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군사

pattern
이동: 둘러보기, 검색

군사

군사적인 행동, 주변 국가와 대립.

대동운부군옥

내용 없음

성호사설

원(元)과 명(明) 이후에는 연(燕)에 수도를 세웠는데 요(遼)와 금(金)이 교대로 일어나서 원(元)과 서로 겨루게 될 때에 그 실력 면에서 중국이 저들과 대항할 수 없게 되었으니, 만일 수도가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면 더구나 저들을 어떻게 견제할 수 있었으랴?  강희(康熙) 말기에 흑룡강 북쪽의 몽고를 가장 염려하여 다시 백도눌 장군(白度訥將軍) 한 명을 더 배치하였다 한다.
  몽고의 48개 부족 가운데서 동북 지방에 거주한 족속이 가장 강성하여 대비달자(大鼻㺚子)는 흑릉강 북쪽에 있다.
  중세 이후에는 중국 국방상의 문제는 언제나 목책 밖에 있는 몽고에 중점을 두어 왔다.
서쪽으로 2천여 리를 달려 호로항구를 거쳐 관문을 들어갔고 또 남쪽으로 가서 변경(汴京)에 수로를 정했다가 그들이 망할 때에는 송(宋)이 남쪽에서 공격해 오고 원(元)은 북쪽에서 쳐들어왔다.
  이때 원의 병력으로도 그들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원 세조(元世祖)가 직접 송(宋) 나라를 공격할 때에는 2년 동안 그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먼저 그의 신하를 보내어 촉산(蜀山)을 넘어 섬주(陝州)에까지 따라가게 했다.
  원 세조(元世祖)가 국경을 가장 멀리 개척하여 서쪽으로 4년 동안 원정한 결과 인도(印度) 지역에까지 들어갔었으나 동진(東眞) 지방에 대하여는 공갈만 하였고, 감히 해를 입히지 못하였다.
  우리 왕조에서는 한양(漢陽)에 수도를 정하였는데 이때는 명 나라의 황제가 금(金)과 원(元)을 쓸어버리고 천하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일본 역사에 “예로부터 외적의 침해를 받지 않았는데, 다만 원(元)나라 때에 많은 군대가 쳐들어와서 자칫하면 멸망을 당할 뻔했는데 다행히 큰 바람이 불어서 원 나라의 배가 모조리 침몰됨을 힘입었다.
” 했다.
원(元)이 중국으로 들어가 주인이 되기에 이르러는 또 온 요동을 차지했다.
  원이 일어나자 우리 북도(北道)의 주군(州君)이 원 나라에 몰입(沒入)되었으니, 원 나라가 장령(長嶺)도 차지했음을 또한 알 수 있다.
  원 세조(元世祖)는 회회국(回回國)을 쳐 없애고 그 임금까지 도망쳐 죽게 만든 다음, 드디어 인도국(印度國)으로 행차를 옮기고 진격하려 하였다.
  그 뒤 원 나라의 운수가 쇠해지자 왜(倭)의 침략이 불처럼 일어나고 바람처럼 휘몰아쳐 동북과 서남으로 침입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이는 모두 지나간 일에서 징험할 수 있다.
오대(五代)와 송 나라 때에는 거란이 다시 강성해졌고, 그 작은 별부를 몽고(蒙古)라 하였는데, 뒤에 몽고가 강성하여 중국에 들어와서 임금이 되기까지 하였다.
“원 순제(元順帝)가 막북(漠北)에 도망가서 대대로 갈저(羯)가 되었는데, 그 지차 아들 두 사람을 서쪽에 봉했더니 후에 그곳이 차츰 커졌기 때문에 백성들이 옛 임금을 찾는다 하였다.
이에 왜적을 정벌할 계획을 세워 충렬왕 7년(1281) 신사(辛巳)에 원 나라는 크게 군사를 동원하여 동정(東征) 길에 나서니, 전함이 3천 5백 척이요, 만군(蠻軍)이 10여 만 명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전선 9백 척과 군사 초공(梢工)수만여 명으로써 이에 협조하였다.
이로부터 왜적의 환란이 지식(止熄)되었으니 이는 원 나라를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원 나라가 쇠약해지자 왜적은 또 다시 침략하였다.
명 성조가 북방을 정벌한 것은 아로태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한 것이니, 화령은 원(元) 나라의 옛땅이다.
우신행(于愼行)은, “송 나라 가정(嘉定 영종(寧宗)의 연호) 3년에 외오아국(畏吾兒國)이 몽고에 항복했으니, 곧 당(唐) 나라 때의 고창(高昌) 땅이라.” 하였다.
관동의 장수 무장(武藏)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경성에 들어가서 조우를 은기(隱岐)에 옮기고, 토어문을 아파(阿波)에 옮기고 드디어 천을 폐하였다.
또 5세에 귀산 천황(龜山天皇)에 이르러 아버지가 죽으매 양암(諒闇)하였고 후우다 천황(後宇多天皇)에 이르렀는데, 원(元) 나라 군사가 크게 이르렀다가 구풍(颶風)을 만나 바다에 침몰되었다.
복견 천황(伏見天皇)에 이르러서는 지진(地震)으로 백성이 압사한 자가 7만여 명이었다.
〈배가 고두 항구(高頭巷口)에 이르러〉 장귀가 앞서 상륙하고 장순이 뒤를 맡아 전전(轉戰)하며 1백 20리를 나가니, 원(元) 나라 군사가 모두 위력에 눌리어 굴복했다.
