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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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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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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적십자 대표단이 왔을 때도 양상이 비슷했다. '''북의 대표단을 워커힐호텔로 데려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고고클럽에 데려가기도 했다. 남쪽의 ‘자유’를 맛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당시 남측이 북쪽에 불어넣으려고 한 ‘자유’는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남쪽 인사들은 이처럼 다분히 속물적인 자유의 분위기를 북에 보이려 했고, 북쪽 사람들이 이를 맛보면 이념적인 세뇌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본성과 감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이는 남북대화의 쟁점이었던 인도주의와 통일(정치)논쟁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종종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ref>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265-266.</ref>
 
:*북의 적십자 대표단이 왔을 때도 양상이 비슷했다. '''북의 대표단을 워커힐호텔로 데려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고고클럽에 데려가기도 했다. 남쪽의 ‘자유’를 맛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당시 남측이 북쪽에 불어넣으려고 한 ‘자유’는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남쪽 인사들은 이처럼 다분히 속물적인 자유의 분위기를 북에 보이려 했고, 북쪽 사람들이 이를 맛보면 이념적인 세뇌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본성과 감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이는 남북대화의 쟁점이었던 인도주의와 통일(정치)논쟁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종종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ref>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265-26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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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워커힐 호텔에서 보여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이 바로 워커힐 하니비 쇼(워커힐 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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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기에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조선호텔을 리모델링하고 1969년에 '웨스틴 조선호텔'로 재출범하면서 지하에 외국인만을 상대로 한 '클럽 투모로우'를 오픈하였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고고클럽이다.
 
:*1970년대의 남북 적십자회담 때 이곳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화려한 시설과 쇼'''를 보고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는 얘기가 있다.<ref>송상근, 「[책갈피 속의 오늘]1962년 워커힐호텔 준공」, 동아닷컴, 2008.12.26. <small>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81226/8676324/1</small></ref>
 
:*1970년대의 남북 적십자회담 때 이곳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화려한 시설과 쇼'''를 보고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는 얘기가 있다.<ref>송상근, 「[책갈피 속의 오늘]1962년 워커힐호텔 준공」, 동아닷컴, 2008.12.26. <small>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81226/8676324/1</smal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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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9일 (화) 23:16 판

〈워커힐과 박정희〉 데이터 목록으로 돌아가기


"처음에는 냉혈적이던 그들이 시시각각 녹아나서 떠날 때는 여심에 도취되는 등 매우 재미를 보고 갔다."[1]

  •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은 1972년 9월 12일부터 16일까지 총 4박 5일 동안 서울에서 진행되었다.
  •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는 1972년 9월 13일 밤 워커힐호텔에서 주최되었다.
  •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주최한 사람은 당시 남북적십자회담 수석대표였던 이범석이다.
  • 북한 적십자측 대표단 일행은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에서 워커힐 하니비 쇼관람했다.

...여기에서 도출된 연결 고리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워커힐호텔──(주최)──▶워커힐 하니비 쇼◀──(관람)──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주최)──이범석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의 포함 범위는...


박정희 재임기간
1963 1964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남북적십자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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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장소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 사진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 사진
판문점 통일로 조선호텔
창덕궁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
(現 국립민속박물관)
워커힐 호텔 현충사 청와대 영빈관


남북적십자회담

  • 남북적십자회담은 1000만 남북 이산가족들의 인간적 고통을 해소하고 궁극적으로 재결합을 주선해 주기 위하여 남·북적십자사 간에 열린 회담이다.
분류:
정치 사건 현대 남북회담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


"북한 적십자 측 대표단 일행은 이날 밤 워커힐에서 우리 측 이범석 수석대표가 베푼 만찬회에 참석, 국악과 민속예술에서부터 인기가수의 노래와 무용 등 다채로운 무대를 보고 경탄했습니다."[2]


▲ 제2차 남북적십자회담 만찬회 영상
  • 북의 적십자 대표단이 왔을 때도 양상이 비슷했다. 북의 대표단을 워커힐호텔로 데려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고고클럽에 데려가기도 했다. 남쪽의 ‘자유’를 맛보여주기 위해서였다. // 당시 남측이 북쪽에 불어넣으려고 한 ‘자유’는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남쪽 인사들은 이처럼 다분히 속물적인 자유의 분위기를 북에 보이려 했고, 북쪽 사람들이 이를 맛보면 이념적인 세뇌상태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본성과 감성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 같다. 이는 남북대화의 쟁점이었던 인도주의와 통일(정치)논쟁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남쪽에서 ‘인간적’이라는 의미는 종종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3]
    • 이때 워커힐 호텔에서 보여준 '무희들이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올리는 캉캉춤'이 바로 워커힐 하니비 쇼(워커힐 쇼)이다.
    • 박정희 정권 시기에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조선호텔을 리모델링하고 1969년에 '웨스틴 조선호텔'로 재출범하면서 지하에 외국인만을 상대로 한 '클럽 투모로우'를 오픈하였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고고클럽이다.
  • 1970년대의 남북 적십자회담 때 이곳을 방문한 북한 대표단이 화려한 시설과 쇼를 보고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전형이라고 비난했다는 얘기가 있다.[4]


각주

  1.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 / 조호연, 「[여적]워커힐의 북한 손님」, 경향신문, 2018.02.27.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802272033005
  2. "대한뉴스 제 897호-제 2차 남북 적십자 회담", KTV 대한늬우스, 2016.11.22. https://www.youtube.com/embed/Hm-Z1RSKeBE?rel=0&start=173&end=217
  3. 홍석률, 『분단의 히스테리』, 창비, (2012), 265-266.
  4. 송상근, 「[책갈피 속의 오늘]1962년 워커힐호텔 준공」, 동아닷컴, 2008.12.26.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081226/86763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