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불국사 기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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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ckquote|7월 12일, 아침 첫 차로 경주를 떠나 불국사로 향하다. 떠날 임시에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881 봉황대(鳳凰臺)]에 올랐건만, 잔뜩 찌푸린 일기에 짙은 안개는 나의 눈까지 흐리고 말았다. 시포(屍布)를 늘어 놓은 듯한 희미한 강줄기, 몽롱한 무덤의 봉우리, 쓰러지는 듯한 초가집 추녀가 도모지 눈물겹다. 어젯밤에 나를 부여잡고 울던 옛 서울은 오늘 아츰에도 눈물을 거두지 않은 듯, 그렇지 않아도 구슬픈 내 가슴이어든 심란한 이 정경에 어찌 견디랴. 지금 떠나면 1년, 10년, 혹은 20년 후에나 다시 만날지 말지! 기약 없는 이 작별을 앞두고 눈물에 젖은 임의 얼굴! 내 옷소매가 축축이 젖음은 안개가 녹아 나린 탓만이 아니리라. | ||
− | + | 장난감 기차는 반 시간이 못 되어 불국사역까지 실어다 주고, 역에서 등대(等待)했던 자동차는 십릿길을 단숨에 껑청껑청 뛰어서 불국사에 대었다. 뒤로 토함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울창한 송림을 끌며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내다보는 절의 위치부터 풍수쟁이 아닌 나의 눈에도 벌써 범상치 아니했다. 더구나 돌 층층대를 쳐다볼 때에 그 굉장한 규모와 섬세한 솜씨에 눈이 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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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 당시엔 낭떠러지로 있던 곳을 돌로 쌓아올리고, 그리고 이 돌 층층대를 지었음이리라. 동쪽과 서쪽으로 갈리어 위아래로 각각 둘씩이니 전부는 네 개인데, 한 개의 층층대가 대개 열일곱 여덟 계단이요, 길이는 오십칠팔 척으로 양 가에 놓인 것과 가운데에 뻗친 놈은 돌 한 개로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인력을 들인 것인가를 짐작할 것이요, 오늘날 돌로 지은 대건축물에도 이렇듯이 대팰 민 듯한 돌은 못 보았다 하면, 얼마나 그 때 사람이 돌을 곱게 다루었는가를 깨달을 것이다. | 초창 당시엔 낭떠러지로 있던 곳을 돌로 쌓아올리고, 그리고 이 돌 층층대를 지었음이리라. 동쪽과 서쪽으로 갈리어 위아래로 각각 둘씩이니 전부는 네 개인데, 한 개의 층층대가 대개 열일곱 여덟 계단이요, 길이는 오십칠팔 척으로 양 가에 놓인 것과 가운데에 뻗친 놈은 돌 한 개로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인력을 들인 것인가를 짐작할 것이요, 오늘날 돌로 지은 대건축물에도 이렇듯이 대팰 민 듯한 돌은 못 보았다 하면, 얼마나 그 때 사람이 돌을 곱게 다루었는가를 깨달을 것이다. | ||
− | 돌 층층대의 이름은, 동쪽 아래의 것은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은 백운교(白雲橋)요, 서쪽 아래의 것은 연화교(蓮花橋), 위의 것은 칠보교(七寶橋)라 한다. 층층대라 하였지만, 아래와 위가 연락되는 곳마다 요새말로 네모난 발코니가 되고 그 밑은 아치가 되었는데,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치 밑은 맑은 물이 흐르며 | + | 돌 층층대의 이름은, 동쪽 아래의 것은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은 백운교(白雲橋)요, 서쪽 아래의 것은 연화교(蓮花橋), 위의 것은 칠보교(七寶橋)라 한다. 층층대라 하였지만, 아래와 위가 연락되는 곳마다 요새말로 네모난 발코니가 되고 그 밑은 아치가 되었는데,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치 밑은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 층층대를 다리라 한 옛 이름의 유래를 터득할 것이다. 층층대 상하에는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쇠사슬인지 은사슬인지 둘러 꿴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귀인이 이 절을 찾을 때엔 저 편 못가에 내려 그림배를 타고 들어와 다시 보교를 타고 이 돌 층층대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단다. 너른 못에 연꽃이 만발한데 다리 밑으로 돌아드는 맑은 흐름엔 으리으리한 누각과 석불의 그림자가 용의 모양을 그리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떠나가는 그림배! 나는 당년의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스스로 황홀하였다. 활동 사진에서 본 [https://www.youtube.com/embed/Ngn-F7OS8Ng 물의 도시 베니스의 달빗긴 바닷가에 그림배를 저어 가는 청춘 남녀의 광경이 선하게 나타난다]. |
