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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27일 (수) 00: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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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가

  • 김수영(1921-1968)
    • 1945년 <묘정의 노래>를 <<예술부락>>에 발표하며 문단에 나옴.
    • 종로에서 주로 생활했으며, 그의 자택은 종로 6가에 위치했음.
    • 어머니가 운영하던 식당 <유명옥>, 박인환이 운영하던 책방 <마리서사>에서 자주 보임.
    • <마리서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박인환과 김수영은 라이벌 관계였으며 김수영은 박인환보다 화가 박일영을 더 따랐음.
  • 박인환(1926-1956)
    • <목마와 숙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모더니스트 시인.
    • 1946년 <거리>라는 시를 <<국제신보>>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장.
    • 김수영의 <묘정의 노래> 창작 시기 및 <<예술부락>> 편집 시기를 보면 김수영이 1년 일찍 등단한 것으로 보지만, 실제 <<예술부락>> 발표시기는 1946.1이기 때문에 등단 시기를 같게 보는 관점도 있음.
    • 김수영의 등단작을 박인환이 "낡았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한 일화는 유명함. 김수영도 산문 <박인환>뿐만 아니라 다양한 글을 통해서 이에 대해 회고하고 있음.
  • 박일영(미상)
    • 해방직후 초현실주의 화가로 김수영과 간판 작업일을 했음.
    • 김수영이 그를 따라 다니면서, '복쌍'이라고 칭했음.
    • 김수영의 산문 <여배우와 사랑 - 나와 가극단>에 처음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김수영의 예술가로서의 양심이나 윤리에 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재평가 됨(유성호).
  • 임화
    • 1920년대~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주도했던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서기장 출신.
    • 시인이자, 소설, 평론, 문학사 등 광범위한 문학적 작업을 시도했고 영화 출연 및 제작 등도 겸해 조선의 발렌티노라 불렸음.
    • 본명은 임인식이며, 보성고보 중퇴였지만 1930년대 그가 남긴 집필활동은 문학사에서 상당히 문제적임.
    • 해방 직후에는 해방운동기념시집에 참여했으나, 뒤늦게 월북하게 되고 미제 스파이 사건으로 처형 당함.
  • 박상진
  • 김병욱
  • 김경린
  • 김경희
  • 임호권
  • 양병식
  • 정인보
  • 홍명희
  • 안재홍
  • 정지용
  • 김기림
  • 김광균
  • 김광섭
  • 이용악
  • 박종화
  • 오장환
  • 조지훈
  • 이한직
  • 이시우
  • 조우식
  • 이활
  • 배인철
  • 장만영
  • 전봉래
  • 박태진


2. 공간

  • 마리서사
    • 해방 직후 박인환이 만든 책방(1946~1948로 추정)
    • 이 책방에는 박인환이 경도되어 있던 모더니즘 문학이 주 서적이었음.
    • 이곳에 해방 직후 모더니스트, 리버럴리스트, 리얼리스트 할 것 없이 젊은 예술가들이 많이 모였음. 이러한 관점에서 <마리서사> 공간을 유럽의 근대적 살롱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음(김웅기).
  • 휘가로
  • 청포도
  • 하루방

3. 작품

  •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 박인환, 김경린 등이 주도하고 김수영이 참여한 신시론 동인의 엔솔로지 차원의 제 2시집.
  • 신시론
  • 해방기념시집
    • 해방기념시집이 나왔을 당시에는 정지용, 임화, 조지훈, 김광섭, 김기림 등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데올로기적 갈등에 사로잡히지 않은 작품집이라 할 수 있음. 비슷한 맥락으로 <횃불>아나 <연간조선시집> 등도 있음. 이 이후 좌익문학의 선봉장이었던 임화가 조선문학건설본부를 결성하였고, 김태준의 주도 아래 조선문학가동맹으로 통합됨. 이에 맞추어 우익에서 양주동 이헌구, 유치진 등이 중심이 되어 중앙문화협회를 결성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장의 좌우대립이 가시화됨(최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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