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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해청요자를 하사하였다.<br> | |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해청요자를 하사하였다.<br> |
| 고려 충선왕 때의 사람으로 벼슬하여 판전교 사시가 되었다.<br> 원나라에 들어가 태자부참군박사가 되었다.<br> 유연이 강남으로 가서 서적을 구입했는데 홍약이 보초 150정을 주어서 1만 8백 권을 구입하여 돌아왔다.<br> 후에 황제가 홍약의 청으로 사신을 보내어 1천 여 권의 책을 하사했는데 모두 송나라의 비각에 소장된 것이었다.<br> | | 고려 충선왕 때의 사람으로 벼슬하여 판전교 사시가 되었다.<br> 원나라에 들어가 태자부참군박사가 되었다.<br> 유연이 강남으로 가서 서적을 구입했는데 홍약이 보초 150정을 주어서 1만 8백 권을 구입하여 돌아왔다.<br> 후에 황제가 홍약의 청으로 사신을 보내어 1천 여 권의 책을 하사했는데 모두 송나라의 비각에 소장된 것이었다.<br> |
− | 김부일이 일찍이 팔관치어를 지을 때 즉석에서 입으로 불렀더니 예종이 크게 기뻐하며 항상 그것을 사용하고 바꾸지 않았다.<br> 송나라 사람이 돌아가 그 가사를 황제 앞에서 외워보였다.<br> 이자량이 조회하러 원나라에 들어가자 황제가 '팔관치어구호'를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물었으니 진실로 가상히 여겨 드러낸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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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 15년(1274)에 1월에 원나라 세조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김방경 등에게 조칙을 내려 합포현에서 전함을 만드는 것을 살피게 하고, 10월에 전함 9백 척으로 일본을 정벌하러 갔다가 일기도에 이르러 패하고 돌아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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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진주. 유학으로 드러났다.<br> 일찍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사신 갔었다.<br>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길을 안다는 이유로 또 가게 되었다.<br>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병사들이 번갈아 자꾸 물에 빠져 죽었다.<br> 돌아와서는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br>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유학을 일삼지 말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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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충이 몽고 장수 합진과 함께 거란의 군대를 강동에서 격파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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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거란 병사가 강동성에 들어가 지키니, 김취려가 몽고 장수 합진과 함께 장차 병사를 합하여 공격하려 할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막혔다.<br> 적군은 성벽을 견고히 하여 아군을 고달프게 하니 합진이 근심하였다.<br> 김취려는 성 아래 이르러 동문, 서문, 남문에 모두 해자를 파서 적이 달아날 길을 막고 드디어 병사를 합하여 공격해서 크게 격파시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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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6년에 원나라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려고 할 때 사신을 보내어 비단 2만 필을 가지고 와서 쌀을 사서 군량에 충당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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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고자 고려국에게 전함 900척과 병기와 의장 등 군수물품 일체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br> 이에 조정에서는 제주도에서 전함 100척을 건조하게 하였는데, 고인탄이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때맞추어 요구에 부응함으로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br> 이에 특별히 명위장군에 임명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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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 국내에 기근이 들어서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어 쌀을 보내줄 것을 고하니 가을이 되어서 곡식이 도착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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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충숙왕 때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이연송이 원나라에서 쌀을 사올 것을 건의하여 쌀 3만여 섬을 청구하여 몸소 친히 구휼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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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김방경을 보내 다시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br> 정벌군이 일기도에 이르자 군중에서 역병이 나돌아 죽은 자가 3천여 명이 되었으며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여 돌아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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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함에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함과 군량과 기계를 갖추게 했다.<br> 원나라 장수 흔도가 감독함이 매우 심하니, 힘들고 지쳐서 능히 결딜 수 없었다.<br> 박항이 황제에게 아뢰어 김방경을 원수로 삼아 권한이 객의 손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니, 당시에 그 능함을 칭송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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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장수 합진이 김취려의 모습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서는 함께 앉아 말하기를 "내가 6 나라를 정벌하러 다니면서 귀인을 많이 보았지만, 형의 용모를 보니 어찌도 그리 기이한가?"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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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가 김방경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케 하였다.<br> 대명포에 이르자 문득 큰 바람이 불어서 군사들이 많이 빠져서 죽었다.<br> 포구가 그 때문에 막혔다.<br> 원나라 군사로서 돌아가지 못한 자가 10만도 넘고 우리나라 군사로서 돌아오지 못한 자는 7천 명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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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세조가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수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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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취려가 몽고 장수 합진과 약속하여 강동에서 거란병을 정벌하였다.<br> 몽고 장수가 김취려의 사람됨을 훌륭하게 여기고 이별할 때 문밖에까지 나와서 겨드랑이를 받들어 말에 태워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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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취려가 몽고, 동진국과 함께 거란을 토벌할 적에 몽고 장수 합진이 말하기를 "과연 우리와 함께 우호를 맺었으니 먼저 몽고 황제에게 절하고, 다음에 만노 황제에게 예를 갖추자"라고 하자, 김취려가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으니, 천하에 어찌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몽고 황제에게만 절하고, 만노에게는 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br> 만노는 동진국의 황제로 금나라 선무포선만노가 요동을 점거하여 천왕이라 참람하게 일컫고 나라 이름을 대진이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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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장차 홍건적과 고우의 적을 토벌하려 할 때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날래고 용감한 군졸을 모집하여 정벌을 돕도록 청했는데 고려왕이 군직을 많이 베풀어 주니 이를 상군정이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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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라고 명하니 김방경이 홍다구와 전선 만드는 것을 감독했다.<br> 오랑캐 배의 모양을 본받을 것 같으면 드는 비용이 너무 많고 또한 기일에 맞출 수가 없었다.<br> 공이 사신을 보내어 문의하여 성(省)의 답서를 받아 동국의 배모양을 써서 만드는 일을 감독하여 능히 이루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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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이 원나라 황제의 칙명으로 김방경을 보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적에 군사들이 합포에 이르러 송악의 작은 언덕 위에 주둔하였다.<br>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고을 사람이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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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세자였을 때 원나라 황제가 불러 보고 수정으로 된 술잔을 내려주며 총애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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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 원나라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자 백성들은 군량을 수송하는 데 곤궁하게 되었다.<br> 이로 인하여 농사의 때를 놓쳐 기근에 이르게 되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중국 강남의 쌀을 배에 실어 와서 구제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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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가 충렬왕에게 명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고 혼도로 하여금 감독하기를 매우 급하게 하여 본국이 피폐해져서 힘이 감당할 수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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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18년(1292)에 본국이 거란 병사로 인하여 농민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나라 안팎이 주리고 곤궁하니, 원나라 황제가 안타까워하여 강절행성에 명하여 양식 10만 석을 운반해 백성을 구원하여 살리도록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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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에서 원나라를 섬긴 이래 왕은 원나라 사신과 동서로 마주 대하였다.<br> 충렬왕 7년에 원나라에서 흔도 등을 파견하여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했는데, 이 일을 의논할 때 왕이 남면하니 흔도 등이 동면하여 감히 대등하게 대하지 못하였다.<br> 이에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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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고자 할 때에 김륜이 합포에 주둔하여 병마를 씩씩하게 훈련시키고 호령이 엄정하니 원나라 사신이 와서 보고 공경을 다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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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세조가 친히 내안을 정벌함에 충렬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정벌을 도왔다.<br> 행차가 평양에 이르러서는 먼저 유비를 파견하고서는 오윤부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br> 이에 오윤부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모일에 유비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고, 왕도 이로부터 왕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 하였다.<br> 그 날짜가 되어 왕이 뒤 언덕에 올라가 오랫동안 북쪽을 바라보다가 농담으로 오윤부에게 말하기를 "너의 점이 틀린 게 아닌가?"라 하니 오윤부가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봅시다"라 하였다.<br> 조금 후에 역마가 먼지를 날리며 오는데, 보니 과연 유비였다.<br> 또 원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병사를 돌아가게 하니, 왕이 오윤부를 더욱 믿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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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충이 몽고 장수와 강동성을 토벌하기로 약속했다.<br> 몽고 장수는 술을 잘 마셨는데, 조충과 우열을 겨루어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벌을 받기로 약속하였다.<br> 조충은 얼마 동안 마셔도 취한 빛이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잔에 이르러 잔을 들고서 마시지 않고 말하기를 "이 술을 내가 못 마실 바는 아니나 약속대로 한다면 공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니, 주인이 손님을 벌주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몽고 장수가 그 말을 중히 여겨 대단히 기뻐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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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서 김방경 등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여, 일기도에까지 이르렀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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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란의 병사가 강동성에 침략하니 김취려, 조충이 몽고 장수 합진과 함께 거란을 토벌하기로 약속하니, 합진이 주연을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br> 몽고 풍습에 칼끝으로 고기를 찔러 주인과 손님이 서로 먹으며 주고받음에 눈을 깜작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br> 김취려와 조충은 꿇어앉고 일어나며 받들고 맞이하는 동작이 매우 익숙하니 합진이 매우 기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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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관부 금강사에 산다수가 있는데 무성하여 뜰을 덮었다.<br> 원나라 황제가 고려로 하여금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니, 충렬왕이 합포[마산]에 이르렀을 때 이 나무 아래 수레를 머물게 하고 '장군수'라고 불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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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을 정벌했는데 대명포에 도착하여 큰 풍랑을 만나 몽고군이 패하여 반 이상 익사하니 군대를 되돌렸다.<br> 그 군졸 가운데 배가 부서져 육지에 있는 자들을 공이 모두 무기와 말을 버리게 하고 여러 배에 나누어 싣고 돌아오니 다 1,070여 명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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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17년에 합단병이 철령을 넘어 교주도에 침략해오자 원나라 황제가 병사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다.<br> 충렬왕은 장군 한희유 등을 원의 장군을 따라가서 합단병을 연기 정좌산 아래에서 섬멸케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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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려 했는데 윤수가 말하기를, "제생 가운데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한 자는 모두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군대에 넣을 것이다"라고 하니, 제생이 두려워하여 모두 나오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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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충이 몽고의 동진과 강동의 적을 토평하고 일찍이 은황을 엮어 청요의 직책을 역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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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본국에 명하여 동쪽으로 일본을 치게 하였다.<br> 패하여 돌아옴에 미쳐서 김주에 진변만호부를 설치케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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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와서 김주 등지에 진변만호를 설치하였다.<br> 인후를 소용대장군 진변만호로 삼고 호부와 도장을 하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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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치려 하였다.<br> 충렬왕이 중방으로 하여금 한가한 직책에 있는 사람을 모두 뽑아 정동군에 충당케 하였다.<br> 그들 가운데 이따금씩 가재 도구를 거두어서 도망하기도 하였다.<br> 도망하는 것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에게는 두 근을 징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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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 때 원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합포를 정동행성으로 삼고 홍다구와 김방경에게 조칙을 내려 전함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br> 일기도에 이르러 패배하고 돌아왔다.<br> 그 뒤 황제가 다시 명령하여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br> 그래서 왕이 친히 합포에 이르러 열병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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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조 태조가 동녕위를 공격할 때 원나라 추밀사 한배주를 보고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주고 그와 함께 돌아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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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용향행성을 설치하여 좌우사사를 두어서 본국의 일과 동쪽으로 일본 정벌을 주관하게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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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취려와 몽고 장수 합진이 함께 거란을 쳐서 평정하고는 드디어 형제의 맹세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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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충이 몽고 장수 합진과 간동의 적을 토벌하기로 약속했는데, 합진이 공의 호칭을 형으로 하여 자기 위에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br> 공과 영결하기에 이르러서는 공의 손을 자고 눈물을 떨구며 오열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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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청신은 본래 '고이부곡' 사람인데 눈치 빠르게 잘 변신하였다.<br> 원나라에 들어가 왕을 배반하고 심왕 고에게 붙었다.<br> 그 당시 "묘부곡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예언이 나돌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묘'를 고이(고양이)라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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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하중이 조적과 죄를 지어 원나라에 도망갔다.<br> 그곳에서 심왕을 아부하여 섬기면서 고려국의 허물을 엿보아 왕위 찬탈을 도모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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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세조가 이추가 꾸며댄 말을 믿고서 사신을 보내 본국 고려에도 없는 금실을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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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후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원나라에 들어가 멋대로 금칠이 본국에서 난다고 말하였다.<br>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급히 이것을 구하였다.<br> 왕이 먼저 열 항아리를 보내었으나, 본국에서는 나지 않는 물건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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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주는 자량의 손자이다.<br> 원나라에 들어가 본국을 배반하고 원나라 황제에게 말하여 고려로 하여금 일본을 정벌하게 했다.<br> 김흔이 그것을 꾸짖으니 유주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은 바로 진흙으로 만든 부처와 같을 따름이다"라고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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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 때 이추가 원나라에 도망가 거짓으로 황제에게 아뢰기를 "등석이 고려국에서 생산됩니다"라 하였다.<br> 이에 황제가 그 말을 믿고 사신을 보내어 와 요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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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원이 왕을 원망하여 자기의 형 최유와 함께 원나라로 도망가서 모국 고려를 혼란에 빠뜨릴 것을 도모하였는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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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안과 고용보는 모두 고려의 환관으로 원나라 조정에 총애를 얻어서 충선왕을 무고로 참소하여 토번에 귀양 보내고 충혜왕을 몰래 참소하여 악양의 화를 이루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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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의가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이고 북쪽으로 원나라에 달아났다.<br> 뒤에 권근이 명나라에 사신을 가다가 의진주에서 김의를 만났다.<br> 그가 스스로 "명나라 지휘 벼슬이 되어서 남만을 정벌하여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말하였다.<br> 이때 김의의 어머니는 살아있었는데 그가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보기는 하였지만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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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한공은 충숙왕을 원망하여 도당에 글을 올려 심왕 고를 세우려고 하였다.<br> 민종유가 탄식해서 말하기를 "신하 된 사람은 임금을 위해서 숨겨주는 것이 정직이다.<br> 내 어찌 차마 우리 임금을 보고 짖겠는가?"라고 하고는 끝내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br>' 심왕의 무리들이 국가의 일을 조목 조목 적어 장차 원나라에 호소하려고 했을 때 최성지는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br>' 주동자가 녹사로 하여금 서명할 것을 요청하자 최성지가 말하기를 "나는 재상의 자리만 채운 사람이지만 녹사를 시켜 나를 협박하려느냐?" 하니 뭇 사람들이 모두 기를 잃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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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원이 왕을 원망하여 불손한 말을 하자, 왕이 그를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게 하였다.<br> 최원이 감옥에 들어가려 하지 않아 강제로 끌어넣고 꿇어앉게 하였는데, 최원이 굴복하지 않고 도리어 소매를 뿌리치고 나갔다.<br> 마침내 원나라로 달아나서는 고려를 소란스럽게 할 것을 도모하여 남쪽 고려를 정벌할 군사를 징발하자고 요청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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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세조가 신백천을 보내 관음송 위에 고인 물을 요구하였다.<br> 수소문을 해보니 낙산 위에 있다고 하였다.<br> 그러나 그것은 본래 없는 것이고 황당한 이야기이다.<br> 신백천 등이 본국을 등지고 원나라로 달아났는데 본국을 해치는 일이면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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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말에 윤이, 이초 등이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기를 "고려가 병사를 움직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합니다"라고 하니, 대간이 청하여 윤, 이의 무리를 국문하고 이색 등을 청주 옥에 가두었는데, 모두 불복했다.<br> 홀연히 우레와 비가 크게 일어나 앞 내가 갑자기 넘치니 성중이 한 발 남짓 수침되었다.<br> 문에 압각수[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이 창황하게 나무를 잡고 올라가 화를 면했다.<br> 왕은 수재로써 하교하여 이들을 석방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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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숙왕이 복위하여 정승 윤석을 하옥한 뒤 네 가지 죄목으로 국문케 하였다.<br> 왕이 원나라에 있을 적에 행저에 전곡을 억지로 중지케 한 것이 첫 번째 죄다.<br> 소인들이 정치를 어지럽히는데도 정승으로서 말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죄다.<br> 전왕과 함께 원나라에 모반한 것이 세 번째 죄다.