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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월탄(月灘), 이 밖에도 죵화·춘풍(春風)·조수루주인(棗樹樓主人, 釣水樓主人)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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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밀실로 돌아가다」, 「만가」, 「오뇌의 청춘」 등을 저술한 시인.소설가,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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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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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출생, 1981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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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는 김광섭,  이헌구 등의 이른바 민족계열 문인들과 함께 ‘전조선문필가협회’(1946.3.13)를 설립하여 당시의 소위 '좌익 문학단체'와 투쟁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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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서 1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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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 사건당시 국가이데올로기의 공식적 천명을 담당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피난 대열에 가담하지 못한 채 서울에 잔류하게 되었는데, 그 때 박종화는 은신한 채 북한군에게 쫓겼다.<ref>「해방 이후 월남 작가의 존재 방식 ― 1945~1953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소영,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pp.383-41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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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
  
박종화는 김광섭,  이헌구 등의 이른바 민족계열 문인들과 함께 ‘전조선문필가협회’(1946.3.13)35)를 설립하여 당시의 소위 '좌익 문학단체'와 투쟁하고자 했다. 여순 사건당시 국가이데올로기의 공식적 천명을 담당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피난 대열에 가담하지 못한 채 서울에 잔류하게 되었는데, 그 때 박종화는 은신한 채 북한군에게 쫓겼다.<ref>「해방 이후 월남 작가의 존재 방식 ― 1945~1953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소영,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pp.383-419</ref>
 
  
 
==황순원과의 관계==
 
==황순원과의 관계==
황순원이 대한민국예술원에 가입할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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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이 대한민국예술원에 가입할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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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2020년 6월 24일 (수) 23:01 기준 최신판


인물

  •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호는 월탄(月灘), 이 밖에도 죵화·춘풍(春風)·조수루주인(棗樹樓主人, 釣水樓主人)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 일제강점기 「밀실로 돌아가다」, 「만가」, 「오뇌의 청춘」 등을 저술한 시인.소설가, 비평가.

생애

  • 1901년 출생, 1981년 사망.
  • 박종화는 김광섭, 이헌구 등의 이른바 민족계열 문인들과 함께 ‘전조선문필가협회’(1946.3.13)를 설립하여 당시의 소위 '좌익 문학단체'와 투쟁하고자 했다.
  •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자로서 1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
  • 여순 사건당시 국가이데올로기의 공식적 천명을 담당했다. 이후 한국전쟁 당시 피난 대열에 가담하지 못한 채 서울에 잔류하게 되었는데, 그 때 박종화는 은신한 채 북한군에게 쫓겼다.[1]
  • 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


황순원과의 관계

  • 황순원이 대한민국예술원에 가입할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었다.

각주

  1. 「해방 이후 월남 작가의 존재 방식 ― 1945~1953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소영,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pp.383-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