이 돌 층층대를 거치어 문루를 지나 서니,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두 탑은 물론 돌로 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만져 보아도 돌이요, 두들겨 보아도 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오히려 그만둘지라도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만일, 그 탑을 만든 원료가 정말 돌이라면, 신라 사람은 돌을 돌같이 쓰지 않고 마치 콩고물이나 팥고물처럼 마음대로 뜻대로 손가락 끝에 휘젓고 주무르고 하는 신통력을 가졌던 것이다. 귀신조차 놀래고 울리는 재주란 것은 이런 솜씨를 두고 이름이리라. | 이 돌 층층대를 거치어 문루를 지나 서니,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두 탑은 물론 돌로 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만져 보아도 돌이요, 두들겨 보아도 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오히려 그만둘지라도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만일, 그 탑을 만든 원료가 정말 돌이라면, 신라 사람은 돌을 돌같이 쓰지 않고 마치 콩고물이나 팥고물처럼 마음대로 뜻대로 손가락 끝에 휘젓고 주무르고 하는 신통력을 가졌던 것이다. 귀신조차 놀래고 울리는 재주란 것은 이런 솜씨를 두고 이름이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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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네 면엔 자그마한 어여쁜 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올라서니 가운데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겹쳐 놓은 듯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둥과 두 층대의 석반(石盤)을 받은 어름에는 나무로도 오히려 깎아 내기가 어려울 만한 소로(접시받침)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닥을 벌리었다. 지붕 위에 이중의 네모난 돌 난간이 둘러 쟁반 같은 이층 지붕을 받들었고, 그 위엔 8모난 돌 난간과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 모양을 수놓은 듯한 돌쟁반이 탑의 8모난 난간을 받들었다. 석공이 기절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기상 천외의 의장(물건의 겉을 꾸미는 도안)은 또 어디서 온 것인고! 바람과 비에 시달린 지 천여 년을 지낸 오늘날에도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옛 모양이 변하지 않았으니, 당대의 건축술 또한 놀랄 것이 아니냐! | 탑의 네 면엔 자그마한 어여쁜 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올라서니 가운데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겹쳐 놓은 듯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둥과 두 층대의 석반(石盤)을 받은 어름에는 나무로도 오히려 깎아 내기가 어려울 만한 소로(접시받침)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닥을 벌리었다. 지붕 위에 이중의 네모난 돌 난간이 둘러 쟁반 같은 이층 지붕을 받들었고, 그 위엔 8모난 돌 난간과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 모양을 수놓은 듯한 돌쟁반이 탑의 8모난 난간을 받들었다. 석공이 기절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기상 천외의 의장(물건의 겉을 꾸미는 도안)은 또 어디서 온 것인고! 바람과 비에 시달린 지 천여 년을 지낸 오늘날에도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옛 모양이 변하지 않았으니, 당대의 건축술 또한 놀랄 것이 아니냐! | ||
