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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해방을 작가의 고향인 평안도 평양 근처의 빙장리에서 맞이하였고, 그곳에서 1946년 5월 월남하기 이전까지 그 곳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그가 월남한 이유는 그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을 당시 지주의 아들로 비교적 굴곡 없는 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들이 사회주의적 세력과 결탁하여 토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대대적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했고, 이에 따라 신분상의 위협을 느낀 황순원에게는 월남밖에 선택지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화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혼란에 대한 반발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8·15해방 이후 작가가 가장 먼저 창작을 감행한 「술」이라는 작품이며, 이 반발심이 황순원의 월남으로 이어지는 주요 동력이라 볼 수 있다.
 
황순원은 해방을 작가의 고향인 평안도 평양 근처의 빙장리에서 맞이하였고, 그곳에서 1946년 5월 월남하기 이전까지 그 곳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그가 월남한 이유는 그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을 당시 지주의 아들로 비교적 굴곡 없는 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들이 사회주의적 세력과 결탁하여 토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대대적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했고, 이에 따라 신분상의 위협을 느낀 황순원에게는 월남밖에 선택지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화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혼란에 대한 반발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8·15해방 이후 작가가 가장 먼저 창작을 감행한 「술」이라는 작품이며, 이 반발심이 황순원의 월남으로 이어지는 주요 동력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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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념적인 부분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황순원의 경향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을 드러냈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품인 「아버지」는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아버지의 3·1운동 당시에 투옥되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해방 직후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던 신탁 통치 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문제에 대해 수필적 필치로 소설화한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작가 황순원은 자신의 아버지 황찬영씨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의 재산을 모두 그대로 두고 월남하여 작가의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찬탁과 반탁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부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외의 작품에서도 황순원은 해방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성찰을 보이고 있었고, 이념의 문제를 갈등의 원인으로 진단하고 이에 대한 소설적 내면화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이념적인 부분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황순원의 경향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을 드러냈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품인 「아버지」는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아버지의 3·1운동 당시에 투옥되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해방 직후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던 신탁 통치 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문제에 대해 수필적 필치로 소설화한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작가 황순원은 자신의 아버지 황찬영씨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의 재산을 모두 그대로 두고 월남하여 작가의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찬탁과 반탁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부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외의 작품에서도 황순원은 해방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성찰을 보이고 있었고, 이념의 문제를 갈등의 원인으로 진단하고 이에 대한 소설적 내면화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념적인 대립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황순원의 경향은 월남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1949년 11월경 황순원은 좌익세력 자수전향이라는 미명하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에도 사상적 억압과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어느 정도 소설 언어의 굴절 현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ref>「황순원 소설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지형도」, 한국근대문학연구, 2015, Issue 31, p.133: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월남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래 사상적 억압과 자기 검열을 겪어야 했던 황순원의 경우 어느 정도 소설언어의 굴절 현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에서는 친농민적 성향의 지주 출신이었고, 남한에서는 사상적 억압을 받던 국민보도연맹원 출신이었던 황순원이 선택할 수 있었던 소설 언어의 스펙트럼이 제한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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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보도02.jpg]]<ref>[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901 국민보도연맹 사진]</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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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념적인 대립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황순원의 경향은 월남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1949년 11월경 황순원은 좌익세력 자수전향이라는 미명하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에도 사상적 억압과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어느 정도 소설 언어의 굴절 현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ref>「황순원 소설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지형도」, 한국근대문학연구, 2015, Issue 31, p.133: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월남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래 사상적 억압과 자기 검열을 겪어야 했던 황순원의 경우 어느 정도 소설언어의 굴절 현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에서는 친농민적 성향의 지주 출신이었고, 남한에서는 사상적 억압을 받던 국민보도연맹원 출신이었던 황순원이 선택할 수 있었던 소설 언어의 스펙트럼이 제한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ref>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로, 6·25전쟁 당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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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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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으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이후 황순원은 1961년에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는데,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다. 문인을 포함한 수많은 예술인들이 황순원과 함께 예술원보 간행에 기여했다.
  
