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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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0월 12일 (토) 21:15 판 (새 문서: 初七日,在杭州,是日陰,請朝,太監使官人來問曰:“鄭麟趾、申叔舟、成三問、金完之、趙惠、李思哲、李邊、李堅已上,俱係朝鮮人物,是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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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七日,在杭州,是日陰,請朝,太監使官人來問曰:“鄭麟趾、申叔舟、成三問、金完之、趙惠、李思哲、李邊、李堅已上,俱係朝鮮人物,是何官職,一一開報來知”臣答曰:“鄭麟趾、申叔舟、李思哲,俱位至一品;成三問位至三品;李邊、金完之、趙惠、李堅,則我以後進之士,不知其人之職品,”有姓名顧壁掌曝中事者,謂臣等曰:“你所食之物,係是朝廷與的,作數支銷,待一年有文簿到部,本驛丞貴州夷人,專不曉得人事,就如孩童一般,不會票上司,以致你等食不敷也,”又曰:“來此看人都是人,不可與他說話,有傷神氣”云云,夕,按察提調學校副使鄭大人,與一大人借到于驛,招臣至前,問曰:“你國科目之制如何?”臣曰:“有進士試、生員試、文科·武科試,又有文·武科重試.”又問曰:“其試士如何?”臣曰:“每於寅、申、已、亥年秋,聚儒生精業者,試以三場;初場疑義論中二篇;中場賦表記中二篇;終場策文一道,取若干人,翌年春,又聚入格者,試以三場;初場背講四書五經,取通四書三經者,中場賦表記中二篇,終場策文一道,取“三十三人,又聚三十三人,試以策文一道分次第,謂之登文科第,許放榜,賜紅牌,給花盖,遊街三日後,又賜恩榮宴、榮親宴、榮貨宴,許通出仕之路.”又問曰:“文章體格如何?”臣曰:“表做宋元播芳,記論做唐宋,義括出五經文,疑拍出四書文為題,並遵華格,策文做《文選》對策,又問:“你治何經?”臣曰:“四書五經,雖未精研,粗嘗涉躍.”又問曰:“經書你可歷數其名?”臣曰:“庸、學、論、孟為四書,易、詩、書、春秋、禮記為五經.”又問曰:“易字何義?”臣曰:“以易字形言之,則合日月字也,以易字義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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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則有交易變易之義,”又問曰:“易之位數,寓於何物?”臣曰:“河出圖,洛出書,聖人則之”又問曰:“非圖書,則不能作易乎?”臣曰:“天下萬物,皆有數,雖見賣者,亦可以推測易中之位數也.”兩大人相顧目擊,謂臣曰:“你實讀書士,此地人固不識也.”鄭大人忘其名,號東園子,齋名即復齋

항주에 머물렀습니다.

이 날은 흐렸습니다.

새벽에 태감(太監)21이 관인(官人)을 시켜 묻기를, “정인지鄭麟趾)22[1][2][3][4] · 신숙주(申叔舟)23[5][6][7] . 성삼문(成三問)24[8] . 김완지(金荒之) · 조혜(__惠)25 . 이사철(李思哲)26 . 이변(李邊)27 . 이견(李堅)은 모두 조선의 인물들인데, 이들이 어떤 관직에 있었는가를 일일이 적어 알려 주시오”라고 하였습니다.

  • 1450년(세종32년) 명나라 경제(景帝)의 즉위를 알리러 조선에 온 한림원시강(侍講) 예겸, 니첸을 접대하고 시를 화답한 조선의 관료들[9]
  • 성삼문·신숙주·정인지와 명나라의 봉사(奉使) 예겸의 시문 37편을 모아 수록한 문서[10]
  • 조선vs명 '시(poetry)배틀' [11]
  • 중국 사신의 기록 [12]
  • 명나라 문신의 사조선록[13]

신이 대답하기를, “정인지 · 신숙주 · 이사철은 모두 관위(官位)가 1품까지 이르렀고, 성삼문은 3품에 이르렀으며, 이변 · 김완지 · 조혜 · 이견은 내가 후배28로서 그 사람들의 벼슬 품계를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역중(驛中)의 사무를 맡은 고벽(顧壁)이란 자가 와서 신 등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먹는 물품은 조정에서 주는 것인데, 지출하려면 1년을 기다려야 문부(文簿)가 부(部)에 도착할 것입니다. 본 역승은 귀주(貴州)의 이인(夷人)29으로서 물정을 전혀 모르는 것이 꼭 어린애와 같고 상사(上司)에게 상신할 줄을 몰라서 당신들이 먹을 것을 넉넉하게 장만하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고, 또“이곳에 와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니 그들과 이야기해서 원기를 떨어뜨리지 마십시오”라는 등의 말을 하였습니다.