− | 들으매 이 탑의 네 귀에는 돌 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 + | 들으매 이 탑의 네 귀에는 돌 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倫敦)에 있는데 다시 찾아 오려면 5백만 원을 주어야 내어놓겠다 한다던가? 소중한 물건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굴리며, 어느 틈에 도둑을 맞았는지도 모르니, 이런 기막힐 일이 또 있느냐?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영혼)이 만일 있다 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아 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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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가탑은 다보탑 서쪽에 있는데, 다보탑의 혼란한 잔손질과는 딴판으로, 수법이 매우 간결하나마 또한 정중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 미인(盛裝美人)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 미인(淡粧美人)이라 할까? 높이 27척, 층은 역시 3층으로 한 층마다 수려한 돌병풍을 두르고, 병풍 네 귀에 병풍과 한데 어울러 놓은 기둥이 있는데, 설명자의 말을 들으면 이 탑은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되었다 하니, 그 웅장하고 거창한 규모에 놀랄 만하다. | ||
− | + | 이 탑의 별명은 무영탑, 곧 그림자가 없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랑과 예술에 얽힌 눈물겨운 로맨스가 숨어있다. 그때의 사람이 얼마나 종교와 예술에 몸 을 바쳤고 또는 사랑과 예술을 한 덩어리로 만든 황홀경에서 살았다는 것이 이 아름답고 슬프고 신비로운 전설에 풍겨 있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시절, 당시 재상 김대성(金大成)은 왕의 명을 받들 어 토함산 아래 불국사를 이룩할새, 나라의 힘을 기울이고 천하의 명공(名 工)을 모아들였는데, 그 명공 가운데는 멀리 당나라로부터 불러내온 젊은 석수 하나가 있었다. 이 절의 중심으로 말하면 두 개의 석탑으로, 이 두 탑 의 공사가 가장 거창하고 까다로웠던 것은 물론이다. 젊은 당나라 석수는 그 두 탑 중의 하나인 석가탑을 맡아 짓기로 되었다. 예술의 감격에 뛰는 젊은 가슴의 피는 수륙 수천 리 고국에 남겨두고 온 사랑하는 안해도 잊어 버리고 오즉 맡은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끓고 말았다. 침식도 잊고 세월 가 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는 왼 몸과 왼 마음을 오직 이 공사에 바쳤다. 덧없는 세월은 어느덧 몇 해가 흘러가고 흘러왔다. 수만 리 타국에 남편을 보내고 외로이 공규(空閨)를 지키던 그의 안해 아사녀(阿斯女)는 동으로 흐 르는 구름에 안타까운 회포를 붙이다 못하여 필경 남편을 찾아 신라로 건너 오게 되었다. 머나먼 길에 피곤한 다리를 끌고 불국사 문앞까지 찾아왔으 나, 큰 공역을 마치기도 전이요, 더러운 여인의 몸으로 신성한 절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고 차디찬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절 문을 지키던 사람도 거절을 하기는 하였으되 그 정상에 동정하였음이리 라. 아사녀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얼마 아니 가면 큰 못이 있는데, 그 맑은 물얼굴엔 시방 짓는 절의 그림자가 뚜렷이 비칠지니, 그대 남편이 맡 아 짓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응당 거기 비치리라. 그림자를 보아 공사가 끝 나거든 다시 찾아오라.” 하였다. 아사녀는 그 말대로 그 못가에서 정심정력으로 비치는 절 모양을 들여다 보며 하로바삐, 아니 한시바삐 석가탑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달 빛에 흐르는 구름 조각에도 그는 몇 번이나 석가탑의 그림자로 속았으랴. 하로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지리하고도 조마조마한 찰나 찰나를 지나는 동안에 절 모양이 뚜렷이 비치고, 다보탑이 비치고, 가고오는 사람 의 그림자도 비치건마는, 오즉 자기 남편이 맡은 석가탑의 그림자는 찾을래 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안해가 멀리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당나라 석수 는 밤을 낮에 이어 마츰내 공사를 마치고 창황히 못가로 뛰어왔건만, 안해 의 양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일. 아모리 못얼굴을 디미다보아도 석 가탑의 그림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데 실망한 그의 안해는 남편의 이름 을 부르며 고만 못 가운데 몸을 던진 까닭이다! 그는 망연히 물얼굴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안해의 이름을 불렀으랴. 그러 나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만 귓가를 스칠 뿐.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이 슬나리는 새벽 달빛 솟는 저녁에도 그는 못가를 돌고 또 돌며 사랑하는 안 해를 그리며 찾았다. 