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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26일 (목) 12: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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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Quote-left.png 재(齋)를 사우(四友)라고 이름지은 것은 왜냐? 허자(許子 저자 자신을 가리킴)의 벗하는 자가 셋인데, 허자가 그 중 하나를 차지하고 보니, 아울러 넷이 된 셈이다. 세 사람은 누구인가? 오늘날의 선비는 아니고 옛사람이다. 허자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잘 맞지 않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지어 배척하므로, 문에 찾아오는 이가 없고 나가도 더불어 뜻에 맞는 곳이 없다. 그래서 탄식하며,

“벗이란 오륜(五倫)의 하나인데 나만 홀로 갖지 못했으니 어찌 심히 수치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했다. 물러나와 생각건대, 온 세상이 나를 비천하게 여기고 사귀지 않으니 내가 어디로 가서 벗을 구할 것인가. 마지 못해 옛사람 중에서 사귈 만한 이를 가려 벗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는 진(晉) 나라의 처사(處士) 도원량(陶元亮)이다. 그는 한가하고 고요하며 평탄하고 소광(疏曠)하여 세상일 따위는 마음에 두지 않고 가난을 편히 여기며 천명을 즐기다가 승화 귀진(乘化歸盡)하니, 맑은 풍모와 빼어난 절개는 아득하여 잡을 길이 없다. 나는 몹시 그를 사모하나, 그의 경지에는 미칠 수가 없다. 그 다음은 당(唐) 나라 한림(翰林) 이태백(李太白)이다. 그는 비범하고 호탕하여 팔극(八極)을 좁다 하고 귀인들을 개미 보듯하며 스스로 산수간에 방랑하였으니, 내가 부러워하여 따라 가려고 애쓰는 처지이다.

또 그 다음은 송(宋) 나라 학사(學士) 소자첨(蘇子瞻)이다. 그는 허심탄회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으므로 현명한 이나 어리석은 이, 귀한 이나 천한 이 할 것 없이 모두 그와 더불어 즐기니, 유하혜(柳下惠)화광동진(和光同塵)을 본받고자 하나 못하는 처지이다.

이 세 분의 군자는 문장이 천고(千古)에 떨쳐 빛나지만, 내 보기에는 모두 그들에게는 여사(餘事)였다. 그러므로 내가 취하는 바는 전자에 있지 후자에 있지 않다. 만약 이 세 분 군자를 벗삼는다 할 것 같으면, 어찌 속인들과 함께 어깨를 포개고 옷소매를 맞대며, 사분사분 귓속말하며 스스로 우도(友道)를 삼을 것인가.

나는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세 군자의 상을 꼭 같이 그리게 하고, 이 초상에 찬(贊)을 짓고 석봉(石峯)으로 하여금 해서(楷書)로 쓰게 하였다. 매번 머무는 곳마다 반드시 좌석 한쪽에 걸어놓으니 세 군자가 엄연히 서로 대하여 권형(權衡)을 평정(評定)하며 마치 함께 웃고 얘기하는 듯하고, 더욱이 그 인기척 소리를 듣는 듯하여 쓸쓸히 지내는 생활이 괴로운 것을 자못 알지 못하였다. 이러고 보니 나는 비로소 오륜을 갖추게 되었으며, 더욱 남과 더불어 사귀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 나는 확실히 글을 못하는 자라 세 분 군자의 여사에도 능하지 못하지만 성격마저 탄솔(坦率)하고 망용(妄庸)하여 감히 그러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지는 못한다. 단지 그분들을 존경하고 사모하여 벗으로 삼고자 하는 정성만은 신명(神明)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벼슬에 그 출처와 거취는 암암리에 그분들과 합치되었다. 도연명이 팽택(彭澤)의 영(令)이 되어 80일 만에 관직을 벗었는데, 나는 세 번이나 태수가 되었으나 임기를 못 채우고 문득 배척받아 쫓겨났다. 이태백은 심양(潯陽)과 야랑(夜郞)으로 가고 소동파는 대옥(臺獄)과 황강(黃岡)으로 갔었다. 이는 모두 어진이가 겪은 불행이지만, 나는 죄를 지어 형틀에 묶이고 볼기맞는 고문을 받은 뒤 남쪽으로 옮겨지니, 아마도 조물주가 희롱하여 그 곤액은 같이 맛보게 하였으나, 부여된 재주와 성품만은 갑자기 옮겨질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늘의 복을 입어, 혹시라도 전야로 돌아가도록 허락된다면, 관동(關東) 지방은 나의 옛 터전이라 그 경치며 풍물이 중국의 시상산(柴桑山)ㆍ채석산(采石山)과 견줄 만하고, 백성은 근실하고 땅은 비옥하여 또한 중국의 상숙현(常熟縣)과 양선현(陽羨縣)보다 못지 않으니, 마땅히 세 군자를 받들고 감호(鑑湖) 가에서 초복(初服) 입던 신세로 돌아간다면, 어찌 인간 세상의 한가지 즐거운 일로 되지 않겠는가. 저 세 분 군자가 아신다면 역시 장차 즐겁고 유쾌하게 여기실 것이다. 내가 사는 집은 한적하고 외져서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으며, 오동나무가 뜰에 그늘을 드리우고 대나무와 들매화가 집 뒤에 총총히 줄지어 심어져 있으니, 그 그윽하고 고요함을 즐기면서 북쪽 창에다 세 군자의 초상을 펴놓고 분향하면서 읍을 한다. 그래서 마침내 편액을 사우재(四友齋)라 하고 인하여 그 연유를 위와 같이 기록해둔다. 신해년(1611, 광해군3) 2월 사일(社日)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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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허균, 『사우재기』(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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