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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 기자들이 뽑은 2001년 최고의 선행 연예인 | ||
+ | *2002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PIONEER상 | ||
+ | *1997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올해의 발라드상 | ||
+ | *1997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베스트비디오상 | ||
+ | *1993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 ||
+ | *1993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본상 | ||
+ | *1992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본상 | ||
+ | *1992 서울가요대상 | ||
+ | *1991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신인가수상 | ||
===종교=== | ===종교=== |
2020년 6월 24일 (수) 22:01 판
목차
개요
출생
1965.12.13
직업
가수
소속
드림팩토리클럽 (1989 ~ 2014) 오드뮤직 (2014 ~ 2015) 드림팩토리클럽 (2015~)
별명
어린왕자, 공연의 신, 공장장, 새벽고딩, 이철민 아쟐, 라이브의 황제
경력
- ~2005.12 드림팩토리 대표
- 2003.03~2012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명예홍보대사
수상
- 2011 MBC 방송연예대상 쇼버라이어티부문 특별상
- 2011 제1회 한국음악저작권대상 공연문화상
- 2011 제3회 멜론 뮤직 어워드 공연문화상
- 2002 기자들이 뽑은 2001년 최고의 선행 연예인
- 2002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PIONEER상
- 1997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올해의 발라드상
- 1997 M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베스트비디오상
- 1993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 1993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본상
- 1992 대한민국영상음반대상 골든디스크상 본상
- 1992 서울가요대상
- 1991 대한민국 영상음반대상 신인가수상
종교
무종교
수상
학력
데뷔
1989년 1집 B.C 603
공연의 神
데뷔 때부터 좀 뜸했던 방송 출연[* 초창기 시절의 TV 출연 영상을 보면 시선 처리를 엄청 못 한다. 본인 스스로도 TV에서 라이브는 공연시보다 엄청 못 한다고 스스로 말하고 다닐 정도다. 다만 요즘은 TV 출연을 안 하면 영업이 불가능한 시대라서 이전보다 TV에 자주 나오기는 한다.]은, 본격적으로 발라드가 아닌 록 등의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게 된 5집 이후에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와 함께 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전성기 또한 지나가버렸고, 결국 이승환은 대중 전반에 걸쳐 사랑받기보다는 매니악한 팬덤과 주로 소통하는 유형의 가수가 되었다.
라이브 밴드 출신임과 더불어, 오디오덕후라는 점이 영향을 끼쳤는지 이승환의 라이브 무대의 퍼포먼스와 음향은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라디오스타에선 아예 "방송국 음향스텝을 믿지 못해서 방송국에선 라이브를 안 한다." 라고 하기도 했다. 항상 음향 엔지니어를 데리고 다니는데, 방송국에서도 그러면 방송국 스텝들이 싫어해서 그냥 방송국에선 립싱크를 한다고 한다.] 따라서 이승환의 콘서트는 국내 대중음악계에서는 선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여러가지 새로운 기술적인 시도와 더불어 절대적인 횟수, 그리고 그 수준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국내 최초로 전국 공연 투어에 이름을 붙여 브랜드화하였다. 99년 무적투어[* 97~99년 사이의 투어를 3CD 형태로 99년 무적전설이란 타이틀로 발매했다. 이 앨범은 패키지 디자인부터 시작해서 여러가지로 극찬을 받은 앨범이다. 이승환 초심자라면 구해서 꼭 들어보자.], 01-02년 SSEN CONCERT, 05년 이승환의 난 '亂李'투어 등. 최초의 용산 전쟁기념관에서의 대중음악 공연[* 이 실황은 끝장 라이브로 DVD 발매.], 최초의 ABR(움직임 제어가 가능한 초대형 풍선예술)의 공연도입, 국내 최초의 젠하이저 후원가수, 게스트도 없이 9시간 30분의 공연시간 등등의 많은 공연관련 기록을 가지고 있다.[* 국내 단독공연 시간기록 1~7위 모두 이승환이다. 03년 '끝장' 공연에서 5시간 33분 기록을 세웠고, 12년 '한번더 빠데이'에서 5시간 40분으로 경신, 15년 '빠데이 26년'에서 6시간 21분으로 경신, 16년 '빠데이 7' 에선 무려 8시간 27분으로 경신했다. 18년 '빠데이 X2 너만 오면 돼'는 8일은 6시간 2분, 9일에는 6시간 15분 공연했다. 마지막으로 2019년 6월 16일 '라스트 빠데이:괴물'에서 9시간 30분으로 이전 기록을 경신했으며, 이는 최장 공연기록이다.] 공연 내용에서는 갖가지 이벤트가 풍성하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발라드 레퍼토리를 주로 하는 대형/연말 공연과, 록 넘버가 주가 되고 주로 스탠딩으로 치뤄지는 중소형 공연이 나뉘어 지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입문하는 사람은 연말 공연 쪽을 도전해보는 것이 좋다.
