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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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15일 (일) 19:38 판 (대동운부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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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

물품, 사람(인적 교류), 제도, 언어, 물품, 풍속.

대동운부군옥

몽고 풍속에 정수리로부터 이마까지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 형태를 네모나게 하고 그 가운데 머리카락을 두는 것을 겁구아라고 하는데, 고려 원종 때 궁중에서 이미 머리카락을 잘랐으나 여러 신하들은 당시에 아직 자르지 않으니, 왕이 꾸짖어 따르게 했다.

원나라 풍속에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깎아 이마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모양을 모나게 하고 머리카락은 그 가운데 두었는데 이것을 일러서 '겁구아'라고 했다.

원나라 태후가 사신을 보내 충선왕에게 숙비의 고고를 내려 주었다. 고고는 몽고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모자 이름이다.

홍약이 원나라에 들어가 보초 백여정으로 서적 만팔백 권을 구입하여 환국하였다.</br> 원나라 세조가 고려의 왕에게 금선주사와 색깔 있는 명주를 하사하였다. 고려 원종 때 토번의 중이 원나라로부터 나와서 면탑과 면들을 만들어 복을 빌었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는 목면이 없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가서 비로소 씨앗을 얻어왔다. 충선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가서 납폐를 하고 실련공주에게 장가드는데, 잔치의 상에 고려에서 가져온 유밀과를 사용하였다. 보리 가루와 유밀을 섞어서 밀과를 만드는데, 이 말은 방언이다. 발도는 '발돌'이라고도 쓰는데 몽고어로 용감하여 대적할 상대가 없는 사람에 대한 명칭이다. 고려 공민왕이 기 황후의 어머니를 위하여 패아찰연을 마련하고 또 태자가 거처하는 곳에 행차하여 방몰연을 마련했다. 원나라 법에 잔치를 연 다음날 다시 잔치하는 것을 '방몰'이라 한다. 원나라 세조가 김방경에게 흰 깃으로 만든 갑옷을 하사했다. 원의 황제가 충선왕이 정책의 공이 있다 하여 벽전과 금대를 하사하였다. 비도, 분도 등은 예전에 우리나라에 없던 품종이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공주에게 장가든 뒤, 우리나라로 돌아올 적에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원나라 순제가 공민왕에게 보검 300자루를 하사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고려왕에게 서금 한 단을 하사했다. 국화 가운데 소설오라는 종자가 있는데 그 색깔이 희다.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원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죽었는데 무후가 매우 애도하고 사예시에 명하여 널을 보내 신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홍자번이 원나라에서 죽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명하여 역함의 수레로 널을 보내게 했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새로 만든 수시력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허형과 곽수경이 편찬한 것이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요동수정도를 보고 수역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배신 정가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려는 산천과 숲 덤불이 국토의 10분의 7을 차지하고 있어, 밭 갈고 베 짜는데 노력을 하여도 겨우 자급할 정도이다. 하물며 고려 사람들은 바닷길에 익숙하지 않으니, 저의 좁은 견해로 보건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불편할까 염려됩니다"하 하니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혁파하였다. "배는 물 위에 있는 역이네" 원종이 몽고의 제도를 따라 순미소를 설치하고 밤마다 순찰하여 사람들이 밤에 다니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 설손이 원나라 단본당 정자가 되었다가 난리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이 그와 단본당에서 교유하였기 때문에 신하를 보내 그를 마중하여 위로함이 줄을 이었다. 그를 만나보고는 넉넉하게 예우하였으며 땅을 하사하고 군에 봉해주었다. 고려 충렬왕 때 태사국을 맡은 오윤부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일찍이 봄 가을의 가운데 달 가운데 원무일을 사일(祀日)로 했는데 송나라 원나라 역법과 현행 역법에는 모두 근무일을 사일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근무일을 쓰기 바랍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나라 사신 곽영석이 고려의 지도를 보고자 하였다. 임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산수의 영이함을 알고 싶으며 지금 위로 황후와 아래로 황태자를 보시오. 어찌 수려한 기운을 타고난 것이 아니겠소?" 하였다. 곽영석이 무릎을 치며 놓게 읊조려 말하기를 "마침내 세상의 부모 마음으로 하여금 아들을 낳기에 중시하지 않고 딸을 낳기를 중시하게 하겠구나"라 하였다. 자는 거진. 상원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몽고어를 익혔는데, 여러 번 사명을 받들어가서 공적이 뚜렸하였다. 충렬왕 때 왕족 가운데서 동쪽 나라에 원한을 품고서 풍속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인규가 아뢰어 분명하게 논변하여 일이 드디어 조용해지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중찬에 임명되자, 조인규가 말하기를 "홍자번은 덕망으로 이부상서가 되었는데 신이 그 위에 있게 되면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굳이 사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중찬에 임명되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그에게 나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다만 토지와 백성들을 많이 끌어 모았고 권력으로 그 당시를 마음대로 하였다. 시호는 정숙이다. 아들 서, 연, 위 등은 모두 다음에 보인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지손연을 크게 벌였다. 지손은 중국말로 색깔이란 말인데 지손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관이 모두 한 빛깔이다. 고려 예종 때에 원나라 휘종이 종과 경을 각각 한 틀씩 하사했는데 홍건적의 난에 흩어져서 거의 사라질 뻔했다. 어떤 늙은 악공이 종과 경 두 가지를 못 속에 던져 보존할 수 있었다. 인후는 본래 몽고의 겁령구로서 공주를 따라 우리나라로 왔다. 고려 충렬왕이 장군에 제수하고 이름을 고치고자 하니 인후가 대장군 인공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절친이니 어찌 너의 성을 빌리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성을 고쳐 인(印)이라 하였다. 충렬왕 12년에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송골매를 잡게 하였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해청요자를 하사하였다. 고려 충선왕 때의 사람으로 벼슬하여 판전교 사시가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태자부참군박사가 되었다. 유연이 강남으로 가서 서적을 구입했는데 홍약이 보초 150정을 주어서 1만 8백 권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후에 황제가 홍약의 청으로 사신을 보내어 1천 여 권의 책을 하사했는데 모두 송나라의 비각에 소장된 것이었다.

성호사설

송남잡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