"이적에게 임금이 있는 것이 제후국에 임금이 없는 것만 못하다" 망은 무와 같다. 제하는 제후의 나라이다. 이는 성인이 예의룰 귀하게 여긴 것이다. 비록 임금이 있더라도 예의가 없으면 이는 금수에서 그다지 멀지 않다. 공자의 때에 제후국에 비록 임금이 있었지만 마치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선왕의 은택이 끊어지지 않고 예의가 아직 있었으므로 공자가 이것을 더 낫게 보았다. 정자의 해석은 불여의 훈고에 잘못이 있어 따를 수 없다.
六章
○『周禮』「大宗伯職」, “國有大故, 則旅上帝及四望. ”鄭玄註, “故謂凶烖. 旅陳也, 陳其祭事以祈焉. 禮不如祀之備也. ”此章, 古註以爲譏僭, 朱子因之. 然觀其引林放, 則孔子之譏, 必在奢而不在僭, 則必季氏爲魯侯旅者, 而其行禮徒務美觀故爾. 後儒每言及季氏, 則輒謂僭也, 豈不泥乎?
『주례』「대종백직」에, "나라에 큰 연고가 있으면 상제와 사방에 여제사를 지낸다."라 하였다. 정현의 주석에, "연고란 흉한 재앙이다. 여는 베푸는 것이니, 그 제사로 빌어 베품을 말한다."라 하였다. 이 장에 대해 옛 주석은 참람됨을 비웃은 것이라 여겼으며 주자도 이를 따랐다. 그러나 임방을 인용한 것을 보면 공자의 비웃음은 반드시 사치에 있었지 참람됨에 있었던 것이 아니며 아마 계씨가 노후를 위해 여제사를 지낸 것이 그 예를 행함이 한갓 미관에 힘썼던 까닭에 비웃었을 따름이다. 이후의 유학자들은 매양 계씨의 이야기를 함에 계속 참람되다 하는데 어찌 얽매인 것이 아니겠는가?
七章
○“揖讓而升下而飲. ”中間不可句. 王肅曰, “射於堂, 升及下, 皆揖讓而相飮. ”按『儀禮』, 射時, 升降皆揖讓, 飮射爵時, 亦揖讓升降也. 朱註升句, 非矣. 蓋射之爭, 爭於中禮, 射不主皮, 則所貴在和容, 故其爭以揖讓行之, 所以爲君子也. 皇侃曰, “它事無爭, 而於射有爭, 故云必也射乎. 於射所以有爭者, 古者生男, 必設蓬矢桑弧於門左, 至三日夜, 使人負子出門而射, 示此子方當必有事于天地四方, 故云至年長以射進仕. 禮王者將祭, 必擇士助祭. 故四方諸候, 並貢士於王, 王試之於射宮, 若形容合禮, 節奏比樂, 而中多者, 則得預於祭, 得預於祭者, 進其君爵土. 若射不合禮樂而中少者, 不預祭, 不預祭者, 黜其君爵士. 此射事既重, 非唯自辱, 乃係累己君. 故君子之人於射, 而必有爭也. 故顔延之曰, ‘射許有爭’, 故可以觀無爭也. ”
"읍하고 사양하며 오르내리며 마신다揖讓而升下而飲" 구의 중간은 끊어서 볼 수 없다. 왕숙이 말하기를, "당에서 활을 쏘면 올라가고 내려갈 때 모두 읍하고 사양하며 서로 마신다"라 하였으며 『의례』를 살펴보면 활을 쏠 때에 올라가고 내려갈 때 모두 읍하고 사양하며 활을 쏘면서 술을 마실 때에도 또한 읍하고 사양하며 올라가고 내려간다[12] 하였다. 주자는 이 구절을 끊어서 보았으니 틀렸다. 대개 활쏘기의 다툼은 다툼의 속에 예가 있으며 활쏘기에 과녁을 뚫기를 주로 하지 않음은 화용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다툼으로 읍하고 사양함을 행하는 것은 군자이기 때문이다. 황간이 말하기를, "다른 일에는 다툼이 없는데 활쏘기에는 다툼이 있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반드시 활쏘기일 것이다.'라 하였다. 활쏘기에 다툼이 있는 까닭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옛날에 남자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쑥대 화살과 뽕나무 활을 만들어 문 왼쪽에 두고 삼 일 밤이 지나면 사람을 시켜 아이를 데리고 문 밖에 나가 쏘게 하였으니 이 자손이 바야흐로 마땅히 천하 사방을 섬길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활쏘기로 임관에 나아간다 하였다. 예에 왕이 장차 제사를 지낼 적에 반드시 선비를 뽑아 제사를 돕게 하여 사방의 제후들이 왕에게 선비를 바치면 왕이 활쏘는 곳에서 이들을 시험하여 형용이 예에 맞고 절주가 예에 비근하며 적중하는 것이 많은 사람이면 제사에 참예하도록 하고 제사에 참예하도록 하면 그 임금의 봉토를 더해준다. 만약 활쏘기가 예악에 부합하지 않고 맞추는 것이 적으면 제사에 참예시키지 않고 제사에 참예시키지 않으면 그 군주의 봉토를 삭감한다 하였다. 이 활 쏘는 일이 이미 중요하니 오직 스스로 욕될 뿐 아니라 그 왕에게도 누를 끼치곤 한다. 그러므로 군자가 된 사람은 활쏘기에 대해 반드시 다툼이 있으니 그러므로 안연지가 말하기를, '활쏘기에서는 다툼을 허용한다.'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다툼이 없음을 볼 수 있다."
八章
○"倩", 『毛傳』“好口輔. ”馬融曰, “笑貌. ”"盼", 『毛傳』“白黑分. ”馬融曰, “動目貌. ”義相通. 蓋笑之美, 在口輔, 動目之美, 在黑白分也.
