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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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황순원의 죽음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big>===
 
===<big>'''황순원의 죽음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big>===
*황순원은 체증을 다스리기 위해 소학교 시절부터 술(소주)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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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열두어 살 때부터 마신 소주를 일흔이 넘도록 마셨고, 그 뒤로 몸이 쇠하여서도 타계할 때까지 매일 <b>'마주앙'</b>을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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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의 죽음과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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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의 죽음 관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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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오성찬,'''''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big></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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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big></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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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선생님 영전에 20대후반 문청 시절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읽던 작품…술자리서 조차 흐트러짐 없는 꼿꼿하면서도 소탈했던 선생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신지, 신문이나 잡지에 가끔씩 나는 동정만 살피는 새 6 ~ 7년을 버텨 오셨는데, 어제 저녁 TV 뉴스를 보다가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나무들 비탈에서다」의 첫회가 「사상계」에 연재가 될 무렵, 나는 20대 후반의 문학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주인공이 진격해 나가며 ‘건드리기만 하면 파삭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긴박한 상황을 작품으로 읽으며 숨이 막힐 정 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후 이 작품을 통독한 것은 물론 그 후 발표된 「일월」은 물론 창우사판 문학전집을 구해서는 언더라인을 그어가며 그 고결한 문장들을 익혔다. 주인공들 감정까지도 극히 절제된 「소나기」 속의 여러 상황과 문장은 마땅히 문학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이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 그 후 나도 문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선생님은 그야말로 태산같은 어른이셨다. 그런데 상경하는 기회에 소설 쓰는 동료와 함께 만나뵌 선생님은 그리도 소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건 우리에게 물으셨다. “너희들 있는 데가 어디냐?”고. 그리곤 선생님께서 계신 곳과 우리가 있는 거리의 중간쯤에 장소를 정해 놓고, 지금부터 움직여서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그 장소에서 오늘 사진에서 뵌 것과 마찬가지 베레모를 쓰신 선생님을 될 수 있었고 그날 처음 만났지만 아주 친숙한 것처럼 소탈하신 성격의 선생님과 음식도 나누고, 술도 마셨다. 그때 인상으로 선생님은 술을 많이 드시지는 않았지만 퍽 즐기시는 것 같았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제주도 사람들이 내가 「비바리」를 쓴 때문에 혼을 내려고 한다면서?” 사실 나도 선생님의 「비바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그런 내색을 바로 수는 없었다. 더구나 평안도 출신의 선생님이 한차례와 보고 쓰신 작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덮어두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두 번째도 처음과 꼭 같은 방법으로 만났는데, 그때도 그 말씀을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그 작품을 쓰시고 나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이라고 속으로 치부했다. 그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선생님은 그 후로 한번도 제주엘 오시지 않았다. 대학의 제자고 원정이 선생님의 염결성에 대해 증언하거니와, 선생님의 그런 점에서도 성격을 선생님은 그런 성격을 느끼게 한다. 어느 신문이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 “정결한 문장… 꼿꼿한 인품”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데, 사실 그는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우리가 마지막 만나던 날은 아마 정초 무렵이었는지 그날 선생님은 검은 두루마기에 베레 모. 차림이셨다. 늦도록 마시고 우리와 헤어져 가실 때 가도로 위를 건너 가실 때 나부끼던 두루마기 자락과 고름은 이제도 나의 망막에 남아 있는 매우 아름다운 영상이다. 그리고 그 후 이 몽매한 제자는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뵙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부음을 접하다니…. 다만 엎드려 명복을 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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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덕순: 지금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얘길 하지만, 사실은 얘기하라면 밤새도록도 할 수 있어. 그게 몇 해에 걸쳐서 선생님을 옆에서 쭉 봤고, 또 평소에도 선생님 소설을 늘 읽고 얘기를 많이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도현(*인터뷰어)이한테 얘기를 하다가 생각을 하니까,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 믿기지 않네. 20년 넘었네. 내가, 선생님 돌아가신(*돌아가신 지가). 선생님이 주무시는 것처럼(*주무시는 것처럼 돌아가셨다), 저녁때 방에 나는 들어가겠다고 주무시러 들어가고, 그러고 나서 새벽에 가보니까 돌아가셨다던가? 