 
==경희대학교(1957~1980)==
 
==경희대학교(1957~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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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 황순원의 교사 생활을 통해 그의 원칙성과 소신을 지키는 면모가 드러나는데, 이는 그의 문학세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 황순원의 교사 생활을 통해 그의 원칙성과 소신을 지키는 면모가 드러나는데, 이는 그의 문학세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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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지막 잔' 일부
 
단편 '마지막 잔'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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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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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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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해방 이후 월남 작가의 존재 방식 ― 1945~1953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소영,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pp.383-419</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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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따라지: 해방기에 만들어진, 월남민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단어- "이북에서 쫓겨 넘어온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말로 ‘38 따라지’라고 했어요. 38선을 넘어왔다는 뜻이 아니라 3하고 8이면 노름할 때 한 끗 ‘따라지’가 아닙니까.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ref>「해방 이후 월남 작가의 존재 방식 ― 1945~1953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소영,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p.384</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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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남조선 이북인: 당시 월남민의 공식 명칭. 월남민이 남조선 원주민과 구분되는 타자적 존재로 인식됨을 보여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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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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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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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동료 문인, 제자와의 교류
  
 
==참조==
 
==참조==

2020년 6월 17일 (수) 12:33 기준 최신판

개요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나 1934년 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한국에 있다가 1934년에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후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일본에 머무르다 귀국하여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으며,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경 전국소설가협회에서 가입을 권유하나 문학단체가 생리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더구나 이름만 걸어 놓는 고문 직은 의미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직접적인 관계보다는 간접적인 관계를 가진다.[1]이후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2]


위 황순원의 생애는 특히 초기에 한국-일본유학-귀국-월남의 과정을 거친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으로의 유학, 특히 향후 공산국가인 북한에서 남한으로 월남한 과거는 황순원의 정체성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황순원 삶의 궤적상 시간순서에 따라 황순원이 시기별 주변인물과의 만남을 조망하면 이로부터 황순원이란 인물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한국 거주(1915~1934)

부친 황찬영과 황순원, 황순원의 작품 「아버지」



황순원은 1915년 3월 26일 부친 황찬영(黃贊永), 모친 장찬붕(張贊朋) 사이에 출생하였다. 부친 황찬영(黃贊永)은 3.1운동 때 평양 숭덕학교 교사로 재직 중에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평양 시내에 배포한 일로 옥살이를 했다. 그가 다섯살이던 1919년 일로 부친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기미독립운동의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수감되자 홀로 남겨진 어머니가 밭을 일궈 어렵게 가정을 책임지게 된 유년시절의 기억은 황순원의 내면에 깊게 새겨져 그의 작품세계에 내재된 문제의식의 발단이 된다. 민족을 위해 싸우다 부재하게 된 아버지와 강인하고 자애로운 어머니는 평생에 걸쳐 그의 전(全)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중요한 이미지가 된다.

지난날 한때 일제 경찰이 뿌린 서슬을 피하여 평안남도 강동군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1년(당시 6세) 가족 전체가 평양으로 이사하고, 1923년(만 8세) 숭덕소학교에 입학한다. 유복한 환경에서 예체능 교육까지 따로 받으며 자라났다.


황순원 졸업사진.jpg


숭실중학에 재학 중이던 황순원은 16세의 나이에 시로 등단해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황순원을 지배하던 고민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 장래는 무엇이며 나의 나갈 길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는 아직 거칠지만 소년다운 직설적 문체로「나의 꿈」, 「강한 여성」등을 통해 시련의 시대를 극복해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특히「잡초」에서는 자신의 다짐을, 한 여름 풀밭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라나는 잡초에 비유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현실과의 대결의지로 가득 찼던 황순원은 1933년 평양 숭의여학교 문예반장이었던 양정길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그녀와 결혼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와 닮은, 강한 모성성을 지닌 양정길을 반려자로 맞이해 그의 작품세계에 강한 동지적 힘을 부여받았다.


