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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二十七日,過淮安府,是日雨,淮陰驛對岸馬頭城門外有漂母,其北又有胯下橋,即韓信寄食受辱之地,驛又與遞運所接,遞夫廠相對,自曝掉舟,傍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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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漂母는 韓信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빨래하는 아낙을 말하는데 漂母祠는 山陽縣城 望雲門 밖에 있다. 《大淸一通志》권65 ; 咸豊《淮安府志》 권26, 壇廟 등 참조. | 312. 漂母는 韓信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빨래하는 아낙을 말하는데 漂母祠는 山陽縣城 望雲門 밖에 있다. 《大淸一通志》권65 ; 咸豊《淮安府志》 권26, 壇廟 등 참조. |
2019년 10월 16일 (수) 07:41 판
二十七日,過淮安府,是日雨,淮陰驛對岸馬頭城門外有漂母,其北又有胯下橋,即韓信寄食受辱之地,驛又與遞運所接,遞夫廠相對,自曝掉舟,傍淮安府,府即舊東楚州,實東南重鎮,其舊城內有府治、山陽縣治、淮安衛及都堂府、總兵府、御史府等諸司,舊城之東,又築新城,新城之中有大河衛,餘司未及設,新舊城間,隔一里許,湖水襟帶于兩城內外,而城與人居,皆在平島中,過自南渡門而北,至淮河,其間有金龍四大王廟、浮橋亭、龍興塔、鍾樓殿、雷神店、西湖河嘴、老和尚塔、鈔廳、板、移風閘、鳳翥門、工廠、清江削、騰蛟起鳳門、清江輻葉門、清江閘、常盈倉門、天妃廟、東嶽仁聖宮、靈慈宮、平江恭襄侯廟、漕運府、總廠東街、總廠西街、福興、玄帝、佑聖祠、新藏”閘,又其間有鳳陽中都、鳳陽左衛、龍虎右衛、龍江左衛、豹翰衛、豹韜前衛、淮安衛、大河衛、鎮江衛、高郵衛、楊州衛、儀真衛、水軍左衛、水軍右衛、府軍前衛、泗州衛、邳州衛、壽州衛、長淮衛、廬州衛等,淮南、江北、江南諸衛會于此造船,俱有廠,大抵大江、淮河四五百里間,地多大浸巨湖,如邵伯湖、高郵湖、界首湖、白馬湖等,湖之大者,四面無際,是日,冒大雨過淮河,一名黃河,臣問諸傅榮曰:“以《禹貢》觀之,黃河過積石、龍門、華陰、底柱、大諸山,又過泽水、大陸,為九河為逆河,東北入于海,淮水過桐柏山,會酒、沂,東入于海,林之奇以謂:河下流竞受 之,淮下流徐受之,然則進與河源出不同,流派不同,入海之地亦不同,今合爲淮河,何也?” 榮曰: “在我 大明朝, 整河路注之淮, 合流入海, 河失故道, 與《禹贡》有異”云云, 淮河實聚水所漂, 黃河與淮水,合流為西河,齊,潔、汶水,與洪、泗水合流,又會汴水,又東會于沂水為東河,西河水色黃,故謂之黃河,東河水色青,故謂之清河,二河合流于此,謂之淮河,河廣可十餘里,深無底,水流暴急,河邊有耿七公神祠,又有龜山臨河.趙鑑語臣曰:“此山足有神物,狀如彌猴,縮鼻高額,青驅白首,目光若電.諺傳:大禹治水時,以大索鎖此物,命住于此,俾淮水安流,今人有圖此物之形者,免淮濤風水之難,”臣曰:“此真怪誕不經之說,不足信也.”鑑默然,臣等過河東河而上,至清口驛,夜經清河縣,至泊無人煙之岸,嘗聞清河縣治,有韓信城、甘羅城,夜過不能見,
회안부(淮安府)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렸습니다.
회음역의 건너편 언덕 마두성문(馬頭城門) 밖에는 표모사(漂母祠)가 있고, 그 북쪽에는 과하교(_下_)[1]가 있었으니, 곧 한신(韓信)이 밥을 얻어먹고 욕을 당했던 곳이었습니다.
회음역은 또 체운소와 접해 있고 체부창(遞夫__)과 서로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회음역에서 노를 저어 회안부에 다가가니, 회안부는 곧 옛날의 동초주(東楚州)로서 실로 동남방의 중요한 진(鎭)이었습니다.
그 구성(舊城)의 안에 회안부치(淮安府治)·산양현치(山陽縣治)·회안위(淮安衛)와 도당부(都堂府)· 총병부(總兵府)·어사부(御史府) 등의 여러 관사(官司)가 있었습니다.