새벽에 조금 이상해서 선생님이, 사모님이 이렇게 들어가셨다가, 두 분이 (같이) 사셨거든, (*황순원의 죽음 이후로)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사셨고. 그래서 자다가 주무시듯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가 굉장히, 8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당시로도 오래 사셨던 거고, 장수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장례식 빈소에 모여서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때, 조세희 선생님이, 조세희 선생님은 영문과 출신이에요. 경희대학교. 영문과 출신인데, 선생님의 제자니까. 그래도. 선생님이 아끼던 사람이고 그러니까, 오셔서 조세희 선생님이, 아닌가? 조세희 선생님도 국문과 출신인가? 야, 진짜 기억이 이러냐…. 아, 조세희 선생님이 국문과 출신이고 한수선 선생님이 영문과 출신이었네. 한수선이라고 또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오시고 그래서 그때 거기 빈소에는 진짜 유명한 작가님들 다 왔었어요. 어, 그리고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도 다 오고. 그래서 선생님이 이제 안 계시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밥을 먹는 그 모임은 더는 할 수 없는데 때 조세희 선생님이, '그러면 내가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조금 힘이 돼서 같이 후배들하고 계속 경희 문인들이 모일 그런 기회를 마련해 보면 좋겠다. 그렇게 하자.' 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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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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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의 죽음 관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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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시 원문'''''</big></big><ref>황동규,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문학과지성사, 2003.</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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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오성찬, 「고가도로 위에서 나부끼던 두루마기 고름」, 제민일보, 2000.09.16'''''</big></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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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big> / 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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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선생님 영전에 20대후반 문청 시절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읽던 작품…술자리서 조차 흐트러짐 없는 꼿꼿하면서도 소탈했던 선생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신지, 신문이나 잡지에 가끔씩 나는 동정만 살피는 새 6 ~ 7년을 버텨 오셨는데, 어제 저녁 TV 뉴스를 보다가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나무들 비탈에서다」의 첫회가 「사상계」에 연재가 될 무렵, 나는 20대 후반의 문학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주인공이 진격해 나가며 ‘건드리기만 하면 파삭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긴박한 상황을 작품으로 읽으며 숨이 막힐 정 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후 이 작품을 통독한 것은 물론 그 후 발표된 「일월」은 물론 창우사판 문학전집을 구해서는 언더라인을 그어가며 그 고결한 문장들을 익혔다. 주인공들 감정까지도 극히 절제된 「소나기」 속의 여러 상황과 문장은 마땅히 문학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이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 그 후 나도 문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선생님은 그야말로 태산같은 어른이셨다. 그런데 상경하는 기회에 소설 쓰는 동료와 함께 만나뵌 선생님은 그리도 소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건 우리에게 물으셨다. “너희들 있는 데가 어디냐?”고. 그리곤 선생님께서 계신 곳과 우리가 있는 거리의 중간쯤에 장소를 정해 놓고, 지금부터 움직여서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그 장소에서 오늘 사진에서 뵌 것과 마찬가지 베레모를 쓰신 선생님을 될 수 있었고 그날 처음 만났지만 아주 친숙한 것처럼 소탈하신 성격의 선생님과 음식도 나누고, 술도 마셨다. 그때 인상으로 선생님은 술을 많이 드시지는 않았지만 퍽 즐기시는 것 같았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제주도 사람들이 내가 「비바리」를 쓴 때문에 혼을 내려고 한다면서?” 사실 나도 선생님의 「비바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그런 내색을 바로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평안도 출신의 선생님이 한차례와 보고 쓰신 작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덮어두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두 번째도 처음과 꼭 같은 방법으로 만났는데, 그때도 그 말씀을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그 작품을 쓰시고 나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이라고 속으로 치부했다. 그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선생님은 후로 한번도 제주엘 오시지 않았다. 대학의 제자고 원정이 선생님의 염결성에 대해 증언하거니와, 선생님의 그런 점에서도 성격을 선생님은 그런 성격을 느끼게 한다. 어느 신문이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 “정결한 문장… 꼿꼿한 인품”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데, 사실 그는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우리가 마지막 만나던 날은 아마 정초 무렵이었는지 그날 선생님은 검은 두루마기에 베레 모. 차림이셨다. 늦도록 마시고 우리와 헤어져 가실 때 가도로 위를 건너 가실 때 나부끼던 두루마기 자락과 고름은 이제도 나의 망막에 남아 있는 매우 아름다운 영상이다. 그리고 그 후 이 몽매한 제자는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뵙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부음을 접하다니…. 다만 엎드려 명복을 빌 따름이다.
 
