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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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재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8월 15일 (일) 20:22 판 (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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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

군사적인 행동, 주변 국가와 대립.

대동운부군옥

성호사설

송남잡지

《원사(元史)》(명나라의 송렴과 이선장 등이 홍무제의 칙명을 받들어 원의 심삼조실록을 바탕으로 편찬했다)의 "왜국의 평호도를 정벌하다가 구풍을 만났다"라는 기록이 이것이다.
거란이 망하여 서쪽으로 금나라에 위축되고 북쪽으로 몽고에 땅을 빼앗겨 유민들이 돌아갈 곳이 없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또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원나라 세조 때 내안대왕(乃顔大王)이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세조가 친히 정벌하여 사로잡았다.
결국 원나라가 크게 병사를 일으켜 온 덕분에 소탕되었다.
어떤 사람은 "원나라 순제가 막북(漠北)으로 달아나 대대로 달단족이 되어 지자 두명을 서북쪽에 봉하였다.
그 뒤에 점점 강대해진 까닭에 '백성이 옛 주인을 알아본다'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강희황제가 회수(淮水)와 제수(淛水)를 순수하여 은밀이 호걸의 마음을 눌렀으나, 또한 천하의 근심은 항상 북쪽 오랑캐에 있었기에 열하에 궁실을 짓고 중무장한 몽고 병사를 주둔시키니, 중국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오랑캐로 오랑캐를 대비하였다.
그러나 진번(眞蕃) 한 군(郡)은 고려 이래로 몽고 때문에 버리고, 폐사군(廢四郡) 서쪽 백여 리 땅은 야인 때문에 버렸다.
《원사(元史)》에도 "평호도(平壺島)에 이르러 태풍으로 전함이 침몰하고 장수들은 각기 달아나 섬에 십여만 명의 군사를 버려 두었다.
그들이 나무를 베어내 배를 만들어 귀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일본이 급습하여 거의 다 죽고 남만인 만여 명만 남았다"라고 하였다.
원나라가 변경(汴京)을 공격할 때, 금나라 사람에게 진천뢰(震天雷)라는 화포가 있었다.
고려왕이 중국에서 태어나기를 원하니 거란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만 알고 여진이 변경에 침입하고 몽고가 강남을 함락한 사실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