"천"에 대해, 『모전』에서는 "보조개가 예쁜 것이다."라 하였고 마융은 "웃는 모양이다."라 하였으며, "반"에 대해, 『모전』에서는 "흑백이 분명함이다."라 하였고 마융은 "눈동자의 모양이다."라 하였으니 뜻이 서로 통한다. 대개 웃음의 아름다움은 보조개에 달려 있고 눈동자 모양의 아름다움은 흑백의 분명함에 달려 있다.
○“素以爲絢兮", 何註以爲『詩』「衛風·碩人」, 逸此一句, 朱子倂上二句, 直以爲逸詩, 未詳執是. "絢", 馬融曰, “文貌”, 而不解一句之義. 邢昺曰, “莊姜, 旣有巧笑美目倩盻之容, 又能以禮成文絢然”, 果其說之是乎? 詩之義, 本謂禮, 而孔子引繪事, 爲迂. 且詩之義, 本謂禮, 而子夏曰, “禮後乎? ”豈足爲起予乎? 朱註, “素粉地, 畵之質也, 絢, 采色, 畵之飾也. ”是因孔子引繪事, 而謂詩本言畵, 可謂泥矣. 且"後素"失義, 不可從矣.
"소이위현혜"에 대해, 하안의 주석은 『시경·위풍·석인』에서 이 한 구절이 빠진 것으로 여겼고 주자는 위의 두 구절을 아울러 바로 일시라 여겼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는 자세하지 않다. "현"에 대해, 마융은 "문채있는 모양"이라 하였는데 한 구의 뜻은 해석하지 않은 것이다. 형병은 "장강이 이미 보조개가 아름다운 웃음과 흑백이 분명하여 예쁜 눈의 용모가 있어서 또한 예로써 문채의 모양을 이룰 수 있었다."라 하였으니 과연 그 설이 옳은 것인가? 시의 뜻이 본래 예를 이른다면 공자가 수놓는 일로 인용함이 어리석게 된다. 또 시의 뜻이 본래 예를 이른다면 자하가 말하기를, "예가 뒤라는 것입니까?"라 한 것이 어찌 "나를 일으키는" 것이 되겠는가? 주자의 주석에 "'소'는 칠하는 자리이니 그림의 바탕이고, '순'은 색을 칠하는 것이니 그림의 꾸밈이다."라 하였으니 이는 공자가 수놓는 일을 인용한 것을 가지고 시가 본래 그림 그리는 일을 말한 것이라 하였으니 천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후소"에 대해 뜻을 잃었으니 따를 수 없다.
○"繪事後素." 何安註鄭曰, “繪畫文也. 凡繪畫, 先布衆色, 然後以素分布其間, 以成其文. ”此說與『考工記』"凡畫繢之事, 後素功"合. 但鄭玄註曰, "素, 白采也. 後布之, 爲其易漬汚也. " 義爲迂矣. 朱註加一於字而曰, 謂“以粉地爲質, 而後施五采”, 是其意據『禮器』“甘受和白受采耳”. 殊不知彼主行禮得忠信之人, 此主學禮貴美質, 其義自別也. 且先素而謂之後素, 後素迺以何措辭乎? 且繪與畵不同, 畵泛言之, 繪則畵布. 如「虞書」, “予欲觀古人之象, 日月星辰山龍華蟲作會, 宗彝藻火粉米黼黻絺繡. ”「曲禮」, “飾羔鴈者以繢. ”「深衣」, “具父母, 大父母, 衣純以繢. ”皆爾. 朱子以粉地爲解, 則以爲畵圖, 可謂不識字義已. 蓋詩“素以爲絢兮”, 謂傳粉也. 絢者, 謂爛然有光也. 美人得粉, 美益彰, 繢事得布素分間, 五采益明, 美質學禮, 其美益盛. 非美人也粉適成醜, 非五采也布素何施, 非忠信之人也, 禮不可得而學. 此章之義也.
"회사후소"에 대해, 하안의 주석에서 정현이 말하기를, "'회'는 문채를 그리는 것이다. 무릇 그림을 그릴 때에는 먼저 여러 색을 칠한 이후에 흰색을 그 사이에 칠해서 그 문채를 이룬다."라 하였다. 이 설과 『고공기』의 "무릇 그림을 그리는 일에서는 흰색을 칠하는 것을 뒤에 한다"가 합치된다. 다만 정현의 주석에, "'소'는 흰색으로 칠하는 것이며 뒤에 칠하는 것은 쉽게 더럽혀지기 때문이다."라 한 것은 뜻이 어리석은 것이다. 주자의 주석은 '어'자 하나를 더하여 "칠하는 자리로 바탕을 삼고, 그런 다음에 다섯 색을 칠하는 것을 말한다."라 하였다. 이는 그 뜻이 『예기·예기』의 "단 맛은 온 맛을 조화롭게 하고 흰색은 온 색에 칠해진다"에 근거한 것으로, 저 글은 예를 행함에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데 요지가 있고 이 글은 예를 배움에 아름다운 자질을 귀히 여기는 데 요지가 있어서 그 뜻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이다. 또 먼저 흰 바탕을 만들어야 하는데 "후소"라 하였으니 "후소"를 어떻게 의미를 둘 것인가? 또한 '회'와 '화'는 같지 않아서 '화'는 널리 말하는 것이고 '회'는 베에 수놓는 것이다. 예컨대 「우서」에, "내가 옛 사람의 상을 관찰하고자 하여 해, 달, 별, 산, 용, 꽃, 벌레를 그리고 종묘의 그릇, 물풀, 불, 쌀, 보불을 수놓았다."라 하였고 「곡례」에, "새끼 양과 기러기를 꾸미는 것은 수놓은 천으로 한다."라 하였으며 「심의」에, "부모와 조부모가 모두 있으면 옷의 가선을 무늬 있는 비단으로 한다."라 하였으니 모두 이러하다. 주자는 칠하는 자리로 해석하였으니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여긴 것이라 글자의 뜻을 알지 못했다 하겠다. 대개 시에서 "소이위현혜"라 한 것은 분칠을 더함을 말한 것이고 "현"은 밝게 빛남을 이른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분칠을 더하면 아름다움이 더욱 드러나고 수놓는 일에서 흰빛을 도포하여 사이를 분명히 하면 여러 색깔이 더욱 밝아지며 아름다운 자질에 예를 배우면 그 아름다움이 더욱 성대해진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면 분칠을 더하여도 추해질 뿐이고 여러 색깔이 아니면 흰빛을 도포한들 어찌 베풀 것이며 충성스럽고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면 예를 배운들 무엇을 더하겠는가? 하는 것이 이 장의 뜻이다.
