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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희의 「미안합니다」"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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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하이퍼텍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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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사람들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단연코 인색한 말이 있다면 아마도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일 것이다. 아주 작고 사소한 일에도 걸핏하면 ‘땡큐, 쏘리(Thank you, Sorry)’를 되뇌는 외국인들에 비해 우리는 여간해서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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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오랜 유학 생활 덕분에 나는 그나마 ‘고맙다’는 말은 꽤 자주 하는 편이다. 조교나 학생들이 심부름을 해 주거나 시중을 들어주면 곧잘 ‘고마워’라는 말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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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에 비해 ‘미안해’라는 말은 여간 어렵지 않다. 분명히 내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미안해’라는 말을 하려면 목소리가 기어들거나 가능하면 슬쩍 얼버무려 버린다. 마음속으로 미안한 감정을 느끼지 않아서가 결코 아니다. 너무나 미안하다고 생각할 때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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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게다가 가끔씩은 그런말을 할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는 적도 있다. 때문에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오해는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거만하게 보이거나 못된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나의 성격적 결함을 머릿속으로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미안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어쨌거나 그 말이 목에 딱 걸려 안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기까지 한다. 왜 ‘미안해요’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가?
 
그것은 나의 삶의 방식과 연결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본능적으로 체득한 내 삶의 법칙은 슬프게도 ‘삶은 투쟁이고, 투쟁은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승부 근성이 투철한 내게 ‘미안해’라는 말은 결국 내가 졌다는 뜻이고,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경쟁 심리가 그 말을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혹은 자존심 탓일 수도 있다. ‘미안하다’고 말한다는 것은 나의 결함과 실수를 인정한다는 것인데, 그것이 나의 자존심을 건드린다. 아니, 좀 더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가 보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어쩌면 잘못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 애당초 남에게 사과할 일을 했으며, 그것도 미리 예견 못했다는 것은 지독한 오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남보다 못났다는 데 대한 열등의식이거나 자격지심일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있다면, 내가 잘못했고, 그 사실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렵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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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amu.wiki/w/%EB%AA%A8%ED%95%9C%EB%8B%A4%EC%8A%A4%20%EC%B9%B4%EB%9E%8C%EC%B0%AC%EB%93%9C%20%EA%B0%84%EB%94%94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지난주, 19세기 미국 소설 강의 시간에, 나는 한 학생에게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의 첫 장면을 읽도록 시켰다.
 
“김영수, 23페이지 첫째 단락을 읽어 보세요.”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되풀이했다.
 
“23페이지 첫째 문단 말이야.”
 
또다시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갑자기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단지 의아해했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학기 시작하고 두어 달이 지났으니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학생들 또한 내가 자기들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호명한 영수가 아닌 서훈이가 책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나에 대한 반항이거나 걸음 더 나아가 모욕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화를 눌러 참고 책을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냉담하게 말했다.
 
“지금 책 읽은 학생이 김영수예요?”
 
나는 정색을 하고 선생으로서의 위엄과 자존심을 건드린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자기 이름들도 몰라요? 결석한 친구 대신 대리 대답하는 학생들이 있다더니 그렇게 하는 것이 아예 버릇이 돼서 이젠 친구 이름을 자기 이름인 줄로 착각할 정도인가?”
 
나는 야유까지 했다.
 
반 전체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영수와 서훈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시간을 더 이상 허비할 수 없어서 강의를 계속했지만, 수업이 끝나고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에 퇴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학생 하나가 찾아와 진상을 알려 주었다. 김영수는 아주 심각한 말더듬이 증세를 갖고있고, 그 증세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읽거나 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더욱 악화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까 갑자기 말문이 막혀 책을 읽을 수도, 그렇다고 말을 더듬어서 못 읽겠다고 설명할 수도 없는 처지였을 것이고, 그 사정을 잘 아는 서훈이가 당황하는 친구를 도와주려고 대신 읽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렸을 때 나도 한때 말더듬이 비슷한 증세가 있었기 때문에 영수가 느꼈을 충격과 고뇌, 그리고 수업 시간 이후의 기분을 잘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영수에게 수업 후에 오라고 할까? 그러면 영수가 더 부끄러워하지 않을까? 아니면 삐삐 번호를 알아내어 내게 전화하라고 할까? 하지만 말더듬이 증상은 전화로 말할 때 더 심각해지니까 그것도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과를 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로 내가 사과해야 하는 상황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일어났다. 요컨대 그게 정말 내 잘못이었는가 말이다. 영수에게 그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지 않았는가? 학기 시작할 때 미리 자기에게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으니 호명하지 말아 달라고 한마디라도 해 줬으면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말이다.
 