 
 
 
부동산은 없고<br>
 
아버님이 유산으로 내리신 동산(動産) 상자 한 달 만에 풀어보니<br>
 
'''마주앙''' 백포도주 5병,<br>
 
호주산 적포도주 1병,<br>
 
안동소주 400㏄ 1병,<br>
 
짐빔(Jeam Beam) 반 병,<br>
 
품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br>
 
잿빛 양말 4켤레,<br>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br>
 
 
 
 
 
가족 모두 집 나간 오후<br>
 
꼭 끼는 가을꽃 무늬 셔츠 입고<br>
 
잿빛 양말 신고<br>
 
답답해 전축마저 잠재우고<br>
 
화분 느티가 다른 화분보다 이파리에 살짝 먼저 가을물 칠한 베란다에<br>
 
쪼그리고 앉아<br>
 
실란(蘭) 꽃을 쳐다보며 앉아 있다.<br>
 
조그맣고 투명한 개미 한 마리가 실란 줄기를 오르고 있다.<br>
 
흔들리면 더 오를 생각 없는 듯 멈췄다가<br>
 
다시 타기 시작한다.<br>
 
흔들림, 멈춤, 또 흔들림, 멈춤<br>
 
한참 후에야 꽃에 올랐다.<br>
 
올라봐야 별 볼일 있겠는가,<br>
 
그는 꼿꼿해진 생각처럼 쪼그리고 앉아 있다.<br>
 
저녁 햇빛이 눈 높이로 나무줄기 사이를 헤집고 스며들어<br>
 
베란다가 성화(聖畵) 속처럼 환해진다.<br>
 
추억이란 애써 올라가<br>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이 아닐까.<br>
 
어느샌가 실란이 배경 그림처럼 사라지고<br>
 
개미만 투명하게 남는다.<br>
 
 
 
 
 
그가 그만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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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style="width:50%; margin: auto;"
 
! style="background-color:#ffffff;" | [[파일:홀로움.png|중앙일보 기사 원문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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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기사 텍스트'''''</big></big><ref>이경철, 「[사람 사람] 황동규 시인, 고 황순원 선생 회상 시 발표」, 중앙일보, 2001.01.0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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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이 부친인 소설가 고 황순원 선생을 회상한 시를 '현대문학' 1월호에 발표했다.
 
 
 
소설만을 위한 올곧은 삶으로 우리 현대소설 최고의 미학과 정도를 꽃피운 부친이 타계하자 아들 동규 시인은 후배 문인들과 함께 백령도로 떠났다.
 
 
 
'풍장' 등으로 시의 한 경지를 열어보인 중진시인으로서 부친의 문학을 위한 삶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다.
 
 
 
"새벽 3시 잠 속에서 기어나와 집을 뜬/아 아직 인간의 매듭 보이지 않던 곳 백령도/매듭 하나 새로 지으려고/부두에서 배에 오를 때부터/이불솜처럼 끼는 안개, /가을비 한 차례 뿌려도/시계 30미터의 안개, /하늘과 바다가 사라진다. /이 속에서 예수와 부처가 만나면/모르는 사이에 서로 구면이 되리라.“
 
 
 
최고의 소설가와 시인 부자(父子). 가장 훌륭한 문인 집안이어서 많은 신문·방송·잡지사들의 글과 인터뷰 청탁을 굳이 마다하고 가장 외따르고 청정한 섬으로 가 얻어온 시다.
 