○“起予”, 朱註盡之. 蓋聖人好學之篤, 與羣弟子相答問, 其意每謂藉此以廣己之意智, 迺所以誨而不倦也. 後人徒以謙虛無我贊之, 抑末矣.
"기여"에 대해, 주자의 주석이 뜻을 다하였다. 대개 성인이 배움을 좋아하는 독실함은 여러 제자들과 함께 문답할 때에 그 뜻이 매양 이러한 이름을 쌓음으로 자신의 뜻과 지혜를 넓히는 데 있으니 그러므로 "가르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라 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다만 "겸허하여 내가 없는 것"으로 이를 칭찬하니 다만 말단일 따름이다.
九章
○“夏禮, 吾能言之. ”仁齋先生, 據『戴記』之訓適, 文辭各殊, 可謂泥矣. 朱註盡之. 古註, 文獻爲二國之君文章賢才, 徵訓成, 誤矣. 如子貢所謂“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是獻足徵也. 文獻不足徵者, 言二國無識夏殷禮之人與典籍也. 徵如『中庸』“無徵不信”也. 蓋孔子洞知古聖人作禮樂之心, 又熟知人情世變, 故夏殷之禮雖殘缺, 僅得一二, 推知其餘, 如視諸掌, 而謙曰“吾能言之”. 豈唯言其義而已哉? 然無徵則民不信, 故孔子不傳夏殷禮. 是此章之義也. 升庵曰, “『左傳』‘不徵辭’, 註, 徵音證. 唐貞觀中, 有"唐九證", 其名取『莊子』九徵說, 而字作證, 可以定其音矣. ”
"하례오능언지"에 대하여. 진사이 선생은 『대기』에서 '가다'라 훈한 것에 근거하여 어구를 각각 다르게 끊었는데 얽매여 해석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이 뜻을 다하였다. 옛 주석에 "문헌은 두 나라 군주의 문장과 현재를 말하며 징은 이룸으로 훈하여야 한다" 하였는데 틀렸다. 자공이 이른바 "어진 사람은 큰 것을 알고 있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작은 것만을 알고 있다."라 한 것과 같으니 이것이 문헌으로 족히 징험하는 것이다. 문헌이 징험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은 두 나라가 하나라와 은나라의 예를 아는 사람과 전적을 알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징험하다라는 것은 『중용』의 "징험하지 못하면 믿지 않는다"와 같다. 대개 공자가 옛 성인이 예악을 만든 마음을 밝게 알고 또한 인정과 세상의 변화를 익히 알아서 하은의 예가 비록 훼손되어 없어져 겨우 한둘만을 얻을 수 있으나 그 나머지를 유추하여 알 수 있으니 손바닥 위에 올려다놓고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겸손하게 말하기를 "내가 능히 말할 수 있다."라 하였으니 어찌 오직 그 뜻을 말하였을 따름이겠는가? 그러나 징험할 것이 없으면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이므로 공자가 하은의 예를 전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 장의 뜻이다. 승암 양신이 말하기를, "『좌전』에 '말을 징험하지 않았다.'라 하였는데 그 주석에 징을 증으로 읽는다 하였다. 당나라 정관 중에 "당구증"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장자』의 아홉 가지 징조에 대한 설에서 가져온 것이나 그 글자가 증으로 되어 있으니 그 음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라 하였다.
十章
○“禘自旣灌而往者. ”如“過此以往未之或知”也, 故訓後. 以天時言之, 往爲前, 來爲後. 以人事言之, 來者其所從來, 往者由此而後也. 禘體失傳, 故其詳不可得而知矣. 然灌所以降神也. 『易』曰, “觀盥而不薦, 有孚顒若, 下觀而化也. ”王弼引此章「祭統」曰“夫祭有三重焉. 獻之屬莫重於祼, 聲莫重於升歌, 舞莫重於武宿夜. 此周道也. ”灌盥祼, 通用. 觀, 示也. 上之所以示, 下之所以觀, 在灌而不在薦, 重故也. 「彖傳」曰, “大觀在上. ”蓋孔子之於禘, 欲觀其大者, 而不欲觀其小者, 貴本也. 孔子曰, “居上不寬, 爲禮不敬, 臨喪不哀, 吾何以觀之哉? ”亦言所觀在本也. 但『易』觀盥, 凡祭皆然, 此特言禘者, 禘爲大祭故特言之歟? 禘所以享帝也. 「祭義」曰, “唯聖人爲能享帝. ”此其所以特言禘歟?