오늘도 못가를 돌 때에 그는 문득 못 옆 물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아련히 나타났다. “아! 저기 있구나!”하며 그는 이 그림자를 향해 뛰어 달려들었 다. 그러나 벌린 그의 팔 안에 안긴 것은 안해가 아니요, 사람이 아니요, 사람만한 바위덩이다. 그는 바위를 잡은 찰나에 문득 제 눈앞에 나타난 안 해의 모양을 길이길이 잊지 않으려고 그 바위를 새기기 시작하였다. 제 환 상에 떠오른 사랑하는 안해의 모양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 했다. 그는 제 예술로 죽은 안해를 살리고 아울러 부처님에까지 천도하려 한 것이다. 이 조각이 완성되면서 자기 역시 못 가운데 몸을 던져 안해의 뒤를 따랐 다. 불국사 남서방에 영지(影池)란 못이 있으니 여기가 곧 아사녀와 당나라 석 수가 빠져 죽은 데다. 내가 찾을 때엔 장마가 막 그친 뒤라 누런 물결이 산 발치의 소나무 가지에 넘실 거리는데, 부처님을 새긴 천연의 돌은 지난 날 의 애화를 다시금 일러 주는 듯. 그 새김의 선(線)이 자못 섬세한 것은 부 처님을 새기면서도 알뜰한 자기 안해의 환영이 머리를 지배한 탓인가? | |
− | 출처=『고도순례 경주(古都巡禮慶州)』(1929). | + | |
+ | 다보탑과 석가탑에 무한 경탄과 감개를 마지 않다가 대웅전을 디미다보니 정면에 엄연히 선 삼위불(三位佛)의 입상이 보통 부처님보담은 어마어마하 게 크다마는 신라 당시의 유물은 아니고, 영묘조(英廟朝)에 개축할 때 맨들 어 놓은 것이라 하며 다만 경탄할 것은 개축할 때 천장과 벽에 올린 휘황찬 란한 단청이 3백여 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조금도 빛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 이다. 무슨 물감을 어떻게 풀어서 썼는지 채색 학자의 연구 문제라던가. 앞 길이 바쁘매 아츰도 굶은 채로 석굴암을 향해 또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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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출처= 현진건, 『고도순례 경주(古都巡禮慶州)』(19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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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6일 (월) 20:30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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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아침 첫 차로 경주를 떠나 불국사로 향하다. 떠날 임시에 봉황대(鳳凰臺)에 올랐건만, 잔뜩 찌푸린 일기에 짙은 안개는 나의 눈까지 흐리고 말았다. 시포(屍布)를 늘어 놓은 듯한 희미한 강줄기, 몽롱한 무덤의 봉우리, 쓰러지는 듯한 초가집 추녀가 도모지 눈물겹다. 어젯밤에 나를 부여잡고 울던 옛 서울은 오늘 아츰에도 눈물을 거두지 않은 듯, 그렇지 않아도 구슬픈 내 가슴이어든 심란한 이 정경에 어찌 견디랴. 지금 떠나면 1년, 10년, 혹은 20년 후에나 다시 만날지 말지! 기약 없는 이 작별을 앞두고 눈물에 젖은 임의 얼굴! 내 옷소매가 축축이 젖음은 안개가 녹아 나린 탓만이 아니리라.
장난감 기차는 반 시간이 못 되어 불국사역까지 실어다 주고, 역에서 등대(等待)했던 자동차는 십릿길을 단숨에 껑청껑청 뛰어서 불국사에 대었다. 뒤로 토함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울창한 송림을 끌며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내다보는 절의 위치부터 풍수쟁이 아닌 나의 눈에도 벌써 범상치 아니했다. 더구나 돌 층층대를 쳐다볼 때에 그 굉장한 규모와 섬세한 솜씨에 눈이 어렸다. 초창 당시엔 낭떠러지로 있던 곳을 돌로 쌓아올리고, 그리고 이 돌 층층대를 지었음이리라. 동쪽과 서쪽으로 갈리어 위아래로 각각 둘씩이니 전부는 네 개인데, 한 개의 층층대가 대개 열일곱 여덟 계단이요, 길이는 오십칠팔 척으로 양 가에 놓인 것과 가운데에 뻗친 놈은 돌 한 개로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인력을 들인 것인가를 짐작할 것이요, 오늘날 돌로 지은 대건축물에도 이렇듯이 대팰 민 듯한 돌은 못 보았다 하면, 얼마나 그 때 사람이 돌을 곱게 다루었는가를 깨달을 것이다. 돌 층층대의 이름은, 동쪽 아래의 것은 청운교(靑雲橋), 위의 것은 백운교(白雲橋)요, 서쪽 아래의 것은 연화교(蓮花橋), 위의 것은 칠보교(七寶橋)라 한다. 층층대라 하였지만, 아래와 위가 연락되는 곳마다 요새말로 네모난 발코니가 되고 그 밑은 아치가 되었는데,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치 밑은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 층층대를 다리라 한 옛 이름의 유래를 터득할 것이다. 