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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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

물품, 사람(인적 교류), 제도, 언어, 물품, 풍속.

대동운부군옥

몽고 풍속에 정수리로부터 이마까지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 형태를 네모나게 하고 그 가운데 머리카락을 두는 것을 겁구아라고 하는데, 고려 원종 때 궁중에서 이미 머리카락을 잘랐으나 여러 신하들은 당시에 아직 자르지 않으니, 왕이 꾸짖어 따르게 했다.
원나라 풍속에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깎아 이마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모양을 모나게 하고 머리카락은 그 가운데 두었는데 이것을 일러서 '겁구아'라고 했다.
원나라 태후가 사신을 보내 충선왕에게 숙비의 고고를 내려 주었다.
고고는 몽고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모자 이름이다.
홍약이 원나라에 들어가 보초 백여정으로 서적 만팔백 권을 구입하여 환국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고려의 왕에게 금선주사와 색깔 있는 명주를 하사하였다.
고려 원종 때 토번의 중이 원나라로부터 나와서 면탑과 면들을 만들어 복을 빌었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는 목면이 없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가서 비로소 씨앗을 얻어왔다.
충선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가서 납폐를 하고 실련공주에게 장가드는데, 잔치의 상에 고려에서 가져온 유밀과를 사용하였다.
보리 가루와 유밀을 섞어서 밀과를 만드는데, 이 말은 방언이다.
발도는 '발돌'이라고도 쓰는데 몽고어로 용감하여 대적할 상대가 없는 사람에 대한 명칭이다.
고려 공민왕이 기 황후의 어머니를 위하여 패아찰연을 마련하고 또 태자가 거처하는 곳에 행차하여 방몰연을 마련했다.
원나라 법에 잔치를 연 다음날 다시 잔치하는 것을 '방몰'이라 한다.
원나라 세조가 김방경에게 흰 깃으로 만든 갑옷을 하사했다.
원의 황제가 충선왕이 정책의 공이 있다 하여 벽전과 금대를 하사하였다.
비도, 분도 등은 예전에 우리나라에 없던 품종이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공주에게 장가든 뒤, 우리나라로 돌아올 적에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원나라 순제가 공민왕에게 보검 300자루를 하사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고려왕에게 서금 한 단을 하사했다.
국화 가운데 소설오라는 종자가 있는데 그 색깔이 희다.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원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죽었는데 무후가 매우 애도하고 사예시에 명하여 널을 보내 신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홍자번이 원나라에서 죽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명하여 역함의 수레로 널을 보내게 했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새로 만든 수시력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허형과 곽수경이 편찬한 것이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요동수정도를 보고 수역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배신 정가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려는 산천과 숲 덤불이 국토의 10분의 7을 차지하고 있어, 밭 갈고 베 짜는데 노력을 하여도 겨우 자급할 정도이다.
하물며 고려 사람들은 바닷길에 익숙하지 않으니, 저의 좁은 견해로 보건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불편할까 염려됩니다"하 하니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혁파하였다.
"배는 물 위에 있는 역이네" 원종이 몽고의 제도를 따라 순미소를 설치하고 밤마다 순찰하여 사람들이 밤에 다니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
설손이 원나라 단본당 정자가 되었다가 난리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이 그와 단본당에서 교유하였기 때문에 신하를 보내 그를 마중하여 위로함이 줄을 이었다.
그를 만나보고는 넉넉하게 예우하였으며 땅을 하사하고 군에 봉해주었다.
고려 충렬왕 때 태사국을 맡은 오윤부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일찍이 봄 가을의 가운데 달 가운데 원무일을 사일(祀日)로 했는데 송나라 원나라 역법과 현행 역법에는 모두 근무일을 사일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근무일을 쓰기 바랍니다.
"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나라 사신 곽영석이 고려의 지도를 보고자 하였다.
임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산수의 영이함을 알고 싶으며 지금 위로 황후와 아래로 황태자를 보시오. 어찌 수려한 기운을 타고난 것이 아니겠소?" 하였다.
곽영석이 무릎을 치며 놓게 읊조려 말하기를 "마침내 세상의 부모 마음으로 하여금 아들을 낳기에 중시하지 않고 딸을 낳기를 중시하게 하겠구나"라 하였다.
자는 거진. 상원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몽고어를 익혔는데, 여러 번 사명을 받들어가서 공적이 뚜렸하였다.