<br> 내수와 결탁하여 왕의 부자를 이간한 것이 네 번째 죄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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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이 몽고병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달로화적이 되었다.<br> 군중에서 노획한 재물은 모두 자기의 소유로 했는데, 은비녀가 한 상자에 가득 할 정도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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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의 내시 박인평은 간교함으로써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br> 왕이 원나라에 가게 되자 드디어 왕을 배반하고 도리어 비밀스러운 일을 심왕에게 하소연하였다.<br> 그래서 시종들이 모두 이반하게 되었다.<br> 당시 사람들이 "인평은 사람 고양이다.<br> 왕을 그릇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리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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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릇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자식을 따르다가 스스로 찬역의 그물에 걸려들었다.<br> 덕흥군이 일찍이 승려가 되어 있었는데 당시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세우려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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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복원이 죄를 얻어 몽고로 달아났는데 황제가 그를 발로 차서 죽이라고 하였다.<br> 그의 아들 다구가 본국을 모함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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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적이 원나라 내관들과 관계를 맺어 권력이 중외를 기울일 정도였다.<br> 충선왕이 즉위함에 미쳐서 그들과 더욱 친밀하여 채하중과 함께 도당에 글을 바쳐 임금에 대해 하소연하기를 마지 않았다.<br> 활을 잡고 칼을 차고 몰려다니면서 사람들을 협박하였다.<br> 역모를 꾀하여 난리를 일으켰다가 드디어 복주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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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박이 원나라에 갔다.<br> 덕흥군이 총랑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br> 돌아오자 왕이 "덕흥군이 좋은 벼슬로 꾀었는데도 네가 따르지 않았으니 나도 좋은 벼슬로 그대를 포상하리라" 하고 바로 중서사인을 제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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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따오기 고기를 연달아 바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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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때 원나라에 가서 공물을 바치는데 사사로이 금이나 은을 가지고 가는 것을 금하였다.<br> 신우 때에 위견이 금령을 위반하여 머리를 베어 조리돌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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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미녀를 바치게 하자 전국에 혼인을 금하는 조칙을 내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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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황서를 원나라에 보내어 '금으로 그린 자기'를 바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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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를 섬긴 이래로부터 태평한 날이 오래 계속되어 '문신들이 느긋하고 무신들은 놀며 지냅니다'. 대궐을 지킬 사람이 없어, 호군 등의 관직을 설치하여 대권을 지키는 임무를 대신하고 있으니 조종 때의 팔위 제도는 모두 헛되이 설치한 것이 되었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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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가 요서를 침략하니 수나라의 황제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br> 왕 고원이 두려워 표를 올려 사죄하며 '요동의 분토신 원'이라 일컬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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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원나라를 섬긴 이래로 국사가 창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많아서 첨의와 밀직이 매양 도평의사에 모여서 의논하였는데, 상의라는 이름이 또한 만들어져 국정에 참여한 자가 6,70명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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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를 배알하니 황제가 고려가요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에 왕이 쌍연곡을 연주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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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방경이 원나라 진봉사가 되었다.<br> 출국하면서 가져간 금은 등 국신은 혹 상대편 관원이 궐직이 되어 받을 사람이 없으면, 사신이 마음대로 쓰게 되어 있다.<br> 그러나 공은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국신고에 반납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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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연이어 환관을 바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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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새매를 바치니 황제가 그것을 받았다.<br> 그 뒤에도 연이어 사신을 보내 새매를 바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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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 번 오랑캐 원나라가 말 기르는 것을 감독한 이후로 화류가 해마다 천자의 마구간에 들어가네. 원나라에서 탐라에 목장을 설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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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수달의 가죽 1천 장[領]을 바칠 것을 요구했다.<br> 백방으로 잡아도 그 수를 맞추기 어려워 977장을 실어 보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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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 때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대령산 남쪽의 비자 50근을 구했다.<br> 그 지방 사람들은 비자나무를 백목이라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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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동녀를 구하는 조칙을 내렸다.<br> 이때 이곡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어사대에게 말하여 자기가 대신 상소문을 작성하여 올리니, 황제가 깊이 받아들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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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어 어린 여자를 찾아오도록 했다.<br> 이때 이곡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어사대에 이야기하여 대신 소를 지어 올리니 왕이 그 뜻을 충분히 받아 들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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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8년 몸고 사신이 와서 광첨동유 160근을 요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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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세조가 황주와 봉주에 둔전을 설치했다.<br> 밭가는 소가 오륙 천 마리도 더 되었다.<br> 고려에 이들의 사료를 담당하게 하였다.<br> 그래서 나라 안팎이 모두 곤란하여 백성들은 초목의 열매를 먹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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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장군 흔도가 봉주에 주둔하면서 군사와 말 그리고 양식과 사료를 징발하였다.<br> 이에 창고가 고갈되어 더 이상 공급할 수가 없어서 왕이 민가에서 말사료를 내게 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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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3년에 원나라가 탐라에 목장을 두고 소와 말과 나귀와 양을 실어 보내어 수산평에 방목하게 하니 마축이 번식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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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 탐라는 원나라에 예속되었는데 말을 기르는 것이 번성하지 못하였다.<br> 나라에서 원나라에 갈 때나 원나라의 일본 원정을 도울 때 지방 관리들에게 말을 바치게 하고, 또 관품에 따라 모든 관리들의 말을 거두니 온 나라가 괴로워하였다.<br> 그러자 왕이 마축자장별감을 두어 여러 섬에서 말을 놓아 길러 번식시키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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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3년에 원나라 세조가 목마장을 탐라에 두고 관리를 두어 주관하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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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둔전을 설치하여 공물을 마련하게 하니, 중외가 모두 곤궁하여 백성들이 초목의 열매를 먹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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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다.<br> 원종은 반전색을 설치하여 여러 도에서 백금을 거두도록 하여 조근하는 사람들의 여행 경비로 쓰게 하였다.<br> 백성들이 굶주린 사람이 많자 충렬왕이 명하여 없애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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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 발아찰연이 있는데, 인척간에 모여서 즐기며 자손의 경사를 삼는 것으로서 그 예가 매우 성대했다.<br> 고려 공민왕이 원나라에 글을 올려 기 황후의 어머니를 위해 이 연회를 열기를 청하니, 원나라가 태자를 보내어 드디어 이 연회를 베풀었다.<br> 시종과 호위병들이 고기를 차려 놓고 먹기를 다투어 승부를 겨루었는데 많이 먹는 자가 승자가 된다.<br> 연회가 끝나고 각각 호가를 불고 춤추며 빙빙 돌면서 저사단을 이어 잡고 둥글게 서서 천을 잘라 꽃을 만드는데 5천 여 필에 이르렀다.<br> 다른 물건도 이에 상응하여 소모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니 국가의 경비가 고갈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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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는 탐라가 방성의 분야라고 생각하여 목장을 두었고 또 만호를 두어 목축을 주관하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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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사신이 속임수로 안교를 요구하면서 왔다.<br> 그리고는 충혜왕을 발로 차면서 묶고는 겨드랑이에 끼고 말에 태워 갔다.<br> 관리들은 모두 달아나 숨어서 구원하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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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장수지가 사신으로 나왔다가 개인적으로 노새를 열 마리를 청하여 가지고 돌아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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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추가 본국인으로서 도리어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원나라 황제가 추를 보내와서 재목을 구하게 하니, 추가 울릉도에 들어가 나무를 베고자 했다.<br> 왕이 대장군 강위로 하여금 도와 함께 가게 하니, 추가 3품은 낮은 직급인 것으로써 말하기를 "3품은 개와 같으니 함께 동행할 수 없다"고 하니, 추밀사 허공을 대신 동행하게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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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여 동녀를 구하여 오게 하였다.<br> 이곡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들어보니 나라 사람들이 딸을 낳으면 곧바로 숨기고는 그래도 꼭꼭 숨기지를 못했을까 염려하니, 비록 이웃 사람이라 할지라도 볼 수가 없습니다.<br> 혹 동녀를 숨기면 그 친족을 잡아들였다가 동녀가 나타난 뒤에야 그만둡니다.<br> 옛날에 동해에 원한을 품은 아낙네가 있었는데, 삼년 동안 크게 가물었다고 합니다.<br> 지금 고려국에 얼마나 많은 원부가 있겠습니까?"하니, 황제가 이를 깊이 가납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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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8년에 몽고의 황태제가 와서 갓는 모시 2천 필을 요구하였다.<br> "밤 깊은데 가벼운 적삼 가는 모시를 입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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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8년 몽고의 사신이 와서 가는 명주 3천 필을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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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 9년(1268)에 원나라 세조가 김유와 신백천을 보내어 대령산의 향백자, 유체인상, 관음송 위에 고인 물, 풍면송 솔잎, 송고떡, 남해도의 실모송, 지령동의 전밀, 금강산의 석용, 영동군의 향국자를 요구했다.<br> 김유와 신백천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오랫동안 몽고에 있어서 고려를 등지고 사신의 임무를 받들어 고려로 돌아와 그 욕심을 이루고자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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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우가 14층 금탑을 만들었다.<br> 부소산에 석탑이 있는데 13층이다.<br> 12회상을 조각했는데 인물이 살아 움직이고 형용이 또렷하고 제작이 정교하여 천하에 둘도 없다.<br> 시속에 전하기를 "원나라 승상 탈탈이 경천사를 원찰로 만들고 강융이 원나라 공인을 모집하여 이 탑을 만들었다"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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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 때에 몽고에서 사람을 보내 아길아합몽합의 가죽을 구하였다.<br> 아길아합몽합은 물고기 이름인데 모양은 소처럼 생겼다.<br> 혹은 환각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가죽으로 가죽신을 만들면 병이 낫는다.<br> 활제가 이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구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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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병기를 만들라 하여 민간에서 화살 만들 깃과 활촉 만들 철을 거두게 했는데 장차 다시 일본을 정벌하여 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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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 때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 오매와 화리를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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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서 우리나라에 원나라 군대의 둔전을 두었고 또 둔전우도 두었다.<br> 고종이 왕의 친족과 높고 낮은 관료와 그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콩을 차등있게 갹출하여 소사료로 공급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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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태감을 보내어 장인 37인을 거느리고 신광사를 짓게 하고 원찰이라 일컬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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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 9년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 사람 형체를 닮은 인삼을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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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와서 동남 동녀 각각 5백 명을 요구했다.<br> 왕이 글로써 답하기를 "우리나라 풍속에는 비록 군주라고 할지라도 오직 한 사람의 적실만 취하고 다시 잉첩을 취하는 경우는 없습니다.<br> 신료들 가운데 조정의 반열에 있는 이들도 또한 한 사람의 처를 취하는 데에 지나지 않으니 자식이 혹 있건 없건 만약 모두 원나라에 보낸다면 누가 그 신하 나라의 직분을 계승하여 대국 원나라를 섬기겠습니까?"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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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때 몽고에서 고려에 사람을 보내서 자로를 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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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에 몽고의 사신이 왔을 때 자황 10근을 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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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 때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 붉은 구리 2만근을 구했다.<br> 구리는 매우 견고하면서도 붉다.<br> 식기, 숟가락, 젓가락 등을 모두 이 구리로 만든다.<br> 바로 중국에서 고려동이라고 하는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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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의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명령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화살과 깃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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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세조의 황후가 경전을 보관하기 위해 나전으로 세공을 한 상자를 요구하였다.<br> 왕이 전함조성도감을 설치하고 나전 상자를 만들어 바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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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에서 사신을 보내 지령동의 전밀을 구했는데 고려에는 없는 물건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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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때 조윤통이 원나라에 갔는데 황제가 이르기를 "세상에 전하기를 너희 나라에서 생산되는 인삼이 가장 좋다고 하니, 짐을 위해 인삼을 바치거라"라고 하자 조윤통이 대답하기를 "해마다 수백 근의 인삼을 채취합니다.<br> 황제가 명하여 그를 보내 해마다 주, 군을 순회하며 백성들을 징발해 인삼을 채취하게 하였다.<br> 조금이라도 기한 내에 바치지 않으면 곧다로 은과 비단을 징수해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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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 때 이추가 도망하여 원나라로 들어가 원나라 황제한테 거짓으로 말하고는 고려로 와서 금, 옻, '푸른 등나무'를 요구하였는데 모두 다 고려에서는 나지 않는 것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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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33년(1246)에 몽고인이 북쪽 변경에 들어와 수달을 잡는다는 핑계로 모든 산천의 궁벽한 곳을 엿보지 않음이 없었으나, 나라 사람들은 몽고와 우호를 맺고 있기 때문에 자못 개의치 않았다.<br> 34년(1247) 가을에 몽고 병사가 염주에 진을 치니 백성들은 모두 몰리고 약탈을 당하여 벗어난 이가 드물었다.<br> 이듬해 겨울에 북쪽 오랑캐가 또 수달을 잡는다는 핑계로 청천강을 건너 들어와 도적질하니 왕은 팽배를 내보내서 두 반으로 나누어 번갈아 송도를 지키게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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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와서 풍면과 송엽을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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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 원나라 탈탈이 사람을 보내 해청 두 마리를 바치고 그것을 계기로 동녀를 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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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 때 원나라가 세조가 사람을 보내어 영동군의 향기로운 누룩을 요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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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보낸 사신이 고려에 와서 행백자를 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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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와서 어상의 재료로 쓸 향장목을 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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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송골매를 잡아서 바치라고 독촉하니 고려 충렬왕이 사신을 보내어 송골매를 바치고 또 새매를 바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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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이 몽고에 와서 '자단나무' 등의 물자를 요구하였다.<br> 이에 앞서 고려 사람 가운데서 도망쳐서 몽고에 들어가 이런 물자가 고려에서 생산된다고 거짓으로 아뢴 자가 있었으므로 원나라에서 믿고 이런 것들을 요구하레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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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을 세우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장차 역모의 우두머리를 추궁하려고 하였다.<br> 이에 임연이 그들을 꺾을 계획을 하고 이에 백관들을 모아서 왕을 복위하는 것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얼마 있지 않아 근심과 분노 때문에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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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유가 원나라 있으면서 덕흥군을 받들고 동쪽으로 압록강을 건너왔다.<br> 안우경이 그들과 7번 싸워 격파하였다.<br> 또 장군 송신길을 사로잡아 배를 갈라 적군에게 보여주니 원나라 병사들이 대패하여 가버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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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몽주가 북쪽 원나라 사신을 맞아들이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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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말에 백관들이 몽고옷을 입고 있었다.<br> 정몽주가 건의하여 백관의 관복을 정하였는데 1품부터 9품까지 모두 비단으로 만든 모자와 둥근 깃의 옷을 입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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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우 초에 북쪽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것에 대하여 의논이 있었는데, 정도전이 "제가 마땅히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오겠습니다.<br>"하였다.<br> 이 일로 이인임의 뜻에 거슬려 회진현에 유배되었다.<br> 그는 그곳 소재동에 우거하면서 『소재동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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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무선이 원나라 염소장 이원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몰래 그 방법을 물어 집안의 종 몇 명을 시켜서 사사로이 익혀서 시험하고 조정에 아뢰어 비로소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화약을 만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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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춘명이 자주 부사가 되어 성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br> 몽고인이 말하기를 "누군인가" 하니 말하기를 "자주 태수이다.<br>" 하였다.<br> 이에 몽고인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온 성의 사람이 충신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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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세웠다.