양정길.jpg

일본 유학(1934~1939)

동경02.PNG


동경학생예술좌(東京學生藝術座)는 1934년 6월 24일에 동경 유학생들이 신극운동을 위하여 동경에서 창단한 학생 연극 단체로서 ‘건전한 연극발전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표로 하였다. 단원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니혼대학[日本大學]·호세대학[法政大學] 등에서 문학·연극·영화 등 예술을 전공하는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 그해 11월, 이 단체의 명의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하였다.

1934년 6월 동경 유학생을 중심으로 동경학생예술좌가 창립되었다. 이들은 '조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신극문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모토로 황순원을 비롯해 주영섭, 이진순, 이해랑, 허남실, 김영수, 김동원 등 일본대, 와세다대, 법정대 유학생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들은 학생이었지만 단순하게 아마추어 모임에 머문 것이 아니라 문예부, 연출부, 연기부, 서무부를 두어 기존 연극조직과 같이 실제적이고 학구하는 전문 극단을 지향하였다. 또한 이들은 일본 신극을 접한 경험을 토대로 우리나라 연극이 나아갈 방향을 깊이 있게 고민하며 실천에 옮겼다. '조선의 신극 수립은 창작극'에서 비롯한 그들의 연극 정신답게 유치진의 <소>, 주영섭의 <나무>를 선보였다. 이후 국내에서는 지주의 횡포를 참지 못해 불 지르는 장면이 계급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문제가 되어 유치진은 옥고를 치루게 되었다. 일제는 1938년 주영섭, 박동근 등을 좌익사상범으로 검거하고 이들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조선동경예술좌의 간부 박동근, 이서향, 주영섭 등이 극예술연구회의 후신인 극연좌의 헤게모니를 잡으려 시도하였고, 이 때문에 좌익운동을 꾀했다는 죄가 되었다. 그 후로 동경학생예술좌는 1940년 창립 6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된다.


표.PNG


동경학생예술좌 제 1회 공연 입장권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방가>(放歌·1934)와 <골동품>(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


  • 주영섭

주영섭.jpeg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그의 집은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리더십이 훌륭해서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밤 주막>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동경학생예술좌이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 주영섭의 <나루>와 <벌판> 등은 동경학생예술좌에서 공연되었다.

월남 후(1946~)

월남작가 황순원

보도01.PNG

황순원은 해방을 작가의 고향인 평안도 평양 근처의 빙장리에서 맞이하였고, 그곳에서 1946년 5월 월남하기 이전까지 그 곳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랬던 그가 월남한 이유는 그가 일제 식민지 시대에 태어났을 당시 지주의 아들로 비교적 굴곡 없는 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하고 그들이 사회주의적 세력과 결탁하여 토지 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대대적으로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했고, 이에 따라 신분상의 위협을 느낀 황순원에게는 월남밖에 선택지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북한의 사회주의화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혼란에 대한 반발심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 8·15해방 이후 작가가 가장 먼저 창작을 감행한 「술」이라는 작품이며, 이 반발심이 황순원의 월남으로 이어지는 주요 동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1946년 북한에서 토지개혁령이 내려지자 작가 황순원은 모친과 아내, 동생, 그리고 세 자녀를 데리고 5월에 월남하여 서울로 내려와 먼저 내려왔던 부친 및 장인과 합류하게 된다. 그 후 작가는 월남민의 고달픈 삶과 현실 모순, 그리고 비리로 얼룩진 사회상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여 「두꺼비」, 「담배 한 대 피울 동안」 등의 작품을 창작했다. 이 중 「두꺼비」라는 작품을 통해 황순원은 월남민이 된 자신의 모습을 전재민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민족 대다수에게 살길을 제시해 주지 못한 이념대립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위에 예시로 든 작품 외 많은 작품들에서 황순원은 이념적인 사상보다는 현실 민중들의 괴로움과 굶주림을 포착하고 이를 작품화하는데 주력했다.

