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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동요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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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동요 특징===
 
===초기 동요 특징===
1931년 3월 19일부터 같은 해 9월 13일까지 집중적으로 발표된 이 동요 시편들은 단지 동요 애호가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열기나 전문성이 만만치 않다. 작품의 수준적 편차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 주제의식을 갖춘 작품들은 지금 읽어도 성과가 높다. 순진무구한 소년들의 작품이기 이전에 식민지적 현실 인식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미 완숙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인간의 가치관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동요의 주제와 그 후 씌어진 시의 주제가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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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3월 19일부터 같은 해 9월 13일까지 집중적으로 발표된 이 동요 시편들은 단지 동요 애호가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열기나 전문성이 만만치 않다. 작품의 수준적 편차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 주제의식을 갖춘 작품들은 지금 읽어도 성과가 높다. 순진무구한 소년들의 작품이기 이전에 식민지적 현실 인식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미 완숙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인간의 가치관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동요에서 나타나는 주제로는 가족의 부재와 그리움, 유랑 아동의 처지, 가난과 노동의 고통, 소년운동의 미래 등이 있다. 해체된 가족이 있고 그것은 식민지에 만연한 가난과 유랑의 삶으로 이어진다. 또 그 고통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소년으로서의 역사적 역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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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동요의 주제와 그 후 씌어진 시의 주제가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황순원의 동요가 보여주는 이러한 주제의식은 소년의 치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정확한 현실 파악 능력을 보여준다. 이 현실 파악 능력이야말로 그가 그의 초기 문학작품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 현실 참여 의식의 밑받침이된다.
  
 
==단오 명절==
 
==단오 명절==
 
손곱아 기다리는/단오날 오면/동리사람 새옷을/떨쳐 입고서/뒷동산에 올나가/근네를 뛰며/깃붐으로 이날을/마지하지만/쓸쓸한 우리 집안/헌옷 입고서/어제나 달음업시/일만 하지요//차라리 이런 명절/오지 않으면/앞흔 마음 얼마큼/나엇겟서도/슯흠 실은 명절은/쉬지도 안코/동업는 내집에도/차저울 때면/나는나는 밧헤서/김을 매면서/훨-훨 올나가는 근네를 보죠
 
손곱아 기다리는/단오날 오면/동리사람 새옷을/떨쳐 입고서/뒷동산에 올나가/근네를 뛰며/깃붐으로 이날을/마지하지만/쓸쓸한 우리 집안/헌옷 입고서/어제나 달음업시/일만 하지요//차라리 이런 명절/오지 않으면/앞흔 마음 얼마큼/나엇겟서도/슯흠 실은 명절은/쉬지도 안코/동업는 내집에도/차저울 때면/나는나는 밧헤서/김을 매면서/훨-훨 올나가는 근네를 보죠

2020년 6월 20일 (토) 19:41 판

동요

뒤늦게 발굴된 작품

경희대 김종회 교수는 2010년 9월 황순원 작가 10주기 추도식에서 초기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을 발굴했다. 새로 공개된 작품들은 등단 직후인 1930년대 전반의 초기 작품이 대부분이어서 작가의 문학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으며 6.25전쟁 이후 작품도 일부 포함돼 있다.

김종회 교수는 "습작기의 초기 작품들은 서정적 감성과 따뜻한 인간애를 잘 보여준다. 서정성과 사실성, 낭만주의와 현실주의를 모두 포괄하는 작가의 문학세계가 어떻게 발아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요소들이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김종회 교수는 경기 앙평군 서종면 황순원문학촌 문학관 내에 들어설 황순원 문학연구센터의 자료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들 작품을 발굴했다.