저녁에 안찰제조학교부사(按察提調學校副使) 정(鄭)대인이 어떤 대인과 함께 역에 이르러 신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는 묻기를,

“당신 나라의 과거 제도는 어떠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진사시(進士試) 생원시(生員試)30 · 문과시(文科試)31 ·무과시(武科試)32 가 있고, 또 문과(文科)·무과(武科)의 중시(重試)가 있습니다.”

“사인(士人)의 시험은 어떻게 치룹니까?”

“인년(寅年)·신년(申年)·사년(巳年)·해년(亥年)의 가을마다 유생(儒生)으로서 학업에 정통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三場)으로써 시험을 봅니다. 초장(初場)에는 의(疑) · 의(義). 논(論) 중에서 2편(篇)을 시험하고, 중장(中場)에는 부(賦) · 표(表) · 기(記)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終場)에는 대책(對策) 1도(道)를 시험하여 몇 사람을 뽑습니다.

그 이듬해 봄에 또 합격한 사람을 모아서 삼장을 시험합니다. 초장에는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四書五經)을 외우게 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통달한 사람을 뽑고, 중장에는 부 · 표 기 중에서 2편을 시험하고, 종장에는 대책 1도를 시험하여 33인을 뽑습니다.

다시 그 33인을 모아서 대책 1도를 시험하여 등급을 나누는데, 이를 일러 문과급제라 하며 방방(放榜)을 허가하여 홍패(紅牌)를 내리고 화개(花蓋)를 주어 3일 동안 유가(遊街)하게 한 뒤에 또 은영연(恩榮宴). 영친연(榮親宴). 영분연(榮墳宴)을 내린 다음 벼슬길에 나아가도록 합니다.”

“문체(文體)는 어떠하오?”

“표(表)는 송원(宋元)의 파방(播芳)을, 기(記)와 논(論)은 당송(唐宋)을 본보기로 하고, 의(義)는 오경(五經)의 글을, 의(疑)는 사서(四書)의 글을 집어내어 제목으로 짓되 모두 중화의 체제를 따르고, 대책은 《문선(文選)》의 대책을 본보기로 삼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경서를 공부하였소?”

“사서와 오경을 비록 정밀히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일찍이 대강은 섭렵하였습니다.”

“당신은 경서의 이름을 낱낱이 셀 수 있겠소?”

“《중용(中庸)》·《대학(大學)》·《논어(論語)》·《맹자(孟子)》가 사서이고, 《역경(易經)》 ·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춘추(春秋)》 · 《예기(禮記)》가 오경입니다.”

“역(易)자는 무슨 뜻이오?”

“역(易)은 글자 모양으로 말한다면 일(日)과 월(月)을 합친 것이고, 글자 뜻으로 말한다면 바뀌고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역의 방위(方位)와 괘수(卦數)는 무엇에 근거하였소?”

“황하(黃河)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서(書)가 나오니, 성인(聖人)이 이를 본보기로 삼은 것입니다.”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아니면 역을 지을 수 없는 것이오?”

“천하의 만물에는 모두 수(數)가 있으니, 토끼를 파는 사람이 토끼를 보는 것만으로도 역 속의 방위와 패수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두 대인은 서로 돌아보고 눈짓을 하고는 신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실로 글을 읽은 선비라는 것을 이 지방 사람들이 잠시 알아보지 못했던 것 같소”라고 하였습니다. 정 대인의 이름은 잊어 버렸지만 호는 동원자(東園子), 재명(齋名)은 복재(復齋)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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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th Day. At Hang-chou. This day was cloudy.