"체자기관이왕자"에 대하여, '왕'은 "과차이왕미지혹지(이에서 더 뒤로 가면 혹 알아차릴 수도 없다)"와 같으니 '뒤로 가다'로 훈하여야 한다. 천시로써 말한다면 간 것이 앞이 되고 온 것이 뒤가 된다. 인사로써 말한다면 온 것은 그 소종래이고 간 것은 이로써 말미암은 이후이다. 체 제사는 실전되었으니 그러므로 그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을 대는 것은 신을 내리게 한 것이다. 『역』에 이르기를, "보기를 손만 씻고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처럼 하면 (백성들이) 정성을 다하여 우리를 존경하리라라 함은 아랫사람들이 보고 교화되는 것이다."라 하였다. 왕필은 이 장을 인용하여 「제통」에서 말하기를, "대저 제사에는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치는 등속의 일은 祼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소리에는 升歌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춤에는 武宿夜보다 중요한 것이 없으니 이것이 주나라의 도이다."라 하였다. 灌, 盥, 祼은 통용된다. 觀은 보이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示라 하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觀이라 하니 물따를 때는 있고 희생물을 바칠 때는 없는 것은 중하기 때문이다. 「단전」에 이르기를, "위에 있는 것을 크게 본다"라 하였으니 대개 공자가 체 제사에 대하여 보고 싶어하는 것은 그 큰 것이고,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그 작은 것이었으니, 근본을 귀히 여긴 것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위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못하고 예를 행함에 공경하지 못하며 상에 임하여 슬퍼하지 않는다면 내가 무엇으로 그를 보겠는가?"라 하였으니 또한 보는 것이 근본에 있음을 말하였다. 다만 『역』의 손씻음을 봄은 무릇 제사에 모두 그러하니 여기에서 유독 체 제사를 언급한 것은 체 제사가 큰 제사여서 특별히 언급한 것일까? 체 제사는 상제를 배향한 것이다. 「제의」에 이르기를, "오직 성인이어야 상제를 배향할 수 있다."라 하였으니 이것이 특별히 체 제사를 언급한 까닭일까?
○何註以來, 以魯郊禘非禮爲說, 不知何以知其爲魯邪. 以非禮而不欲觀, 則灌以前何擇也? 又如朱註以誠意, 未散浸以懈怠解之, 大失其義矣. 夫灌而易能乎, 則『易』何以言“觀盥而不薦乎”. 且所謂禘者, 禘嘗之禘邪? 王者大祭之禘邪? 何以必以非禮解之? 可謂不通已. 皇侃曰‘先儒舊論灌法不同. 案鄭二註, 或神或尸. 故解者或云, 灌神是灌地之禮’, ‘灌尸是灌人之禮. ’而鄭註『尙書大傳』則云, “灌是獻尸, 尸乃得獻, 乃祭酒以灌地也. ”
하안의 주석 이래로 노나라의 교 제사와 체 제사가 예에 맞지 않는다고 일컬어졌는데 어떻게 그것을 노나라가 행한다고 알았는지 모르겠다. 예에 맞지 않아서 보고자 하지 않았다면 물을 따르기 이전에는 어떻게 구분하였겠는가? 또 주자의 주석과 같이 성의로써 하여 흩어지지 않았다가 해이하고 태만함이 침식하여 들어오는 것으로 이를 풀이한다면 그 뜻을 크게 잃은 것이다. 대저 물을 따르는 것이 쉽게 할 수 있었다면 『역』에서 어찌 "보기를 손만 씻고 제수를 올리지 않았을 때처럼 하면"이라 말했겠는가? 또한 소위 체 제사라 함은 체 제사와 상 제사라 할 때의 체 제사인가? 왕이 크게 제사지낼 때의 체인가? 어찌 반드시 예에 맞지 않음으로 이를 풀이하겠는가? 맞지 않다고 이를 따름이다. 황간이 말하기를, "선유의 구설에 물을 따르는 법이 같지 않다 하였다. 생각건대 정씨 둘의 주석은 혹 귀신이라 하고 혹 시동이라 하니 그러므로 풀이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은 "신에게 물을 따르기 위해 바닥에 물을 뿌리는 예이다."라 하고 어떤 사람은 "시동에게 물을 따르기 위해 사람에게 물을 따르는 예이다."라 하였다. 『상서대전』의 정씨의 주석에서는 "시동에게 주기 위해 물을 따르니 시동이 따른 것을 받으면 제사 술을 땅에 뿌린다."라 하였다.
十一章
○“我觀周道, 幽厲傷之. ”孔子適周, 禮皆殘缺, 不可得而考也. “吾舍魯何適矣? ”“周禮盡在魯也. ”“魯之郊禘非禮也, 周公其衰矣. ”[13]“成王命鲁公, 世世祀周公以天子禮樂. ”[14] 故周公若是隆焉. 及後世惠公請郊廟, 遂祀群公皆用天子禮樂. 是天子禮樂, 不屬諸周公而屬諸魯. 屬諸魯而後周公之隆不可見矣. 故曰“其衰矣. ”郊祀天配后稷而不祀周公. 天與后稷, 非魯所得祀, 則昉乎惠公之請者審矣. 後世之禘, 又非伯禽時之禘, 故曰非禮.
"내가 주나라의 도를 보려고 하였으나 유왕과 여왕이 이를 손상시켰다."에 대하여, 공자가 주나라로 갔을때 예가 모두 손상되어 없어졌으니 얻어 상고할 것이 없었다는 말이다. "내가 노나라를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에 대하여, 주나라의 예가 모두 노나라에 있다는 말이다. "노나라의 교 제사와 체 제사는 예가 아니니 주공의 것이 쇠퇴하였다."와 "성왕이 노공에게 명하여 대대로 주공의 제사를 천자의 예악으로 하도록 하였다."에 대하여, 그러므로 주공이 이와 같이 융성하게 대접받았음을 알 수 있다. 후세에 이르러 혜공이 교 제사와 묘 제사를 청하였으니 드디어 여러 공을 모두 천자의 예악을 사용하여 제사지냈다. 이 천자의 예악은 주공에 속하지 않고 노나라에 속하였으니 노나라에 속하여 뒤에 주공의 융성함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주공의 것이 쇠퇴하였다."라 하였다. 교 제사는 하늘에 제사지내고 후직에게 배향하는 것으로 주공을 제사지낸 것이 아니다. 하늘과 후직은 노나라가 제사지낼 것이 아니니 혜공의 청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후세의 체 제사는 또한 백금 때의 체 제사와 달랐으니 그러므로 예가 아니라 한 것이다.