충렬왕 때 왕족 가운데서 동쪽 나라에 원한을 품고서 풍속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인규가 아뢰어 분명하게 논변하여 일이 드디어 조용해지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중찬에 임명되자, 조인규가 말하기를 "홍자번은 덕망으로 이부상서가 되었는데 신이 그 위에 있게 되면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굳이 사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중찬에 임명되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그에게 나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다만 토지와 백성들을 많이 끌어 모았고 권력으로 그 당시를 마음대로 하였다.
시호는 정숙이다.
아들 서, 연, 위 등은 모두 다음에 보인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지손연을 크게 벌였다.
지손은 중국말로 색깔이란 말인데 지손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관이 모두 한 빛깔이다.
고려 예종 때에 원나라 휘종이 종과 경을 각각 한 틀씩 하사했는데 홍건적의 난에 흩어져서 거의 사라질 뻔했다.
어떤 늙은 악공이 종과 경 두 가지를 못 속에 던져 보존할 수 있었다.
인후는 본래 몽고의 겁령구로서 공주를 따라 우리나라로 왔다.
고려 충렬왕이 장군에 제수하고 이름을 고치고자 하니 인후가 대장군 인공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절친이니 어찌 너의 성을 빌리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성을 고쳐 인(印)이라 하였다.
충렬왕 12년에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송골매를 잡게 하였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해청요자를 하사하였다.
고려 충선왕 때의 사람으로 벼슬하여 판전교 사시가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태자부참군박사가 되었다.
유연이 강남으로 가서 서적을 구입했는데 홍약이 보초 150정을 주어서 1만 8백 권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후에 황제가 홍약의 청으로 사신을 보내어 1천 여 권의 책을 하사했는데 모두 송나라의 비각에 소장된 것이었다.

성호사설

대부가 처첩을 두는 것은 법에서 금하지 않은 것인데 아마도 그때에 왕이 원(元) 나라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듯하며, 조선에 들어와서는 서선(徐選)이 법을 세운 후부터 개가(改嫁)한 여자의 자손에 대하여 앞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나 충렬왕(忠烈王) 15년에 원(元) 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고려로 통첩을 보내 청사(靑砂)로 만든 독ㆍ동이ㆍ병 등을 구해 갔다 하니
제주에서 생산되는 말도 원(元) 나라 때부터 들어온 것이니, 지금도 만약 이런 이유를 들어서 상국(上國)에 주청(奏請)한다면 반드시 허락해 줄 것이다.
  제주 목장은 원 세조(元世祖) 때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금령(禁令)이 있어 키가 큰 종자를 얻을 수가 없다.
옛날 충선왕(忠宣王)이 세자(世子)로서 원(元) 나라에 들어갔을 때 그들의 잔치상에 우리나라 유밀과(油蜜果)를 썼다 하니
원(元) 나라 사람 양윤부(楊允孚)의 시에, 고려 식품 중에 맛 좋은 생채를 다시 이야기하니(更說高麗生菜美) 향기로운 새박나물과 줄나물을 모두 수입해 들여온다(摠輸山後藦菰香)하고 요즈음 이 괘배를 도복(道服) 위에다 덮어 입는 이도 약간 있으니, 추측컨대 고려 시대에도 역시 이와 같이 했고 원 나라 사람은 본떠서 만들었던 것인 듯하다.
구준(丘濬)은 이르기를, “면화는 원(元) 나라 때 비로소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였으니, 무엇을 의거해서 그렇다고 했는지? 가소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원 세조가 만났다는 각단과는 분명 딴 짐승인데, 옛날이건 지금이건 학식이 넓은 자로서도 능히 분변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원 세조가 보았다는 각단도 역시 뿔이 하나뿐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필시 서쪽 나라에서 생산되는 기린 따위였을 것이다.
원(元) 나라 이전엔 둥근 부채[團扇]만 있고 접는 것은 없었는데, 원 나라 초기에 외국 사신이 가진 접선(摺扇)을 처음 보았다.
  제주에서 나는 말은 본래 대원(大宛)의 종자를 원 세조(元世祖)가 번식시키라고 보내주었던 것이다.
왕씨(王氏 고려)가 일어나서 삼국을 통일하고, 한강 하류 비옥한 곳에 서울을 정하였으나, 물자가 원(元) 나라로 들어가고 전쟁의 경보(警報)가 잦아 미처 번성할 겨를이 없었다.