이처럼 이념적인 부분에서 자유롭고자 했던 황순원의 경향은 정치적이고 이념적인 갈등을 드러냈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그의 작품인 「아버지」는 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아버지의 3·1운동 당시에 투옥되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해방 직후의 중요한 사회적 이슈였던 신탁 통치 안에 대한 찬성과 반대의 문제에 대해 수필적 필치로 소설화한 작품인데, 이 작품에서 작가 황순원은 자신의 아버지 황찬영씨의 모습을 서술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의 재산을 모두 그대로 두고 월남하여 작가의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잘 표현되어 있는데, 찬탁과 반탁이라는 사회적 이슈를 부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외의 작품에서도 황순원은 해방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성찰을 보이고 있었고, 이념의 문제를 갈등의 원인으로 진단하고 이에 대한 소설적 내면화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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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념적인 대립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했던 황순원의 경향은 월남 작가라는 정체성으로 인해 그 한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1949년 11월경 황순원은 좌익세력 자수전향이라는 미명하에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에도 사상적 억압과 자기 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하여 어느 정도 소설 언어의 굴절 현상을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4]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로, 6·25전쟁 당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황순원은 특히 월남했기에 가입을 피할 수 없었다. 황순원 외에도 양주동(국어학자), 정인택(문학가동맹), 김용환(화가), 신막(음악가동맹), 김기림(시인), 백철(문학평론가)과 같은 문학 관련인들도 가입했다.

대한민국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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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예술원은 예술의 향상 발전을 도모하고 예술가를 우대하기 위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이다.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보장하여 그 발전을 도모하고 과학자와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제정 공포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7월 17일 창설되었다. 황순원은 1957년 대한민국예술원에 입회했으며, 당시 대한민국예술원회장이 박종화였다. 이후 황순원은 1961년에 박태준 (음악, 음악 연세대 교수), 변기종 (연극·영화·무용, 연극 국립극장 연기부장), 이종우 (미술, 미술 홍익대 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했다. 이외에 대한민국예술원은 기본적으로 매년(항상 매년 나오진 못했다.) 간행물인 예술원보를 발행했는데, 여기에 황순원은 원고를 4번 투고했다. 문인을 포함한 수많은 예술인들이 황순원과 함께 예술원보 간행에 기여했다.

경희대학교(1957~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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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은 1957년부터 경희대학교에 부임하여 문학적인 분위기와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확보한 상태에서 더욱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그 해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으로 선임되었고, 스스로의 다산의 창작과 그 성취를 기반으로, 그것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얹어지는 가운데서 수많은 문인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던 시기가 이때로부터 열렸다. 경희대학교에서는 특별한 보직 없는 평교사로 23년 6개월을 봉직하고 또 말년까지 계속 명예교수로 있었다. 황순원의 교사 생활을 통해 그의 원칙성과 소신을 지키는 면모가 드러나는데, 이는 그의 문학세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 "소설가로 충분하다."

황순원은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 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세속에 대한 잡다한 관심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았던 황순원은 신문 연재소설 청탁을 거절했으며, 어떤 대담 요청도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체의 잡문도 쓰지 않았다. 이 시기 황순원은 단편집 『잃어버린 사람들』과 『너와 나만의 시간』, 『탈』, 장편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신들의 주사위』 등을 발표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 제자들에 대한 태도

황순원은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이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 제자들과의 교류


1. 작품을 통한 교류


1)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출간(1997.09.05.)

저자 : 황순원, 전상국, 김용성, 조해일, 조세희, 이유범, 고원정, 이연철, 유재주, 박덕규, 김형경, 이혜경, 서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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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황순원과 제자들인 경희대 국문과 출신 작가들이 네가지 테마별 작품을 엮은 소설집이다. 「소리 그림자」, 「잃어버린 사람들」 등 원로문인의 작품과 해설을 싣고 전상국, 조세희, 고원정, 박덕규, 김형경, 서하진 등 작가들의 작품 1편씩과 간략한 해설을 덧붙였다. 이를 통해 황순원이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한 권의 책을 낸다면, 과연 어떤 책이라야 어울릴 것인가? 우리들 만남의 중심에 선생이 계시고, 그리고 문학이 있으니, 양자를 모나지 않게 아우르면서, 우리에게도 남에게도 모두 도움이 될 그런 책이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선생과 우리가 스승과 제자 사이, 선배와 후배 사이라면, 특히 우리 다음의 세대와도 멋지게 연계될 책이 되는 게 좋지 않을까? - 「옛 사랑으로 돌아오라」 中


2) 「소년, 소녀를 만나다」 출간(2016.05.27.)