이리저리 공연 중간에 이벤트도 많은 편이며,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몇 공연 외주 업체에 십여년 이상 전담하다시피 외주를 주어 일관성있는 수준을 뽑아내고 있다. 과거에는 더 뛰어다니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달고 점프 연습을 하기도 하였으며, 공연 도중에 맹장염이 나면 어쩌나 싶어서 병원에 가서 미리 짤라버리면 안 되나요 하고 상담했다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고 한다.
공연 기획부터 주최, 연출까지 직접 하다 보니 공연 도중에 자꾸 이런저런 손동작으로 엔지니어들과 대화하며 이런저런 것들을 조정하기도 한다. 공연장이나 라이브 영상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인터뷰에서 노래 부르는 것보다 "아... 왜 여기서 조명이랑 노래랑 타이밍이 안 맞지?" 이런 생각에 더 집중하기도 한다고 하기도 했다.
평소 성격은 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공연 전후로 스탭들에게는 까칠 그 자체라고 알려져 있다.
탁재훈, 신정환의 컨츄리꼬꼬와 무대도용에 대한 소송이 2008년 시작되어 2009년 여름에야 끝났다. 이승환은 지난 2007년 12월 22일부터 24일 3일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콘서트 '슈퍼히어로'를 열었고 컨츄리꼬꼬는 12월 25일 같은 장소에서 콘서트 '불후의 명곡'을 펼쳤다. 문제는 컨츄리꼬꼬가 이승환이 사용했던 무대 설비와 특수효과 등을 철거 없이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승환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상의도 없이 자신의 무대를 도용한 컨츄리꼬꼬의 공연기획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양측의 법정공방이 시작됐다.
정확히는 컨츄리꼬꼬의 공연기획사와 이승환의 공연기획사 간의 문제였지만, 이승환이 워낙에 공연에 목숨을 거는 스타일이라 본인이 직접 대응을 하게 되어 꽤 일이 커졌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 제12부(재판장 양재영 판사)는 2009년 2월 6일, "이승환 측의 저작권 침해나 소유권 침해 주장은 명시적 승낙은 없지만, 제반사정에 의해 묵시적으로 승낙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이를 기각하였으나, 컨츄리꼬꼬 측이 이승환의 명예를 훼손한 점은 인정하여 금 1,000만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고 판결하였다.
훗날 탁재훈은 오빠밴드 녹화 관계로 이 펜싱 경기장을 다시 찾게 되는데 여기 좋지 않은 추억이 있다면서 몸서리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이 문제는 "컨츄리꼬꼬 공연기획사"의 문제이지 탁재훈과 신정환이 일으킨 문제는 아니라서 이승환과의 사이는 딱히 나쁘지 않다.
콘서트 때 모니터링 이어폰으로 B&O사의 오픈형 이어폰 A8을 주로 사용했었다. 보통 모니터링 이어폰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커널형을 사용하는것에 비추어보면 의외스러운 일이기에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곤 했다. 이승환이 홈페이지에서 밝힌 바로는 첫째로 커널형은 외부의 소리를 차단해서 콘서트 중 관객들의 반응을 들을 수 없고, 둘째로는 어떤 이어폰을 사용해도 귀에서 빠져나가버리기 때문에 귀 걸개가 있는 A8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격렬하게 움직이다 두 세 개씩 고장내기도 하고, 그 중에 알루미늄으로 된 이어폰에 귀가 긁혀 그 다친 곳을 만지는 버릇이 생기기도 했다고 한다.
매번 공연 때마다 기본 2, 3개는 사용후 맛이 가버려서 쓸 수 없어 버린다고 말한 적이 있어 식호 덕후들을 열폭하게 만들었다. 정말 여담이지만, 시코 에서는 "이승환 왜 A8같은 거 쓰나요? 별로네~" 하고 이승환과 A8을 동시에 비난했다. 게다가 A8은 일반적으로 저음부가 약하다는 게 중론인데 이승환이 A8을 쓰는 이유중에 "저음이 좋다"고 하는 부분이 있어서 비난하는 사람들은 '가수라면서 귀는 폼으로 달았네'라며 까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니들이 음악쪽으로 이승환보다 잘났냐'며 키배를 떴다. 하지만 지금은 DF가 쓰여진 노란색 커스텀이어폰을 쓰는 듯하다. 2015년 9월 19일 빠데이공연 때 A8을 쓰지 않고 커스텀 이어폰으로보이는 노란 이어폰을 사용했다. 현재는 Westone의 엔도서로 선정되어 동사의 um pro 50 에 이어 ES 60 이어폰을 사용 중이다. A8 이전에는 인이어를 절대 하지 않고(상기된 관객 반응 캐치의 이유) 거의 메인 스피커 만큼의 물량을 모니터에 투입했었다. 덕분에 드럼은 아크릴 벽에 갇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모니터 외에 공연시 주로 선호하는 스피커는 클레어브라더스, Adamson, 메이어사운드 등이며, 마이크는 SHURE 이승환 자체 커스터마이징 버전(젠하이저는 기간 만료)이고 마이크스탠드는 특별 주문한 빙빙 돌리기 좋은 물건이다.