○弇州先生, 以郊禘爲皆非後世之僭, 而謂“晉文雄伯而有崇勳, 襄孱王而卻請隧. 魯弱國而未聞以僭禮樂討. 且魯得僭之, 齊晉先矣. 奚待魯也? ”其言雖辯, 孔子既曰非禮, 則其非昉伯禽者審矣. 且『家語』曰, “魯無冬至大郊之事, 降殺於天子”, 亦不深考已. 夫祀周公以天子禮樂, 既爲非常之典, 則後世郊禘之非禮, 亦得藉口. 齊晉之不以僭討者, 周公之餘威也. “不王不禘”之法, 又魯之所當諱者, 故以不知答之[15], 此據程子之說, 而以成王伯禽爲非禮. 按「明堂位」, “季夏六月, 以禘禮祀周公於大廟. ”是祀周公用禘禮也. 不曰“禘周公”, 而曰“以禘禮祀周公”, 則非禘者審矣. 豈所謂天子禮樂者禘禮歟? 抑將所謂天子禮樂者不必禘禮, 而用禘禮者後世之僭歟? 是未可知矣. 意必因得用禘禮而遂禘焉耳. 『呂覽』惠公所請“郊廟之禮”者, 廟蓋謂禘歟? 要之孔子所謂魯郊禘者, 以當時言之, 而非伯禽之舊也.
엄주선생 왕세정은 교 제사와 체 제사가 모두 후세의 참람된 것이 아니라 여겼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진나라 문공이 패자 중에 으뜸이고 높은 공이 있었으나 양왕은 약한 왕임에도 오히려 순유를 청한 것을 거절하였다.(좌전의 내용을 참조) 노나라는 약한 나라이나 예악을 참람되이 하여 토벌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으니 또한 노나라가 참람되었다면 제나라와 진나라가 먼저 쳤을 것이니 어찌 노나라를 기다려 주었겠는가?"라 하였다. 그 말이 비록 그럴듯하나 공자가 이미 예가 아니라 말하였으니 백금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또한 『가어』에 이르기를, "노나라에서는 동지에 큰 교 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니 천자보다 낮추어야 하기 때문이다."라 하였으니 또한 깊이 상고하지 못한 것이다. 대저 주공을 천자의 예악으로 제사지냄이 이미 통상적이지 않은 전례였으므로 후세에 교 제사와 체 제사를 예가 아니라 보았으니 또한 구실을 얻었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참람되다고 토벌하지 않은 것은 주공의 남은 위엄 때문이다. "왕이 아니면 체 제사를 지내지 못한다는 법은 또한 노나라가 마땅히 휘하여야 할 일이었으니 그러므로 이로써 알지 못한다라 대답하였다."라 하였으니 이는 정자의 설에 근거하여 성왕과 백금을 예가 아니라 여긴 것이다. 「명당위」를 보면, "계하 유월에 체 제사의 예의로 주공을 대묘에서 제사지낸다."라 하였으니 이는 주공을 제사지냄에 체 제사의 예를 사용했다 함이다. "주공을 체 제사 지냈다."라 하지 않고 "체 제사의 예로 주공을 제사지냈다."라 하였으니 체 제사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어찌 소위 천자의 예악이란 것이 체 제사의 예이겠는가? 다만 장차 소위 천자의 예악이라는 것이 반드시 체 제사의 예는 아니었으나 체 제사의 예를 쓴 것이 후대에는 참람되었는가?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생각건대 반드시 인하여 체 제사의 예를 사용하고 따라서 체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여씨춘추』에 혜공이 "교 제사와 체 제사의 예"를 청한 것은 묘 제사가 대개 체 제사를 이른 것일까? 요컨대 공자의 소위 노나라의 교 제사와 체 제사는 당시의 말로 그러하고 백금의 옛 것과는 다르다.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古註, “如指示掌中之物, 言其易了. ”是不知示之爲視也. “其如示諸斯乎”, 如視天下於掌也. 孟子曰, “武丁朝諸候有天下, 猶運之掌也. ”語勢相同. 禘之說, 朱子以“仁孝誠敬之至”, 言之. 仁齋先生曰, “治天下之本, 在感應之孚”, 是一端耳. 夫禘禮弗傳, 故後世自言知其說者皆妄矣. 大氐古聖人之道, 奉天道以行之, 尊祖宗合諸天, 禮樂刑政, 皆受其命. 是其大端也. 諸儒爭務高其議論, 而遺其大端, 我所不取也.
"'그 설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천하를 보기를 이것을 보듯이 할 것이다'라 하고는 그 손가락을 가리켰다."에 대하여, 옛 주석에서는 "손바닥 안에 있는 물건을 보이는 것과 같으니 그 쉬움을 말하였다."라 하였으니 이는 '보이다'가 '보다'가 됨을 알지 못한 것이다. "이것을 보이는 것과 같다"는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본 것고 같다. 맹자가 말하기를, "무정이 제후들에게 조회받고 천하를 얻었으니 손바닥을 움직임과 같았다."라 하였으니 어세가 서로 같다. 체 제사의 설은 주자는 "인효성경의 지극함이다."라 말하였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은 감응의 믿음직함에 있다."라 하였으니 이 말 또한 일리가 있다. 대저 체 제사의 예가 전해지지 않았으므로 후세에 스스로 그 설을 말하는 사람은 모두 망령될 뿐이다. 대저 옛 성인의 도는 천도를 받들어 이로써 이를 행하고 조종을 높이고 천도에 합쳐 예악형정이 모두 그 명을 받드니 이것이 그 큰 단서이다. 여러 유자들이 힘써 그 의론을 높이려 다투고 그 큰 단서를 내버려두니 나는 이를 취하지 않겠다.