층층대 상하에는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쇠사슬인지 은사슬인지 둘러 꿴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귀인이 이 절을 찾을 때엔 저 편 못가에 내려 그림배를 타고 들어와 다시 보교를 타고 이 돌 층층대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단다. 너른 못에 연꽃이 만발한데 다리 밑으로 돌아드는 맑은 흐름엔 으리으리한 누각과 석불의 그림자가 용의 모양을 그리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떠나가는 그림배! 나는 당년의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스스로 황홀하였다. 활동 사진에서 본 물의 도시 베니스의 달빗긴 바닷가에 그림배를 저어 가는 청춘 남녀의 광경이 선하게 나타난다. 이 돌 층층대를 거치어 문루를 지나 서니,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눈앞에 나타난다. 이 두 탑은 물론 돌로 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만져 보아도 돌이요, 두들겨 보아도 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석가탑은 오히려 그만둘지라도 다보탑이 돌로 되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눈을 의심치 않을 수 없었다. 연한 나무가 아니요, 물씬물씬한 밀가루 반죽이 아니고, 육중하고 단단한 돌을 가지고 저다지도 곱고 어여쁘고 의젓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공교롭게 잔손질을 할 수 있으랴. 만일, 그 탑을 만든 원료가 정말 돌이라면, 신라 사람은 돌을 돌같이 쓰지 않고 마치 콩고물이나 팥고물처럼 마음대로 뜻대로 손가락 끝에 휘젓고 주무르고 하는 신통력을 가졌던 것이다. 귀신조차 놀래고 울리는 재주란 것은 이런 솜씨를 두고 이름이리라. 탑의 네 면엔 자그마한 어여쁜 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올라서니 가운데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겹쳐 놓은 듯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둥과 두 층대의 석반(石盤)을 받은 어름에는 나무로도 오히려 깎아 내기가 어려울 만한 소로(접시받침)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닥을 벌리었다. 지붕 위에 이중의 네모난 돌 난간이 둘러 쟁반 같은 이층 지붕을 받들었고, 그 위엔 8모난 돌 난간과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 모양을 수놓은 듯한 돌쟁반이 탑의 8모난 난간을 받들었다. 석공이 기절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런 기상 천외의 의장(물건의 겉을 꾸미는 도안)은 또 어디서 온 것인고! 바람과 비에 시달린 지 천여 년을 지낸 오늘날에도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옛 모양이 변하지 않았으니, 당대의 건축술 또한 놀랄 것이 아니냐! 들으매 이 탑의 네 귀에는 돌 사자가 있었는데, 두 마리는 동경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倫敦)에 있는데 다시 찾아 오려면 5백만 원을 주어야 내어놓겠다 한다던가? 소중한 물건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굴리며, 어느 틈에 도둑을 맞았는지도 모르니, 이런 기막힐 일이 또 있느냐?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영혼)이 만일 있다 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아 울 것이다. 석가탑은 다보탑 서쪽에 있는데, 다보탑의 혼란한 잔손질과는 딴판으로, 수법이 매우 간결하나마 또한 정중한 자태를 잃지 않았다.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 미인(盛裝美人)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 미인(淡粧美人)이라 할까? 높이 27척, 층은 역시 3층으로 한 층마다 수려한 돌병풍을 두르고, 병풍 네 귀에 병풍과 한데 어울러 놓은 기둥이 있는데, 설명자의 말을 들으면 이 탑은 한 층마다 돌 하나로 되었다 하니, 그 웅장하고 거창한 규모에 놀랄 만하다. 이 탑의 별명은 무영탑, 곧 그림자가 없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랑과 예술에 얽힌 눈물겨운 로맨스가 숨어있다. 그때의 사람이 얼마나 종교와 예술에 몸 을 바쳤고 또는 사랑과 예술을 한 덩어리로 만든 황홀경에서 살았다는 것이 이 아름답고 슬프고 신비로운 전설에 풍겨 있다. 제35대 경덕왕(景德王) 시절, 당시 재상 김대성(金大成)은 왕의 명을 받들 어 토함산 아래 불국사를 이룩할새, 나라의 힘을 기울이고 천하의 명공(名 工)을 모아들였는데, 그 명공 가운데는 멀리 당나라로부터 불러내온 젊은 석수 하나가 있었다. 