그 편지를 근시(近侍)를 통해 임금께 바친 결과, 원(元) 나라는 드디어 송 나라를 공격하여 수년 만에 멸망시켰다.
그리고 5년에는 몽고(蒙古) 원수(元帥) 합진(哈眞)이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동진(東眞) 완안 자연(完顔子淵)의 군사 2만 명과 함께 글안을 친다고 선언한 다음, 화(和)ㆍ맹(猛)ㆍ순(順)ㆍ덕(德) 네 성을 격파하였다.
이듬해에 원 나라에 항복하고 그의 아들 첩가(帖哥)로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배반하여 국호를 동하(東夏)라고 참칭했으나 또 15년을 지난 임진년에 원 나라에 사로잡힌 바가 되었다.
금 나라 말기에는 그의 종족인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遼東)에 웅거하여 천왕(天王)이라 자칭하고 국호를 동진(東眞)이라 하였으며, 원(元) 나라 말기에는 납합출(納哈出)이 심양(瀋陽)을 점거하고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자칭하였는데, 모두 우리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었다.
발해(渤海)가 망할 때는 태자(太子)의 대신(大臣) 및 군사와 백성 수만 명이 모두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백성이 되었고, 거란(契丹)이 망할 때는 서쪽 지방은 금(金)에 깎이고 북쪽 지역은 몽고(蒙古)에 깎이게 되자, 남은 무리가 돌아갈 곳이 없으므로 금산 왕자(金山王子)가 그들을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이에 몽고와 동진(東眞) 두 나라로 더불어 좌우로 협격하여 3년 만에 겨우 멸망시켰다.
원 세조(元世祖) 때에는 내안대왕(乃顔大王)이 배반하자 원 세조가 친히 토벌하여 사로잡았다.
고려 신왕(辛王) 때에 명 태조(明太祖)가 조칙하기를, “짐(朕)이 역대로 고려 정벌한 사실을 살펴보니, 원(元) 나라는 다섯 차례나 정벌하였는데 도망쳐 다니면서 사자(使者)와 조정에서 배치한 관노(官奴)를 죽인 까닭에 군사를 일으켜 토벌한 다음 탐라(耽羅)로 귀양 보냈다가 잡아 죽이기까지 하였다 했으니, 이렇게 서로 벌어진 원인은 모두 자신이 취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진(秦) 나라는 육국(六國)을 평정하였고 명 나라는 호원(胡元 오랑캐 원 나라란 말)을 소탕하였으니, 그들의 생각에는 형법이 엄격하지 않으면 천하에 위엄을 세울 수 없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원 세조(元世祖)도 반드시 왜적을 치려고 했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갓 소방(小邦)의 혼란만 불러일으킨 셈이다.
원(元) 나라의 운수가 쇠하지 않았을 때에 동진(東眞)과 남왜(南倭)가 감히 침노할 수 없었던 것은 모두 원 나라의 힘이었고, 나중 임금은 모두 그들의 외손[外裔]이 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 후에 글안의 후예 금산(金山)ㆍ금시(金始) 두 왕자(王子)가 하삭(河朔) 백성을 위협하고 자칭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하여 천성(天成)이라는 연호까지 세웠으나 몽고(蒙古)에 패망되고 말았다.
선종(宣宗) 때 다시 변경으로 옮겼는데, 애종(哀宗)수서(守緖)에 이르러 원(元)ㆍ송(宋) 두 나라의 협공을 받아 하북(河北)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채주(蔡州)로 도망쳐 분신자살하니 금 나라가 드디어 멸망되었다.
몽고제(蒙古帝)는 본래 사막(沙漠)에서 일어나 금 나라와 송 나라를 차례로 격멸하고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고 연호를 지원(至元)으로 하였으니, 이 대원과 지원은 건곤(乾坤)이라는 뜻이었다 몽고는 또 기름으로 섶을 적셔 두텁게 쌓은 다음 불을 놓고 물을 대어, 불꽃을 더욱 성하게 했다.
원(元) 나라가 금(金) 나라를 공격할 때에는 대유포(大油砲)가 있었다.
원(元) 나라가 변경(汴京 송(宋)의 수도)을 공격할 때, 금(金) 나라 사람에게 진천뢰(震天雷)라는 화포(火砲)가 있었다.
원 나라가 비록 중국을 잃었다 할지라도 우리나라와는 강토가 서로 닿았으니, 그들의 해독을 면한 것은 다만 천행이었다.
만약 한결같이 북쪽 풍속을 따라 내복(內服)에 혼합하여 궁마(弓馬)에 민첩하고 전쟁에 익숙하다면 우리는 곧 하나의 요(遼)요, 금(金)일 것이니 원 나라와 더불어 각축한다 해도 반드시 회초리를 꺾어 매질할 정도로 우리를 얕보지는 못할 것이다.
  원 세조(元世祖)가 일본을 칠 적에 만병(蠻兵) 10만이 구풍(颶風)을 만나다 죽고 돌아간 사람은 겨우 세 사람뿐이었으며, 뜬 시체가 포구를 메워 밟고 건너갈 만했다.