구성의 동쪽에 또 신성(新城)을 쌓았는데, 신성의 안쪽에 대하위(大河衛)316가 있었으며, 나머지 관사는 미처 세우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성과 구성은 사이가 1리가량 떨어져 있었는데, 호수가 두 성의 안팎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성과 인가는 모두 평도(平島)안에 있었습니다.
남도문(南渡門)을 지나 북쪽으로 가서 회하(淮河)에 이르니, 그 사이에 금룡사대왕묘(金龍四大王廟)317·부교정(浮橋亭)·용흥탑(龍興塔)·종루전(鐘樓殿)·뇌신점(雷神店)·서호하취(西湖河嘴)·노화상탑(老和尙塔)·초청(廳)·판갑(板開)·이풍갑(移風間)·봉저문(鳳門)·공부창(工部v)318. 청강갑(淸江間)319, 등교기봉문(騰蚊起鳳門)·청강폭주문(淸江輻藤門)·청강갑(淸江間)·상영창문(盈倉門)·천비묘(天起廟)· 동악인성궁(東嶽仁聖宮)·영자궁(靈慈宮)320 · 평강공양후묘(平江恭襄侯廟)·조운부(遭運府)322. 총창동가(總r東街)·총창서가(總r西街)·복흥갑(福興間)·현제사(玄帝祠)323.우성사(佑聖祠)·신장갑(新藏間)324 이 있었습니다. 또 그 사이에 봉양중도(鳳陽中都)·봉양좌위(鳳陽左衛)·용호우위(龍虎右衛)·용강좌위(龍江左衛)·표도위(韜衛)·표도전위(霜前衛)·회안위(安衛)·대하위(大河衛)·진강위(鎭江衛)·고우위(高郵衛)·양주위(楊州衛)·의진위(儀眞衛)·수군좌위(水軍左衛)·수군우위(水軍右衛)·부군전위(府軍前衛)·사주위(泗州衛)·비주위(亞州衛)·수주위(壽州衛)·장회위(長淮衛)·여주위(廬州衛) 등이 있었습니다. 회남(淮南)·강북·강남의 여러 위(衛)가 이곳에 모여 배를 만드는데 모두 선창(船廠)이 있었습니다. 무릇 장강과 회하(淮河)의 400-500리 사이의 땅은 소백호(邵伯湖)·고우호(高郵湖)·계수호(界首湖)·백마호(白馬湖) 등과 같은 큰 호수에 침식당했으니, 큰 호수는 4면으로 끝이 없었습니다.
이 날 큰비를 무릅쓰고 회하를 건넜는데 황하(黃河)라고도 불렀습니다.
신이 부영에게 묻기를,
“<우공>을 살펴보면, 황하는 적석(積石)·용문(龍門)·화음(華陰)·저주(底柱)·대비(大__) 등 여러 산을 지나고, 또 홍수(降水)와 대륙(大陸)을 지나 구하(九河)가 되고, 역하(逆河)325가 되어 동북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고, 회수는 동백산(桐柯山)을 지나 사수(泗水)와 기수(淨水)를 만나 동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게 됩니다.
임지기(林之奇)326는, '황하[2]의 하류는 연주(州)가 받고, 회수의 하류는 서주(徐州)가 받는다'라 하였으니, 그렇다면 회수와 황하는 연원도 같지 않고 지류의 갈림도 같지 않고, 바다에 들어간 땅도 또한 같지 않은데 지금 합하여 회하가 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은,
“우리 명나라 조정이 황하[3]의 수로를 파서 회수에 유입시켜, 합류해서 바다로 들어가게 하였으므로 황하는 옛 길을 잃게 되었으니 <우공>과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라고 운운하였습니다.
회하는 실로 여러 물이 모이는 강입니다. 황하와 회수가 합류하여 서하(西河)가 되고, 제수(濟水)·탑수(深水)·문수(汶水)가 수수(洙水)·사수(泗水)와 합류하여 또 변수(沐水)를 만나고, 다시 동으로 흘러 기수(所水)를 만나 동하(東河)가 됩니다.
서하는 물 빛깔이 누렇기 때문에 황하라 이르고, 동하는 물 빛깔이 푸르기 때문에 청하(淸河)라 이릅니다.
두 강물이 합하여 이곳으로 흐르니 회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4]
강의 너비는 10여 리나 되고 깊이는 끝이 없으며, 물의 흐름은 사납고 급하였습니다.
강가에는 경칠공신사(秋七公神祠)가 있었고, 또 귀산(龜山)이 강과 접해 있었습니다.
조감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산 밑에는 신물(神物)이 있는데, 모양은 원숭이와 같으며 주름진 코, 높은 이마, 푸른 몸뚱이, 흰 머리털에 눈빛이 번개와 같습니다.
