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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출발하여 환향하(還鄕河)<ref>[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fcs=&fcsd=&cf=&cd=&gb=&aa10up=&aa10no=kh2_je_a_vsu_24518_006&aa15no=006&aa20no=24518_006_0006&gnd1=&gnd2=&keywords=&rowcount=10 ]</ref>라고도 하는 경수(硬水)에 이르렀는데 물길은 양하(梁河)로 흘러 들어갔습니다.<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668?np_nil_b=-1 고구려 오골성을 찾았다.]</ref> | 일찍 출발하여 환향하(還鄕河)<ref>[http://yoksa.aks.ac.kr/jsp/aa/VolView.jsp?mode=&page=&fcs=&fcsd=&cf=&cd=&gb=&aa10up=&aa10no=kh2_je_a_vsu_24518_006&aa15no=006&aa20no=24518_006_0006&gnd1=&gnd2=&keywords=&rowcount=10 ]</ref>라고도 하는 경수(硬水)에 이르렀는데 물길은 양하(梁河)로 흘러 들어갔습니다.<ref>[http://m.blog.daum.net/manjumongol/668?np_nil_b=-1 고구려 오골성을 찾았다.]</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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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태종(唐太宗)152 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에 지은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태종(唐太宗)152 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에 지은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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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역사 | ||
*지리 | *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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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 | *인명 | ||
*인물 | *인물 | ||
*유학 | *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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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翰林院은 掌院學士가 1인으로 정5품이다. 그 아래가 侍讀學士와 侍講學士로 각 2인이며 모두 종5품이다. 制話, 史冊, 文翰의 일을 관장하였다. 제도를 연구하고 의논하 며 문서를 상세히 알고 바로잡아 황제의 顧問에 대비하였다. 經筵에서 日講을 하였 고, 實錄을 纂修하였으며, 史志諸書로 勅을 받든 것은 모두 맡아 하였다. 品은 비록 낮지만 지위는 우대 받았다. | 150. 翰林院은 掌院學士가 1인으로 정5품이다. 그 아래가 侍讀學士와 侍講學士로 각 2인이며 모두 종5품이다. 制話, 史冊, 文翰의 일을 관장하였다. 제도를 연구하고 의논하 며 문서를 상세히 알고 바로잡아 황제의 顧問에 대비하였다. 經筵에서 日講을 하였 고, 實錄을 纂修하였으며, 史志諸書로 勅을 받든 것은 모두 맡아 하였다. 品은 비록 낮지만 지위는 우대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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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문의 두 기둥 위에 가로로 댄 나무. 上引. | 154. 문의 두 기둥 위에 가로로 댄 나무. 上引. | ||
155. 庫藏의 庶務를 전담하는 관리. | 155. 庫藏의 庶務를 전담하는 관리. | ||
+ | * 열하일기에 나오는 환향하 참고 |
2019년 10월 18일 (금) 08:27 판
三十日,過豐潤縣,是日陰,早發行至漢水,一名還鄉河,下流入梁河. 諺傅唐太宗征遼還時所名,又過登雲門,至豐潤縣城西門,門之重城內,有火神廟,入其城,過武安王廟、騰霄門、繡衣門,復出城東門,門之楣刻書‘興州前衛,門外有在城總鋪,鋪之東有東關遞運所,所有官員姓名田能也,鬚眉皓白,頗示款待之意,請藏吏鄭文宗,速討車輛,以送臣等,文宗啡然怒撥田能之巔,其大無官衙上下之節類如此,縣有鴉鵑、靈應二山在西北,陳宮山在北,崖兒口山在東北,馬頭、明月、腰帶三山在東,唯鴉鵑近城。臣等又過林城鋪,至義豐驛.
이 날은 흐렸습니다.
일찍 출발하여 환향하(還鄕河)[3]라고도 하는 경수(硬水)에 이르렀는데 물길은 양하(梁河)로 흘러 들어갔습니다.[4]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당태종(唐太宗)152 이 요동을 정벌하고 돌아올 때에 지은 이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등운문(登雲門)을 지나서 풍윤현성(豐潤縣城) 서문에 이르니 서문의 겹성의 안에 화신묘(火神廟)가 있었습니다.