저자 : 황순원, 구병모, 손보미, 전상국, 서하진, 김형경, 이혜경, 노희준, 조수경, 박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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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은 1915년에 태어난 작가 황순원의 탄생 100주기였다. 이를 기념해 황순원 오마주 「소나기」 이어쓰기 사업이 열렸다. 양평에 위치한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에서 주최한 행사로, 작가 황순원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 작가 5인의 「소나기」 속편을 『대산문화』(대산문화재단)에 싣는 것으로 시작해, 황순원이 23년 6개월 동안 재직했던 경희대학교 출신 젊은 작가 4인도 「소나기」 속편을 소나기마을 소식지 『소나기마을』에 발표하였다. 60여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감동을 고스란히 잇는 아홉 편의 작품은 독자들을 「소나기」의 풋풋하고도 가슴 저리는 첫사랑, 그 후의 세계로 안내했다. 그리고 이 뜻깊은 결실을 모아 황순원문학촌 촌장이자 문학평론가 김종회의 책임편집으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황순원의 「소나기」 이어쓰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3)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출간(2018. 07. 13.)

저자 : 김용성, 김종회, 신봉승, 박이도, 안영, 김형경, 황동규, 정호승, 이혜경, 전상국 외 多

황순원 작가를 회고하고 추억하는 소나기마을 이야기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는 도서출판 작가에서 출간되었다. 총 7부로 나뉘어져 74편의 글이 수록되었다. 필자는 구효서, 김병익, 김원일, 오정희, 유종호, 윤대녕, 한수산 등 모두 우리 문단에 수려한 이름을 가진 문인들인데, 그중에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유명(幽明)을 달리한 분들도 있다. 각기의 글은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 숨은 일화와 또 가슴 속에 숨겼던 생각들을 담담하게 드러내고 있다.


2. 공간을 통한 교류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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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황순원 선생님의 삶과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양평군과 경희대학교가 힘을 모아 조성한 테마파크 공간.


건립 배경 : 황순원은 고향이 이북이지만 생애의 3분의2를 남한 땅에 살면서 많은 작품을 썼으며 한편으로는 23년 6개월 동안 경희대학교 국문학과에 봉직하면서 많은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을 길러내었다. 황순원이 2000년 9월 15일 타계하자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의 문학을 온 국민이 체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적합한 공간을 찾아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황순원의 대표작인 「소나기」에 착안하여 이와 관련된 공간을 만들고자 하였다.「소나기」 속의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 라는 문장에 근거하여 작품의 장소적 배경을 경기도 양평군 관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경희대학교는 양평군과 협의하여 2003년 6월 자매결연을 맺음으로써 '소나기마을' 건립의 기초를 마련했다.


  • 소나기마을 촌장 김용성 - 안영 - 김종회


황순원의 제자 김용성은 1961년 장편소설 「잃은 자와 찾은 자」가 『한국일보』 공모 당선으로 문단에 등단한 뒤, 황순원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1962년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로 편입하게 된다. 이후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여 정년퇴임 후 별세 전까지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 촌장으로 일하였다. 그 뒤를 안영 작가가 이어 받아 약 2년 정도 자리를 지켰다.(2011-2013 추정) 이후 현재까지 황순원의 제자인 김종회가 촌장을 맡고 있다. 이렇듯 김용성 - 안영 - 김종회로 이어지는 계보는 황순원과 그들 제자 및 동료 문인이 두터운 관계를 가졌음을 암시한다.