 
 
위의 시 '추억의 힘줄은 불수의근(不隨意筋)이니' 의 일부와 같이 그는 '예수와 부처의 만남' 의 경지에 이른 부친의 문학에 자신의 시를 함께 하려 한다.
 
 
 
때때로의 사회적 명성이나 이득에 저버릴 수 없는 인간 본원적인 신성(神性)과 그리움을 향해 나가야만 하는 문학.
 
 
 
"부동산은 없고/아버님이 유산으로 주신 동산(動産)상자 한 달만에 풀어 보니/'''마주앙''' 백포도주 5병, /호주산 적포도주 1병, /안동소주 4백㏄ 1병, /짐빔(Jim Beam)반 병, /통 좁은 가을꽃 무늬 셔츠 하나, /잿빛 양말 4켤레, /그리고 웃으시는 사진 한 장. " (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중에서)
 
 
 
'소나기' '카인의 후예' 등 빼어난 소설과 명리(名利)를 탐하지 않은 삶으로 우리 사회의 사표(師表)가 된 고 황순원 선생은 우리 마음 속에 영원히 남을 작품만 남기고 갔다. 술 몇병만 남기고 간 청정한 삶의 문학혼이 아들·후배를 통해 다시 시로 솟아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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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관련 글'''====
 
 
 
{| class="wikitable" style="width:50%; margin: auto;"
 
! style="background-color:#ffffff;" | [[파일:추억만들기.png|중앙일보 기사 원문 캡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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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mw-collapsible" style="width:90%; margin: auto; background-color:#ffff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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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g><big>'''''기사 텍스트'''''</big></big><ref>박덕규, 「황순원씨 이색 사은회…제자 문인들과 함께 '옛사랑으로' 출간」, 중앙일보, 1997.09.0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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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님아, 내 사랑아, /우리의 앞에는 다시 동반해야 할 험한 길이 놓여 있나니/돌아오라 옛사랑으로,가면을 버리고 힘의 상징인 옛사랑으로 돌아오라." 원로작가 황순원씨는 18세때 발표한 '옛사랑' 이란 시에서 사랑에게 가면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했다. 황씨의 '사랑' 이 될 수 있는 경희대 국문과 출신 제자 문인들은 20년 가까이 황씨를 모시고 모임을 갖고 있다. 이번에 스승과 제자들이 함께 소설집을 내고 모임을 가졌다.
 
 
 
<박덕규>    지난6일 오후7시 즈음 모인 사람 수를 헤아리니, 이미 스무명.
 
황순원선생을 모시고 저녁 자리를 함께 가진 20년 가까운 세월 중에서는 최다 인파 (?).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제자 (작가 전상국, 조해일) 도 있고, 멀리 광주 (광주대교수 신덕룡) 나 청주 (청주전문대교수 한원균)에서 온 제자도 있다. 물론 선생을 뵈러 온 것이지만, 이렇게 많은 제자가 일시에 모인 이유는 좀 각별하다.
 
 
 
며칠 전 선생의 작품을 앞세워 작가.평론가 제자 18인이 공동으로 한 권의 책을 출간한 것이 여러모로 선생에 대한 옛 감회를 불러 온 까닭이다. 그 책은 '소설이 있는 문학 강의실' 이라는 부제가 붙은 '옛사랑으로 돌아오라' (유니스타刊).
 
 
 
이 책이 선생께도 많은 추억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사람이 많으면 말수를 줄이는 선생의 성품과 최근의 기력으로 보면 이날은 말씀이 결코 적지 않았다. 더구나 선생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과의 월드컵 예선전 축구 실황 방송을 켜둔 상태.
 
 
 
댁에서부터 사모님이 챙겨오시는 '''마주앙'''으로 맥주잔을 채우시고 책 출간을 자축하는 뜻의 건배를 제의하시는 선생의 모습에는 옛 기백이 여전했고, 책의 표제가 된 당신의 시 '옛사랑' 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출처를 캐물으실 때는 그 눈빛이 영롱하기까지 했다.
 