이승환의 음악
스스로 음악의 출발점을 들국화로 꼽고 있으며,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시절 '아카시아', '셀프서비스[SS]' 등의 헤비메탈 밴드를 결성하는 등 이승환 음악의 시작점은 록 음악이다. 이후에도 오태호와 함께 파고다 극장 언더그라운드의 여러밴드를 거쳤다.[* 이 시절 오태호는 기타리스트다.]
본인의 발언에 따르면 이 시기 가죽 자켓에 쇠사슬을 매달고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고 한다.[* 이 시절 파고다 극장 공연에서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무대에 멋지게 등장했는데 제일 앞자리 여자 관객이 어머 여기는 중학생이 보컬인가 봐!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 좌절했다고 한다.][* 또한 이 시절에 가수를 꿈꾸는 아들이 재능은 있는건지 궁금한 아버지가 평소 알고 지내던 작곡가 길옥윤에게 평을 듣고자 밴드 공연에 온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당시 욕 들어간 외국 메탈곡을 한국화해야 한다며 걸쭉한 욕을 쩌렁쩌렁한 샤우팅으로 내뱉는 바람에 어르신들이 당황했다고 한다. 어찌 됐건 이 공연을 계기로 첫 음반을 위한 부친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를 테면 1집의 데뷔곡 '텅 빈 마음'[* 다만 본인은 이 앨범, 특히 이 당시 본인의 보컬톤을 상당히 부끄러워 하는 듯하다. 스스로 바람난 중딩이라면서 디스한다.]의 경우에도 분명 음악 장르적 분법으로는 발라드에 속하지만, 곡 진행과 사운드의 활용에 있어 록적인 요소를 가미했으며, 동 앨범의 다른 트랙들, 특히 '좋은 날이'나 '그냥 그런 이야기'[* 그래서 라이브에서는 아예 록으로 싹 뒤엎어서 부른다.]는 아예 록적인 접근이 더 두드러진다. 그리고 데뷔 이후 계속된 음악 작업에서는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런 록적인 본색은 본인 스스로도 이오공감의 앨범에서 많이 드러냈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고[* 그래서 이오공감의 앨범은 오태호의 발라드 곡 때문에 많이 팔렸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3집부터는 1, 2집에 비하면 록적인 접근이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당시의 이승환 본인에게 있었던 일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모양이다. 3집부터 내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그래서 3집의 타이틀이 My Story다.]
다만 메이저 데뷔가 발라드로부터 시작했으며, 이때 당시 큰 활약을 했던 오태호와의 콤비로 엄청난 대중성을 발휘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 후 앨범에서도 록적인 요소가 가미된 곡이나 록 음악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앨범의 타이틀곡은 발라드였으므로, 추구하는 장르가 어떻든지 대중은 이승환을 발라드 가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이승환 본인의 말로는 록 보컬로는 자신의 음색에 강한 한계를 느껴서 결국 발라드와 록 사이의 미묘한 줄타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로는 같은 무명 시절에 파고다 극장 무대에 선 김종서의 공연을 보고 쟤 때문에 난 록은 안 되겠다라고 느껴서 방향을 틀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이문세의 소녀가 본인을 발라드로 전향하게 만든 곡이라고 했다.