이 절의 중심으로 말하면 두 개의 석탑으로, 이 두 탑 의 공사가 가장 거창하고 까다로웠던 것은 물론이다. 젊은 당나라 석수는 그 두 탑 중의 하나인 석가탑을 맡아 짓기로 되었다. 예술의 감격에 뛰는 젊은 가슴의 피는 수륙 수천 리 고국에 남겨두고 온 사랑하는 안해도 잊어 버리고 오즉 맡은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끓고 말았다. 침식도 잊고 세월 가 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는 왼 몸과 왼 마음을 오직 이 공사에 바쳤다. 덧없는 세월은 어느덧 몇 해가 흘러가고 흘러왔다. 수만 리 타국에 남편을 보내고 외로이 공규(空閨)를 지키던 그의 안해 아사녀(阿斯女)는 동으로 흐 르는 구름에 안타까운 회포를 붙이다 못하여 필경 남편을 찾아 신라로 건너 오게 되었다. 머나먼 길에 피곤한 다리를 끌고 불국사 문앞까지 찾아왔으 나, 큰 공역을 마치기도 전이요, 더러운 여인의 몸으로 신성한 절 문 안에 들어서지 못한다고 차디찬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 절 문을 지키던 사람도 거절을 하기는 하였으되 그 정상에 동정하였음이리 라. 아사녀에게 이르기를 “여기에서 얼마 아니 가면 큰 못이 있는데, 그 맑은 물얼굴엔 시방 짓는 절의 그림자가 뚜렷이 비칠지니, 그대 남편이 맡 아 짓는 석가탑의 그림자도 응당 거기 비치리라. 그림자를 보아 공사가 끝 나거든 다시 찾아오라.” 하였다. 아사녀는 그 말대로 그 못가에서 정심정력으로 비치는 절 모양을 들여다 보며 하로바삐, 아니 한시바삐 석가탑의 그림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달 빛에 흐르는 구름 조각에도 그는 몇 번이나 석가탑의 그림자로 속았으랴. 하로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이태, 지리하고도 조마조마한 찰나 찰나를 지나는 동안에 절 모양이 뚜렷이 비치고, 다보탑이 비치고, 가고오는 사람 의 그림자도 비치건마는, 오즉 자기 남편이 맡은 석가탑의 그림자는 찾을래 야 찾을 길이 없었다. 사랑하는 안해가 멀리멀리 찾아왔다는 소식을 뒤늦게야 들은 당나라 석수 는 밤을 낮에 이어 마츰내 공사를 마치고 창황히 못가로 뛰어왔건만, 안해 의 양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일. 아모리 못얼굴을 디미다보아도 석 가탑의 그림자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는 데 실망한 그의 안해는 남편의 이름 을 부르며 고만 못 가운데 몸을 던진 까닭이다! 그는 망연히 물얼굴을 바라보며 몇 번이나 안해의 이름을 불렀으랴. 그러 나 찰랑찰랑하는 물소리만 귓가를 스칠 뿐.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이 슬나리는 새벽 달빛 솟는 저녁에도 그는 못가를 돌고 또 돌며 사랑하는 안 해를 그리며 찾았다. 오늘도 못가를 돌 때에 그는 문득 못 옆 물가에 사람의 그림자가 아련히 나타났다. “아! 저기 있구나!”하며 그는 이 그림자를 향해 뛰어 달려들었 다. 그러나 벌린 그의 팔 안에 안긴 것은 안해가 아니요, 사람이 아니요, 사람만한 바위덩이다. 그는 바위를 잡은 찰나에 문득 제 눈앞에 나타난 안 해의 모양을 길이길이 잊지 않으려고 그 바위를 새기기 시작하였다. 제 환 상에 떠오른 사랑하는 안해의 모양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 했다. 그는 제 예술로 죽은 안해를 살리고 아울러 부처님에까지 천도하려 한 것이다. 이 조각이 완성되면서 자기 역시 못 가운데 몸을 던져 안해의 뒤를 따랐 다. 불국사 남서방에 영지(影池)란 못이 있으니 여기가 곧 아사녀와 당나라 석 수가 빠져 죽은 데다. 내가 찾을 때엔 장마가 막 그친 뒤라 누런 물결이 산 발치의 소나무 가지에 넘실 거리는데, 부처님을 새긴 천연의 돌은 지난 날 의 애화를 다시금 일러 주는 듯. 그 새김의 선(線)이 자못 섬세한 것은 부 처님을 새기면서도 알뜰한 자기 안해의 환영이 머리를 지배한 탓인가? 다보탑과 석가탑에 무한 경탄과 감개를 마지 않다가 대웅전을 디미다보니 정면에 엄연히 선 삼위불(三位佛)의 입상이 보통 부처님보담은 어마어마하 게 크다마는 신라 당시의 유물은 아니고, 영묘조(英廟朝)에 개축할 때 맨들 어 놓은 것이라 하며 다만 경탄할 것은 개축할 때 천장과 벽에 올린 휘황찬 란한 단청이 3백여 년을 지난 오늘날에도 조금도 빛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 이다. 무슨 물감을 어떻게 풀어서 썼는지 채색 학자의 연구 문제라던가. 앞 길이 바쁘매 아츰도 굶은 채로 석굴암을 향해 또 다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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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현진건, 『고도순례 경주(古都巡禮慶州)』(19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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