十二章
○“祭如在”, 古經之言也. “祭神如神在”, 釋經之言也. 下引孔子之言以證之. 如"色斯擧矣"章[16]也. 大氐後儒深泥『論語』爲孔子語錄, 殊不知一時門人以其意錄之, 或記孔子言行, 或記『詩』·『書』之義, 故其例不同者, 如此也. 程子曰, “祭, 祭先祖也, 祭神, 祭外神也. ”本諸孔安國. 然祭豈必先祖乎, 神豈必外神乎? 可謂不知而爲之解已. 范氏曰, “有其誠則有其神, 無其誠則無其神. ”不曰至不至而曰有無, 宋儒之廢鬼神尙矣. 仁齋先生曰, “盡吾不得已之至情而已爾, 豈問其享與不享? ”大氐後之賢者, 其所見不勝阮瞻[17]而上之, 悲哉. 剖樹以求花於其中, 烏能見之? 謂之無花可乎哉? 『易』曰, “知鬼神之情狀”, 是聖人之事也. 後世儒者皆理學, 烏能知之? 又按, 不曰“如親在”而曰“如神在”. “事死如事生”, 語其心也, 禮則否, 雖親亦神之, 雖妻亦拜之, 可以見已. 後需昧乎禮而不知此義. 故文公作『家禮』, 主“事死如事生”之義, 可謂陋已. 『文獻通考』載天寶詔, 宗廟祭, 引"祭神如在”[18], 可見古來註家亦有不若孔安國說者矣.
"제사지낼 때에는 자리에 계신 것처럼 하였다"에 대하여, 이는 옛 경의 말이며 "신에게 제사지낼 때는 신이 계신 것처럼 하였다."에 대하여, 이는 경을 해석한 말이다. 아래에 공자의 말을 인용해 놓은 것으로 이를 증험할 수 있으니, "色斯擧矣" 장도 이와 같다. 대저 후세의 유학들이 『論語』를 공자의 어록이라 천착하였으니 한번씩은 문인들이 그들의 뜻을 기록하고 혹은 공자의 언행을 기록하고 혹은 『詩經』·『書經』의 뜻을 기록하여 그 예가 같지 않음이 이와 같음을 알지 못한 것이다. 정자가 말하기를, "제는 선조를 제사지내는 것이다. 제신은 천지신명을 제사지내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이는 본래 공안국에게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제사가 어찌 반드시 선조만이겠으며 제신이 어찌 반드시 천지신명만이겠는가? 알지 못하고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이를 만하다. 범씨가 말하기를, "정성이 있으면 그 신이 있고, 정성이 없으면 신이 없다."라 하였는데, 오고 오지 않고를 말한 것이 아니라 있고 없음을 말하였으니, 송대 유자들이 귀신을 폐단으로 본 것이 오래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내가 부득이하게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을 따름이니 어찌 그 흠향하고 흠향하지 않음을 묻는가?"라 하였다. 대저 후세의 어진 자들은 그 소견이 완첨의 위에 있지 못하였으니 슬프다. 나무를 쪼개어 그 속에서 꽃을 찾으니 어찌 찾아볼 수 있겠는가? 꽃이 없다 말하면 되겠는가? 『易經』에 이르기를, "귀신의 상태를 안다."라 하였으니 이는 성인의 일이다. 후세의 유자들이 모두 이학을 공부하니 어찌 이를 알겠는가? 또 생각건대 "如親在"라 하지 않고 "如神在"라 하였으니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한다"는 그 마음씀을 말한 것이고 예는 그렇지 않아서 비록 친족이라 하여도 신으로 모시고 비록 처라 하여도 절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후세의 유자들은 예에 어두워서 이 뜻을 알지 못하였으니 그러므로 문공이 지은 『家禮』가 "죽은 사람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한다."를 주로 하는 뜻에 누를 끼쳤다 이를 만하다. 『文獻通考』에 천보 연간의 조서에서 종묘의 제사에 대해 인용하기를 "신을 제사지냄에 자리에 계신 것처럼 하였다."라 하였으니, 고래의 주석가들이 또한 공안국의 설과 같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十三章
○“孔安國“奥以喩近臣, 竈以喩執政, 天以喩君”, 而無五祀之說. 觀於“無所禱也”, 則朱註爲優. 朱註五祀之禮, 據鄭玄「月令」註. 又王孫賈意, 奥以喩君, 竈以喩執政, 而諷孔子, 孔子直以天答之, 若不知諷意者. 然其言也厲, 豈可謂之遜乎? 王孫賈托禱祀言之, 則孔子亦以禱祀答之, 若不知諷意者, 是所以爲孔子之言也. 天道福善禍淫, 故曰, “獲罪於天, 無所禱也. ”朱子乃曰“天卽理也. ”仁齋先生曰, “天之道, 直而已矣. ”其論非不美矣, 然皆以已心言之. 以知天自負, 豈不倨乎? 『集註』, “凡祭五祀, 皆設主而祭於其所. ”按鄭玄「月令」註. “祀戶設主于戶內之西”, “竈在廟門外之東”, “中霤設主於牖下”, “祀門設主於門左樞”, “行在廟門外之西". 爲軷壤, 厚二寸, 廣五尺, 輪四尺. 祀行之禮, 北面設主于軷上," 是也. 其主, 鄭註『周禮』, “以菩芻棘栢爲之. ”“菩音員. ”按字書, 菩陽宮『漢書』萯陽宮, 迺音負之誤. 鄭註「聘禮」, “禮畢乘車轢之而遂行”, 迺知其主皆權時設之, 祀畢弃之, 非若宗廟之主也.
