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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三日,晴,過斜哨大嶺,至八渡河,以其八渡其水故名,或謂之半塗河,以其自我 朝鮮京城,至中國北京,此河正在其中界兩半故名,又過長嶺兒、薛里站、白言嶺、奴哥秀、奴哥河兒、奴哥嶺、干河兒,至鳳凰山,東寧衛方才撥軍夫,築城于此,吳鑒謂臣曰:“此城乃為貴國使臣往來,防道梗而築也。”過開州城、王斌吉塔里、餘溫者介河兒,至寬得洛谷,露宿焉,谷之東有海青山,又名松鶴山,
 
初三日,晴,過斜哨大嶺,至八渡河,以其八渡其水故名,或謂之半塗河,以其自我 朝鮮京城,至中國北京,此河正在其中界兩半故名,又過長嶺兒、薛里站、白言嶺、奴哥秀、奴哥河兒、奴哥嶺、干河兒,至鳳凰山,東寧衛方才撥軍夫,築城于此,吳鑒謂臣曰:“此城乃為貴國使臣往來,防道梗而築也。”過開州城、王斌吉塔里、餘溫者介河兒,至寬得洛谷,露宿焉,谷之東有海青山,又名松鶴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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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장령아(長嶺兒)· 설리참(薛里站)·백언령(白言嶺)·노가독(奴哥)·노가하아(奴哥河兒)·노가령(奴哥嶺)·간하아(干河兒)를 지나서 봉황산(鳳凰山)<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hIe&articleno=8768388&categoryId=323255&regdt=20160429234430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ref>에 이르니, 동녕위(東寧衛)에서 이제 막 군부(軍夫)를 뽑아 이곳에 성을 쌓고 있었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6004_003 성종실록 217권, 성종 19년 6월 4일 병신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상언하다]</ref>  
 
또 장령아(長嶺兒)· 설리참(薛里站)·백언령(白言嶺)·노가독(奴哥)·노가하아(奴哥河兒)·노가령(奴哥嶺)·간하아(干河兒)를 지나서 봉황산(鳳凰山)<ref>[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hIe&articleno=8768388&categoryId=323255&regdt=20160429234430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ref>에 이르니, 동녕위(東寧衛)에서 이제 막 군부(軍夫)를 뽑아 이곳에 성을 쌓고 있었습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ia_11906004_003 성종실록 217권, 성종 19년 6월 4일 병신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상언하다]</ref>  
  
“이 성은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길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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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새(吳__)가 신에게 말하기를, “이 성은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길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개주성(開州城)·왕빈길탑리(王法吉塔里) · 여온자개하아(餘溫者介河兒)을 지나서 관득락곡(寬得洛谷)에 이르러 노숙하였습니다.  
 
개주성(開州城)·왕빈길탑리(王法吉塔里) · 여온자개하아(餘溫者介河兒)을 지나서 관득락곡(寬得洛谷)에 이르러 노숙하였습니다.  
  
 
관득락곡의 동쪽에 해청산(海靑山)<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2555 해동청]</ref>이 있었는데, '[http://kostma.aks.ac.kr/dataSearch/dataSearch.aspx?cateQ=&mE=&query=%EC%86%A1%EA%B3%A8%EC%82%B0 송골산(松巖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관득락곡의 동쪽에 해청산(海靑山)<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2555 해동청]</ref>이 있었는데, '[http://kostma.aks.ac.kr/dataSearch/dataSearch.aspx?cateQ=&mE=&query=%EC%86%A1%EA%B3%A8%EC%82%B0 송골산(松巖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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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rd Day. Fair.
 
3rd Day. F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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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went from K’ai-chou Wall to Hai-ch’ing Mountain.]
 
[We went from K’ai-chou Wall to Hai-ch’ing Mountain.]
  
226. 吳璽는 4년 후에 鳳凰城을 수비하는 鎭撫로 승진하였음이 확인된다. 《朝鮮成宗實錄》 23년 5월 乙酉.
 