송남잡지

《원사(元史)》(명나라의 송렴과 이선장 등이 홍무제의 칙명을 받들어 원의 심삼조실록을 바탕으로 편찬했다)의 "왜국의 평호도를 정벌하다가 구풍을 만났다"라는 기록이 이것이다.
거란이 망하여 서쪽으로 금나라에 위축되고 북쪽으로 몽고에 땅을 빼앗겨 유민들이 돌아갈 곳이 없자 금산왕자(金山王子)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또 우리나라에 투항하였다.
원나라 세조 때 내안대왕(乃顔大王)이 원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세조가 친히 정벌하여 사로잡았다.
결국 원나라가 크게 병사를 일으켜 온 덕분에 소탕되었다.
어떤 사람은 "원나라 순제가 막북(漠北)으로 달아나 대대로 달단족이 되어 지자 두명을 서북쪽에 봉하였다.
그 뒤에 점점 강대해진 까닭에 '백성이 옛 주인을 알아본다'라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강희황제가 회수(淮水)와 제수(淛水)를 순수하여 은밀이 호걸의 마음을 눌렀으나, 또한 천하의 근심은 항상 북쪽 오랑캐에 있었기에 열하에 궁실을 짓고 중무장한 몽고 병사를 주둔시키니, 중국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오랑캐로 오랑캐를 대비하였다.
그러나 진번(眞蕃) 한 군(郡)은 고려 이래로 몽고 때문에 버리고, 폐사군(廢四郡) 서쪽 백여 리 땅은 야인 때문에 버렸다.
《원사(元史)》에도 "평호도(平壺島)에 이르러 태풍으로 전함이 침몰하고 장수들은 각기 달아나 섬에 십여만 명의 군사를 버려 두었다.
그들이 나무를 베어내 배를 만들어 귀환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일본이 급습하여 거의 다 죽고 남만인 만여 명만 남았다"라고 하였다.
원나라가 변경(汴京)을 공격할 때, 금나라 사람에게 진천뢰(震天雷)라는 화포가 있었다.
고려왕이 중국에서 태어나기를 원하니 거란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만 알고 여진이 변경에 침입하고 몽고가 강남을 함락한 사실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