<br> 이에 원나라 황제가 장군을 보내어 임연에게 죄를 따져 물었다.<br> 임연은 황제의 명을 거절하고자 하여 백성들을 거느리고 섬에 들어가 살았는데, 근심과 분노로 인하여 등창이 발병하여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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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민왕이 오랑캐 옷을 입고 변발을 하자 이연종이 간하여 말하기를 "변발과 오랑캐 옷은 선왕의 제도가 아니니 본받지 마십시오"라 하였다.<br> 그러자 왕이 즉시 변발을 풀고 기뻐하며 옷과 이불을 하사하였다.<br> 당시 사람들이 이연종을 현명한 신하라 생각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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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고려국의 사풍을 고치려고 하니 앞으로 일어난 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br> 이에 조인규가 홀로 말을 타고 원나라에 들어가 천자를 뵙고 의견을 명백하게 아뢰어, 옛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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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 원나라 사신 야율희일이 와서 대성전의 집이 좁고 매우 누추한 것이 반궁의 제도에 맞지 않는 것을 언급함에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새로 중수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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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탁이 대산이 되었을 때 천제석이라 자칭하고 요망한 말로 군중을 미혹시키는 무당이 있었다.<br> 유탁이 그를 매로 때리니, 원나라 사신이 유탁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부인을 형벌한 사람이 있습니까?"하니, 유탁이 학식이 없어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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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사신이 와서 충혜왕을 결박해 갔다.<br> 숙주에 이르러 왕이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숙주 수령 안균이 이불을 올리지 않았다.<br> 원나라 사신이 안균에게 말하기를 "너의 임금이 추위가 두려워 이불을 달라고 하는데 네가 주지 않으니 신하의 의리에 있어 어찌된 것인가?"라고 하고서 쇠로 만든 자를 그를 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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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17년에 거란병이 침략하여 북쪽 경계의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br> 오영인이 원나라에 들어가 황제에게 아뢰니 황제가 말하기를 "너의 나라는 당태종이 친히 정벌에 나서서도 쉽게 이기지 못하였는데 지금 이런 조그마한 나라의 침략을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는가?"라 하였다.<br> 오영인이 말하기를 "고금의 성쇠가 같지 않습니다.<br>"하니 황제가 야전을 하라고 유시해주었는데 그에 따라 공격하여 드디어 물리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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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사신 장수지가 우리나라에 와서 밀직사사 한희유에게 물어 말하기를 "추밀원은 지금 어떤 호칭으로 바뀌었습니까?" 하니 한희유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br> 또 묻기를 "그대는 어떻게 재상이 되었는가?" 하니 한희유가 "군공 때문이다"라 대답하였다.<br> 이에 장수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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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의는 성격이 간사하고 아첨을 잘 하였다.<br> 일찍이 경상도의 안렴사가 되어 가렴주구와 가혹한 형벌로 다시리니,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br> 원나라 사신이 경상도를 왕래하면서 이에 말하기를 "별감을 많이 파견하여 마음대로 가렴주구와 포확함을 숭상하며 형벌을 남용하여 속죄금을 과중하게 받음으로 인하여 죽는 백성들이 많다.<br> 백성은 천자의 백성인데,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하는가?"하였다.<br> 김방경이 권의를 처벌하자 하였지만 왕이 들어주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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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때에 합단이 침략하니 원나라 황제가 병사를 보내어 토벌했는데, 원나라 장수가 왕에게 말하기를 "왕이 친히 나가 도적을 막으소서." 하였다.<br> 왕이 늙고 병든 것으로 사양하니, 원나라 장수가 말하기를 "이웃 사람이 잘못하여 불이 나도 오히려 가서 구제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일에 있어서 어찌 좌시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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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하간왕이 곽영석을 사신으로 보내왔다.<br> 그가 문묘에 배알할 때 학사가 황폐하게 무너져 있었다.<br> 곽영석이 관방에게 말하기를 "내 듣건대 당신네 나라는 예로부터 문을 숭상한다고 하던데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소?"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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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고려 충혜왕을 게양에 귀양보냄에 황제가 왕에게 고하기를 "그대는 임금이 되어 백성에게 포학하니, 비록 그대의 피로써 천하의 개에게 먹게 하더라도 오히려 먹지 않으리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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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동운부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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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재 이제현이 원나라에 벼슬하다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아미산'에 향을 내려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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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서 고려에 행성을 두어 세록노비법을 혁파하고자 하였다.<br> 최유엄이 이때 나이 86세였는데, 중서성에 가서 옛날 제도를 그대로 따르도록 극력 청하였다.<br> 귀국함에 나라 사람들이 손을 들어 경례를 하고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삼한을 있게 한 것은 최시중이다"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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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공민왕 23년에 향시에 합력한 사람 김잠, 송문중, 조신 등을 원나라 서울에 보내어 회시에 응하게 했는데, 바닷길에 회오리바람 만나 거인들이 모두 바다에 빠져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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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삼석은 본래 남만 사람이다.<br> 성격이 경박하고 조급하였으며 재주와 학예가 없었다.<br>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왕삼석이 왕을 찾아 뵙고 총애를 얻었다.<br> 드디어 왕과 함께 고려에 돌아와 의술로써 총애를 받음이 비길 데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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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공수가 원나라에 있을 때 기황후가 이공수에게 덕흥군을 모시고 돌아가라고 하였다.<br> 당시에 원나라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 벼슬을 받았는데 이공수만은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비록 목의 피를 덕흥군의 끌채에 뿌리지는 못할지라도 어찌 차마 따를 수 있겠는가?"라 하고 병을 핑계 대고 따르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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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은 이색이 원나라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하여 두 번 장원을 하니, 고관인 한림승지 구양현이 보고서 크게 칭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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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청주이다.<br>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한원에 있었는데 충직하고 문장의 재능이 있었다.<br>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세조가 고려에 명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내서 초유하도록 했을 때 서장관이 없었다.<br> 사람들이 모두 그 일을 회피했으나 곽린이 무리들에게 말하기를 "일에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것이 신하의 절의이니 어찌 사양하랴?" 하니 재상이 기뻐하며 드디어 서장관에 들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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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포산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이 총량으로 원나라에 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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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보문이 하정사로 원나라에 갔는데, 황제가 한림시강학사 지제고 동수국사 벼슬을 주었다.<br> 전보문은 글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매우 해괴하게 여겼다.<br> 원나라 말기에 벼슬을 함부로 줌이 이와 같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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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가신이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세조 황제가 중히 여겨 융숭한 대우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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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화는 자기 아버지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갔다.<br> 그는 어려서부터 말타기를 익히고 막대기를 잘 다루어 신묘하기가 고금에 드물었는데 황제가 매우 탄복하며 좌우에 말하기를 "만약 신의 도움이 아니라면 이는 반드시 환술일 것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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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현이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다.<br> 후에 몽고의 병사를 따라 돌아와서 여러 성들을 항복하도록 회유하고 거기에서 얻은 재물을 모두 자기 것으로 삼았다.<br> 여러 재상들이 그를 반역자라 논죄하여 그를 죽여 시신을 거리에 버리고 그의 가족들은 적몰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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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가 자오이다.<br> 행주 사람이다.<br> 벼슬하여 총랑이 되었다.<br> 정중부가 난리를 일으킨 뒤로 권신이 잇달아 일어났으나 자오는 시종 부지하여 옛 관직을 잃지 않았다.<br> 그의 막내딸이 원나라 순제의 황후가 되어 태자를 생산하였다.<br> 황제가 봉하여 영안왕으로 삼았다.<br> 아들 다섯을 낳았으니 기식, 기철, 기원, 기주, 기륜이다.<br> 황후의 세력을 의지하여 제멋대로 굴다가 모두 주살당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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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후와 장순룡은 모두 몽고의 겁령구였는데 왕에게 총애를 얻어 다투어 집을 지음에 사치하고 참람함이 극도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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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후는 처음 원나라 순제의 궁녀가 되었는데 성품이 영리하여 날로 총애를 받았다.<br> 뒤에 황후가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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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풍의가 아름답고 일에 주선을 잘하였으나 일을 처리함에 과단성이 없었다.<br> 그러나 사람들이 장자라 칭했다.<br> 일찍이 몽고에 사신을 가서 남송과 일본과의 교류를 하지 않을 것을 변론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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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산 사람이다.<br> 성품이 질박하여 화려함이 없었다.<br>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적에 부윤이 따라갔다.<br> 비록 험난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절개를 지키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br> 원나라 세조가 그 이름을 알고 정동행성의 관직을 주었다.<br> 나중에 관직이 찬성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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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이 안변으로 고려 말에 원나라의 제과 시험에 합격하였다.<br> 재지와 품행과 그리고 이적이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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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안동이며 문영공 김순의 아들이다.<br> 젊었을 때 자는 나해라고 하였고, 호는 구봉이다.<br> 충렬왕 때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조적의 난에 시종하여 공을 세웠다.<br>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들려 갔을 때 김영돈이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다"라 하고 여러 재상들과 함께 글을 올려 풀어 줄 것을 요청하려고 하였으나 논의가 일치하지 않아 성사되지 못하였다.<br> 충목왕 때에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고 상낙군에 봉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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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안성으로 좌복야 김돈의 아들이다.<br> 15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br> 원종 때 원나라 세조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을 타일렀는데, 김유성은 서장관으로 원나라 사신과 함께 가서 반역과 순종의 논리로 타이르니 일본이 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조공을 바쳤다.<br> 그 공으로 어사로 옮겼다.<br> 충렬왕 때 원나라가 또 다시 사신을 일본에 보내는데 왕은 김유성이 말을 잘한다 하여 선유사로 삼아서 보냈는데 붙잡혀서 돌아오지 못했다.<br> 국가에서 불쌍히 여겨 평리 벼슬을 영원히 주고 대대로 그 집에 녹을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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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주 춘양현 사람이다.<br> 처음 이름은 지정(之琔)이었는데 뒤에 정미로 고쳤다가 충선왕이 이(怡)라는 이름을 내렸다.<br> 성격이 활달하고 일찍부터 큰 뜻이 있어 장자의 기풍이 있었다.<br>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처벌을 받는 수고로움을 겪었으나 시종일관 한결같이 절조를 지켰다.<br> 벼슬은 중찬에 이르렀고 시호는 광정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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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경산이다.<br> 충선왕을 모시고 원나라에 가서 공을 세웠다.<br>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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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낙안이다.<br> 고려 공민왕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br> 이존오가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던 옥사에 연루되어 곤장을 맞고 외지로 유배되었다.<br> 세자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갈 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시종하는 사람은 마땅히 바른 사람을 써야 하니, 변방의 무관직을 제거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했다.<br> 관직이 대사헌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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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광산이다.<br>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고 침중하여 말이 적었다.<br> 원종조에 문과에 급제하고, 충렬왕 때 승선에 임명되었다.<br> 원나라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때 대명포에 이르러 군사가 익사한 이가 많았는데, 주정이 계책으로써 건져서 살린 사람이 매우 많았다.<br> 그러나 일찍이 응방사가 되어 응견으로써 왕에게 아부하여 자못 위세를 떨쳤다.<br> 관직은 도첨의에 이르고, 시호는 문숙이다.<br> 아들은 심인데 아래 인명에 보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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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서흥으로 무술과 지략으로 유명하였다.<br> 일본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공이 있어서 원나라에서 관군총파에 임명하였다.<br> 관직이 찬성사에 이르렀으며 서흥군에 봉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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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경현 군산도 사람이다.<br> 젊어서 지혜와 용기가 있었으며 경서와 역사에 능통하였다.<br> 고종 때 몽고 사신 저가등이 왓는데 왕이 김희제로 유회사를 삼았다.<br> 저가등은 김희제의 처분을 한결같이 따랐다.<br> 뒤에 전라도 순문사가 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최이에게 참소하였다.<br> 최이가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br> 드디어 바다에 투신하여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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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경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문학을 좋아하지 않고 오히려 몽고어를 배우니 원나라 세조가 납린합날이라 불렀는데 응대함이 자상하고 민첩하여 행동이 재빠르기 때문에 '납린'이라 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기이했기 때문에 '합날'이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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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제신이 원나라에서 벼슬하다가 고려에 돌아와서는 정동행성낭중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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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순효는 성품이 맑고 깨끗하였는데, 일찍이 몽고에 사신으로 갔을 때 어떠한 물건도 뇌물로 받지 않고 돌아왔으므로 주머니와 자루가 모두 비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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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용보는 천한 노예로서 금박을 만드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는데, 충숙왕 때 여러 번 승진하여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br> 충숙왕이 원나라에 체류할 때 심왕 고가 왕위 찬탈을 꾀하고 간실들이 서로 결탁했다.<br> 그때 왕이 재상에게 말하기를 "옛날에 작은 광대가 큰 광대를 따라 강을 건너려는데 배가 없어서 큰 광대에게 '나는 키가 작아 물의 깊이를 알기 어렵지만, 그대는 키가 크니 먼저 수심을 재어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br> 드디어 물에 들어가 모두 빠져 죽고 오직 작은 광대만 죽음을 면했다.<br> 지금 작은 광대가 나라에 있으니, 전영보가 그 놈이다.<br> 나를 화의 그물 가운데 두고 좌시하니,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br> 나라 말에 가면을 쓰고 놀이하는 자를 '광대'라고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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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곡이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의 대책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독권관들이 크게 칭찬하며 특별히 제2등으로 뽑았다.<br> 이색이 정동향시에 합격하여 원나라에 가서 정시에 합격하니 한림승지 구양현이 그의 대책에 답안지를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제2등으로 뽑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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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염제신이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있을 때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돌아올 것을 요청하였다.<br> 황제가 잔치를 베풀고서 그를 보냈다.<br> 공민왕이 친히 '그 얼굴을 그려서' 내려주면서 말하기를 "중국에서 배워서 성품 또한 고결하여 다른 신하들과 비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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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일신이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숙위하였다.<br> 공민왕이 돌아와 왕위에 오름에 조일신이 왕을 수행한 공을 믿고 횡포를 부리며 방자하였다.<br> 이에 마을의 악하고 젊은 이들을 모집하여 기씨들을 제거하고 또 왕을 이궁에 가두고 숙직하던 위사들을 죽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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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 있을 때 심왕을 보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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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과에 급제하여 일찍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br> 한림학사에 임명되었다.<br> 고려에 돌아와서는 관직이 수정승에 이르렀다.<br> 『본국편년강목』을 편찬하여 주자의 의논이 그르다고 주장하는데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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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강은 만물에 정통했다.<br> 일찍이 몽고에 사신으로 갔는데 황제가 참으로 유능한 사신이라고 칭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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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조정에서 배신 가운데 현자를 불렀다.<br> 최유엄이 이 명에 응하였다.<br> 황제가 불러 보고는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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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남포이다.<br> 대사성 백문절의 아들이고 호는 이재이다.<br> 천성이 순박하고 후하여 재상의 기국이 있었다.<br> 당시에 정주학이 처음 중국에서 일어나 아직 우리나라에 전해지지 않았는데,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정주학을 배우니, 이제현 등이 먼저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br> 상당군에 봉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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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래 심양 사람인데 원나라 말년에 고려에 와서 공민왕을 섬겼다.<br> 여러 번 전공을 세워 관직이 영삼사사에 이르고 원천 부원군에 봉해졌다.<br> 신우가 폐위되어 여흥에 거처하니 공이 김저의 옥사에 연루되었다.<br> 윤소종 등이 '신우를 맞이하는 일을 꾀한 죄'를 논하여 끝내 죽임을 당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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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제신이 원나라에 들어갔다.<br> 일찍이 강소절강에 사신으로 갔는데 청백한 것으로 알려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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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이는 고려 충선왕을 오래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시종하여 왕을 보살핀 공로가 있었다.<br> 조일신이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했는데 귀국하여 공을 기록함에 1등으로 등록되었다.<br> 왕을 보살핀 공로를 믿고 횡포를 부리고 교만 방자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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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에서는 부형을 쓰지 않기 때문에 엄인이 없었다.<br> 안락공주가 원나라에 몇 사람을 바쳤는데, 원나라 황제가 매일 보고 가까이 하여 총애했다.<br> 이로부터 잔인하고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서로 본받아 아버지는 그 아들을 거세하고 형은 그 아우를 거세하고 또 강폭한 자는 조금만 분통과 원망이 있으면 문득 스스로 거세한 까닭으로 수십 년이 되지 않는 사이에 거세한 무리가 매우 많아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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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능간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반전색이 되어 한 푼도 사사롭게 쓰지 않고, 깨끗하고 고생스레 지내면서 스스로 힘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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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인복은 원나라 과거시험인 제과에 합격하여 태녕로금주판관에 임명되었다.