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6일

pattern
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9년 10월 16일 (수) 09:03 판

이동: 둘러보기, 검색

初六日,過沛縣,是日晴,曉過頭下開、頭中間、社學、洁頭上 開、(刀)(陽湖、金溝兒淺有上中下三處,至沛縣,縣即漢高祖故里也,縣之東北有河,即泡河,河之越岸有高墩,其前建族門,(標)「標]以 ‘歌風臺’之名,即高祖歌大風之處也,縣之東南有亭躁,即高祖少為上亭長之處也,河之西岸有橋,即張良取履處,飛雲在河口,臣等其河,歷其間,觀其臺,訪其橋,至驛前,驛距河三十步,傅榮謂臣曰:“足下觀我大國制度,以謂何如?自江南抵北都,舊無河路,自至正年間以來,始為通路之計. 至我太宗朝,置平江(候)(侯]以治之,疏清源,濟濟、沛,整淮陰,以達于大江,一帶脉絡,萬里通津,舟楫濟,功保萬全,民受其賜,萬世永頼.” 臣曰:“響非此河路,則我等於崎嶇萬里之路,有百技跛行之苦,今乃安队舟中,以達遠路,不知顛仆之虞,其受賜亦大矣,”是日,自曝過水母神廟,冒夜而行.

패현(__縣)을 지났습니다.

이 날은 맑았습니다.

새벽에 고두하갑(活頭下閘)·고두중갑(活頭中閘)의 상·중·하 세 곳을 지나서 패현에 이르니, 패현은 곧 한고조(漢高祖)389의 고향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북방에 강이 있었으니 곧 포하(泡河)였습니다.

포하의 건너편 언덕에 높은 돈대(數臺)가 있었는데, 그 앞에 정문(推門)을 세워 '가풍대(歌風臺)'란 이름을 붙였으니 곧 한고조가 대풍(大風)을 노래390 한 이었습니다.

패현의 동남방에는 사정역(四亭驛)이 있었으니 곧 한고조가 젊었을 때 사상정장(泗上亭長)으로 있던 이었습니다.

포하의 서쪽 언덕에는 이교(橋)가 있었으니 곧 장량(張良)이 신을 주워 준 392이었습니다.

비운갑(飛雲間)은 포하의 어구에 있었습니다.

신 등은 그 포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을 지나 대(臺)를 구경하고 다리를 찾아보고 사정역 앞에 이르니, 사정역은 포하에서 30보 떨어져 있었습니다.

부영이 신에게 말하기를,

“족하는 우리 대국의 제도를 보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강남으로부터 북도(北都)에 이르기까지는 옛날에는 강의 수로가 없었는데, 지정(至正)393 연간으로부터 비로소 수로를 개통할 계책을 세웠습니다.394 우리 태종대에 와서 평강후(平江侯)395를 두어 이를 다스리게 하여 청원(淸源)을 소통시키고, 제수(濟水)·패수(流水)를 깊이 치고 회음(淮陰)의 땅을 파서 대강(大江)에 도달하게 하니, 한 줄기 맥락이 만 리나 되는 수로로 통하여 배가 다니는 데 안전을 보장하여 백성들이 그 은혜를 입어 만세에 길이 힘입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지금까지 이 강의 수로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들은 기구한 만 리 길에 온갖 고통을 겪었을 것인데 지금 배 가운데 편안히 누워서 먼 길을 오면서 전복의 근심을 알지 못했으니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날 사정역에서 수모신묘(水母神廟)396를 지나 밤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습니다.

6th Day. Passing P’ei District. This day was fair.

[We went from Ku-t'ou Lower Lock to P’ei District,] which had been the native place of Han Kao Tsu (r. 202 B.C. -195].80 Northeast of the district was a river, which was the P’ao. On its far bank was a high mound, in front of which a banner gate had been erected. It displayed the name Ko-feng Tower and was the place where Kao Tsu had sung of the great wind. Southeast of the district was Ssu-t'ing Station, which was the place where Kao Tsu had for a short time been head of Ssu-shang Pavilion. On the west bank of the river was I Bridge, which was the place where Chang Liang had got the shoe [that the old man had dropped].81 Fei-yün Lock was at the mouth of a river. We went up that river through the lock, looked at the stand, visited the bridge, and arrived in front of the station. The station was 150 feet from the river. Fu Jung said to me, “Now that you see our great country's system, what do you think of it? Formerly there was no river route from south of the Yangtze to the northern capital. From the Chih-cheng period [1341-1367] there was for the first time a plan for a passage. With the reign of our T’ai Tsung, a Marquis of P’ing-chiang was established to carry it out.82 He dredged the Ch’ing and Yüan, deepened the Chi and Pei, and channeled the Huai and Yin so that they passed into the Yangtze. Throughout the whole region for ten thousand li, streams interlace like veins. Boats are able to pass in safety because of the work. The people have received the benefits and will continue to do so forever.” I said, “If there were not this river passage, it would be our misfortune to hobble along by whatever means we could over a long, hard road. Now we lie at ease in the boats all the long way and do not know what it is to fall down. The benefits we have received are great, indeed.” This day we went from the station past Shui-mu-shen Shrine and on through the night.

  • 기후
  • 시간
  • 지명
  • 지리
  • 인명
  • 고증
  • 토목
  • 심리(안심)
  • 모화
  • 유학(경세제민)
  • 유학(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