또 우리나라에서 제주산으로 주장을 삼는데, 제주산은 본래 원 세조(元世祖)가 창시한 대완종(大宛種)이다.
국초에는 높고 건조한 산협 지대에 목장들이 많이 있었으니, 생각건대 고려(高麗) 때에는 금(金) 나라ㆍ원(元) 나라와 섞여 살았으므로 사냥하는 풍속이 서로 같았는데, 후일에 와서 점점 그것이 폐지됨으로써 사람만 그 환을 당할 뿐 아니라 마정(馬政)까지도 편의함을 잃게 되었다.
고려 충선왕에 이르러 원 나라 공주에게 장가가는 데도 백마(白馬) 81필로 폐백을 하여 그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있으니, 대혼(大婚)의 유속을 상상하여 알 수 있다.
이보다 앞서 원 나라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서 우리나라 사람으로 향도(嚮導)를 삼았는데, 왜인들이 의심하고 모두 죽이려하여 간신히 도망하여 살아 돌아온 자가 있었다.
원 나라는 그의 말을 믿고 원 나라 승상(丞相) 안동(安童)의 편지를 주어 고려로 돌려보냈는데 그 편지에, ‘듣건대 왕(王)의 나라에는 생산되는 약품(藥品)이 많다고 하므로 그것을 조금 준비하려고 한다.
고려 말기에는 자주 우리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왔고, 신우(辛禑) 3년(1377)에는 북원의 선광(宣光)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
원(元) 나라 때에 정개부(鄭介夫)가 정전론(井田論)을 올려 말하기를 또 지원(至元 원 세조(元世祖)의 연호. 1264~1294) 연간에 해적(海賊) 주청(朱淸)과 장선(張瑄)을 불러다 금부(金符)를 주어 운수하도록 해서 능히 1만 3천여 리를 운행하였으니, 경사(京師)에서는 편리할 뿐더러 비용을 절약함도 적지 않다고 하였다.
원 세조(元世祖 홀필렬(忽必烈)을 이름)가 일찍이 말하기를, “중서(中書)는 짐(朕)의 왼손이고, 추밀(樞密)은 짐의 오른손이며, 어사대(御史臺)는 짐의 의원이다.
두 손에 있는 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혈맥이 마비되어 통하지 못하여 몸이 하는 일에 아무 관계도 없게 된다.
” 고 하였다.
원 나라는 부세와 역사를 헐하게 하였는데, 명 나라의 가혹하고 세밀한 것이 이어져서, 치고 싸우기를 쉬지 않아 천하가 괴롭게 여기다가 명 나라가 망한 뒤에 사람들이 다시 한(漢 여기는 명 나라를 이름)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으니, 백천만 년 뒤에는 또 장차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하겠다.
그러나, 묘정(廟庭)에 종향(從享)된 이들 중에 한(漢)ㆍ진(晉)의 여러 선비는 참여하지 아니하고, 다만 당(唐)의 한 문공(韓文公 한유(韓愈)의 시호)과 송(宋)의 여러 철인(哲人)과 원(元)의 허ㆍ오(許吳 허형(許衡)과 오징(吳澄))가 반열에 참여하였으니, 아마도 문성공이 원 나라 때 사람이므로 혹 원 나라 때의 제도를 따라 그런 것인 듯하다.
원(元) 나라 학사(學士)인 승지(承旨) 기기(巙巙)의 말에, “천하의 일은 재상(宰相)이 말하는 것이나 재상이 못한다면 대간(臺諫)이 말해야 하고, 대간이 못한다면 경연(經筵)에서 말해야 한다.
소위 골고루 배정했다는 것은 절약하여 했다는 말인데, 원(元) 나라 세대가 끝나도록 천하에 징수하는 부세가 모두 가볍게 되어 백성이 편히 살 수 있었으니, 이것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 나라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임금이 되어서는 수자리 사는 부역을 혁파시켰고 꼴을 실어 나르고 곡식을 끌고 다니는 수고를 없애는가 하면 요역(徭役)과 세금을 가볍게 하여 백성을 잘 살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오랑캐를 높이고 중국을 천하게 여겨서 외직과 내직에 우두머리 벼슬은 모두 본국인이었고, 중국 사람은 대개 참좌(參佐)에 지나지 않았다.