<br> 고려에 돌아와서는 충목왕이 그가 명망이 있다고 여겨 4번 관직을 옮겨 우부대언으로 삼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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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노성은 본래 원나라 색목의 부유한 상인이었는데 충숙왕이 군에 봉하도록 명하고는 물의가 들끓을 것을 싫어하여 비목에 "사백 살의 노인 최노성"이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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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공수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는 길에 여산참에 이르렀다.<br> 거기에 노적가리가 들판에 쌓여있었는데, 따르던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와 말에게 먹였다.<br> 공이 말하기를 "벼 한 묶음의 값이 면포 몇 자에 해당하는가?" 하고는 말한 그대로 면포 양쪽 끝에다 써서 노적가리 안에 두고 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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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청신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몽고어를 익혔다.<br>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을 가서 황제께 응대함을 잘 하여 드디어 총애와 신임을 받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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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경주인데 스스로 홍유후 설총의 후예라고 했다.<br> 키가 크고 풍채가 아름다웠고 천성이 근후하였다.<br> 살림을 돌보지 않았다.<br> 대대로 의업을 이어 왔는데 의술에 자못 정통했다.<br> 원나라 세조가 몸이 아파 의원을 구하자 설경성을 보냈다.<br> 약을 쓰니 효과가 있었다.<br> 이때부터 자주 왕래했는데 황제가 내리는 것을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br>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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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공원, 호는 근사재이다.<br> 본래 회골 사람인데 시문에 능하였다.<br> 원나라에서 진사에 합격하여 단본당 정자를 역임하였다.<br> 지정 15년에 단주 수령이 되었을 때 창을 맞고 탈출했는데 뒤에 홍적적을 피하여 고려로 왔다.<br> 공민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상종하였기 때문에 예로 대우하여 군에 봉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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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말에 설씨가 가솔을 이끌고 동쪽으로 왔다.<br> 그 선대는 도운인데 나라를 위하여 적을 토벌함에 굽히지 않고 죽어서도 신이 되어 전쟁을 독려하여 이적을 드러내니 신하의 충성이고 부인은 일찍 과부가 되어 의를 지켰으니 부인의 정절이고 아들 총관은 10세에 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의 병을 낫게 했으니 자식의 효도이다.<br> 한 가문 안에 삼절이 능히 갖추어졌으니 그 당을 삼절이라 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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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곡은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여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며 강마해 진보한 바가 깊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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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자 최세연은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종하였는데 날마다 호위병들에게 말똥을 줍게 하여 행군할 때의 땔감으로 준비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비웃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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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색이 원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어머니가 연로한 때문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에 돌아와서 당시 정치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일을 상소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정방을 혁파하고 이, 병, 부의 관리 선발권을 회복시키라는 것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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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때 권신이 날래고 용감한 병사를 뽑아 자신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명칭을 신의군이라고 하였다.<br> 백성들이나 또는 몽고에서 달아나 돌아온 사람들이 따로 한 부를 만들어 자칭 신의군이라고 하였으니 곧 삼별초의 하나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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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민왕이 처음에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br> 황제가 환국하기를 명하였다.<br>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친인보의선력봉국창혜정원 공신'의 칭호를 주었다.<br> 왕이 김영후를 보내어 표를 올려 사례하였다.<br> 용루에서 숙위에 충당되었으며 접역에서 번국의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br>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열두 글자의 포상이 백 가지 가운데 하나도 능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미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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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당지이고 호는 근재이며 본관은 흥주이다.<br> 타고난 총명함에 힘써 공부하여 글을 잘 지었다.<br> 충선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또 원나라의 과거에도 합격하였다.<br> 당시에 충숙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었는데 안축이 말하기를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 것이다"라 하고 글을 올려 충숙왕에 대해 따졌다.<br> 여러 차례 관직에 있어 표전과 사명이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br> 공은 마음을 쓰는 것이 공정하고 집안을 근검하게 꾸렸으며 좋은 일을 보면 극구 칭찬을 하고 나쁜 일을 보면 피해버리고 가까이하지 않았다.<br> 두 아우 보와 집을 가르치니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난 벼슬아치가 되었다.<br> 벼슬은 찬성사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정이다.<br> 지은 글로는 『관동와주집』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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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현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br> 그곳에서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강남에 갔는데, 그곳에 있는 삼왕묘를 배알하고 각각 송을 지어 올렸다.<br> 삼왕은 우, 탕, 문왕을 말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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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내시로 선발되어 원나라에 들어가 천자의 총애를 받은 자가 있는데, 그 중에는 천자의 조칙을 받들고 다시 고려에 사신으로 오는 자도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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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에 합격하는 사람은 관례에 따라 검열을 거쳐 예문관 응교에 임명된다.<br> 고려시대 옛 제도에 예문관 응교가 있는데, 품계는 비록 낮지만 반드시 문장으로 두터운 명망이 있어 뒷날에 문단의 맹주가 될 수 있는 사람을 뽑아 시키니, 그 선발이 지극히 중요하였다.<br>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그것을 따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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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조년은 큰 절의(節義) 다섯 가지가 있다.<br> 공이 충렬왕을 따라 중국에 갔을 때 충선왕이 와서 문안함에 여러 신료들은 모두 의심을 품고 달아나 숨었으나, 공은 다른 일이 없을 것을 믿고 진퇴를 오직 삼갔다.<br> 이것 때문에 멀리 귀양갔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일찍이 한 번도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한 적이 없는 것이 첫째이다.<br> 충숙왕이 원나라에 5년 동안 억류되었을 때 공은 여러 선비들과 종이에 서명하여 대궐로 달려가 청하고자 함에 공이 홀로 4천 이를 달려 그 글을 올린 것이 둘째이다.<br> 충혜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에 삼가지 않음이 많았다.<br> 이로 인하여 귀국을 고하고 경계의 말씀을 드리니 왕이 뒤에 자못 이를 생각하게 한 것이 셋째이다.<br> 원나라 승상 백안에게 죽고자 한 것이 넷째이다.<br> 왕이 탄알로 참새를 사냥하는 것을 간하고 용감히 떠난 것이 다섯째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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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연우 3년에 장원급제하였고 벼슬은 간의대부에 이르렀다.<br> 시를 잘 지었는데 일찍이 「춘강」이란 절구를 지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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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사람이다.<br> 처음 성명은 권재고 몽고 이름은 탈환이며 정승 권보의 아들이다.<br> 충선왕이 길러서 자신의 아들로 삼은 뒤, 성명을 내려주고 속적에 기록하였다.<br>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됨에 미쳐서 왕후가 자신으로 대신해 주기를 원했다.<br> 황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불쌍히 생각했다.<br> 성품이 굳세고 바르며 장중하고 얼굴이 크며 훤출하여 바라보면 의젓하였다.<br> 평소에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았으며 책을 읽을 줄 알고부터 글의 대의를 토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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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의풍은 본래 원나라 사람인데 충숙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었다.<br> 대궐을 출입하며 권세를 이용해 뇌물을 받았다.<br> 진양 기생 월아를 사랑하였는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이것을 연줄로 하여 벼슬을 얻은 사람이 매우 많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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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산군 해평 사람으로 정승을 지낸 윤석의 아들이다.<br>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위험한 곳에 가지 않았다.<br> 또 몽고어를 잘 하였다.<br> 벼슬이 문하성사에 이르렀다.<br> 시호는 충간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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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박이 당초에 원나라에 있을 때 덕흥군을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니 사람들이 모두 충절이 있다고 인정하였다.<br> 그러다가 신돈과 사귀면서 일을 꾸미고 떨어진 옷을 입고 밤에 다니면서 자취를 숨기고 속이는 일을 많이 하여 사람들이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br>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숨어서 간사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책망하기도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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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중보이고 본관은 한산이다.<br> 스스로 가정이라고 호를 지었으며 초명은 운이다.<br>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원나라의 과거에도 합격하여 한림원 검열에 임명되었다.<br> 중국의 문사들과 교유하여 더욱 깊은 경지에 나아갔다.<br> 문장을 짓는 붓을 잡으면 그 자리에서 이루었는데 전아하고 고고하여 외국인이라고 함부로 보지 못하였다.<br> 후에 귀국하여 벼슬은 도첨의찬성사에 이르렀고 한산군에 봉해졌다.<br> 성품이 단정하고 엄격하여 강직하였다.<br>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섬겼다.<br> 시호는 문효다.<br> 문집이 간행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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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원나라에 오래 머물러 있었는데, 권한공이 종신으로 연경의 잠저에 있었다.<br> 다른 종신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였지만, 권한공과 최성지는 같이 전주를 맡아 뇌물 받는 것을 이롭게 여겨서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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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하간부 사람이다.<br> 원나라 순제때 병란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왔는데 나라에 공로가 있어서 상산군에 봉해졌다.<br> 이 때문에 본관을 상산으로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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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담양이다.<br> 약관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후에 집안 사람들을 이끌고 촌사로 돌아가 벼슬을 구하지 않고 고서를 연구하기를 일삼아 장차 그렇게 일생을 마칠 것처럼 했다.<br> 59세에 좌사보에 임명되었는데 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br>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의 이름을 듣고 내서사인에 임명하였다.<br> 여러 번 자리를 옮겨서 좨주에 이르렀다.<br> 가는 곳마다 학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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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한주. 사람됨됨이가 청백하였으며 일을 처리함에 물흐르듯 하였다.<br> 일찍이 몽고에 사신을 갔다 돌아옴에 한가지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으니 고을의 아낙네와 역졸들이 "참다운 관인이다"라 하였다.<br> 고종 때 관직이 전라도순문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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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휴휴이며, 경산 가리현 사람으로 호는 동안거사다.<br> 어려서 고아가 되어 힘써 공부해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br> 성품이 정직하고 남에게 구함이 없었다.<br> 두타산에 들어가 몸소 농사를 지으면서 노모를 봉양하였다.<br> 뒤에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는데 시사(詩詞)가 매우 훌륭하여 접대하는 사람들이 탄복하였다.<br> 양광도, 충청도 안핵사로 나갔을 때 탐학한 관리 7명을 탄핵하여 그들의 가산을 적몰하였다.<br> 얼마 뒤 전중시사에 제수되었는데 상소를 올려 열 가지의 일의 이해를 극론하다가 임금의 미움을 사 파직되어 삼척 구동의 옛 집으로 돌아갔다.<br> 은거하며 『제왕운기』를 저술했다.<br> 충선왕이 교서를 내려 다시 불러 벼슬길에 나아갔다가 밀직부사로 치사하였다.<br> 만년에는 불법을 매우 좋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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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온주 사람이며 호는 추재로 고려 말에 와서 벼슬하여 관직이 정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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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고성이고 초명은 인성이다.<br>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을 잘 지었으며, 예서를 잘 썼다.<br> 원종 때 과거시험에 급제하였다.<br> 몽고군이 일본국을 정벌할 때 군량과 전함을 조달함에 있어서 미리 날짜에 앞서서 수집하여 준비하였는데, 백성들을 요란하게 하지 않아 고을이 편안할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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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창군 사람이다.<br>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에 합격하여 문명이 있었다.<br> 관직이 산기상시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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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재 이제현이 연우 기미년 왕을 따라 강남에 갔을 때 왕이 고향의 오수산을 불러 얼굴을 그리라 하고 북촌의 탕선생에게는 찬을 지으라 하였다.<br> 북쪽을 돌아옴에 사람들이 빌려가서 어느 곳에 있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br> 뒤 32년에 제현이 나라의 표문을 받들고 원나라 서울에 갔다가 다시 그 그림을 얻었다.<br>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의 다름에 놀라고 떨어졌다가 다시 만나는 것이 때가 있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br>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br> "이 사진은 다른 사진이 아니라, 후신을 정해 놓은 전신이라네. 아손은 전혀 알지 못하고 이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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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포가 유배지에서 개연히 멀리 중국에 가서 벼슬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br> 일찍이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한쪽 구석에서 답답하게 살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원나라로 가서 원나라 승상을 만났다.<br> 원나라 승상이 '한 번 보자마자 그를 기특하게' 여겨 황제에게 추천하였으나 공교롭게도 병이나 죽고 말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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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동 길안현 사람이다.<br>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덕흥군의 변란에 죽음을 맹세하고 따르지 않아 원나라 학사 위소가 감탄하였다.<br> 그러나 만년에 신돈에게 아부하여 속임수를 쓰고 억측을 행하다가 지윤에게 살해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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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색이 원나라에서 벼슬하고 고려에 돌아옴에 공민왕이 그에게 이부시랑 겸 병부낭중의 벼슬을 내려 문무의 관리들을 선발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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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린은 여러 번 몽고에 사신을 갔기에 전대의 재주가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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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은 이색이 원나라에서 인재를 뽑는 과거에 급제하니 규재 구양현이 크게 칭찬하여 전발이라는 말이 있었다.<br> 뒤에 목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의발은 마땅히 해외에서 전해 받았으니, 규재의 한 마디 말 아직 낭랑하네"라고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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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공수가 원나라에 가서 벼슬을 사직하고 고려로 돌아오는 도중에 말이 지치자 하인이 화살을 주고 콩단을 사서 먹였다.<br> 이에 이공수가 "어찌 빈민의 곡식을 빼앗는가?"라 하고는 비단을 끊어서 대가를 치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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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광주 장택현이다.<br>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렴하였다.<br> 처음에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숙위하고 후에 기철을 죽인 공으로 1등 공신에 들었다.<br> 8년에 홍건적이 서경에 침략하니 왕이 정세운을 서북면 도순찰사로 삼았다.<br> 10년에 홍건적이 경성을 함락하니 세운은 밤낮으로 분노를 가슴에 품어 적을 소탕하고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경성을 회복하였다.<br> 얼마 후 안우 등에게 살해되었다.<br> 후에 첨의정승에 추증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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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봉화, 고려 충숙왕조에 급제했다.<br> 성품이 강직했다.<br> 일찍이 전주에 부임했을 때 원나라 사신이 수령을 능멸하고 죄를 주고자 하니, 운경이 예를 따라 굽히지 않고 그 날로 관직을 버리고 갔다.<br> 공민왕이 처음 즉위하여 운경이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으로 내전에 불러 들여 술을 하사했다.<br> 여러 번 관직을 옮겨 형부상서 밀직제학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직하고 영주로 돌아가 세상을 마쳤다.<br> 아들이 세 명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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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목왕이 정치도감을 설치했는데 판사, 판관 등의 직책이 있었다.<br> 무릇 빼앗긴 노비나 전답, 집 등은 모두 분변하여 처리하여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br> 또 소속관원을 나누어 파견하여 각도의 전답을 측량하도록 하였다.<br> 기황후의 일가들이 그 세력에 의지해서 토지나 사람을 빼앗았으므로 형장을 때려 옥에 가두었더니 죽었다.<br>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정치도감의 관원들에게 형장을 때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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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윤부가 복서에 능하니, 원나라 세조가 듣고 불러서 시험했는데 모두 맞추자 이로 말미암아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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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경이 원나라에 벼슬하여 누차 벼슬하여 요동참정으로 옮겼다.<br> 후에 고려로 돌아왔는데,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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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한양, 쌍성 만호 조휘의 아들인데 대대로 덕원부의 용진 땅에 살았다.<br> 나이 13세 때 김방경의 부장이 되어 원나라 장군을 따라 동쪽으로 일본을 정복하러 갔다.<br> 황제가 비단 전포와 옥띠를 내려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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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유엄이 원나라에 가서 대대로 노비를 물려주는 법을 요청하였다.<br> 그가 돌아오자 백성들이 모두 이마에 손을 얹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삼한을 보존시킨 것은 최시중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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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부윤이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는데, 비록 험난한 일을 만나도 '지절을 지켜 변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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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평강인데 평자사 채송년의 아들이다.<br> 음서로 벼슬에 나갔는데 지조가 굳세었다.<br> 원종이 몽고에 갈 때 호종해 갔는데 공이 있고 도운 바가 많았다.<br>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고 원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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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철원이고 평장사 최유청의 후손이다.<br> 젊어서 자잘한 행실에는 삼가지 않고 호걸이나 협객들과 노름방이나 술집에 어울려 다녔다.<br> 나이 삼십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분발해서 독서를 하여 강종 때에 급제하였다.<br> 기국이 크고 깊었으며 여러 차례 몽고에 사신으로 갔는데 독자적으로 외교를 하는 재주가 있었다.<br> 고종 때에 벼슬이 평장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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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이 영천이다.<br> 성품이 통민하고 중국어에 능통하였다.<br> 가동에게 사사로이 원나라 사람들이 화약 만드는 법을 익히게 하여 화통을 설치하였다.<br> 심덕부와 왜적을 치면서 적선 30척을 태워 영성군에 봉해졌다.<br> 본조에 들어와서 관직이 참찬문하부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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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해주이고, 태자 자의 아들이다.<br> 성품이 고요히 물러나기를 좋아했는데, 충렬왕이 오래 그 이름을 듣고 등용하여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찬성사에 이르렀다.<br> 당시에 원나라 황제가 곁에서 모실 어진 신하를 구했는데, 유엄이 당시 나이 86세였으나 명에 응하여 원나라에 갔다.<br> 황제가 세록 노비의 법을 없애고자 하니, 유엄이 힘껏 그만두게 했다.<br> 네 임금을 내리 섬겨 관직은 정승에 이르고 시호 충헌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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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언보, 호는 소재이다.<br> 고려 말 원나라 제과에 합격하였다.