공안국이 "아랫목은 가까운 신하를 비유하고 부뚜막은 정치를 집행하는 신하를 비유하며 하늘은 임금을 비유한 것이다."라 하였으니 다섯 제사 이야기가 빠졌다. "빌 곳이 없다."라는 말로 미루어보면 주자의 주석이 낫다. 주자의 다섯 제사를 지내는 예의에 대한 주석은 정현의 「월령」편 주석에 근거한다. 또한 왕손가의 뜻이 아랫목 귀신은 임금을 비유하고 부뚜막 귀신은 정치를 집행하는 신하를 비유하여 이로써 공자를 풍자하였는데 공자가 바로 하늘로써 이에 답하였으니 어찌 풍자의 뜻을 모르겠는가. 그러나 그 말하는 바가 귀신이라면 어찌 겸손하게 말하겠는가? 왕손가가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에 의탁하여 말하였으므로 공자가 또한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으로 대답하였으니 만약 풍자의 뜻을 몰랐다면 이것이 공자가 말한 바의 까닭이다. 천도는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나쁜 사람에게 벌을 주니 그러므로 말하기를, "하늘로부터 죄를 받으면 빌 곳도 없다."라 하였다. 주자가 이에 말하기를 "하늘은 이치이다."라 하고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하늘의 도는 곧을 따름이다."라 하니 그 논리가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나 모두 이미 마음으로 말하고 있으니 하늘을 앎으로써 자부한다면 어찌 거만하지 않겠는가? 『집주』에 "무릇 다섯 제사에 제사드릴 때 모두 미리 신주를 설치하여 그 곳에 제사지낸다."라 하였는데, 정현의 「월령」편 주석으로 미루어보면 "제사지내는 집의 집 안 서쪽에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고 "부엌은 사당 문 바깥의 동쪽에 있다."라 하며 "중류는 들창의 아래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고 "제사지내는 문의 왼쪽 지도리에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고 "길가의 신은 제사지내는 문 바깥의 서쪽에 있다."라 하고 "길가의 신에게 제사드리면서는 두께를 두 촌으로, 넓이를 다섯 척으로, 둘레를 네 척으로 하며 길가의 신을 제사드리는 예는 북향으로 하고 제사지내는 곳에 신주를 설치한다."라 하였으니 이와 같다. 그 신주는 정현의 『주례』 주석에서 "향초와 꼴, 가시나무와 측백나무로 이것을 삼는다."라 하고 "보의 음은 원이다."라 하니 자서로 미루어볼 때 보양궁을 『한서』에서 부양궁이라 썼으니 아마 "음은 부이다."를 잘못 쓴 듯하다. 정현이 「빙례」 주석에서 "예를 마치며 수레를 타고 이것을 짓밟고 나서 간다."라 하였으니 이로써 그 신주가 모두 때에 맞추어 설치되고 제사가 끝난 뒤에는 버려지며 종묘의 신주와 같은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十四章
○“周監於二代. ”孔安國曰, “監, 視也. ”皇侃邢昺疏, 以比視廻視解之. 以余觀之, 如“儀監於殷”之監, 蓋以二代爲監戒, 曲爲之防, 故制度詳密, 所以文也. 孔子從之, 以備也, 以時也. 仁齋先生曰, 聖人每惡奢而從儉, 今於周之禮, 則獨從其文之郁郁者, 何哉? 蓋道得當爲貴, 自治之道, 不可不儉, 朝廷之禮, 不可不備. 夏商之禮, 質而不備, 周之禮, 文而得當, 此夫子所以特從周也. ”可謂不知而强爲之解者已. 林放問禮本, 何以知其爲自治之禮, 周監於二代, 何以知其爲朝廷之禮? 本文所無, 取諸臆, 豈不妄乎? 禮有財物, 奢險皆以用財言之, 豈文質之謂乎? 季氏旅泰山, 可謂非朝廷之禮哉? 而孔子引林放, 豈非惡其奢邪? 夫朝廷之禮, 其用財物豈不廣乎? 朝廷而不貴險, 豈聖人之心哉? 麻冕豈不用諸朝廷哉?
"주나라가 이대를 거울삼았다"에 대하여, 공안국이 말하기를, "監은 보다의 뜻이다."라 하였다. 황간과 형병의 소에서는 이로써 비겨 보아 돌아보다로 해석하였다. 나의 생각에는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삼아야 한다."의 監이어서 대개 이대로 경계를 삼아서 잘못된 것을 예방하고 제도를 상세하고 정밀히 하여 이로써 문을 삼는 것이다. 공자가 이를 따라서 이로써 갖추고 이로써 때에 맞게 하였다. 진사이 선생이 말하기를, "성인은 매양 사치를 미워하고 검소함을 좇았으니 지금 주나라의 예에 대해서 유독 그 문의 번성함을 따른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도는 마땅함을 얻음을 귀하게 여기니 스스로 다스리는 도는 검소하지 않을 수 없지만 조정의 예는 갖추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는 질박하되 갖추어지지 않았고 주나라의 예는 문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이것이 공자가 특별히 주나라를 따른 까닭이다."라 하였으니 알기 어려우며 억지로 해석한 것이라 할 만하다. 임방이 예의 근본을 물음에 어찌 그것이 자신을 다스리는 예임을 알겠으며 주나라가 이대를 봄에 어찌 그것이 조정의 예라 알 수 있겠는가? 본문에 없는 것을 취하여 생각하니 어찌 망령되지 않겠는가? 예에는 재물이 드는데 사치와 검소가 모두 재물을 씀으로 이를 말하니 어찌 문질로 이를 이르겠는가? 계씨가 태산으로 여행간 것이 조정의 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임방을 인용한 것이 어찌 사치를 미워해서가 아니겠는가? 대저 조정의 예는 그 재물을 씀이 어찌 광범위하지 않겠는가? 조정의 예가 검소함을 귀히 여기지 않음이 어찌 성인의 마음이겠는가? 삼베로 만든 면류관을 어찌 조정에서 쓰지 않았겠는가?