소위 저들의 오랑캐 관리는 중국말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위와 아래가 통정이 되지 않아서 억울한 일이 자주 생겼다.
뒤에 원 나라가 중국에 들어와 황제가 되자 화인(華人)의 상복(常服)을 금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는, 오랑캐 원(元) 나라가 천하를 차지하고도 중국 의관(衣冠)의 옛 제도를 변경시키지 않았다고 하는데 남추강(南秋江 추강은 남효온(南孝溫)의 호)의 시에, 가소롭다 허문경은(可笑許文敬)머리 풀고 그 신하가 되단 말인가(被髮爲其臣) 하였다.
그러나 원 나라의 군신도상(君臣圖像)에, 허문경은 선비의 의관 그대로인데, 《명사》를 살펴보면 홍무(洪武) 원년 11월에 조서를 내려, “오랑캐의 풍속을 금하고 모두 중국 의관의 옛 제도를 회복하라.”고 하였다.
원 세조가 북막(北漠)으로부터 천하를 차지하고 모조리 오랑캐 풍속으로 중국의 제도를 변경시켜 선비나 서민이 모두 머리를 땋아서 상투를 틀고 첨(簷)이 깊숙한 되놈의 모자를 쓰고 의복을 고습(袴褶)ㆍ착수(窄袖)와 판선(瓣線)ㆍ요습(腰褶)을 입었다고 한다.
또한 원 나라에서 의복을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 선비나 서민들이 날이 오래 되어 감에 따라 차츰 물들어 스스로 옛 제도를 변경하게 되었거나, 선비와 대부만은 변경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에 한해서도 금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송남잡지

호박사(琥珀詞)'는 바로 '화불사(火不思)'(현악기의 일종. 원나라 때 중국에 유입되었음.)이다.
《정자통(正字通)》에서 "哩의 음은 '리'이니 타라니어(陀羅尼語)에서 나왔다. 여음(餘音)을 말한다. 원나라 사곡(詞曲)에서 조어(助語)로 차용되었다"라고 하였다.
지봉(芝峯) 이수광(李睟光)이 "본래는 중국 배우, 마술사의 부류이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로는 고려 말에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고려 제31대 공민왕의 정비(正妃). 원나라 공주출신으로 위왕(魏王)의 딸이며 이름은 보탑실리(寶塔實里)라고 하였다. 노국대장공주는 그 시호(諡號)이다. 공민왕이 대군으로서 원나라에서 숙위(宿衛)하고 있을 때 결혼하여 승의공주(承懿公主)로 책봉되었다.)가 시집 올 때에 따라왔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교역할 때 그들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몽달군'이라고 한다.
정조가 "광해군 때부터 규장이라는 명칭만 있고 각은 없다"라고 하고 특별히 명하여 규장각을 세우게 하였는데, 곧 송나라 '용도각' ∙ 원나라 '환장각'과 같은 성격이니 임금의 화상과 필적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전세에는 단지 궁궐 안의 관서를 칭하였는데, 원나라 때 기내 주부에 직예중서성을 두었고 외방의 여러 도에 행중서성을 세웠기 때문에, 성이라고 칭한다.
지봉 이수광이 "중국에는 소상을 사용하고 우리나라에 위판을 사용하는데 오로지 개성과 평양에 안치된 소상은 또한 원나라 때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노비에게 세금을 거두는 사람을 '달화주(達化主)'라 이르는데, 이는 원(元)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따라 쓰다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도치(闍赤)'는 몽고말로 서생(書生)이고 '팔합식(八合識)'은 사부(師傅)이다.
조선 시대에도 내삼청(內三廳)에 소속된 하인을 '조라치(照羅赤)'라고 하니 이것은 고려가 익숙하게 쓰던 위구르(몽골 유원에서 일어나 뒤에 투르키스탄 지방으로 이주한 터키계의 유목 민족)의 말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래서 지금 교시(交市)를 할 때에 '몽달군(蒙韃軍)'이 있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와전되어 '몽달귀신(蒙韃鬼神)'이라고 하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고려 원종(元宗) 때 조량필(조량필)이 일본에 사신을 가서 밤열매를 얻어서 귀국하여 의안(義安), 즉 창원(昌原)에 심었다.
충렬왕(忠烈王)때에는 원나라에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