<br> 벼슬이 참지정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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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한공은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왕이 환국하기에 이르러 항상 대궐에 출입하고 왕이 불러 봄이 일정한 때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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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한공이 상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을 때 권세를 부리고 뇌물을 받았다.<br> 뒤에 충숙왕이 명하여 국문하게 했는데, 한공이 변소 구멍을 따라 도망하니 잡아서 옥에 가두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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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방경이 원나라에 불려 들어갔을 때 황제가 문지기에게 명하여 빨리 들여보내라고 하였으니 총애를 받은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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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추밀원사부를 지낸 배주로 자호는 나재이다.<br> 조선조 태조가 동녕부를 공격할 때 그와 같이 돌아왔다.<br> 공민왕이 한복이라는 성명을 내리고 벼슬을 시켜 판전농시사에 임명하였다.<br> 조건 건국 후 다시 태조를 섬김에 매우 삼가고 공손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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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사고이고 본관은 한양이며 호는 복재이다.<br> 젊어서 당시의 명사들과 왕래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가 나라일을 보필할 그릇인 줄을 알았다.<br> 충렬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충선왕 때는 악양으로 유배되었다.<br> 원나라에서 한종유를 불러 충목왕을 맡겼다.<br> 귀국해서 다섯 임금을 내리 섬기니 뛰어난 충성과 큰 절개가 남보다 뛰어났으며 권세 있는 사람들이 일을 꾸미는 것을 미워하였다.<br> 만년에 한영의 저자도에 물러나 살았다.<br> 한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시호는 문절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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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녹생이 일찍이 해액에 있을 때 권세가에게 미움을 받아서 원나라의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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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김해이다.<br> 원종 말기에 과거에 급제하였다.<br>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되었을 적에 허유전이 민지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소환해 주기를 요청하였다.<br> 허유전은 당시에 나이가 81세였다.<br> 아내 또한 늙고 병들어 가지 못하게 하였다.<br> 허유전이 답하기를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 있으니 아내가 병들고 자신이 늙었다는 이유로 임금을 잊고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하고는 드디어 영결하고 떠났다.<br> 그 뒤 9일 만에 아내가 죽었다.<br> 듣는 사람들이 탄식하였다.<br> 관직이 정승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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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문야이고 본관은 남양인데 그 선조는 중국에 살았다.<br>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나라에 머물 때 왕을 위하여 사력을 다하여 그 억울함을 아뢰어 밝혔다.<br> 충숙왕이 복위되어 돌아올 때 홍빈이 따라왔다.<br> 벼슬은 정승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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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운지, 본관은 남양. 충평공 관의 후손이다.<br> 타고난 바탕이 민첩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자태가 아름답고 컸으며, 재간이 남보다 뛰어났다.<br> 어려서부터 모두들 재상감으로 기대하였다.<br> 충렬왕 때에 벼슬이 첨의중찬에 이르렀고 세 번 수상이 되었다.<br> 대신의 풍도가 있었다.<br> 일찍이 원나라에 들어가 이왕을 받들어 고려로 돌아오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br> 시호는 충정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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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곡이 원나라에 들어가 제과에 합격하여 검열에 임명되었지만, 본국 고려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는 우리나라에 돌아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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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민왕 3년 갑오년에 이색이 원나라에 가서 전정에서 대책 시험을 보았다.<br> 독권관 구양현이 이색의 대책문을 보고 크게 칭찬하면서 드디어 갑과 2등으로 뽑았다.<br> 처음에는 갑과 1등에 뽑혔지만 고시관이 이색이 외국사람이라고 하여 2등으로 바꾸어 놓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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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때 오기는 참소와 말재주로 총애를 받았는데, 왕의 부자간을 이간질하자 사람들이 이를 갈았다.<br> 원나라 이 학사가 돌아갈 때 안유가 교외에서 전별연을 베풀었는데, 이 학사가 먼저 "흰 술은 사람의 얼굴을 붉게 하고"라고 하고서 안유에게 화답을 청했는데 안유가 머뭇거렸다.<br> 이 학사가 스스로 화답하기를 "누런 금은 관리의 마음을 검게 하네"라고 하였다.<br> 이는 대체로 원나라 사신 불화가 오기의 뇌물을 받고 그의 죄를 느슨하게 다룬 것을 풍자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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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국공주가 원나라에 소인 내시를 바친 이후로 잔인한 무리들이 서로 앞다투어 모방하고 부러워하여, 궁형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내시들이 모두 본국 고려를 멸시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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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때 오랑캐 병사가 이르자 사람들이 굴 속으로 들어가 피하고 방수별감을 뽑아 지키게 하였다.<br> 고종 45년에 몽고병이 가수굴과 양파혈을 침공하였다.<br> 양파혈은 상, 중, 하 세 개가 있는데 몽고병이 산 위로부터 밧줄로 갑사를 굴 입구에 내려보냈으나 창과 도끼가 들어갈 수 없었다.<br> 이에 또 풀에 불을 질러 굴 속에 던지니 지키는 병졸들이 모두 어지럽게 흩어져 항복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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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3년에 몽고의 군사가 와서 서경을 노략질하였다.<br> 여러 성들은 위도에 들어가서 관청을 유지하고 있을 때, 김방경이 병마판관이 되었다.<br> 섬 가운데 평탄해서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사방 십여 리 가량 있었으나, 바다의 조수가 밀려들어 개간을 할 수 없었다.<br> 김방경이 바다를 막고 파종을 하게 하니 백성들이 처음에는 고통스럽게 여겼으나 가을이 되어 곡식이 잘 여물자 그 덕에 살아갈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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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침략해옴에 창고가 고갈되었음을 알려왔다.<br> 이에 왕이 주선을 감하도록 명하였다.<br> 또 창감을 소환하였으나 끝내 이르지 않았으므로 왕이 성을 내면서 그의 관직을 빼앗고자 하였다.<br> 그러나 얼마 후 탄식하여 말하기를 "오늘 비록 관직을 박탈시킨들 내일 반드시 복직될 것이니 무슨 징계가 되겠는가?"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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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가서 공주에게 장가를 들었다.<br> 황제가 본국의 악관들에게 『감황은곡』을 연주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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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민왕이 돌아가신 뒤로부터 원나라 황제가 늘 집정을 뽑아 원나라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니, 모두들 두려워서 감히 가지를 못하였다.<br> 이색이 재상이 되어 말하기를, "지금 원나라와 우리나라에 틈이 있는데, 왕은 어려서 갈 수가 없으니, 이것은 늙은 나의 책임이다"라고 하고 자청하여 원나라 조정에 들어갔다.<br> 우리 태조가 그것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강개하도다.<br> 이 늙은이여!"라고 하였다.<br> 나라 사람들이 모두 늙었다고 말렸으나, 이색은 스스로 자신이 죽을 곳을 얻었다고 생각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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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이 몽고의 병사가 수도로 침략하는 것을 피해 강화로 들어가 그곳을 '강도'라 불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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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제신은 어려서 원나라에서 자랐는데 황제가 한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서 명하여 궁궐에서 숙위를 하도록 명하였다.<br> 이 때문에 오랜 동안 어머니를 뵙지 못하자 황제에게 고하여 어머니를 뵙기를 청하였다.<br> 황제가 금강산에 향을 주라고 명한 뒤에 가서 어머니를 뵙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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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래는 고구려의 혈구군인데 신라 원성왕이 진을 두었다.<br> 고종이 몽고의 병사를 피하여 수도를 옮겼으므로 강도라고 부른다.<br> 본조에 들어와 도호부로 되었는데 사면이 바다로 둘러 있으며 안으로는 마니, 혈구에 의거하고 밖으로는 용진, 백마와 경계하고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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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2년에 원나라 황제가 고려에서 참람하게 일컫는 말을 일체 금하니 이에 충렬왕이 '사(赦)'를 고쳐 '유(有)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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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초에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우리나라 위상에 넘치게 사용해 오던 용어를 일절 금지시켰다.<br> 이에 '주(奏)를 고쳐 정(呈)으로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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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현이 원나라에서 가서 왕이 오회에 갈 때 따라갔고 또 여항에서 나그네로 묵기도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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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때 몽고병이 춘주를 침범할 때 목책을 몇 겹이나 세우고 참호를 한 길 남짓 파고서 며칠 동안 공격하니, 수령 조효립이 성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아내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가 죽었다.<br> 안찰사 박천기는 계책이 궁하고 힘이 다하자 먼저 성안의 재물과 곡식을 불사르고 나서 목책을 무너뜨리고 포위를 뚫으려 했으나 참호를 만나 나갈 수 없어 한 사람도 탈출한 자가 없었다.<br> 몽고병이 드디어 그 성의 사람을 모두 죽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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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장수가 서경에 주둔하며 김방경에게 말하기를 "오랜 객지 생황에 무료하니 물고기를 잡으려 즐겨야겠다"라고 했다.<br> 김방경이 "어디에서 고기잡이 할까요?" 하니 "대동강을 지나 초도로 들어가리라"고 했는데 김방경은 따르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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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총랑 기자오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들어가 순제의 두 번째 황후가 되어 황태자를 낳았다.<br> 공민왕이 후모 이씨를 부에 두고 이름을 경항이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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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침략하니 주현이 시들어 피폐하고 노소가 골짜기에 많이 뒹굴어 아이를 나무에 달아매고 가는 자가 있기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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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42년 여름 몽고병이 쳐들어와 의주, 정주에 주둔하였는데, 군사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br> 20 여 기마병이 곧장 승천부에 이르러 개경이 계엄에 들어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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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공수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가니 황태자가 공을 불러 광한전에 올랐다.<br> 태자가 거문고를 가지고서 타다가 곡조를 잊어버려 이루지 못하자 공이 즉시 꿇어앉아서 말하기를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을 것이고, 거문고의 한 두 곡조는 잊어버린들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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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원나라에 조회를 가서 황제에게 축수를 올렸더니 황제가 「고려가」를 부르도록 명하였다.<br> 왕이 송영 등에게 「쌍연곡」을 부르도록 하고 일어나 춤을 추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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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북면의 옛 지역 가운데 오직 공주만이 가장 편벽되고 멀다.<br> 원나라 말엽에 사람과 연기가 완전히 없어져서 가시밭이 된 지 수십 년이 되었다.<br>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됨에 미쳐서 고을로 승격하여 경원부가 되었다.<br> 유민들을 끌어 모아서 거진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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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원나라 황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br> 유경이 말하기를 "공주가 임금에게 시집온 이후 나라 사람들이 안도하고 지내게 되었다.<br>"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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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공주를 고려왕에게 시집보내어 대대로 장인과 사위의 우호를 돈독히 하였습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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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14년 봄, 궁문 밖 큰 길에서 판교까지 지렁이가 나와 혹은 실이 얽힌 것처럼 혹은 산대를 펼친 것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얼마 뒤에 몽고군이 크게 쳐들어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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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 사신이 와서 국신을 요구했다.<br> 그러나 최우는 위로하고 타일러 그냥 보내게 하였는데 그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몽고 침략의 재앙은 이때부터 싹텄다"라 하였다.<br> 윤해가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조회갈 때 행장과 공물의 재화를 관장하였는데, 귀국하여서는 쓰고 남은 물건을 모두 국신고에 반납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을 칭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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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무도와 경필의 예식을 행하는 것을 금하는 조칙을 내려 그것을 없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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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금묘년부터 준동하는 북쪽 오랑캐 사람들. 이것은 고종 신묘년에 몽고 병사가 비로소 침략하기 시작하였다는 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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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가 침략하여 노략질하자, 백돈명이 동주산성 방호별감이 되어 백성들을 몰아 성보에 들어가서는 출입을 금지시켰다.<br> 고을 사람들이 말하기를 "벼를 수확하지 못하였으니 적병이 이르기 전에 교대로 나가서 벼를 베어오기를 청합니다"라 하였다.<br> 그러나 백돈명은 그 말을 들어주지 않고 간언하는 사람을 죽였다.<br> 이에 고을 사람들이 분노하고 원망하였는데, 적병이 성 아래에 이르자 병사들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 버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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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행주로, 총랑 기자오의 막내딸이다.<br> 원나라에 선발되어 들어가 순제의 둘째 황후가 되고 태자를 낳으니 이가 기황후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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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경주이며 평장사를 지낸 김태서의 아들이다.<br> 풍모가 아름답고 성품이 장중하였으며 온화하고 너그럽고 지혜롭고 용감함이 뛰어났다.<br> 음보로 벼슬길에 나아가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br> 고려 고종 때 정주분도장군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강을 건너 정주로 침략하였다.<br> 김경손이 기지를 발휘해 대비하였는데 변란에 대응하는 재주가 귀신같아 적이 포위를 풀고 갔다.<br>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니 조정이나 재야에서 의지하며 귀중히 여겼다.<br> 최항에게 해를 입자, 사람들이 모두 애통해 하였다.<br> 벼슬이 추밀원부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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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상산, 호는 난계이다.<br> 과거에 급제하여 검교에 보임되었다.<br> 공민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였다.<br> 뒤에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재차 홍건적을 평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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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의 사람이다.<br> 성품이 널리 정통하였고 경개하기가 남달랐다.<br> 과거에 합격한 뒤에 여러 벼슬을 거쳐서 시어사가 되었다.<br> 그때 몽고가 장수를 보내어 해마다 침략을 해왔는데 왕이 수강을 보내어 더 이상 침략하지 말 것을 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br> 벼슬은 중서사인에 이르렀고 끝내 재상에 임명되지 않으니 당시의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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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이 김해다.<br> 공민왕 때 여러 장수와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여 공이 있었다.<br> 원나라에서 덕흥군을 책립하였을 때 김유가 사명을 받들고 원나라에 있으면서 절개를 지키고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br> 돌아오자 공신에 녹훈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찬성사가 되었다.<br> 바다를 건너 대명에 조회하러 가는데 바닷길이 험악하여 제 날짜에 도착하지 못하였다.<br> 고황제가 대리부로 유배보내었다.<br> 2만 8천 리나 떨어진 곳인데 3년 동안 지낸 뒤에야 살아서 돌아올 수 있었다.<br> 이인임이 또 어떤 일로 무함함으로써 순천으로 유배되었는데 도중에 졸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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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때 사람이다.<br> 고종 때 충주방호별감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고을을 90일 동안이나 포위하여 군량미가 거의 바닥이 날 지경이었다.<br> 김윤후가 병사들을 격려하자 모두들 죽을 각오로 싸워 몽고병이 점차 기가 꺾여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였다.<br> 그는 그 공으로 상장군에 올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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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주의 아전으로 어릴 때의 이름은 해장이다.<br> 고종 말기에 몽고군이 쳐들어와 그 어미를 사로잡아 갔다.<br> 그 어미가 죽은 줄로만 알고 최복을 입어 상제를 마쳤다.<br> 나중에 그 어미에 원나라 요양에서 종살이하며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백금을 가지고 가서 속량하여 돌아왔다.<br> 나라에서 그 마을에 정려를 내려 '효자지'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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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권한공이 호종을 하면서 관리의 선발을 주관하였다.<br> 왕이 돌아오자 늘 대궐에 출입하니 친척과 친구들에게 함부로 높은 벼슬을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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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악부에 「납민가」가 있다.<br> 원나라 가짜 승상인 납합이 출입하며 우리나라의 동북쪽 변방에 침략하므로 우리 태조가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쫓아 버렸다.<br> 정도전이 이 노래를 지어서 그 공을 칭송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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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혜왕이 복위했을 때 원나라의 백안은 묵은 감정이 있어 조적의 도당과 함께 대질을 하게 되었다.<br> 이조년이 분개하여 이제현에게 "내가 마땅히 글을 올리고 죽어 우리 임금이 죄가 없음을 밝히리라. 그대는 나의 편지를 쓰라"라 하고 밤에 일어나 목욕하고 떠나려 하는데 백안이 실각하였다.<br>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모골이 송연하여 말하기를 "쓸개가 몸보다 크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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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군대는 '대포차'로써 구주를 공격해 오자 장군 박서 역시 '대포차'로서 돌을 날려 공격하여 무수히 죽였다.<br> 몽고 장수가 성루와 무기를 둘러보고는 탄식해서 말하기를 "성 안에 있는 여러 장수들은 다른 날 반드시 다 장수나 정승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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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니 원나라 황제가 성을 내어 병사를 파견하여 진상을 물었다.<br> 원나라 장군 살리타가 송경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려고 하니 잡단설신이 군중에 있으라고 붙잡으면서 말하기를 "우리나라 속담에 다른 나라의 대관이 남쪽 강을 건너는 것은 불길하다는 말이 있습니다"라 하였다.<br> 그러나 원나라 장군은 그 말을 듣지 않고 강을 건너 가다가, 처인성에 이르러 빗나간 화살에 맞아 죽었다.<br> 이에 원나라 병사들이 설신이 앞을 내다보는 식견이 있다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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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조카에게 몽고에 들어가서 독로화가 되라고 하였는데 독로화는 중국말로 인질이란 뜻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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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5년이 되자 생활물품이 부족하였다.<br> 심왕의 무리들이 그것을 알고 나라 창고를 닫고 물품을 수송해 가는 것을 막았다.<br> 윤선좌가 찰관 조관에게 격문을 보내어 물품을 주관하는 자를 독책하게 하자, 물품의 수송이 이루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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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18년(1231) 겨울에 몽고군이 경성 문 밖에 주둔했는데 왕이 종실 정을 보내어 강화를 청하니 몽고 장군이 동락을 주었다.<br> 정이 권유에 따라 능히 먹고 마시니 몽고 장군이 크게 기뻐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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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지정 연간에 설손 단주를 지키다가 적에게 성이 함락되면서 창에 맞고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아났다.<br> 공민왕은 그가 종유하였기 때문에 예를 갖추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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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순제가 덕흥군을 세워 왕으로 삼고 병사 만 명을 갖추어 보내니, 공민왕이 우리 태조에게 명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가게 했다.<br> 적이 수주의 달천에 주둔했는데 우리 태조의 말이 진창에 들어가 빠져 위태로움이 심했으나 말이 훌쩍 뛰어 나오니 무리들이 경이롭게 여겼다.<br> 드디어 형세를 합하여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br> 우리 태조가 또 해주의 동정에서 왜적을 칠 때 전투가 마침 한창이었는데 한 자 남짓한 진창을 만났는데 태조의 말은 한 번에 뛰어서 지나갔으나 따르는 자들은 모두 건널 수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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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에 몽고병이 경성의 사문(四門) 밖에 주둔하니 왕이 사자를 시켜 몽고 장수에게 말다래와 말 가슴걸이 등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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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숙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들었다.<br> 돌아가기를 청하자 어떤 사람이 말렸다.<br> 숙이 말하기를 "충신과 효자는 이름이 비록 다르지만 실상은 서로 같은 것입니다.