3.그의 든든한 동료문인들


그의 동료들로는 안영,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 원응서 등이 있다.

김광섭, 김진수, 조병화, 주요섭은 황순원과 함꼐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를 전임하였다.

황순원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1957년부터 1992년까지 무려 35년을 경희대학의 학생들을 가르쳐 왔다.

그의 영향 아래에서 많은 제자들이 실제로 경희의 문학 전통을 형성해 왔다.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교수로 활동하여 <별과 갗이 살다>, <카인의 후예>, <인간접목>, <나무들 비탈에 서다>, <일월>, <움직이는 성>, <신들의 주사위> 등의 장편소설들을 발표했다.



  • 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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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안영례이며 1940년 10월 3일 출생 여성작가이다. 한 때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의 촌장이었으며 황순원의 애제자이다. 작가교수회에서 발간하는 소설전문지 『소설시대』의 복간호 『소설시대』 20호 특집1-작가교수 재조명(황순원 편)은 황순원 작가론과 제자인 안영 작가의 황순원 회고록이 실렸다. 황순원 작가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논문도 수록했다. 특히 안영 작가의 회고록은 황순원 작가와 얽힌 이야기와 주고받은 편지도 들어있어 귀한 자료로 쓴 글이다. 안영 작가는 황순원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등단하게 되었다.


  • 원응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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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응서는 평양 출생 번역문학가 (1914-1973)이다. 리쿄 대학 영미 학부를 졸업했고, 1.4 후퇴 때 월남. 문예지 <문학의 주간>을 역임하였고, 번역 이외의 일에는 별로 활동을 하지 않은 인물이다. 번역 작품으로는 <나의 사랑 안드리스>, <제인 에어>, <25시> 등이 있다. 원응서와 황순원은 절친한 사이였다. 소나기의 원래의 원고 결말에서는 소년이 신음소리를 내며 돌아눕는다는 끝 문장이 있었는데, 절친한 친구 원응서 선생이 그것은 사족이니 빼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정은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도 유사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좋은 친구요 좋은 독자를 가진 복을 누린 경우이다. 황순원은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 원응서와의 교감을 그린 <마지막 잔>(1974)이라는 단편을 쓰기도 하였다. 황순원은 주석에서 친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꼭 병바닥의 마지막 잔 술을 탁자 옆 허공이나 퇴주그릇에 부었는데, 그것을 아는 제자들은 덩달아 그 법칙을 지켜가며 숙연해 하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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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마지막 잔' 일부

결론

월남작가

[5]

  • 38따라지: 해방기에 만들어진, 월남민을 부정적으로 지칭하는 단어- "이북에서 쫓겨 넘어온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말로 ‘38 따라지’라고 했어요. 38선을 넘어왔다는 뜻이 아니라 3하고 8이면 노름할 때 한 끗 ‘따라지’가 아닙니까. 그래서 나온 말입니다."[6]
  • 재 남조선 이북인: 당시 월남민의 공식 명칭. 월남민이 남조선 원주민과 구분되는 타자적 존재로 인식됨을 보여줌.

휴머니즘

  • 소설가협회
  • 경희대 동료 문인, 제자와의 교류

참조

  1. 황순원과 소설가협회 중앙SUNDAY 기사 참조.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3. 국민보도연맹 사진
  4. 「황순원 소설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지형도」, 한국근대문학연구, 2015, Issue 31, p.133: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월남 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이래 사상적 억압과 자기 검열을 겪어야 했던 황순원의 경우 어느 정도 소설언어의 굴절 현상을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에서는 친농민적 성향의 지주 출신이었고, 남한에서는 사상적 억압을 받던 국민보도연맹원 출신이었던 황순원이 선택할 수 있었던 소설 언어의 스펙트럼이 제한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5. 「해방 이후 월남 작가의 존재 방식 ― 1945~1953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소영,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pp.383-419
  6. 「해방 이후 월남 작가의 존재 방식 ― 1945~1953년의 시기를 중심으로」, 전소영, 한국현대문학연구 44, 2014.12,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