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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황순원 문학상 심사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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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대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심사평의 일부를 발췌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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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대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심사평(김윤식 대표집필, 「2002년의 한국 소설 지적도」)의 일부를 발췌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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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앞에서 언급한 끈적끈적한 인정주의, 그 샤머니즘적 엉겨붙임성이랄까 그런 것이지요. 『봄날은 간다』의 유행가 가락 속으로 얼버무리기가 그것.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다분히 한국적이라 하겠지요.”
 
“제가 앞에서 언급한 끈적끈적한 인정주의, 그 샤머니즘적 엉겨붙임성이랄까 그런 것이지요. 『봄날은 간다』의 유행가 가락 속으로 얼버무리기가 그것.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다분히 한국적이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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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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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계 문학이란 뜻이겠는데요. 그것도 한 수 깊은 그런 경지라는. 그렇기는 하나, 부처님 쪽으로 너무 빨리 간 것은 아닌지요. 부처님만이 구제할 수 있는, 혹은 그분의 가피를 입을 만큼 그 업이 무거웠던 증거인가요. 이 나라 사회가 치러야 될 민주 업장 말입니다. 거기에는 해피엔딩이 없다는 것, 아직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 아니, 해피엔딩이란 것 자체가 원래 그러하다는 것,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 작가는 이를 기억, 자세히는 ‘훼손된 기억’의 현태라 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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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있던 옛 대학 동창의 모친상에 가기 위해 그곳까지 간 여성 작가인 ‘나’가 마음을 바꾸어, 부처님 계신 천은사로 간 얘기. 샘이 숨겨진 곳 아닙니까. 얼마나 속이 탔으면 샘을 찾고자 했을까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샘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 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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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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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가 너무 커서 날지 못하는 새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육체가 너무 살쪄 보행에 부자유롭다는 것. 짜임이나 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틀을 넘어선 곳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기해놓았다는 것에 오히려 이 작품의 의의가 있겠지요. 적어도 이 작품은 흔히 말해지는 수다스러움이라든가 입심과는 무관합니다. 작가 신씨 고유의 세계에 속하는 그런 원인이랄까 이유가 잠겨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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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파스텔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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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글쓰기란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음의 간접적 호소가 아닐가요. 대문자 문학이나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것. 만평으로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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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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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문도 묘사도 설명도 모조리 대화로 대치해놓았습니다. 무대가 있고, 등장인물이 떠들고 있고, 무대 아래서는 합창단이 있는 그런 고전적 예술 양식을 송두리째 깔아뭉개 써댄 형국입니다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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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전적 통합 양식이란 실상 오늘날엔 있을 수 없다는 것. 말을 바꾸면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무대만 달랑 있거나, 합창단만 따로 있어 각각 분리되었다는 것. 등장인물이 서 있을 자리가 아예 없는 형국이지요. 그렇다면 등장인물은 어디에 서야 할까. 허허벌판일 뿐. 곧 언어로 된 들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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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 13일 (토) 13:57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대담의 형식으로 진행된 심사평(김윤식 대표집필, 「2002년의 한국 소설 지적도」)의 일부를 발췌했음을 알린다.

수상작

『손풍금』


“『손풍금』을 읽고 있노라면, 두 가지 점에서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하나는 이 과제에 대한 작가의 지속성. 『어둠의 혼』(1973)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단 없이 매달린 작가의 놀라운 일관성은 유레를 찾기 어려울 정도. 다른 하나는, 실은 이 점이 중요한데, 실험성이 그것. 이런 일관성과 실험성을 에워싸고 있는 것이 바로 치열성이겠는데.”


“적절한 사례가 아닐지 모르겠으나, 우리는 흔히 지독한 충격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든 그 사건을 되풀이하여 그 사건을 타인에게 말하고 있음을 자주 보아왔는데, 『손풍금』의 작가의 경우도 이와 방불한지 모르겠습니다. 제 말씀은 그러니까 작가 자신이 근원적인 의미에서 사건의 주체라는 것. 그러니까 그는 그것을 말함으로써 그토록 견디기 어려운 결과에서 자기를 해방하는 한편 그 사건을 객관화하고자 꾀합니다.”

후보작

『시취』


“시취란 사전적 뜻은, 시체에서 풍기는 냄새 아닙니까. 그런데 그 냄새가 몸에서 나는 것이 아니군요. ‘의식’의 냄새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치매스러움’의 냄새이겠는데요.”


“잘 보셨군요. 정확히는, 기억하고자 하는 노력에 저항하는 노인성 ‘현기증’. 이 현기증이 작품 도입부에서 비석모양 버티고 있습니다. ‘7월 24일에 특급 열차 탈선과 화재 사고가 났다.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혹시 휴가……’에서 보듯 ‘분명하지는 않았지만’이 작품 속에 무수히 울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P가 그 열차를 탔든 타지 않았든 P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로 변주곡을 이루어냅니다. P가 사고 열차를 탔을지도 모르며 안 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열차를 P가 탔든 안 탔든 관계없이 P가 죽었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는 것. 이런 ‘의식’이야말로 시체 냄새라는 것. 그러니까 헤겔 투로 하면 ‘의식’이 주인공인 셈이겠지요.”