 
 
"이번에 시 '옛사랑' 을 보고 선생님 시를 정독하게 되었다" 고 고백하는 제자 (문학평론가 강웅식) 의 말에 모처럼 파안대소하셨다. 몇 년전부터 사모님이 동석하면서 두 분의 연애와 결혼 이야기에 귀기울여 왔던 우리들은 "선생님께서는 옛사랑이나 첫사랑이나 지금 사랑이나 모두 한분 뿐이시겠지요" (작가 김용성등) 라는 말로 화기로움을 돋구기도 했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일부 제자들과 함께 책을 낸 일로 혹시 겪게 될지 모를 불편함을 염려하는 우리들에게 거듭 "책 내느라 애썼어요" 라고 격려하는 말에 염치없이 우쭐해하는 나이 먹은 제자들도 있는 눈치. 그러는 사이 사모님은 새 일일극을 집필중인 제자 (방송작가 박진숙) 와 몇 마디 나누시고….
 
 
 
단골음식인 '보신탕' 에 대한 선생의 감식평도 당연한 순서. 골을 성공시키는 한국축구에도 박수를 아끼시지 않는 내외분. "12월 만남 때는 내가 산다!" 며 마지막 건배를 힘있게 외치는 선생의 즐거운 안색. 그런 모습은 3개월에 한번 보는 일이지만, 이 책에 직접 참여한 제자이건 그렇지 않은 제자이건 간에, 우리의 일상 틈틈에서 조용히 우리를 관찰하는 자상하고도 엄격한 눈이 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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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24일 (수) 19: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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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장례식장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 믿기지 않네."[1]


황순원의 죽음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황순원의 죽음 관련 인터뷰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

서덕순: 지금 내가 이렇게 여러 가지 얘길 하지만, 사실은 얘기하라면 밤새도록도 할 수 있어. 그게 몇 해에 걸쳐서 선생님을 옆에서 쭉 봤고, 또 평소에도 선생님 소설을 늘 읽고 얘기를 많이 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도현(*인터뷰어)이한테 얘기를 하다가 생각을 하니까,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20년이 되어가는데 믿기지 않네. 20년 넘었네. 내가, 선생님 돌아가신(*돌아가신 지가). 선생님이 주무시는 것처럼(*주무시는 것처럼 돌아가셨다), 저녁때 방에 나는 들어가겠다고 주무시러 들어가고, 그러고 나서 새벽에 가보니까 돌아가셨다던가? 새벽에 조금 이상해서 선생님이, 사모님이 이렇게 들어가셨다가, 두 분이 (같이) 사셨거든, (*황순원의 죽음 이후로) 사모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혼자 사셨고. 그래서 자다가 주무시듯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우리가 굉장히, 80(세)에 돌아가셨으니까 당시로도 오래 사셨던 거고, 장수하신 거였어요. 그런데 장례식 때 빈소에 모여서 우리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 조세희 선생님이, 조세희 선생님은 영문과 출신이에요. 경희대학교. 영문과 출신인데, 선생님의 제자니까. 그래도. 선생님이 아끼던 사람이고 그러니까, 오셔서 조세희 선생님이, 아닌가? 조세희 선생님도 국문과 출신인가? 야, 진짜 기억이 이러냐…. 아, 조세희 선생님이 국문과 출신이고 한수선 선생님이 영문과 출신이었네. 한수선이라고 또 유명한 작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도 오시고 그래서 그때 거기 빈소에는 진짜 유명한 작가님들 다 왔었어요. 어, 그리고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도 다 오고. 그래서 선생님이 이제 안 계시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밥을 먹는 그 모임은 더는 할 수 없는데 그 때 조세희 선생님이, '그러면 내가 원래 그런 걸 좋아하진 않지만 내가 조금 힘이 돼서 같이 후배들하고 계속 경희 문인들이 모일 그런 기회를 마련해 보면 좋겠다. 그렇게 하자.' 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셨어요.