At dawn the Overseer sent an official to question me. He said, “Chong In-ji, Sin Suk-chu, Sòng Sam-mun, Kim Wan-ji, Cho He, Yi Sa-choöl, Yi Pyốn, and Yi Kyon are all Koreans. What are their positions? Write a report for each of them and bring it here to let me know.” I answered, “Chong In-ji, Sin Suk-chu, and Yi Sa-ch’ðl have reached First Rank. Sõng Sam-mun has reached Third Rank. Yi Pyon, Kim Wan-ji, Cho He, and Yi Kyon became Chinsa after me, and I do not know their positions or ranks."8 One Ku Pi, a fellow who managed things in the station, came and said to us, "Everything you eat is given by the Court. When we calculate our disbursements, we wait a year for the ledgers to reach the Ministry. The Station Master here is a barbarian from Kuei-chou who is as utterly incapable of managing things as a child. He does not know how to provide for all contingencies in his reports to the superiors and brings it about that you do not get enough to eat.”Then he said, “The people who come here and look at you are all idlers. Do not talk with them. It is a waste of energy.” In the evening, His Excellency Cheng [Chi],9 the Surveillance Vice Commissioner for Schools, and another eminent person came to the station. They summoned me before them and asked, “What is the system of scholastic degrees in your country?”. I said “There are the Chinsa Examination, Saeng-won Examination, Civil Service and Military Service Examinations, and Civil and Military Service Second Examinations.”'10 They asked, “What are those examinations like?” I said, “Every third year, the most accomplished of the Confucian pupils are brought together and examined in three sessions. The first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explication, interpretation, or essay [forms on the classics]; the middle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rhyme-prose [fu], memorial [piao], or narrative [chi] forms; and the last session comprises a problem-essay [tuits’ê]. From this a certain number of men are selected, and in the spring of the next year they are brought together and examined in three sessions. The first session is recital from memory from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and expounding on them. Those versed in the Four Books and three of the Classics are passed. The middle session comprises two papers in rhyme-prose, memorial, and narrative forms; and the last session comprises a problem-essay. Thirty-three men are passed. Then the thirty-three are brought together and tested by a problem-essay. The standings are determined and called the Order of Graduates, and permission is given to publish the list. Royal presents of vermilion plaques are made and umbrellas given to the graduates, who parade in the streets for three days. After that, the King gives for them a Banquet of Honor, a Banquet on the Honor to Parents, and a Banquet on the Honor to Ancestors; and they are allowed to enter upon their public careers.” They asked, “What are your literary styles ?” I said, “The memorials follow the polished style of Sung and Yuan, the narratives and essays follow T’ang and Sung. Interpretations are required of passages from the Five Classics, and explications are required of passages from the Four Books. In everything we follow Chinese forms. The problem-essays follow that of Wen hsüan.”11 They asked, “What classics have you mastered?” I said, “Though I have not studied the Four Books and Five Classics thoroughly, I have browsed in them here and there.” They said, “Name the Classics and the Books in order.” I said, “The Mean, Great Learning, Analects, and Mencius are the Four Books. The Book of Changes, Book of Odes, Book of History, Spring and Autumn Annals, and Book of Rites are the Five Classics.” They asked, “What is the significance of the character i [change]?” I said, “In terms of form, the character i combines the characters jih (sun] and yüeh (moon). In terms of meaning, it has the meaning of 'exchange' and ‘substitute'.” They asked, “In what were the diagrams of the Book of Changes lodged?” I said, “The Yellow River put forth the plan, and the Lo River put forth the book. The sages took them as models.” They said, “Without the plan and the book, would it have been impossible to write the Book of Changes?” I said, “All the things of the world have numbers. Though one sees only a rabbit seller, one can deduce the diagrams in the Book of Changes.12 The two personages stared hard at each other and said to me, “You are truly a well-read gentleman. The people here have not understood that at all.” I have forgotten the given name of His Excellency Cheng. His hao was Tungyüan-tzu and his studio name Fu-chai.