전해 오는 속담에, '우왕이 홍수를 다스릴 때 큰 새끼로 이 신물을 잡아매어 이곳에 살면서 회수가 편안히 흐르게 하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이 신물의 형상을 그려서 갖고 있으면 풍랑의 조난을 면한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터무니없고,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니 믿을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감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신 등은 회하를 거쳐 동하를 거슬러 올라가서 청구역(淸口驛)에 이르렀습니다. 밤에 청하현(淸河縣)을 지나서 인가가 없는 기슭에 정박하였습니다. 청하현치(淸河縣治)에 한신성(韓信城)과 감라성(甘羅城)328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었으나, 밤에 지나가 볼 수 없었습니다.
27th Day. Passing Huai-an Prefecture. This day it rained.
On the bank opposite Huai-yin Station, outside Ma-t'ou-ch'eng Gate, was P’iao-mu Shrine. North of it was K’ua-hsia Bridge, which was the place where Han Hsin ate another's food and was disgraced.63 The station was opposite the transfer station keeper's storehouse, adjoining the transfer station. From the station, we rowed the boats alongside Huai-an Prefecture. The prefecture had been the old Tung-ch'u Department, an important control point for the southeast. Inside the old wall were the prefectural capital, the seat of Shan-yang County, Huai-an Garrison, and various posts, for the Surveillance organization [Tu-tang-fu], Regional Command [Tsung-ping-fu], Censoring organization [Yü-shih-fu], and others. East of the old wall, a new wall had been built. The Ta-ho Garrison was inside the new wall, but other posts had not yet been established. There was a space between the new and old walls of about one li. The water of the lake flowed round the walls inside and out, but both the walls and the houses were on flat islands. We left from Nan-tu Gate and went north. We came to the Huai River. In the interval had been [numerous structures and garrisons). Garrisons for the regions south of the Huai and north and south of the Yangtze were gathered there to build boats, and they all had shipyards. In general, for the four or five hundred li between the Yangtze River and the Huai River, the land has many big swamps and huge lakes. Of the lakes, the big ones like Shao-pu Lake, Kao-yu Lake, Chieh-shou Lake, and Pai-ma Lake seem to stretch endlessly in all directions. This day we braved heavy rain and passed the Huai River, also called the Huang [Yellow] River. I asked Fu Jung about that: “According to Yü kung, the Huang River passes the Chi-shih, Lung-men, Hua-yin, Ti-chu, and Ta-p'ei mountains and then passes the Chiang-shui and Ta-lu, becoming the Chiu-ho and Ni-ho and entering the sea in the northeast. The Huai River passes the T’ung-po Mountains, joins the Ssu and I and enters the sea in the east.64 Lin Chih-ch’i65 thinks that the lower reaches of the [Huang] River lie in Yen and the lower reaches of the Huai in Hsü. Then the sources of the Huai and the [Huang] River are not the same, their courses not the same, and the places where they enter the sea not the same. How is it that now you put the Huai and the Huang River together?” Jung said, “Under our Ming Court, we have channelled the bed of the Huang River and made it flow into the Huai; they flow into the sea together. The Huang River has lost its old course and is different from that in Yü kung.” The Huai River truly receives many waters. The Huang River and Huai River flow together as the West River. The Chi, T'a, and Wen rivers flow together with the Chu and Ssu rivers and then join the Pien River and to the east meet the I River to become the East River. The water of the West River is yellow, so it is called Yellow River. The water of the East River is green, so it is called Green River. The two rivers flow together there; combined, they are called Huai River. The river is more than ten li wide, it is bottomless, and the current is violent. On the bank of the river was Keng-ch'i-kung-shen Shrine, and Mt. Kuei overlooked the river. Chao Chien said to me, “There is a god at the foot of that mountain. He looks like a Macacus monkey; he has a turned-up nose, high forehead, blue body, and white head. His eyes flash like lightning. The legend is that when the Great Yü channelled the waters, he bound that creature with a great rope and ordered him to live there and make the Huai flow quietly. Today, people who have pictures of that creature are spared trouble from wind and waves on the Huai.” I said, “There is nothing in the classics about this extraordinary tale; I cannot believe it.” Chien was silent.66 [We went up the East River and stopped at night near Ch'ing-ho County.]