초기 동요

초기 동요 의의

황순원이 『동광』(1931.7)에 「나의 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인의 행보를 걷게 되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숭실중학교 재학 시절 『매일신보』를 중심으로 한 매체에 동요를 집중적으로 발표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는 당시의 동요 창작 청년들에게 전문적인 창작자로 이미 충분히 인정되고 있는 상태였다. 애독자 층도 있어서, 황순원이라는 필명[1]으로 발표된 동요가 그 자신에 의해 제목만 바뀌어 재발표된 것에 대해 표절 운운하는 사태도 있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황순원의 동요 창작은 단순한 취미 생활을 이미 넘어서 있는 것이었다. 그는 애독자들에 의해 보호될 정도로 전문적인 동요 창작자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 동요들은 훗날 ‘일정한 문학적 성취기준’을 강조했던 작가에 의해 버려진 작품이다. 그는 이런 저런 글에서 창작자 자신에 의해 폐기된 작품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지 말 것을 요청한 바 있다. 1984년 문학전집 출간 시의 선정 기준을 황순원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판을 달리할 적마다 작품을 손봐 오는 편이지만, 해방 전 신문잡지에 발표된 많은 시의 거의 다를 이번 전집에서도 빼버렸고, 이미 출간된 시집 『방가』에서도 27편 중 12편이나 빼버렸다. 무엇보다도 쓴 사람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읽힌다는 건 용납될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빼버리는 데 조그만치도 미련은 없었다. 이렇게 내가 버린 작품들을 이후에 어느 호사가가 있어 발굴이라는 명목으로든 뭐로든 끄집어내지 말기를 바란다.[2]

그러나 황순원의 문학적 생애 전체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1931년에 발표된 그의 동요가 반드시 탐구되어야 한다.[3] 더구나 황순원은 활자화된 작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작가가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작품으로 하여금 독립된 생명을 스스로 지니게 하기 위해서요, 작품에 대한 독자의 자유스러운 감상을 작가로서 방해하지 말자는 생각”[2]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초기 동요 특징

1931년 3월 19일부터 같은 해 9월 13일까지 집중적으로 발표된 이 동요 시편들은 단지 동요 애호가의 그것이라고 보기에는 그 열기나 전문성이 만만치 않다. 작품의 수준적 편차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시대적 주제의식을 갖춘 작품들은 지금 읽어도 성과가 높다. 순진무구한 소년들의 작품이기 이전에 식민지적 현실 인식 능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이미 완숙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는 인간의 가치관을 충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동요에서 나타나는 주제로는 가족의 부재와 그리움, 유랑 아동의 처지, 가난과 노동의 고통, 소년운동의 미래 등이 있다. 해체된 가족이 있고 그것은 식민지에 만연한 가난과 유랑의 삶으로 이어진다. 또 그 고통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소년으로서의 역사적 역할이 있다. 이러한 동요의 주제와 그 후 씌어진 시의 주제가 일관된 흐름을 보여준다. 특히 황순원의 동요가 보여주는 이러한 주제의식은 소년의 치기라고 치부하기에는 상당히 정확한 현실 파악 능력을 보여준다. 이 현실 파악 능력이야말로 그가 그의 초기 문학작품을 통해 실현하고 있는 현실 참여 의식의 밑받침이된다.

단오 명절

손곱아 기다리는/단오날 오면/동리사람 새옷을/떨쳐 입고서/뒷동산에 올나가/근네를 뛰며/깃붐으로 이날을/마지하지만/쓸쓸한 우리 집안/헌옷 입고서/어제나 달음업시/일만 하지요//차라리 이런 명절/오지 않으면/앞흔 마음 얼마큼/나엇겟서도/슯흠 실은 명절은/쉬지도 안코/동업는 내집에도/차저울 때면/나는나는 밧헤서/김을 매면서/훨-훨 올나가는 근네를 보죠
  1. 황순원이라는 이름 이외에 ‘황광파’, ‘광파생’ 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고 있음도 확인된다.
  2. 2.0 2.1 황순원, 「말과 삶과 자유」, 문학과지성사
  3. 박수연, 모던과 향토의 공동체, 한국비평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