<br> 하물며 임금을 섬길 수 있는 날은 많이 남아 있고 어버이를 섬길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있지 않음에랴? 만일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였다.<br> 드디어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만나보고는 기뻐서 병이 바로 나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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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서 제주에 목장을 설치하였다.<br> 목장의 오랑캐들이 발호하여 관리를 살해하기도 하였다.<br> 공민왕이 도통사 최영을 보내어 토벌하여 없애고 다시 관리를 두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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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병이 북방 변경을 침략하였다.<br> 지병마사 홍희는 여색을 좋아하고 군무를 돌보지 않았다.<br> 이에 왕이 김지대가 재략이 있다고 생각하여 홍희를 대신하여 가서 지키게 하였다.<br> 김지대가 백성들을 은혜와 신의로서 어루만지니, 서북의 40여 성이 이에 힘입어 편안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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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낭장이 되어 몽고병에게 포로가 되었는데 몽고병이 철주성 아래 이르렀을 때 문대로 하여금 고을 사람들에게 '진짜 몽고병이 왔으니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라고 소리치게 하였다.<br> 문대가 소리치기를 "가짜 몽고병이다.<br> 항복하지 말라!"라고 하였다.<br> 몽고 사람들이 목을 베려다가 다시 소리치게 하였더니 다시 전처럼 하였다.<br> 마침내 그의 목을 베고 얼마 있지 않아서 성이 함락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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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원종이 원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장차 옛 수도를 회복하려 할 때 임유무가 병사를 거느리고 대항했는데 홍문계가 상장군 송송례와 모의하여 공격했다.<br> 임유무가 "사자가 누구인가?"라고 묻자, "홍 중승입니다"라고 하니, 임유무는 간담이 떨어져 마침내 패배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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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죽주를 침공하였다.<br> 송문주는 몽고 군사가 성을 공격하는 전술을 쓸 줄을 미리 짐작하고서 그 계획을 먼저 헤아리지 않은 것이 없었다.<br> 이에 말하기를 "오늘 적은 반드시 어떤 무기를 설치할 것이니 마땅히 어떤 무기를 준비하여 대처해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았다.<br> 사졸들이 모두 그를 '신명'이라고 일컬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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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죽산으로 상서 인석의 아들이다.<br> 고종 때 서북면병마사가 되었을 때 몽고병이 귀주를 침략하였다.<br> 박서가 기미를 타서 임기응변으로 잘 대처하여 견고하게 지키니 몽고병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br> 어떤 몽고 장군 한 명은 성 아래에서 성루와 무기들을 둘러보고는 탄복하면서 가 버렸다.<br> 뒤에 관직이 평장사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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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혁지, 본관은 춘주. 처음 이름 동보를 고쳤다.<br> 고려 고종 때 몽고 군대가 고을을 함락했을 때 부모 시체를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부모와 모양이 비슷한 사람의 시체 삼백 구를 다 거두어 묻었다.<br> 과거에 올라 벼슬이 찬성사에 이르렀다.<br>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군기에 대한 조처는 모두 박항이 내놓은 것이다.<br> 일찍이 인사(人事)를 담당했을 때 발탁하는 사람이 모두 자기에게 은혜가 있는 옛날 사람들이었다.<br> 사람들이 이 때문에 그를 보잘 것 없는 인물로 여겼다.<br> 시호는 문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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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대사동으로 옮겨가고자 했는데, 하천조가 말하기를 "이 골짜기는 백호가 입을 벌린 지세이니 지금 몽고병이 가득한데 임금과 신하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감이 옳겠습니까?"라고 하니, 이에 그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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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45년에 원나라 병사가 내침했는데, 용진 사람 조휘 등이 병마사를 죽이고 화주 이북 땅으로써 반란하여 원나라에 붙으니,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두고 조휘를 총관으로 삼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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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크게 이르니 여러 도의 산성에 모두 방호별감을 두어 수비하게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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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천의 어머니가 몽고병에게 잡혀가니, 당시에 김천의 나이가 15세였는데, 밤낮 울부짖으며 상복을 입고 상기를 마쳤다.<br> 14년 후에 어머니 서신을 가지고 와서 전하는 사람이 있어 어머니가 요양 북쪽 고을에 생존하고 있음을 알고 백금 50냥으로써 속환했다.<br> 그 아버지 종연도 또한 탈이 없어 김천이 종신토록 효를 다하니,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표창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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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천 사람이다.<br> 고종 때 몽고 적병이 경성을 포위하자 왕이 강화도로 피하였다.<br> 변려가 붙잡혀 수로에 대해 심문을 받았다.<br> 포락의 고문을 받고도 '수로가 매우 험하다'고만 대답하였다.<br> 적들이 그의 말을 믿어 배를 붙태우고 물러갔다.<br> 왕이 상장군을 제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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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 때 탐라가 원나라로부터 다시 고려에 속하게 되자, 왕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홍정, 자의, 보개 등의 물건을 하사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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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13년에 원나라 황제가 조칙을 반포하여 지원보초와 중통보초를 통행하여 쓰게 하되, 지원보초 1관의 가치를 중통보초 5관의 가치에 해당하게 하여 자모로 삼아 사용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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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고려 충선왕에게 명하여 보타굴에 경향사로 가게 했는데 이제현이 수행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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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릉간이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있었다.<br> 왕이 토번으로 유배를 가서 세상을 마치자 이릉간이 '상여를 받들고 동쪽으로 돌아왔다'. 울고불고 하면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등 애쓰며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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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하루는 옷을 갈아입다가 땅에 엎어져 이가 부러졌다.<br>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충선왕을 참소하고 받들어 모시는 데는 힘을 쓰지 않았다.<br> 그리하여 부자 간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더 벌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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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현이 성절을 축하하러 원나라에 갔다.<br> 때마침 황제가 북방 변경에 행차하고 없었는데, 원나라 관리들이 모든 나라의 사신들은 일체 서울에 머물러 있도록 하였다.<br> 그러나 김태현이 홀로 말하기를 "해마다 조공을 하면서 한번도 빠진 적이 없는데, 이번에 만약 진하하지 못하면 죄를 지을지언정 감히 우리 임금의 명령을 폐할 수 없다.<br>"하고는 드디어 북쪽으로 가서 행재소에 도착하니, 황제가 그의 충성스러운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크게 칭찬하며 상을 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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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스러운 은혜가 멀리까지 비치니, 북쪽 몽고의 군대가 눈녹듯 쓰러진다.<br> 북몽은 몽고이다.<br> 고종 때 몽고의 병사가 해마다 침범했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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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에 원나라에서 고려에 일본에 갈 서장관을 불러오도록 하니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다.<br> 곽린은 충직하고 문장을 잘 하였는데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섬김에 어려운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 신하의 절개를 지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br> 재상이 그 말을 듣고 마침내 서장으로 충당을 하였다.<br> 장인 최역이 말리려고 하였으나, 곽린은 분연히 장인의 말을 돌아보지도 않고 가서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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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든 뒤로 부부의 도리를 싫어하였다.<br> 황제가 급히 왕을 불러 입조케 하였다.<br> 안유에게 묻기를 "너희 왕이 어찌 해서 공주를 가까이하지 않는가?" 하였다.<br> 안유가 대답하기를 "규문의 일은 바깥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거늘 이로써 질문하신다면 어찌 답을 들으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br> 황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체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니, 어찌 먼 지방의 사람으로 보겠는가?"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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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이가 장흥부에 부임하니 그때 합골이 쳐들어와 노략질을 하였으므로 국가에서 각 고을로 하여금 백성들이 들에 나가 경작하는 것을 금지시키도록 하였다.<br> 김이가 말하기를 "원나라 군사가 이 대수롭지 않은 오랑캐를 도마 위의 고기처럼 제압할 것인데, 어찌 우리나라 변방 고을에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또 먹는 것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이고, 밭갈고 씨 뿌리는 데는 시기가 있는 것이다.<br> 국가의 명령을 따라서 경작하지 않는다면 굶어죽는 것은 백성이다.<br> 명령을 따르지 않고 경작하면 죄를 받는 사람은 나다"라고 하고는 백성들로 하여금 들에 나가 경작하도록 했다.<br> 오랑캐들은 과연 섬멸되었는데 다른 고을에서는 모두 수확을 하지 못했지만 오직 장흥부에만 크게 풍년이 들어 원근의 고을에서 여기에 힘을 입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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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의 왕비인 원나라 공주가 궁실을 지으려고 태사 오윤부에게 명하여 날을 잡게 하였다.<br> 윤부가 이르기를 "임금에게 불리하므로 신은 감히 날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br> 공주와 왕이 노하여 곤장을 쳤다.<br> 윤부가 이르기를 "날을 잡는 것은 흉함을 피하고 길한 쪽으로 가려고 함입니다.<br> 위협하여 날을 잡는다면 날을 잡이 않음만 못 합니다.<br>신은 차라리 죽더라도 감히 아부하지는 못 하겠습니다"하고 끝내 날을 잡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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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이 태자 때에 원나라에 인질로 가있었다.<br> 연경에서부터 길이 동관을 지났다.<br> 그곳 수령이 맞이 하여 화청궁에 이르러 온천에서 목욕하게 하였다.<br> 원종이 사양하면서 "이곳은 당의 명황제가 일찍이 목욕한 곳이니 비록 다른 시대의 사람이라 한들 어찌 감히 더럽힐 수 있으리오?"하였다.<br> 듣는 사람들이 원종이 예를 알고 있음에 감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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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손이 몽고 병사와 싸울 때에 호상에 걸터앉아 전투를 독려하였다.<br> 포탄이 머리 위를 날아가자 좌우에서 상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것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얼굴빛도 태연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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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손이 몽고 군사와 분전할 때, '팔에 화살을 맞아 피가 뚝뚝 떨어졌으나', 그래도 손으로 북을 울리기를 그치지 않으니 몽고 군사들이 물러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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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언기가 일찍이 네 차례나 몽고에 사신으로 가서 강화함으로써 변방이 조금 안정되었다.<br> 고종이 다시 몽고에 사신으로 보내려 하자 마침 병이 들었다.<br>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송씨가 살아 있음은 국가의 복이요, 송씨가 죽음은 국가의 근심이다"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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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자주 부사 최춘명에게 유시하여 몽고에 항복하라고 하였다.<br> 그러나 최춘명이 말을 듣지 않자 최우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목을 베려 하였다.<br> 최춘명이 그 이야기를 듣고 말과 얼굴색이 전혀 변함이 없었다.<br> 몽고 사람도 풀어주기를 요청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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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가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을 세우고자 하여 이가노를 보내어 왕의 인장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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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우가 나라 안에 도적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용사들을 모아 매일 밤에 순행하며 감시하였다.<br> 이로 인하여 이 무리들이 이름을 야별초라 하였는데 뒤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었다.<br> 또 고려 사람으로 몽고에 잡혀갔다가 도망하여 돌아온 자들을 한 부대로 만들어 신의군이라 하니 앞의 좌, 우별초와 합쳐 삼별초라 하였다.<br> 이로부터 권신들이 정권을 잡음에 이들을 측근 호위군으로 삼으면서 혹 그들에게 사적인 은혜를 베풀어주니, 그들이 경쟁적으로 앞장서서 힘을 다 바쳤다.<br> 임유무가 죽자, 그들이 스스로 이상한 분위기에 회의를 느끼고는 사(士)와 서민들을 약탈하였다.<br> 그리고는 배를 타고 남쪽으로 진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곳에 관부를 두었다.<br> 뒤에 김방경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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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리로는 임금과 신하이고 친분으로는 사위와 장인이다.<br> 고려가 원종 충렬왕 이후로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사위와 장인의 나라가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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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장수 조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주 지역에 웅거하였다.<br> 우리 태조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끝내 환난을 일으킬 것이니, 그대로 둘 수 없다" 하고서, 그를 쳤다.<br> 그의 용감하고 날랜 것을 애석하게 여겨 쇠촉을 박은 화살을 쓰지 않고 박두를 가지고 쏘아 맞혔다.<br> 조무가 수십 걸음 밖에서 말에서 내려 절을 하여 그를 생포하였다.<br> 조무가 마음으로 복종하여 끝내 심복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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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말년에 몽고의 장수가 강도의 내외 성을 무너뜨리자 성안의 백성들이 모두 달아날 계획을 세워 다투어 배를 사니, 배의 날로 가격이 날로 올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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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충선왕을 폐하고자 하니 김이가 충선왕이 수봉한 조책을 가져다 몰래 허리에 차고 다른 종이를 빈 선갑 안에 넣어 예전처럼 봉하였다.<br> 며칠 있다가 과연 선갑을 도둑을 맞아 충선왕이 크게 놀라니 김이가 몰래 말하기를 "신이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을까 두려워 일찍이 가져다 보관하였습니다"하고 차고 있던 책명을 꺼내 보여주었다.<br> 그 의논이 마침내 가라앉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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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민왕이 원나라 말기에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원나라 황제가 이제현에게 명하여 '정승의 일을 겸임하여' 정동성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도록 했다.<br> 그때 나라가 텅 비어 있었기에 이 조치가 적절했고 나라 사람들이 여기 힘입어 안정될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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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의 병사가 침략하여 강도성을 훼손하니 성이 무너지는 소리가 빠른 우레와 같아 거리의 아이들과 부녀자들이 다 울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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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쳐들어 와 죽주성을 공략하였다.<br> 대포로 성을 공격하여 사방의 성문이 곧바로 무너졌다.<br> 성 안에서도 대포로 맞아 싸우니, 몽고병이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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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다가 충렬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별똥별이 흘러내리듯 빨리 걸어' 10여 일 만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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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병이 해마다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포로로 잡아 간 사람이 남녀 20여 만 명이나 되었고 죽인 자는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br> 이에 왕이 고정매를 소복별감에 임명하였는데 고정매가 주색에 탐닉하고 백성을 갈취하여 사리를 취하니 백성들이 도리어 더 고통을 받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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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군이 죽주를 포위하고 관솔불과 볏짚을 갖추어 불을 놓아 공격하였는데 방호별감 송문주가 그들을 물리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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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찍이 몽고에 네 번 사신 사거 강화조약을 맺으므로 변경지역이 다소 안정되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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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충정왕을 폐위시키고 창고를 봉하고 국새를 거두었다.<br> 왕이 강화로 물러나서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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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손이 몸고병을 방어함에 기미를 따라 대비하였고, 변화에 대응하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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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몽고병의 핍박을 받고 강화도에 천도하였는데, 강화도를 수내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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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항의 부모는 몽고의 병란에 죽었다.<br> 이에 박항은 시신 중에 부모의 모습과 비슷한 것을 거두어 묻어준 것이 300명이나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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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손이 몽고와 싸움에 적의 대포가 자기 머리 위를 지나가서 자기 뒤에 있는 위졸을 때려 몸과 머리가 박살이 났다.<br> 그러나 김경손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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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원나라 성종황제를 숙위하였다.<br> 황제가 죽었을 때 충선왕과 승상 불화가 책략을 평정하고 무종을 맞아 들였다.<br> 그 공으로 심양왕에 봉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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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족보를 살펴보니 원나라 신호위대장군 장서가 고려 말에 피난하여 동쪽으로 와서 아산에 본관을 두고 드디어 토성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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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은 영녕공 준을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면서 '애자'라고 일컬었다.<br> 황제가 말하기를 "너는 왕자가 아닌데 아들이라고 일컬을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니 준이 말하기를 "신은 어려서부터 궁중에서 자라나 왕을 아버지로 여기로 왕비를 어머니로 알았지 친아들이 아닌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하였다.<br> 황제가 사신 최린에게 "애자와 친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애자란 남의 아들을 데려다가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입니다.<br> 만일 자기 소생의 아들이라면 무엇 때문에 다시 사랑한다는 말을 붙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br> 황제가 예전의 표를 확인해보니 모두 애자라고 일컬었다.<br> 그래서 불문에 부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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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 때 몽고 사신이 와서 고려가 육지로 나오지 않은 것을 질책하고 성을 내면서 돌아가고자 하였다.<br> 이에 왕이 앵무잔을 선물로 주어 화해할 수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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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반의 누이가 뽑혀 원나라 정승에게 시집가게 되었다.<br> 조반도 누이를 따라 원나라로 들어갔는데, 누이가 시집한 집의 여동이 재주와 여색을 겸비한 것을 보고 반해 정이 매우 도타웠다.<br> 명나라 군사가 원나라로 쳐들어가자 원나라 황제가 북쪽으로 피해 갔다.<br> 공이 그 여자를 버리고 귀국하자, 여자가 뒤쫓아 왔는데 두 발이 부르트고 찢어졌다.<br> 강가에 있는 높은 누각에 이르러 여자가 누각 밑의 못으로 몸을 던져 순식간에 죽고 말았다.<br> 공이 더욱 그녀의 절개에 감복하여 항상 비통해 마지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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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18년에 몽고군이 침략해 왔다.<br> 구주의 병마사 박서가 힘을 다하여 그들을 막았다.<br> 힘이 다하였으나 오히려 항복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다.<br> 그 공으로 고을을 승격하여 정원대도호부로 삼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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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선왕이 오래도록 원나라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정을 쏟은 여인이 있었다.<br>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왕이 연꽃 한 송이를 꺾어서 주고 이로써 작별하였다.<br> 하루 저녁에 왕이 그리운 정을 이기지 못하여 이제현으로 하여금 가서 보게 했는데 여자가 누대 안에서 음식을 먹지 않은 지 이미 여러 날이었다.<br> 여인이 억지로 붓을 잡고 절구 한 수를 쓰기를, "보내주신 연꽃 조각, 처음에는 매우 붉었네. 가지를 떠난 지 지금 며칠인가, 초췌함이 나와 같구려!" 하였다.<br> 이제현이 돌아와 아뢰기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였습니다"고 하니 왕이 매우 원망하여 땅에 침을 뱉었다.<br> 다음해 이제현이 뜰 아래 엎드려 그 시를 올리고 그때의 일을 말하니 왕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경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바꾸어 말한 것이니 참으로 충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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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의 병사가 춘주를 함락하였다.<br> 그 고을의 아전인 박항이 부모의 시신을 찾았으나 얻지 못하자 모습이 비슷한 것은 모두 거두어 묻어주었는데 무려 3백 명이나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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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이 죽었을 때 세자가 원나라에 있어 여러 신하들이 멀리서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충렬왕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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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병이 귀주로 처들어와 구름 사다리로 성을 공격하였다.