  
봉황성: http://www.palhae.org/sogilsu/travel/cholli-1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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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황성: http://www.palhae.org/sogilsu/travel/cholli-12.htm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023 건주여진정벌(建州女眞征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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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023 건주여진정벌(建州女眞征伐)]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1%B4%EC%A3%BC%EC%82%BC%EC%9C%84(%E5%BB%BA%E5%B7%9E%E4%B8%89%E8%A1%9B) 건주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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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A%B1%B4%EC%A3%BC%EC%82%BC%EC%9C%84(%E5%BB%BA%E5%B7%9E%E4%B8%89%E8%A1%9B) 건주삼위]
  
 
여진족을 둘러싼 명과 조선의 각축<ref>[http://b2b.mekia.net/previewEPUB/BK0000147495/OEBPS/Text/Section0002.xhtml]</ref>  
 
여진족을 둘러싼 명과 조선의 각축<ref>[http://b2b.mekia.net/previewEPUB/BK0000147495/OEBPS/Text/Section0002.xhtml]</ref>  
오새(吳__)226가 신에게 말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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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주의 아들 귀순<ref>[http://sillok.history.go.kr/id/kfa_10306105_002 단종실록 14권, 단종 3년 윤6월 5일 기유 2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세조가 이두리를 의정부에서 만나보다]</ref>
 
이만주의 아들 귀순<ref>[http://sillok.history.go.kr/id/kfa_10306105_002 단종실록 14권, 단종 3년 윤6월 5일 기유 2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세조가 이두리를 의정부에서 만나보다]</ref>

2020년 12월 10일 (목) 19:17 판

初三日,晴,過斜哨大嶺,至八渡河,以其八渡其水故名,或謂之半塗河,以其自我 朝鮮京城,至中國北京,此河正在其中界兩半故名,又過長嶺兒、薛里站、白言嶺、奴哥秀、奴哥河兒、奴哥嶺、干河兒,至鳳凰山,東寧衛方才撥軍夫,築城于此,吳鑒謂臣曰:“此城乃為貴國使臣往來,防道梗而築也。”過開州城、王斌吉塔里、餘溫者介河兒,至寬得洛谷,露宿焉,谷之東有海青山,又名松鶴山,



맑았습니다.

사초대령(斜哨大嶺)을 지나서 팔도하에 이르렀는데 강물을 여덟 번 건너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었습니다.

반도하(半塗河)[1]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우리 조선의 경성(京城)으로부터 중국의 북경에 이르자면 이 강이 바로 그 중간의 절반에 위치하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또 장령아(長嶺兒)· 설리참(薛里站)·백언령(白言嶺)·노가독(奴哥)·노가하아(奴哥河兒)·노가령(奴哥嶺)·간하아(干河兒)를 지나서 봉황산(鳳凰山)[2]에 이르니, 동녕위(東寧衛)에서 이제 막 군부(軍夫)를 뽑아 이곳에 성을 쌓고 있었습니다.[3]

오새(吳__)가 신에게 말하기를, “이 성은 귀국의 사신이 왕래할 때에 길이 막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쌓는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개주성(開州城)·왕빈길탑리(王法吉塔里) · 여온자개하아(餘溫者介河兒)을 지나서 관득락곡(寬得洛谷)에 이르러 노숙하였습니다.

관득락곡의 동쪽에 해청산(海靑山)[4]이 있었는데, '송골산(松巖山)'이라고도 하였습니다.




3rd Day. Fair.

We passed Hsieh-shao Great Range and came to Eight Crossings River, which was named for its eight ferries. Some called it Halfway River. It was so named because it was exactly halfway between Ching-ch'eng [Seoul] of our Korea and Peking of China. We passed [several places] and came to Fenghuang-shan-tung-ning Garrison. Military laborers had been sent out and were just then building a wall there. Wu Hsi said to me, “That wall is being built to protect the road along which envoys from your country pass.”?51 [We went from K’ai-chou Wall to Hai-ch’ing Mountain.]




여진족을 둘러싼 명과 조선의 각축[5]


이만주의 아들 귀순[6]
  1. 조선의 압록은 베이징북쪽 칠도하가 맞더라
  2.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
  3. 성종실록 217권, 성종 19년 6월 4일 병신 3번째기사, 1488년 명 홍치(弘治) 1년, 무령군 유자광이 의주에 성 쌓는 일이 중요함을 상언하다
  4. 해동청
  5. [1]
  6. 단종실록 14권, 단종 3년 윤6월 5일 기유 2번째기사, 1455년 명 경태(景泰) 6년, 세조가 이두리를 의정부에서 만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