그 성으로 들어가 무안왕묘(武安王廟)153, 등소문(騰門), 수의문(繡衣門)을 지나서 다시 성의 동문으로 나오니, 동문의 문미(門)154에는 '홍주전둔위(興州前屯衛)'라고 새겨 있었습니다.
동문 밖에 재성총포(在城總鋪)가 있고, 그 포의 동쪽에는 동관체운소(東關遞運所)가 있었습니다.
체운소에 있는 전능(田能)이라는 관원은 수염과 눈썹이 하얀 노인이었는데 자못 간곡히 대접하려는 뜻을 보이면서, 장타리(藏採吏)155 정문종(鄭文宗)을 꾸짖어 속히 수레를 준비하여 신 등을 보내게 하자 정문종은 발끈 성을 내며 전능의 수염을 뽑아 버렸습니다.
관아에서 상하의 예절같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이와 같은 정도였습니다.
풍윤현에는 아골산(__鴻山), 영응산(靈應山) 두 산이 서북쪽에 있고, 진궁산(陳宮山)이 북쪽에 있고, 애아구산(崖兒口山)[5]이 동북쪽에 있고, 마두산(馬頭山), 명월산(明月山), 요대산(腰帶山) 등이 동쪽에 있었는데, 아골산만이 성에 가까웠습니다.
신 등은 또 임성포(林城鋪)5%를 지나서 의풍역(義豐驛)에 이르렀습니다.
30th Day. Passing Feng-jun County. This day was cloudy.
[We went from the Keng River past Feng-jun County to I-feng Station.]
- 기후
- 지명
- 언어(어원)
- 역사
- 지리
- 유학(묘)
- 인명
- 인물
- 유학
- 사회
150. 翰林院은 掌院學士가 1인으로 정5품이다. 그 아래가 侍讀學士와 侍講學士로 각 2인이며 모두 종5품이다. 制話, 史冊, 文翰의 일을 관장하였다. 제도를 연구하고 의논하 며 문서를 상세히 알고 바로잡아 황제의 顧問에 대비하였다. 經筵에서 日講을 하였 고, 實錄을 纂修하였으며, 史志諸書로 勅을 받든 것은 모두 맡아 하였다. 品은 비록 낮지만 지위는 우대 받았다. 151. 弘治帝가 太子였을 때 東宮侍講을 지낸 적이 있는 左春防右庶子 兼翰林侍講 董越은 弘治帝의 즉위를 알리는 詔書를 들고, 頒詔正使의 신분으로 바로 弘治원년(1488) 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 朝鮮에 들어왔다. 이때 工科右給事中 王아이 副使로 동행 하였다. 董越은 귀국 후에 《朝鮮賦》를 남겼다. 본인의 見聞과 조선 측에서 제공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의 地志, 풍속, 산천, 인물, 畜産, 제도, 使行의 路程과 조선의 明使 접대 등을 정리 소개했다. 《朝鮮成宗實錄》 19년 2월 壬戌; 2월 癸亥 참조. 152. 唐의 황제(재위 626-649)로, 이름은 李世民이다. 총명하고 사려가 깊으며, 무술과 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어, 소년 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 이 두터웠다. 태자인 형과 동생을 죽이고 高祖를 강제 퇴위시킨 뒤 제위에 올랐다. 즉위한 뒤 돌궐을 비롯한 사방의 이민족을 누르고 세계 제국을 이루었다. 사사로운 마음을 멀리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지극히 공정한 정치를 하여, 이에 貞觀의 治라 칭송받았고, 뒤에 제왕 통치의 모범이 되었다. 153. 關羽를 제사지내는 묘. 宋 建炎연간에 壯穆義勇武安王으로 賜額되었다. 《明一統 | 志》권70 참조. 154. 문의 두 기둥 위에 가로로 댄 나무. 上引. 155. 庫藏의 庶務를 전담하는 관리.
- 열하일기에 나오는 환향하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