<br> 성을 지키던 장수 박서가 대우포를 적을 맞아 싸워 물리쳤다.<br> 대우포는 큰 칼날을 댄 거대한 병기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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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숙왕 때 원나라 사신들이 끊임없이 오가면서 기세를 부리고 포악하였다.<br> 이에 조련이 말을 부드럽게 하여 대하니 사신들이 문득 성냄을 풀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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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염제신은 오랫동안 원나라에 있었다.<br> 원나라 황제에게 청하기를 "신은 어미를 오래도록 뵙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자, 황제가 그의 말에 감격하여 향금강산을 내리라 명하고, 금으로 쓴 원패를 주었다.<br> 그것은 그의 떠남을 빛나게 하고, 그의 돌아옴을 빠르게 하려는 것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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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조회하러 갔는데,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국왕의 인장을 빼앗았다.<br> 그때 김태현으로 하여금 임시로 국사를 맡게 하였는데, 충숙왕이 김태현을 가두었다.<br> 풀려난 뒤 김태현이 가족을 데리고 동쪽으로 금강산을 유람하였으니, 혐의를 멀리 하기 위함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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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43년 몽고 군대가 중원주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을 공격하였다.<br> 관리와 노약자들은 막지 못하게 되자 '월악산의 신사'로 올라갔다.<br> 문득 구름과 안개와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번갈아 일어났다.<br> 몽고 군사들은 신의 도움이 있다고 생각하여 공격하지 않고 물러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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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듣건대 여러 기관의 관료들이 직무에 태만하다 하니 매월 말에 그들의 잘잘못과 근면함 그리고 태만한 점을 상세하게 조사하여 보고하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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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장군 조무가 조선 태조에게 잡혀서 마침내 시양이 되어 종신토록 복역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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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 가자 시종하던 백관들이 모두 달아나 숨었는데 김영후만은 왕을 호위하다가 적의 창에 맞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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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수에게 시집갔다.<br> 고려 고종 때 호수가 맹주의 수령이 되었었는데, 몽고의 군사가 처들어와 함락되는 바람에 호수도 피해를 입었다.<br> 유씨는 적에게 몸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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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 있다가 함거를 타고 게양에 유배되었다.<br> 수레가 너무 빨리 달려서 그 고초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므로 게양에 이르기도 전에 길에서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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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천자가 충선왕을 토번에 유배시켰는데 그곳은 수도에서 만오천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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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에 몽고 병사가 침략하니 여러 성 사람들이 해도 가운데로 들어갔다.<br> 섬 안에는 샘과 우물이 없어서 사람들은 항상 육지로 가서 물을 길었는데 왕왕 몽고 병사에게 잡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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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숙왕때 유청신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글을 올려 고려 본국에 행성을 세워 원의 내지와 같이하기를 청하였는데, 원나라 사인 왕관이 승상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불가하다고 말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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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병사가 춘주성을 포위하여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 놓고 여러 날 공격하니 성 안에 샘과 우물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 피를 마셔서 군졸들의 곤궁함이 심했다.<br> 수장 조효립이 처와 함께 불에 뛰어 들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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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태조가 동녕의 전쟁에서 원나라 장수 처명을 붙잡았는데 죽이지 않았다.<br> 처명이 은혜에 감사하여 화살자국을 어루만질 때마다 목이 메이고 눈물을 흘렸으며 곁에 따라다니면서 모셨다.<br> 운봉에서 전쟁을 할 때는 처명이 힘껏 싸워 공을 세우니 당시 사람들이 의리 있다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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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 병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정주를 침략해 왔다.<br> 김경손이 관아에 있는 결사대 12명을 이끌고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니 몽고병이 물러나 달아났다.<br> 그 뒤에 다시 침략해옴에 조짐에 따라 대비하여 변화에 대응하기를 귀신과 같이 하였다.<br> 이에 적들이 "적은 병사로 많은 병사를 대적하는 것은 하늘이 도운 바이지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br>" 하고 퇴각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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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사람이다.<br> 철주 판관이 되었을 때 몽고병이 성을 공격함이 다급하였다.<br> 성 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이희적이 성안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불을 질러 죽였으며 또 장정들을 이끌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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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때 몽고 군사들이 귀주로 들어와 노략질하였다.<br> 장작에 사람 기름을 적셔서 두텁게 쌓아 불을 지르며 성을 공격하였다.<br> 장군 박서가 물로 끄려 하였으나 불길이 더욱더 타올랐다.<br> 이에 진흙을 물에 타서 뿌리니 비로소 꺼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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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의 병사가 귀주에 들어와 도적질을 하는데 사람 기름으로 땔나무를 적셔서 불을 놓아 태우니 사람들이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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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23년 몽고가 쳐들어와 죽주성을 침략할 때 사람의 기름을 준비해 짚에 부어 불을 지펴서 공격하였다.<br> 당시 송문주가 죽주성의 방호별감으로 있었는데 성안의 사졸들이 일시에 문을 열고 돌격하자 몽고병은 여러 방면으로 공략하였으나 성을 하락시키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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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김태현에게 행성의 직무를 대행하라고 하였다.<br> 이에 김태현은 혐의를 피하기 위하여 금상산에 유람을 가버렸는데, 원나라에서 역마를 보내 불러서 다시 행성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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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는 충렬왕에게 조서를 내려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하고 충렬왕을 일수왕에 봉하였다.<br> 세자는 충선왕을 말한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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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조카 왕고를 궁중에서 양육하여 자식처럼 돌보았으며 드디어 세자로 세워 심왕의 자리를 전해주었다.<br> 이에 왕고는 스스로 태위왕이라 칭하였고 원나라 황제는 그를 심왕에 임명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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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이후 4분의 임금은 연이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었기에, 정치와 법령이 모두 원나라에서 나오게 되었다.<br> 나라에 불만을 품은 무리들이 원나라 왕으로 연결되어 양국을 왕래하며 시기하고 참소하였다.<br> 그리하여 자식이 왕위에 오르면 아버지가 폐하게 되고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면 자식이 폐하게 되었다.<br> 새로운 임금 세우기를 도모하는 사람은 옛 임금을 욕하였으며 본국을 배반한 자는 어떤 사건을 만들기를 좋아하여 다시는 군신과 부자의 사이의 도리가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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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방경이 서북면병마판관이 되었다.<br> 때마침 몽고가 여러 성을 침공함에 공이 보위도로 들어갔다.<br> 그 섬에는 우물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육지에 나가 물을 길러 오다가 왕왕 포로가 되었다.<br> 이에 공이 제방을 쌓아 조수를 막고, 빗물을 모아서 큰 못을 만들었다.<br> 그리하여 여름에는 물을 길렀고 겨울에는 얼음을 뚫어 물을 공급하였다.<br> 이로부터 육지에 물을 긷기 위해 갔다가 포로가 되는 근심이 없게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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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이 몽고병의 침략을 당하여 강화로 도읍을 피했는데, 원나라 병사가 추격하여 해안에 이르러 말하기를 "갑옷을 쌓으면 건널 수 있겠다"고 하니, 후에 그 나루를 이름하여 갑곶이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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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병사가 자주를 매우 급박하게 포위하였는데 부사 최춘명은 굳게 지키면서 항복하지 않았다.<br> 나라에서 화친을 한 뒤에 사신을 보내어 항복하라고 타일렀는데도 최춘명은 문을 닫고 상대하지 않았다.<br> 최우가 노하여 사람을 보내 목을 베려 하였다.<br> 몽고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비록 명을 거스른 것이지만 당신네 나라로 보면 충신인데 성을 온전히 지켜낸 충신을 죽이면 되겠습니까?"라고 하며 풀어주기를 요청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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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현이 북쪽으로 원나라 황제의 행재소에 이르니 황제가 가상하게 여겨 황제의 음식을 하사하여 총애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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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서 충정왕을 폐위키시고 국새를 몰수해서 가버렸다.<br> 왕은 강화도에 안치되었다.<br> 판삼사사 이제현이 정승을 겸하여 정동성의 일을 임시로 처리하였는데, '조치하는 바가 알맞아'. 사람들이 그것에 힘입어 편안할 수가 있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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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사람이다.<br> 일찍이 문학으로서 춘주에 있을 때 몽고 병사가 겹으로 포위하였다.<br> 성 안의 우물과 샘이 모두 말라 소와 말을 찔러서 피를 마시니 사졸의 곤궁함이 심했다.<br> 효립은 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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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혔다.<br> 언양군 김륜이 당시 집에 있으면서 이 소식을 듣고 문득 일어나 여러 재상과 함께 글을 올려 사정하고사 하여 이제현으로 하여금 초안을 잡게 하였다.<br> 그러나 나라의 원로가 많이 서명하지 않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br> 윤이 종신토록 울분이 쌓여 언어와 안색에까지 나타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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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 때에 원나라 사신이 왔다.<br> 윤석이 술잔 시중을 드는 사람으로 왕의 앞에 서 있었다.<br> 원나라 사신이 황제의 뜻을 전하였는데 두 왕자를 입시케 하라는 것이었다.<br> 석이 마음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마땅히 아우를 시종하리라' 하였다.<br> 집으로 돌아와 그 아버지 만비에게 말하였다.<br> 만비가 말하기를 "시종하는 것은 후일을 위한 계책이다.<br> 형이 있는데 아우가 먼저 나라를 소유하겠는가?" 하였다.<br> 석이 말하기는 "제가 아우를 보면 공경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형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br> 이것이 제가 아우를 시종하기로 결정한 이유입니다"하였다.<br> 그리고는 드디어 아우를 시종하였다.<br> 형이 과연 일찍 죽었다.<br> 아우가 바로 충숙왕이다.<br> 충숙왕이 즉위하자 윤석은 형의 폐행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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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41년 몽고병이 우리나라의 고을을 크게 노략질하여 포로가 된 남녀가 2만 6천 8백여 명이었고, 죽은 자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다.<br> 그들이 스치고 간 고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니, 몽고병의 난리가 이것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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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때 몽고가 해마다 침략하여 왔으므로 왕이 김수강을 몽고에 보내어 병사를 파할 것을 간청하였다.<br> 김수강이 몽고 황제의 물음에 상세하고도 정성스럽게 대답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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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자 안축이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임금이 근심하는 것은 신하의 치욕이요,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라 하고는 이에 원나라에 글을 올려 임금의 무죄를 소송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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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용이 원나라에 갔을 때 원나라 정승이 우리나라의 호구수를 물었다.<br> 이장용이 '손으로 격자창을 가리키면서 그 숫자를 묻자' 원나라 승상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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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사신이 충혜왕을 잡아서 돌아갔다.<br> 김륜은 그때 집에 있었는데 '원나라 조정에 아뢰어 빌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하자 권한공이 막았다.<br> 김륜이 엄한 목소리로 "신하의 임금에 대한 관계는 자식의 아버지에 대한 관계와 같소. 차마 구하지 않을 수 있겠소?"라고 하니, 드디어 글을 올리기로 결정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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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때 몽고 병사가 국경을 억압하며 자주 충하고 꾸짖었다.<br> 이규보가 오랬동안 양제에 재직하면서 글을 짖는 것을 관장하였는데, 이에 진정표를 지어 올렸다.<br> 몽고 황제가 그것을 보고 감동하고 깨닫는 점이 있어 드디어 병사를 철수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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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종이 공주와 함께 오랑캐 옷을 입고 원나라 서울에 들어가니 백관들이 예복을 입고 가기를 청하였다.<br> 송분이 윤수 등을 사주하여 회초리를 들고 말을 달리며 예복을 입은 자들을 때려서 쫓아내니 시종하는 사람들이 모두 흩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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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에서 왕을 불러들여 조회하게 하였다.<br> 고려 고종이 족자를 왕자라 일컫고 그를 보내었다.<br> 들어가서 인질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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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병사들이 대거 침략하여 노략질하자 최이는 고종을 협박하여 수도를 강화도에 옮기려고 하였다.<br> 이에 유승단이 말하기를 "도성을 버리며 또 종묘를 내던지고서 바다 섬에 도망가 숨어 있으면서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은 국가를 위한 장계가 아닙니다"라고 하였지만, 최이는 이 건의를 들어주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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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 때에 궁인 백야단이 임금의 총애를 한창 많이 받아 중앙과 외방에서 횡포한 직을 제멋대로 하였다.<br> 세자가 원나라에서 공주의 상에 달려와 왕에게 아뢰기를 "공주가 질환에 걸리게 된 것은 안으로 총애한 것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br> 국문을 하여 모두 참수하십시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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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숙왕의 종신 백응구가 도망하여 고려로 돌아오니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왕에게 돌려보내라고 칙명을 내렸다.<br> 왕이 받들어 시행하지 않으니, 심양왕 고가 충숙왕이 황제의 칙명을 찢어버렸다고 참소하자 황제가 힐책하여 다시 왕의 인장을 빼았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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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공수가 원나라에 들어가 덕흥의 난리에 동조하지 않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려로 돌아오니, 천하 사람들에게 그의 충의가 알려졌다.<br> 그가 연경의 문을 나와서 하인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말하기를 "천하의 즐거움이 다시 이와 같은 것이 있겠는가?"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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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장용이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승상이 "고려국의 주군의 호구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다.<br> 이장용이 "모릅니다"라 대답하니, 승상이 "그대는 나라의 재상이면서 어찌 그것을 모른단 말입니까?"라 하였다.<br> 이장용이 창문살을 가리키며 "승상은 저 창문살이 몇 개라고 생각합니까?" 하니 승상이 "모른다"고 하였다.<br> 이장용이 "저의 나라의 주군의 호구 숫자에 대하여는 담당 관원이 따로 있으니 비록 재상이라고 한들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라 하자 승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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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득유와 노진의가 김방경을 무고하여 죄를 주려 하였다.<br> 원나라 장수 홍다구가 황제에게 아뢰어 국문하는데 매우 참혹하였다.<br> 황제가 조서를 내려 모두 수도로 압송하여 대질 신문하여 분변하게 하였다.<br> 위득유는 중도에서 혀가 썩어 죽었고 노진의도 수도에 이르러 역시 혀가 썩어 죽었다.<br> 사람들이 하늘이 주벌한 것이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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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군대가 귀주를 공격할 때 대포로서 성곽을 파괴하자 박서가 무너지는 대로 보수하였는데 '쇠 밧줄'로 감으니 몽고 군대가 다시는 공격하지 못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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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8년 봄에 비가 내리고 있는데 푸른색의 지렁이가 궁문에서 밖으로 판교에 이르기까지 길에 가득하였다.<br> 길 가는 사람들이 모두 피하였다.<br> 15년 봄에 또 궁문에서부터 서문에 이르기까지 길에 푸른색 지렁이가 있었다.<br> 길이가 세 치쯤 되는데, 비를 따라 많이 내려왔다.<br> 3년도 되지 않아 몽고의 군사들이 크게 쳐들어왔다.<br> 왕이 강화로 피하여 도읍을 옮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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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군사들이 서해도 산성을 공격하였다.<br> 성은 험하여 겨우 사람과 말이 통행할 정도였는데 몽고 군사들이 불화살을 성 안으로 쏘니 초막에 모두 불길이 번져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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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재지며 본관은 완선이다.<br> 나이가 차서 벼슬에서 물러난 득평의 아들이다.<br> 충숙왕 때 과거에 급제하였다.<br> 아버지의 풍모가 있어서 강직하여 흔들리지 않았다.<br> 그래서 세인들의 추중을 받았다.<br> 충혜왕이 붙잡혀서 원나라에 가자 왕이 설치했던 모든 것을 다 고치고 혁파하였다.<br> 도감을 세워서 최재를 판관으로 삼았다.<br> 재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왕의 실덕은 바로 왕의 측근들이 왕의 뜻을 맞추어 준 것이다.<br> 앞에서 맞추어 주었다가 뒤에서 들어올리는 짓을 나는 실로 부끄러워한다" 하고는 드디어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다.<br> 공민왕 때 완산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정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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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강화도에 도읍을 옮기자 원나라 황제가 매양 사신을 보내 육지로 나오는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br> 이에 김수강이 병사를 철수할 것을 청하니, 황제가 육지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 핑계를 삼았다.<br> 김수장이 말하기를 "비유하건대, 사냥꾼이 짐승을 몰아 굴로 들어가게 하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그 앞에 지키고 있는 것과 같으니, 그렇게 하면 곤경에 빠진 짐승이 어디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또 얼고 눈보라치는 참담한 겨울에 땅이 얼어붙게 되면 초목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 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기고 군사를 되돌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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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사신이 와서 대접이 불만족하다 하여 활을 펼치고 몽둥이를 잡고서 쏘기도 하고 치기도 하자, 관반 등이 달려서 문을 나가 곧 자물쇠를 걸었으므로 몽고 사신이 나오지 못했다.<br> 김희제가 문을 열고 들어가 타이르니 그 노여움이 점차로 풀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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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는데, 광주가 서울과 강화도의 중간에 위치한 큰 진읍인 까닭에 이세화를 자사로 보냈다.<br> 이때 몽고군이 포위하고 온갖 꾀를 써서 공격하였으나, 이세화가 주야로 성을 수리하고 방비하여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니 오랑캐가 드디어 포위를 풀고 나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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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나라에 머물렀을 때 왕의 재물이 이미 비었다.<br> 이때에 정척이 궁궐도감이 되어 도감의 옛날 비용 가운데 명분이 없는 것을 가벼이 하여 연경의 충숙왕 처소에 실어보내니 왕이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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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이 이자겸의 난을 만나 궁궐이 연속해서 불타는 것을 보고 탄식하기를 "도적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것이 낫겠다"라 하고 문을 닫아걸고 불길에 몸을 던져 죽었다.<br> 고종 40년에 조효립이 춘주의 원님이 되었다.<br> 몽고의 군사가 성을 포위하자 조효립이 지킬 수 없음을 알고 처와 함께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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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황제가 충선왕을 형부에 가두고 아울러 김륜을 옥에 가둔 뒤 5부의 관원들을 시켜서 심문하게 하였다.<br> 심왕과 조적 등 구변이 좋은 자가 많았으나 김륜은 편언으로 그들을 꺾었는데 말이 간단 직절하니 5부의 관원들이 모두 용모를 가다듬고 주목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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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병이 귀주를 공격하는데, 풀과 나무를 실은 수레를 몰고 진격하였다.<br> 장군 김경손이 포차로써 끓는 쇠물을 뿌려 수레에 적재한 풀을 태우니, 몽고인들이 퇴각하여 달아났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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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병이 죽주성을 노략질함에 포로써 성을 공격하니, 성문이 문득 무너졌다.