21. 가장 품급이 높은 靈官으로 정4품이다. 內府 24衙門에 각각 掌印太監 1인을 두었다. 이 밖에 都督·秉筆·隨堂·守備太監 등의 명칭이 있었다. 처음 설치하였을 때에는 오로지 皇帝 및 皇室의 시중을 드는 일만을 하였으나, 후에 권세가 날로 강해져 出使 ·監軍·鎭守 및 신하와 백성의 감추어진 일을 적발해내는 등의 막강한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 본문에서는 鎭守太監 張慶을 가리킨다. 22.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로, 본관은 河東이다. 자가 伯이고, 호는 學易齋이다. 1414년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 세종의 신임을 받아 集賢殿 學士를 거쳐 直提學에 올랐다. 1427년 文科 重試에 장원 급제하여 左弼善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1453년 癸酉靖亂 때는 수양대군을 도운 공으로 우의정, 영의정까지 올랐다. 훈민정음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고, 안지 등과 함께〈龍飛御天歌)를 지었으며, 天文·曆法·雅樂 등에 대한 책을 펴냈다. 23.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호는 保閑齋이다. 1439년 親試文科에 급제하고,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다. 1447년 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부제학 등을 거쳐, 1453년 부승지로 계유정난에 참여, 정난 공신 2등이 되었다. 1454년 도승지에 오르고, 세조가 즉위하자 병조판서, 우찬성, 대사성 등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 주로서 6대왕을 섬겼고, 《國朝五禮儀》 등을 책으로 엮었다. 주요 저서로는《保閑齋集》 등이 있다. 24.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로, 호는 梅竹軒이다. 死六臣의 한 사람이다. 1438년 생원으로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여 집현전학사, 修撰 등을 지냈다. 그 뒤 왕명으로 신숙주와 함께 《禮記大文諺讀)을 편찬하고 經筵官이 되어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한글의 창제에도 참여하였다. 1455년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 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 복위를 꾀하였으나, 李豊 등과 함께 체포되어 극형을 당하였 다. 저서로는 문집인 《成謹甫集》이 있다. 25.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楊州이다. 자는 濟夫이고 호는 施齋이다. 세종21년(1439) 전라도병마도절제사를 지냈다. 1442년 호조참판으로 있을 때 賀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64년에 判中樞院事의 職을 받았다. 시호는 恭安이다. 26.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全州이고 자가 誠之이며, 시호가 文安이다. 세종14년 (1432)에 문과에 급제하여 集賢殿의 博士로 있다가 都承旨, 吏曹·禮曹判書, 左贊成 에 이르렀고, 문종2년(1452) 首陽大君을 따라 명나라에 다녀왔고, 靖難공신이 되어 左議政으로 임명, 佐翼공신이 되었다. 27.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德水이다. 세종 원년(1419) 進士試에 합격하고 承文院 博士, 藝文館大提學, 工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漢語와 吏文을 잘하여 司譯院 의 提調를 겸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여러 관직을 지낸 다음 성종3년(1472)에 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28. 이변과 조혜는 모두 최부보다 활동시기가 앞선 인물이다. 예를 들면 그중에 이변은 세종원년(1419)에 급제하였으므로, 성종13년(1482)에 급제한 최부보다 급제한 해가 훨씬 이르다. 29. 漢族이 아닌 소수민족을 가리킨다. 貴州省에는 苗族·布依族·侗族 등 여러 소수민족이 있다. 30. 생원시는 진사시와 함께 小科에 해당하는데 五經義와 四書疑 2편을 시험보는 試의 終場에 합격한 자를 生員이라 하였다. 생원에게는 진사와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 및 하급관료에 취임하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 자격만으로 관직에 나아가기는 힘들었지만 免役의 특권은 향유하였다. 31. 문관의 등용자격시험으로 東堂試라고도 한다. 숭문정책의 영향으로 가장 중시되었다. 가을에 시험하는 문과의 初試는 漢城府에서 실시하는 漢城試, 성균관에서 시행하 는 館試 및 各道에서 실시하는 鄕試의 3종이 있다. 초시의 합격자는 이듬해 봄에 서울의 明倫堂 및 조堂에서 2차시험을 보는데 이를 위試라 하였다. 복시에 합격한 자는 다시 궁궐 안의 殿庭에서 임금이 친히 시험을 주재했는데 이를 殿試라 하였다. 후기에 이르러 전시는 형식에 그치고 복시에 합격하면 사실상 최종 합격한 셈이 되었다.

32. 弓術과 講書 등을 시험과목으로 하고 문과시와 마찬가지로 초시와 복시 및 전시의 절차를 밟았다. 조선에서 무과시는 崇文정책의 영향으로 그다지 중시되지는 않았다.
  1. 서거정은 정인지의 묘비문에 왜 사주를 적어넣었을까, 조선일보, 2016.07.02
  2. [술 먹고 임금을 '너'라고 한 정승, 중앙일보, 2014.09.03]
  3. 정인지, 취중에 세조를 꾸짓다, 남해타임즈, 2014.01.23
  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16/2017061601750.html 부친 묏자리로 富貴 얻고… 자신은 납작 엎드릴 곳 찾은 정인지, 조선일보, 2017.06.17 ]
  5. 언어천재-외교 달인 신숙주(申叔舟)...과연 변절자인가?, 조선일보, 2015.10.24
  6. 신숙주는 변절의 상징? 되짚어보는 오해와 속설, 중앙일보, 2017.10.27
  7. 변절, 혹은 관리의 아이콘 ‘신숙주’…“얻기 위해선 받는 것은 적게, 주는 것은 후하게 하라”매일경제, 2016.01.13
  8. 신숙주가 본 ‘죽마고우’ 성삼문, 신동아, 2006.03.29
  9. 조선·明나라 문학외교 기록, 국보 됐다, 한국경제, 2018.08.23
  10.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
  11.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vs 예겸' 한 중 시문배틀의 승자는 누구였을까, 경향신문, 2018.08.31]
  12. <한반도를 다녀간 중국 사신의 기록>, 연합뉴스, 2012.03.09
  13. 다른 나라에서 같은 점을 찾다: 명나라 문신의 사조선록(使朝鮮錄) 연구, 두후이웨(杜慧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