황순원의 죽음 관련 글

오성찬, 「고가도로 위에서 나부끼던 두루마기 고름」, 제민일보, 2000.09.16

황순원 선생님 영전에 20대후반 문청 시절 숨막히는 긴장 속에서 읽던 작품…술자리서 조차 흐트러짐 없는 꼿꼿하면서도 소탈했던 선생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계신지, 신문이나 잡지에 가끔씩 나는 동정만 살피는 새 6 ~ 7년을 버텨 오셨는데, 어제 저녁 TV 뉴스를 보다가 선생님의 부음을 접했다. 선생님의 작품 중 「나무들 비탈에서다」의 첫회가 「사상계」에 연재가 될 무렵, 나는 20대 후반의 문학청년으로 전장에 투입된 주인공이 진격해 나가며 ‘건드리기만 하면 파삭 깨질 것 같은 유리처럼’ 긴박한 상황을 작품으로 읽으며 숨이 막힐 정 같은 느낌을 받은 경험이 있다. 그 후 이 작품을 통독한 것은 물론 그 후 발표된 「일월」은 물론 창우사판 문학전집을 구해서는 언더라인을 그어가며 그 고결한 문장들을 익혔다. 주인공들 감정까지도 극히 절제된 「소나기」 속의 여러 상황과 문장은 마땅히 문학을 하고자 하는 후배들이 귀감으로 삼을만 하다. 그 후 나도 문단의 말석을 차지하고 앉았을 때 선생님은 그야말로 태산같은 어른이셨다. 그런데 상경하는 기회에 소설 쓰는 동료와 함께 만나뵌 선생님은 그리도 소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거리에서 공중전화를 건 우리에게 물으셨다. “너희들 있는 데가 어디냐?”고. 그리곤 선생님께서 계신 곳과 우리가 있는 거리의 중간쯤에 장소를 정해 놓고, 지금부터 움직여서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하셨다. 얼마 후 우리는 그 장소에서 오늘 사진에서 뵌 것과 마찬가지 베레모를 쓰신 선생님을 될 수 있었고 그날 처음 만났지만 아주 친숙한 것처럼 소탈하신 성격의 선생님과 음식도 나누고, 술도 마셨다. 그때 인상으로 선생님은 술을 많이 드시지는 않았지만 퍽 즐기시는 것 같았다.술이 몇 순배 돌았을 때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제주도 사람들이 내가 「비바리」를 쓴 때문에 혼을 내려고 한다면서?” 사실 나도 선생님의 「비바리」의 내용에 대해서는 불만이 있었으나 그런 내색을 바로 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평안도 출신의 선생님이 한차례와 보고 쓰신 작품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덮어두고 있었지만, 선생님은 두 번째도 처음과 꼭 같은 방법으로 만났는데, 그때도 그 말씀을 하셨다. 나는 선생님께서 그 작품을 쓰시고 나서 제주도 사람들에게 미안한 것이라고 속으로 치부했다. 그런 때문인지는 모르나 선생님은 그 후로 한번도 제주엘 오시지 않았다. 대학의 제자고 원정이 선생님의 염결성에 대해 증언하거니와, 선생님의 그런 점에서도 성격을 선생님은 그런 성격을 느끼게 한다. 어느 신문이 선생님의 인품에 대해 “정결한 문장… 꼿꼿한 인품”을 제목으로 달고 있는데, 사실 그는 술자리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으셨다. 우리가 마지막 만나던 날은 아마 정초 무렵이었는지 그날 선생님은 검은 두루마기에 베레 모. 차림이셨다. 늦도록 마시고 우리와 헤어져 가실 때 가도로 위를 건너 가실 때 나부끼던 두루마기 자락과 고름은 이제도 나의 망막에 남아 있는 매우 아름다운 영상이다. 그리고 그 후 이 몽매한 제자는 다시 선생님을 찾아 뵙지 못하였다. 그런데 오늘 부음을 접하다니…. 다만 엎드려 명복을 빌 따름이다.


각주

  1. 서덕순, 황순원 관련 인터뷰, 2020.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