“확실한 자기의 소유물 속에 완고히 자폐될 때, 미래의 불확실성 앞에 비틀거리며 타자라는 이질성에 마음을 닫는다면 창조적 자유란 나올 수 없는 법. 이러한 실존적 형식을 기독교의 전통은 ‘죄’라 불렀던 것. 어째서 타자를 거부하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없지 않지요. 과도하게 자기 존재에 기울어져 불안 속에 내쫓기는 지금의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확보하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근원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말미암지요. 죽음의 불안 속에 흔들리면서 자기의 존재를 자각함에서 말미암은 것이니까. 죽음에 대한 불안이 만일 인간의 보편적 느낌이라면 그 구제 방법은 무엇일까. 『시취』는 아직 거기까지 이른 것은 아니겠지요. 다만 그 입구에 가까이 갔다고나 할까요.”

『밀랍 호숫가로의 여행』


“『밀랍 호숫가로의 여행』은 약국을 업으로 하는 노부부 사이에 벌어진 사건 하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단편이 갖추어야 될 미덕이 뚜렷이 드러난 작품이겠지요. 특히 구성과 결말의 돌연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뚜렷한 지적 통제력이 강점.”

『책과 함께 자다』


“『책과 함께 자다』는, 갈데없는 관념형 소설입니다그려. ‘첫장까지 온통 책으로 뒤덮여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는 방 안에 잠든 듯 죽어 있는 한 남자에 대한 기사가 11월 16일 아침 배달된 지방신문에 실렸다’로 시작되지 않습니까. 문제는 ‘책’인데. 그러니까 ‘책’으로 상징되는 것에 관련되어 있지요. 책이란 무엇인가. 그 책 틈에서 죽은 사내란 무엇인가.” “그러니까 ‘책’과 ‘죽음’이겠는데요.” “그렇소. 말을 바꾸면 추리적 흥미일 수도 있긴 해도, 벌써 ‘대답’(해결)이 처음부터 나버린 형국.”


“책과 더불어 시작된 인류사의 어떤 양질의 부분이 소멸된 상태라고 하면 좀 거창해질까요. 그것이 바로 ‘인간다움’인데, 책의 종말이란 곧 ‘인간다움’의 종말인지 모른다는 것. ‘나’의 성목경 되기가 그것. 만일 이런 식의 해석을 두고 답이 먼저 나와 있음이라 하겠지요. 관념성 소설이 지닌 초대의 난점이라고나 할까요.”

『봄날은 간다』


작가는 ‘쇳기운’을 담뿍 가진 사내를 천하 악종으로 간주하기 않고. ‘개’와 같은 일종의 동물로 본다는 것. 그만큼 친근한 동물이라는 것. 선생의 독법은 그러니까 종애의 유년기. 동네에서 개백정처럼 아내를 두들겨 패던 선옥이 아빠에 대한 작가의 태도를 ᄏힻᆨ 평가하고 있어 보입니다. 선옥이 아빠의 그토록 딸 아끼는 자상한 측면, 곧 새끼 가진 민박집 개와 진배없으니까.“


“제가 앞에서 언급한 끈적끈적한 인정주의, 그 샤머니즘적 엉겨붙임성이랄까 그런 것이지요. 『봄날은 간다』의 유행가 가락 속으로 얼버무리기가 그것.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다분히 한국적이라 하겠지요.”

『숨은 샘』


“후일담계 문학이란 뜻이겠는데요. 그것도 한 수 깊은 그런 경지라는. 그렇기는 하나, 부처님 쪽으로 너무 빨리 간 것은 아닌지요. 부처님만이 구제할 수 있는, 혹은 그분의 가피를 입을 만큼 그 업이 무거웠던 증거인가요. 이 나라 사회가 치러야 될 민주 업장 말입니다. 거기에는 해피엔딩이 없다는 것, 아직도 여전히 그러하다는 것. 아니, 해피엔딩이란 것 자체가 원래 그러하다는 것,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니라는 것. 작가는 이를 기억, 자세히는 ‘훼손된 기억’의 현태라 했군요.”


“시골에 있던 옛 대학 동창의 모친상에 가기 위해 그곳까지 간 여성 작가인 ‘나’가 마음을 바꾸어, 부처님 계신 천은사로 간 얘기. 샘이 숨겨진 곳 아닙니까. 얼마나 속이 탔으면 샘을 찾고자 했을까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샘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 했던가요.”

『달의 물』 “날개가 너무 커서 날지 못하는 새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소설의 육체가 너무 살쪄 보행에 부자유롭다는 것. 짜임이나 구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틀을 넘어선 곳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이 따로 있습니다. 이 문제를 제기해놓았다는 것에 오히려 이 작품의 의의가 있겠지요. 적어도 이 작품은 흔히 말해지는 수다스러움이라든가 입심과는 무관합니다. 작가 신씨 고유의 세계에 속하는 그런 원인이랄까 이유가 잠겨 있지요.”

『서울은 파스텔톤』


“오늘날 글쓰기란 이런 식으로밖에 할 수 없음의 간접적 호소가 아닐가요. 대문자 문학이나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것. 만평으로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

『의료원』


“지문도 묘사도 설명도 모조리 대화로 대치해놓았습니다. 무대가 있고, 등장인물이 떠들고 있고, 무대 아래서는 합창단이 있는 그런 고전적 예술 양식을 송두리째 깔아뭉개 써댄 형국입니다그려.”


“그런 고전적 통합 양식이란 실상 오늘날엔 있을 수 없다는 것. 말을 바꾸면 오늘의 현실에서 보면 무대만 달랑 있거나, 합창단만 따로 있어 각각 분리되었다는 것. 등장인물이 서 있을 자리가 아예 없는 형국이지요. 그렇다면 등장인물은 어디에 서야 할까. 허허벌판일 뿐. 곧 언어로 된 들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