그래서 팬들도 발라드 가수 이승환을 좋아하는 팬들과, 록 음악을 하는 이승환까지 좋아하는 팬들로 나뉘게 되는 경향이 있는데, 난 이승환 옛날엔 좋았는데 요즘은 별로야라면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만 노래 중간중간에 나오는 메탈릭한 샤우트 보컬은 곡의 전개에 큰 의미가 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4집의 '너의 나라'와 6집의 '나의 영웅'을 들어보면 된다. 골수팬들이야 좋다고는 하지만 발라드 가수로만 아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4집에서 다수 수록된 록적인 트랙을 듣고 변절자라면서 돌아선 팬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와는 반대로 1, 2집 시절의 이승환을 낯설어하는 사람들도 예상 외로 많은 편이다.] 이에 따라 4집 Human에서는 'Fire'와 'Water', 6집에서는 '정상'과 '비정상', 7집에서는 'Sunny Side-Up'과 'Over Easy' 등으로 앨범을 이분하여 앞부분에는 발라드를 위시한 팝 적인 분위기의 곡들, 뒷부분에는 록 위주의 곡들을 수록하여 양쪽 모두의 팬들을 끌어들이려 하였지만 음악적 퀄리티와는 무관하게 그다지 성공한 시도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발라드 팬들은 뒷부분을 싫어하고 록음악 팬들은 앞부분을 싫어하니 결국 불만은 그대로. 게다가 음반 자체로서의 연결성과 완결성이 떨어진다는 비판까지 나왔었다. 그래서 Serious Day라는 록 음악에 집중한 음반을, Monglong이라는 발라드에 집중한 비정규 음반을 내기도 했다. 정규 9집과 10집은 락과 발라드를 잘 섞어서 한 장의 음반으로 발매했다. 또 발라드로만 구성되어있는 His Ballad I, His Ballad II 앨범을 내기도 했다. 이 앨범들엔 주로 예전에 나온 노래를 다시 녹음하거나 새 곡을 넣었다.
사실 '천 일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김동률이 작사하고 작곡까지 한 노래로 알고 있는데 이 곡은 이승환이 가사를 쓰고 김동률이 멜로디를 쓴 곡이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9년 선후배 사이다. 김동률은 본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당시 학교 가요제의 손님으로서 이승환을 본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천 일 동안은 김동률이 이승환 집에 놀러와서 피아노로 멜로디를 연주해줬을 때 이승환이 그 자리에서 '다만이랑 함께 이 곡을 수록하겠다'고 바로 알려줬다고 한다.] 등의 초히트 발라드곡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승환의 록 음악은 어느 수준 이상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사운드 측면에서는. 다만 전통적인 록/메탈씬에서는 발라드 가수 출신인 이승환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으며, 이승환 스스로도 전통적인 문법에 따른 록 음악보다는 가스펠을 도입하고 Choir를 강조하는등 변형된 록 음악을 추구하고 있기에 실제보다는 낮게 평가받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싱어송라이터다. 데뷔 앨범만 하더라도 수록곡 10곡 중 7곡을 자작곡으로 넣을 정도며, 매 앨범마다 꾸준히 자작곡을 채우는 사람이다.[* 다만 5집 이후부터 작곡 부분은 공동으로 하는 비중이 많이 늘고 있다.] 문제는 유명한 곡들 대다수가 다른 뮤지션 혹은 작곡가들의 곡이거나 아님 공동 작사/작곡이라는 것. 특히 공동 작사/작곡인 경우에는 엄밀히 말해서 일단 이승환이 먼저 곡을 쓰고 그것을 공동 작사/작곡으로 명시되는 뮤지션과 공동으로 수정, 보완하는 식으로 완성하는데 문제는 이게 그 공동 작곡가의 곡이라고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본인도 내가 곡을 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유희열의 인터뷰에 의하면 전체적인 아이디어의 대다수는 해당 뮤지션(이승환, 윤종신)이 하고 본인은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한편, 가수 유재하 다음으로 가수 본인이 직접 자신의 음반을 제작한 가수이다. 1집을 제작한 '우리기획'은 이승환이 아버지에게 돈을 빌려서 차린 회사다. 이후 1997년, 우리기획[* 불후의 명곡으로 알려진 더 클래식의 마법의 성, 그게 이 양반이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름을 감춘 이유는 그 당시 '가수가 왜 제작을 하느냐'는 주변의 눈총(그 시절에는 가수가 제작은 하는 것에 대해서 시선이 고운 편이 아니었다고 한다.) 때문에 숨긴 것이라고 밝혔다. 소속 가수로 따지면 더 클래식이 바로 우리기획 소속 가수 1호.]을 확장시켜 '드림팩토리'라는 종합 연예기획사를 만들어 휘하에 공연 스탭 양성 학교, 음반 녹음 스튜디오,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부, 캐릭터 디자인 사업 등을 하였으나 국내 음반 시장의 전체적인 부진과 더불어 그리 전문적이지 못했던 경영 등의 이유로 시원하게 말아먹고 대부분 철수 혹은 분리하였고, 직접 매니지먼트하던 박신혜, 정성미, 김시후 등은 모두 다른 기획사로 이적하게 됐다.
이후로 드림팩토리에 본인만 남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인디 뮤지션들에 대한 제작과 지원의 끈은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듯 했으나, 드림팩토리클럽은 잠정 휴업에 [[1]]. 2014년부터 2015년까지 윤상과 같은 소속사였고, 지금은 오드뮤직에서 나와 1인 기획사 형태로 드림팩토리를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