○且聖人之道, 文也, 夏以夏禮爲文, 殷以殷禮爲文, 周以周禮爲文, 皆以其時也. 當夏殷之時, 豈有意於爲質乎? 自後觀之而後以周爲文耳. 文即中也. 非比並文質而取其中也. 且以周爲文者, 非就殷之質而加之以爲文也. 且“道以當爲貴”者, 出於何典? 是朱子以當然之理, 訓道之見也. 孰謂仁齋先生知道也? 又曰, “孔子於自治之道不取周禮, 於朝廷之禮則取之, 聖人處事之權衡也. ”夫禮豈事之倫哉? 其人不知禮, 故輕視禮爾. 古曰, “先王制禮, 不敢不至”, 是孔門之教也. 不然, 子思何謂“憲章文武”? 大氐後儒動輒曰, “萬世不易之禮”, 斯見錮其胸中耳. 仁齋嘗謂“宋儒死定”, 豈非操戈入其室邪? 此章之言, 孔子自言制作之意, 當其時, 俾孔子制作, 則從周者獨多也. 亦如答顏子爲邦之問焉.
또 성인의 도는 문이다. 하나라는 하나라의 예가 문이 되고 은나라는 은나라의 예가 문이 되며 주나라는 주나라의 예가 문이 되니 모두 그 때에 맞기 때문이다. 하나라와 은나라의 때에 어찌 질박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겠는가? 이후로 이를 보아 뒤에 주나라를 문이라 하였을 따름이다. 문은 곧 중이니 문질을 견주어 그 가운데를 취한 것이 아니다. 또 주나라를 문으로 여겼다 하여 나아가 은나라의 질박함에 이를 더하여 문으로 삼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또 "도는 마땅함을 귀하게 여긴다."라는 말은 어떤 전고에서 나왔는가? 이는 주자의 당연한 이치로 도를 가르치는 견해이니 누가 진사이 선생이 도를 알았다 일렀는가? 또 말하기를, "공자가 스스로 다스리는 도로는 주나라의 예를 취하지 않고, 조정의 예로 이를 취하였으니 성인이 일을 처리하는 잣대이다."라 하였으니 대저 예가 어찌 일의 인륜이겠는가? 그 사람들은 예를 잘 몰라서 예를 경시할 뿐이다. 옛말에, "선왕이 예를 제정하니 감히 이르지 않을 수 없다."라 하였으니 이는 공문의 가르침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사가 어찌 "문왕과 무왕을 법으로 삼았다"라 하였겠는가? 대저 후세의 유자들이 걸핏하면 말하기를, "만세토록 바뀌지 않는 예"라 하여 이 견해가 그 흉중을 막았을 따름이다. 진사이 선생은 항상 "송나라 유자들이 정한 것은 틀렸다宋儒死定"이라 하였는데 어찌 창을 들고 그 방에 들어가지 않는가? 이 장의 말은 공자가 스스로 정하여 만든 뜻을 말한 것이니 그 때에 공자가 스스로 정한 것을 좇아 주나라를 따르는 사람이 유독 많았다. 또 안자의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냐는 질문에 대답한 것 같다.
- ↑ 論語 先進에 증점이 "세 사람의 택함과는 다르다(異乎三子者之撰)"라 하였다.
- ↑ 禮記 樂記에 "(예악을) 만드는 사람을 성이라 하고 서술하는 사람을 명이라 하니(作者之謂聖, 述者之謂明)"라 하였다.
- ↑ 書經 弘範
- ↑ 近思錄에, "성왕이 어려 주공이 섭정하다가 주공이 죽으니 성왕이 그 훈덕을 생각하여 노나라에 천자의 예악을 내리고 주공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니 이에 대해 공자는 성왕이 하사한 것과 백금이 받은 것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 하였다.(成王幼, 周公攝政, 周公沒, 成王思其勳德, 錫魯以天子之禮樂, 使祀周公焉, 孔子曰, 成王之賜, 伯禽之受,皆非也.)”라 하였다.
- ↑ 앞에서 왕세정이 요순우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書經 舜典, 大禹謨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한 復子는 周書 洛誥에 "주공이 배수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 밝은 군주에게 복명한다(周公拜手稽首曰, 朕復子明辟.)에서 유래한 말이다.
- ↑ 인을 안민지덕이라 하여 통치술로 보아 이치를 논한 성리학과 궤를 달리하였으며, 1~3장에서 일관되게 공자의 말을 제언적인 강한 말이 아니라 청유하는 말이라 하였다.
- ↑ 孔子家語 曲禮子夏問
- ↑ 孟子 離婁
- ↑ 漢書·禮樂志에, "주나라는 하나라와 은나라를 본받았으되 예와 문이 더욱 구체적이어서 사물에 대해서는 절제가 되고 곡진함에 대해서는 방비가 되었으므로 칭하기를 '지켜야 할 예절은 삼백 가지요, 몸가짐을 바르게 할 계는 삼천 가지라'.(周監于二代, 禮文尤具, 事爲之制, 曲爲之防, 故稱禮經三百, 威儀三千.)"라 하였다.
- ↑ 周禮 地官 大司徒, "以五禮防民僞, 而敎之中."
- ↑ 孔子家語 曲禮子夏問
- ↑ 『儀禮』, "揖讓而升, 謂飲射爵時, 揖讓非射時也."
- ↑ 이상 인용문은 모두 『예기』『예운』을 출전으로 한다.
- ↑ 이 인용문은 『예기』『명당위』를 출전으로 한다.
- ↑ 『논어집주』의 내용이다.
- ↑ 『論語·鄕黨』
- ↑ 阮瞻은 위진시기 인물로, 여기에서는 그가 유학과 노장학의 차이에 대해 "아마 같지 않을 것이다.(將無同)"라 대답한 것에 대해 有無의 화법을 쓴 부분에 주목하여 말한 것이다.
- ↑ 『文獻通考』卷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