- 기후
- 지명
- 고증(고사)
- 언어(어원)
- 지리
- 건축물
- 토목
- 기술(선박제작)
- 환경(침식)
- 고증(장소:우공의 내용과 실제)
- 언어(어원)
- 동물
- 풍습(속담,미신)
- 풍습(부적)
- 심리(유학:미신에 대해서)
- 시간
- 고증(하려고 했으나 못함)
312. 漂母는 韓信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다는 빨래하는 아낙을 말하는데 漂母祠는 山陽縣城 望雲門 밖에 있다. 《大淸一通志》권65 ; 咸豊《淮安府志》 권26, 壇廟 등 참조. 313. 漢初의 武將이다. 秦나라 말 난세에 처음에는 楚의 項梁과 項羽를 섬겼으나 중용되지 않아 漢王 劉邦의 군에 참가하였다. 승상 蕭何에게 인정을 받아 군사 면에서 크게 공을 세움으로써 齊王, 이어 楚王이 되었다. 그러나 漢帝國의 권력이 확립되자 劉氏 외의 다른 諸王과 함께 차차 밀려나, B. C. 201년 淮陰侯로 격하되고, B.C. 196년 陳의 亂에 가담하였다 하여 呂后의 부하에게 慘殺 당하였다. 314. 淮陰侯 韓信이 어렸을 때 가난하여 漂母에게 靑食하고, 무뢰배 소년들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 들어가는 수모를 당하여 겁쟁이로 비웃음을 당한 고사를 말한다. 《史권 92, 列傳32, 淮陰侯 참조. 315. 화물의 장거리 운송을 담당하는 壯丁. 316. 옛 大淸觀基로서 洪武2년(1369)에 창건되었다. 咸豊《淮安府志》권17, 營制. 317. 宋朝 理宗의 외척 謝緖를 모신 사당이다. 사서는 남송이 멸망할 무렵 항주의 金龍山에 은거하였는데, 謝太后가 북쪽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물에 뛰어 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元代에 謝緖는 민간에서 黃河의 수호신으로 추앙되었고, 후에 顯佑通濟王이라는 爵號를 받았다. 《江南通志》권39; 咸豊《淮安府志》 권26, 壇廟 등 참조. 318. 工部分司의 제署를 가리킨다. 正堂 5間, 後堂 3間, 南房은 동서로 각 3間, 庫房 3間, 儀門 3間, 大門 3間, 更樓 1座, 牌樓 1座로 구성되어 있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19. 山陽縣城에서 서북으로 30리 거리로서 龍王聞이라고도 한다. 咸豊《淮安府志》 권5, 城池. 320. 天妃宮을 가리키는데 漕運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靈慈宮은 모두 3곳이 있는데 그 가운데 본문의 그것은 淸江浦에 위치한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宣德 연간 平江伯 陳이 세웠는데 勅額을 下賜받았다. 少師 楊士奇의 〈記>가 있다. 正德《淮安府志》권11, 〈祀祠), 寺觀. 321. 明 永樂연간에 漕運에 공을 세운 平江伯 陳眞을 모신 사당. 다만 《江南通志》와 《山東通志》 등에는 ‘恭襄侯廟'가 아닌 ‘恭襄侯祠라고 되어있다. 《江南通志》 권40 ; 《山東通志》 권21 참조. 322. 벽運鎭守府를 가리킨다. 永樂 연간 總兵官 平江伯 陳寅이 漕運을 提督하기 위하여 세웠다. 正德《淮安府志》권6, 規制2, 公署. 323. 女帝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먼저 道敎에서 眞武帝를 玄天上帝 즉 女帝라 하기도 하고, 治水 사업에 大功을 세운 禹王을 玄帝라 부르기도 한다. 다만 淮安이 漕運路上에서 차지하는 위치 등을 고려해 볼 때 여기에서의 女帝는 禹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324. 正德《崔安府志》권6, 規制2, 公署를 보면 開名은 新藏이 아니라 新莊이라 되어있다. 325. 黃河가 바다로 들어가기 직전의 河流를 말하는데 潮水가 거슬러 들어온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26. 南宋 초기의 학자로, 세간에서는 三山先生이라 불렀다. 紹興21년(1151)에 진사가 되어, 지방을 거쳐 중앙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그 후 外任을 청하여 지방관이 되었다. 가 얼마 후 사임하였다. 남송 중기의 名儒 呂祖謙은 그의 제자로서 呂氏學問의 중계자 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는 훌륭한 시인이기도 하여 (江月圖〉와 〈早 春偶題) 등의 명작을 남겼다. 저서에는 《春秋周禮說論》 등이 있다. 327. 宋 耿遇德을 모신 사당이다. 그런데 《江南通志》에는 맛七公神祠가 아닌 歌七公雨'로 되어 있다. 康澤廟의 俗名으로 이곳에서 항해의 안전을 비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江南通志》 권40 참조.
328. 淸河縣의 舊 淮陰縣治 북측에 있는데 秦의 甘羅가 쌓은 것이라고도 하고 甘羅가 묻힌 곳이라고도 한다. 咸豊《淮安府志》 권28, 古蹟. 한편 甘羅는 戰國時代의 策士 로서 趙王을 설득하여 五城을 들어 秦에 割讓하고 奈을 섬기도록 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