<br> 송문주가 방호별감이 되어 또한 포로써 마주 공격하자 몽고병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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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가 귀주에 침략했는데 대포가 달린 수레로써 여러 갈래로 성을 공격하니, 장군 김경손이 호상에서 전투를 독려했다.<br> 대포가 경손의 머리 위로 지나가 뒤에서 호위하는 병졸을 치니 몸과 머리가 부서졌다.<br> 좌우에서 호상을 옮길 것을 청하니, 경손이 말하기를 "내가 움직이면 사람들 마음이 동요할 것이다.<br>"하고, 정신과 기색이 변함이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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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이 몽고군을 피하여 강화에 들어가 도읍을 정했는데, 변려가 적에게 사로잡혀 수로에 대해 추궁을 당하여 살을 지지는 형을 받았으나 변려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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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인규가 붙잡혀서 원나라에 머물기가 8년에 이르렀는데, 하루는 인규의 아들 서가 여러 아우를 거느리고 길가에서 황제를 알현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인규의 환국을 허락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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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위상 납합출이 북쪽 경계에 침략하자 공민왕이 조선조 태조를 동북면병마사로 임명하였다.<br> 태조가 홍원의 달단동에서 적을 만났는데 태조가 먼저 병사를 매복시키고 자기 홀로 말을 타고 돌진하였다.<br> 공방을 거듭하다가 아군이 매복한 곳에 이르자 매복병이 일어나서는 태조와 합세하여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br> 이에 납합출이 달아나니 동북 지역이 다 평정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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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병이 곧장 갑곶 강 너머까지 쳐들어와 고종이 최린을 보내 몽고의 군영으로 가서 토산물을 바치고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br> 이 때문에 개경에 계엄이 해제되었다.<br> 각 도가 전란을 겪어 주, 군의 세 가지 세금 외에 잡역을 모두 면제하였다.<br> 그리고 산성이나 섬으로 들어가 있던 사람들을 모두 육지로 나오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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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에서 충선왕을 토번으로 유배하였다가 뒤에 방환하였다.<br> 이제현이 왕을 맞이하면서 임조를 지나서 하주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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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경이 일찍이 사록이 되었는데, 원나라 사신이 무례하게 대했다.<br> 정운경이 직책을 버리고 떠나자 원나라 사신이 이마에 피를 흘리며 사과하고 돌아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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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군이 대거 침략해 들어왔을 때 최이가 고종을 위협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겼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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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왕이 원나라에 갈 때 황산을 홍산으로 바꾸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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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이 몽고병을 피하여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고, 또 백성들도 감독하여 해도에 들어와 보전하게 하였다.<br> 송길유는 성격이 잔인하고 혹독하였는데 이때 수로방호별감이 되었다.<br> 그는 백성들이 재산을 아까워하며 고향 떠나기를 어려워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집과 돈 그리고 곡식을 불사르니 이에 죽은 자가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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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 3년 몽고병이 대거 압록강을 건너 왔다.<br> 가주, 박천 두 고을 사이에 불 기운이 하늘에 잇달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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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이 서해도 산성을 공격했다.<br> 이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오직 사람과 말이 통행할 정도의 길 하나만 있었는데 방호장이 험준한 지형만 믿고 방비하지 않았다.<br> 몽고군이 성에 임하여 대포를 설치하고 또 석벽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와 불붙은 활로 쏘자 초막에 모두 불이 번져 성이 함락되었는데 죽은 사람이 무려 5천 명 남짓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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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 때 몽고병이 귀주까지 침략했는데, 박서가 병마사가 되어 기미를 타고 변고에 응하여 굳게 수비하니 몽고병이 드디어 물러갔다.<br> 몽고 장군의 나이가 거의 일흔에 이른 자가 성 아래 이르러 기계를 돌아보며 감탄하기를 "내가 나이 들어 군진에 종사한 이래 이와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br> 성 안의 여러 장수가 후일 반드시 모두 장상이 될 것이다"라고 했는데, 후에 박서가 과연 평장사가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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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몽고 군대가 구주를 공격할 때 누거 및 목상을 만들어 소가죽으로 싸 가지고 그 가운데 무기를 감추어 성 밑까지 밀고 들어와서 지하통로를 팠다.<br> 장군 박서가 성에 구멍을 뚫고 쇳물을 쏟아 부어 누거를 불태웠고 또 썩은 띠풀에 불을 붙여 목상을 태워버리니 몽고 군사들이 놀라 어찌할 줄 모르고 흩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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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고종이 몽고 군대를 피하여 강화도에 들어가 도읍으로 삼았다.<br> 몽고가 여러 차례 군사를 두입하여 육지로 나오도록 독려하였고, 사람들 보내어 '내외의 성곽을 헐었다.<br>' 성곽 무너지는 소리가 급한 천둥 같았다.<br> 골목의 아낙네나 거리의 아디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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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세종대왕 임술년(1442)에 망한 원나라의 나머지 무리들이 국서를 보냈는데, 우리나라에 변방의 장수가 그 사신을 막고 들여보내지 않았다.<br> 임금이 이변을 보내서 명나라에 알렸는데 성삼문 선생이 서장관이 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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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갔을 때 조자앙 등이 모두 충선왕의 문에 놀았다.<br> 왕이 한 연을 지어 읊기를 "닭 소리가 문 앞의 버들과 흡사하네"라고 하니, 여러 학사들이 용사의 출처를 물었다.<br> 왕이 말없이 있자, 익재 이제현이 곁에서 설명하기를 "우리나라 사람의 시에 '집 머리 처음 뜨는 해에 금계가 우니, 흡사 늘어진 버들 가지 간드러지게 긴 모양일세'라고 한 것이 있는데, 닭 소리가 연함으로써 버들가지의 가볍고 가는 것을 비유했으니, 우리 왕의 시구는 이 뜻을 쓴 것이다.<br> 한퇴지가 거문고를 두고 읊은 시에 '뜬구름과 버들솜처럼 뿌리와 꼭지가 없네'라고 했은 즉 고인이 소리에 있어서 또한 버들솜으로 비유한 이가 있다"라고 하니, 자리에 가득 한 사람들이 칭찬 탄복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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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재 이제현이 원나라 서울에 있으면서 송도를 그리워하며 『송도팔경』을 지었는데 첫 번째가 '곡령춘청'이었는데 시는 이러하다.<br> "팔선궁은 푸르른 봉우리에 있으니 아련한 연하 몇 만 겹이던가? 하룻밤 사이 긴 바람이 비를 불어 지나가니 바다의 용이 옥연꽃을 받들고 나왔도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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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공수가 원나라에 갔다.<br> 황태자가 공수를 불러 함께 관한전에 올라가 금과 옥으로 이루어진 광한전의 기둥을 가리키며, "이러한 기둥을 본 적이 있는가?" 하였다.<br> 공수가 대답하기를 "제왕이 어진 정치를 베풀면 비록 썩은 나무라도 오히려 견고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비록 금옥이라도 믿을 것이 못되옵니다.<br>"하였다.<br> 황제가 그 말을 전해듣고 이르기를 "짐이 진실로 이 노인이 어진 이임을 알겠노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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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공수가 원나라에 조회하러 갔다.<br> 황태자가 이공수를 불러 함께 광한전에 올랐는데 거기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 '인지'의 뜻에 대하여 물었다.<br> 이공수가 대답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인'이고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 '지'이니, 제왕께서 이 두 글자를 사용하여 사해를 다스려 만세토록 태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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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주학이 중국에서 유행하였지만 우리나라에는 보급되지 않았다.<br> 충선왕 때 백이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것을 배웠는데 우리나라에 돌아오자 이제현과 박충좌가 먼저 그를 스승으로 모셔서 배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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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만권당을 짓고 이름난 선비 조맹부 등과 함께 담론했다.<br> 왕이 동쪽으로 돌아올 때 문적과 서화 만 권을 실으니 조맹부의 필적이 동방에 가득했다.<br> 우리 동방 사람들 가운데 조맹부의 필법 정신을 얻은 이는 행촌 이암 한 사람 뿐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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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 때 연경의 사저에 만권당을 지어놓고, 이제현을 불러다가 부중을 채우고 문학하는 선비인 요수, 조맹부, 우집 등을 맞이하였다가 서사로 즐기도록 하였는데 종신으로 하여금 번갈아 대신하도록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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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세자로 있을 때 원나라에 가니 원나라 황제가 세자를 불러 보고는 "너는 무슨 책을 읽는가?"라고 물었다.<br> "사유 정가신이 여기에 같이 왔기에 효경과 논어에 대하여 질문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br>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정가신을 불러오게 하였다.<br> 정가신이 들어오자 황제가 관을 쓰고 갑자기 일어나서 "네가 비록 배신陪臣이지만 유자儒者이다"라고 하고는 그를 앉게 하고서 고려국의 왕위 전승의 차례, 이난理亂의 자취, 풍속의 마땅함 등에 대하여 물으면서 경청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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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현이 원나라에 조회했는데, 연구 때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천성 아미산에 있는 절에 향을 내리러 갔다.<br> 이때 지은 시를 모은 『서정록』이 있다.<br> 회재 선생이 갑술년에 서울로 과거보러 가면서 「서정시」 130운을 지었는데 이 해 과거에 올랐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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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관종이 한림학사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하고 진사를 시험하여 취했는데, 왕이 의봉루에 임하여 선비들을 시험하니 문풍이 이에 흥기했다.<br> 원종이 옛 서울로 돌아와 감시의 방을 내거니 몽고 사신이 가서 보고 말하기를 "난리를 겪은 뒤에서 문풍을 실추하지 않음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성대한 일이다"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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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굉연은 자가 무설이고 호는 죽간인데 원나라에 들어가 구양현, 위소 등과 사귀었다.<br> 『죽간집』이 있는데 '시가 아주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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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정주학이 우리나라에 아직 보급되지 않았었는데 백이정이 원나라에 들어가 이를 배웠고 이제현 등이 스승을 통해 수학하였다.<br> 우리나라 이학은 백이정으로부터 비롯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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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가신이 원나라에 있을 때 황제의 명령으로 낙타조란시를 지어 올렸다.<br> 황제께서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면서 어갱 한 사발을 상으로 내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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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제현이 원나라에 있을 때 시를 지었는데, "비 가는데 연못 개구리 시끄러이 다투고, 구름에는 우는 외로운 학 권태로이 돌아가려 하네"하고 하였다.<br> 그 주에 "섬우와는 간신이 공을 바라는 것이고 여운학은 민유전이 충선왕의 일로 상소를 하여 물러나기를 청했으나 방해하는 자가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귀국하려 한 일을 말한다"고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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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현이 지공거가 되어 새로 급제한 사람들을 데리고 왕을 배알하니 왕이 잔치를 베풀어주도록 명하였다.<br> 이때 원나라 사신 이학사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왕에게 말하기를 "천하에는 이런 의례가 없어졌는데, 귀하의 나라에만 고풍이 없어지지 않고 있으니 감히 절하며 하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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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규보는 경사 백가의 책을 한번 보면 문득 다 외웠다.<br> 문정공 조용은 성품이 총민하여 한번 보면 다 외웠다.<br> 어릴 때 어떤 서생이 원나라에서 가져온 『문선책』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3일 동안만 빌려달라고 하였다.<br> 문정공이 그 책을 빌려서는 하루 만에 다 외우고 약속대로 돌려주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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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관은 용안. 조부 장영이 진헌사로 원나라에 가서 천호에 제수되었다.<br> 장원적도 또한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들어갔는데 그때 지은 시에 말하기를 "삼한의 한 사람이 눈이 내리는 저물녁에 강가로 가네. 돌아가는 배 태평스러움을 싣고 가니, 이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네"라 하였다.<br> 원나라 황제가 그 시를 보고서 관학에서 머물며 공부하게 하였다.<br> 고려에 귀국하여서는 관직이 삼품에 이르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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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가 문한을 전담했는데 당시에 원나라의 요구가 매우 번다했으나 김구의 표의 말이 이치에 들어맞으니 원나라 학사들이 매양 칭송하여 찬미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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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나라 말 하남왕이 중서 검교 곽영석이 돌아가다가 평양에 이르러 기자묘에다가 가음과 같은 시를 썼다.<br> "무슨 일로 미친 체하여 풀어헤쳤던가? 은나라의 국조를 홀로 세워보려 함이었지. 나라 버리고 간 미자는 다만 몸을 길이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고, 간하다가 죽은 비간을 나라가 이미 위태로운 상황에서 누가 슬퍼하리? 노나라의 땅 한 구릉에 송백이 있으니 충혼은 만고에 귀신이 알아주리. 늦게 조선을 방문하는 길에서 말을 멈추니, 어렴풋이 「맥수가」를 듣는 듯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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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조 알의 크기가 독만하였다.<br> 원나라 황제가 정가신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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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선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왕위를 충숙에게 전해주고 자칭 상왕이라고 하면서 천자의도성에서 즐겁게 지냈다.<br> 연경에 있는 사택에 만권당을 짓고 글 잘하는 학자들을 초청하여 글과 역사에 대해 연구하면서 자기 생활을 즐겼다.<br> 이제현을 불러 부중에 있게 하고 따르는 신하들로 하여금 돌아가면서 번을 들어 교대하게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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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 황제가 매양 이색을 불러 볼 때마다 반드시 깨끗이 청소하고 향을 피웠다.<br> 황제 왈 "이색은 용렬한 유학자가 아니니 그의 학문은 비록 중국에서 구하더라도 또한 드물 것이니 어찌 감히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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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세종대왕이 유신에게 명하여 책을 편찬하게 했는데, 중국은 주나라 때부터 원나라에서 마치고 우리나라에 이르러서는 기자로부터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릇 국가의 흥하고 쇠함, 군신의 사특하고 바름, 풍속의 침체와 융성, 정교의 선하고 선하지 않음과 작게는 필부와 멀게는 사방 오랑캐의 일이 무릇 인륜 등의 일에 관련된 것은 기록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책 이름을 『치평요람』이라고 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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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는 표를 쓸 때마다 일에 따라 문장을 꾸미는데 모두 이치에 들어맞았다.<br> 원의 학사 왕악의 표의 글을 볼 때마다 반드시 칭찬하고 감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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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충목왕이 나이 겨우 8세에 왕위를 이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묻기를 "그대는 아버지에게 배웠는가, 어머니에게 배웠는가?"하니 대답하기를 "어머니에게 배웠습니다.<br>" 하자 황제가 그 천성이 총명함을 탄복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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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성지는 수학에 정통했는데 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스승을 구하여 수시역법을 배워 고려로 돌아와 마침내 그 학문을 전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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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는 문장에 있어서 한 때의 으뜸이었는데, 희종 때는 표문 짓는 일을 전담하였다.<br> 원나라 한림학사 왕악이 매양 표사를 보고 반드시 칭찬하면서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함을 한스러워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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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은이 원나라 조정에 들어가 황갑에 두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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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사설== | | ==성호사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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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남잡지== | | ==송남잡지== |
물품, 사람(인적 교류), 제도, 언어, 물품, 풍속.
몽고 풍속에 정수리로부터 이마까지 머리카락을 잘라서 그 형태를 네모나게 하고 그 가운데 머리카락을 두는 것을 겁구아라고 하는데, 고려 원종 때 궁중에서 이미 머리카락을 잘랐으나 여러 신하들은 당시에 아직 자르지 않으니, 왕이 꾸짖어 따르게 했다.
원나라 풍속에 정수리 부분의 머리를 깎아 이마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모양을 모나게 하고 머리카락은 그 가운데 두었는데 이것을 일러서 '겁구아'라고 했다.
원나라 태후가 사신을 보내 충선왕에게 숙비의 고고를 내려 주었다.
고고는 몽고 부인들이 머리에 쓰는 모자 이름이다.
홍약이 원나라에 들어가 보초 백여정으로 서적 만팔백 권을 구입하여 환국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고려의 왕에게 금선주사와 색깔 있는 명주를 하사하였다.
고려 원종 때 토번의 중이 원나라로부터 나와서 면탑과 면들을 만들어 복을 빌었다.
우리나라에는 예전에는 목면이 없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 가서 비로소 씨앗을 얻어왔다.
충선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가서 납폐를 하고 실련공주에게 장가드는데, 잔치의 상에 고려에서 가져온 유밀과를 사용하였다.
보리 가루와 유밀을 섞어서 밀과를 만드는데, 이 말은 방언이다.
발도는 '발돌'이라고도 쓰는데 몽고어로 용감하여 대적할 상대가 없는 사람에 대한 명칭이다.
고려 공민왕이 기 황후의 어머니를 위하여 패아찰연을 마련하고 또 태자가 거처하는 곳에 행차하여 방몰연을 마련했다.
원나라 법에 잔치를 연 다음날 다시 잔치하는 것을 '방몰'이라 한다.
원나라 세조가 김방경에게 흰 깃으로 만든 갑옷을 하사했다.
원의 황제가 충선왕이 정책의 공이 있다 하여 벽전과 금대를 하사하였다.
비도, 분도 등은 예전에 우리나라에 없던 품종이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들어가 공주에게 장가든 뒤, 우리나라로 돌아올 적에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원나라 순제가 공민왕에게 보검 300자루를 하사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고려왕에게 서금 한 단을 하사했다.
국화 가운데 소설오라는 종자가 있는데 그 색깔이 희다.
충숙왕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들어 본국으로 돌아올 적에 원나라 황제가 하사한 것이다.
김인문이 당나라에서 죽었는데 무후가 매우 애도하고 사예시에 명하여 널을 보내 신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고려 충렬왕 때 홍자번이 원나라에서 죽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명하여 역함의 수레로 널을 보내게 했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새로 만든 수시력을 반포하였는데 이는 허형과 곽수경이 편찬한 것이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요동수정도를 보고 수역을 설치하고자 하였다.
배신 정가신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 고려는 산천과 숲 덤불이 국토의 10분의 7을 차지하고 있어, 밭 갈고 베 짜는데 노력을 하여도 겨우 자급할 정도이다.
하물며 고려 사람들은 바닷길에 익숙하지 않으니, 저의 좁은 견해로 보건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어 불편할까 염려됩니다"하 하니 황제가 그렇게 여기고 혁파하였다.
"배는 물 위에 있는 역이네"
원종이 몽고의 제도를 따라 순미소를 설치하고 밤마다 순찰하여 사람들이 밤에 다니는 것을 금하도록 하였다.
설손이 원나라 단본당 정자가 되었다가 난리를 피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이 그와 단본당에서 교유하였기 때문에 신하를 보내 그를 마중하여 위로함이 줄을 이었다.
그를 만나보고는 넉넉하게 예우하였으며 땅을 하사하고 군에 봉해주었다.
고려 충렬왕 때 태사국을 맡은 오윤부가 말하기를 "국가에서 일찍이 봄 가을의 가운데 달 가운데 원무일을 사일(祀日)로 했는데 송나라 원나라 역법과 현행 역법에는 모두 근무일을 사일로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근무일을 쓰기 바랍니다.
"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나라 사신 곽영석이 고려의 지도를 보고자 하였다.
임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 산수의 영이함을 알고 싶으며 지금 위로 황후와 아래로 황태자를 보시오. 어찌 수려한 기운을 타고난 것이 아니겠소?" 하였다.
곽영석이 무릎을 치며 놓게 읊조려 말하기를 "마침내 세상의 부모 마음으로 하여금 아들을 낳기에 중시하지 않고 딸을 낳기를 중시하게 하겠구나"라 하였다.
자는 거진. 상원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몽고어를 익혔는데, 여러 번 사명을 받들어가서 공적이 뚜렸하였다.
충렬왕 때 왕족 가운데서 동쪽 나라에 원한을 품고서 풍속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조인규가 아뢰어 분명하게 논변하여 일이 드디어 조용해지게 되었다.
그 공적으로 중찬에 임명되자, 조인규가 말하기를 "홍자번은 덕망으로 이부상서가 되었는데 신이 그 위에 있게 되면 여론을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라고 하고는 굳이 사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중찬에 임명되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그에게 나아가서 자문을 구했다.
다만 토지와 백성들을 많이 끌어 모았고 권력으로 그 당시를 마음대로 하였다.
시호는 정숙이다.
아들 서, 연, 위 등은 모두 다음에 보인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지손연을 크게 벌였다.
지손은 중국말로 색깔이란 말인데 지손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의관이 모두 한 빛깔이다.
고려 예종 때에 원나라 휘종이 종과 경을 각각 한 틀씩 하사했는데 홍건적의 난에 흩어져서 거의 사라질 뻔했다.
어떤 늙은 악공이 종과 경 두 가지를 못 속에 던져 보존할 수 있었다.
인후는 본래 몽고의 겁령구로서 공주를 따라 우리나라로 왔다.
고려 충렬왕이 장군에 제수하고 이름을 고치고자 하니 인후가 대장군 인공수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절친이니 어찌 너의 성을 빌리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성을 고쳐 인(印)이라 하였다.
충렬왕 12년에 원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송골매를 잡게 하였다.
충렬왕 때 원나라 황제가 해청요자를 하사하였다.
고려 충선왕 때의 사람으로 벼슬하여 판전교 사시가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가 태자부참군박사가 되었다.
유연이 강남으로 가서 서적을 구입했는데 홍약이 보초 150정을 주어서 1만 8백 권을 구입하여 돌아왔다.
후에 황제가 홍약의 청으로 사신을 보내어 1천 여 권의 책을 하사했는데 모두 송나라의 비각에 소장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