게다가 선생 체면에 학생에게 그런 말 했다고 해서 사과할 필요까지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쯤은 영수도 다 잊어버리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괜히 사과해서 오히려 긁어 부스럼이 될 수도 있다.
 
영수에게 ‘미안해’라고 말할 필요가 없을 만한 온갖 구실들을 발견하고 나니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고, 오히려 사과하려고 생각했던 내가 어리석게까지 여겨졌다. 그리고 바쁜 와중에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결론짓고 그냥 잊어버렸다.
 
하지만 오늘 나는 ‘미안합니다’라는 말, 아니 그 말의 위력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만 했다.
 
저녁때 아버지가 오피스텔에 있는 나를 데리러 차를 갖고 오셨다.
 
아버지와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나갔는데,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 경비원이 아버지에게 현관 가까이에 차를 댔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계속 허리를 굽히면서 사과하고 계셨다.
 
“미안합니다. 잠깐만 있을 겁니다. 제가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곧 나올 겁니다.”
 
그러나 아버지 연세쯤 되어 보이는 경비원은 심하게 아버지를 힐책하였다.
 
“아, 글쎄 기다리려면 저기 주차장 안에 차를 대고 기다리란 말예요! 왜 하필이면 현관 앞에 차를 대냐고요.”
 
“미안합니다. 조금만.”
 
아버지는 계속 ‘미안합니다’를 반복하고 계셨다. 물론 차를 현관 근처에 대는 것은 금지되어 있지만, 경비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너무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서 나는 경비원을 한 번 흘끗 쳐다보고는 차에 올라탔다.
 
경비원은 잠시 나와 목발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아버지에게 깊이 머리를 숙이더니,
 
“아이구, 정말 죄송합니다. 왜 이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지 그랬어요. 만약 그랬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 텐데요. 이분이라면 몸이 불편하시니까 여기 대셔야지요. 이분을 자주 봬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중간중간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또 아버지대로 “괜찮습니다. 제가 잘못한 건데요. 죄송합니다.”라고 사과했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차가 떠날 때 경비원은 손까지 흔들며 우리들을 배웅해 주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결말인가! 서로 얼굴 붉히고 마음 상하고 헤어졌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두 사람은 모두 기꺼이 “미안합니다.”하고 사과를 했기 때문에 결과는 해피 엔딩이었다.
 
아마도 나라면 아버지처럼 사과하는 대신 “금방 간다는데 왜 그러세요? 그렇게 융통성이 없으세요?” 하면서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고, 경비원도 사과하는 대신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지, 아무리 몸이 불편한 사람 기다린다고 차를 현관 앞에 세우다니.” 생각하면서 뾰로통한 얼굴로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나보다 나이도 많고 인생 경험도 풍부한 두 사람은 해피 엔딩을 만드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잘못을 기꺼이 인정하는 태도와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미안합니다’라는 말의 효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나는 차를 타고 나서 아버지에게 투덜댔다.
 
“아버지, 왜 그 사람한테 허리까지 굽히고 그래. 채신없이 보이잖아.”
 
그러자 아버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채신? 원, 잘못한 거 사과하는데 채신은 무슨 채신이냐?”
 
문득 영수 얼굴이 떠올랐다. 잘못한 것 사과하는데 선생 체면은 무슨 선생 체면? 수업 중에 내가 한 말 때문에 영수가 아직도 상심해 있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수업 끝나고 정식으로 사과해야지.
 
“얘, 영수야, 지난번엔 미안했어. 수업 중에 읽는 것 시키지 말라고 말해주지 그랬니. 모르고 그런 거니 용서해 줄 거지?”
 
이번 일을 계기로 나도 ‘미안합니다’를 좀 더 자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출처 : 구자분 <미안합니다> 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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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https://ko.wikipedia.org/wiki/%EC%A0%81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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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데이터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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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http://alleyway.kr/220706667464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낸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 뿐이었다. 그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애들의 건강을 위해 [https://blog.naver.com/zksltl4050/221108615089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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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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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3921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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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 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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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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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embed/B1_ukoY_On8 집착]이 [https://www.lgchallengers.com/social/etiologyj_20150316/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僧家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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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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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https://www.youtube.com/embed/J8skfhmAQmM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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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러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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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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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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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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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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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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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https://www.youtube.com/embed/6C0Faocxri4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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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법정, 『무소유』(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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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1월 11일 (월) 14:2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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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left.png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 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되었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낸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 뿐이었다. 그애들을 위해 관계 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 왔다. 아니나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 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僧家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을 못했다. 밖에 볼 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소유욕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러 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어제의 맹방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방향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뜬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 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다른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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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법정, 『무소유』(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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