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過徐州。是日雨大風。曉過九女塚,子方山。至雲龍山。山上有石佛寺。甚華麗。其西有戲馬臺,拔劍泉。又過蝗蟲集,夫廠,廣運倉,國儲門,火星廟。至彭城驛,登庸門。進士朱軒在驛前。徐州府城在驛西北二三里。徐州。古大彭氏國。項羽自稱西楚霸王。定都於此城之東。有護城堤。又有黃樓舊基。卽蘇軾守徐時所建。蘇轍有黃樓賦。至今稱道。臣等自驛過夫廠。廠在兩水交流之中。過至百步。洪,泗,洙,濟,汶,沛水合流。自東北汴,睢二水合流。自西北至徐州城北。泗淸汴濁。會流南注于是洪。洪之湍急處。雖不及呂梁之遠。其險峻尤甚。亂石錯雜磊砢。如虎頭鹿角。人呼爲飜船石。水勢奔突。轉折壅遏。激爲驚湍。湧爲急溜。轟震霆噴。霰雹衝決倒瀉。舟行甚難。臣船自工部分司淸風堂之前。用人巭百餘。徇兩岸牽路。以竹索縛舟。逆挽而上。臣與傅榮等上岸。由牽路步行。見鋪石堅整。問於榮曰。治此路者其有功於後世乎。榮曰。在昔此路湫隘。稍遇水漲。無路可尋。水退則土去石出。艱於步履。近年郭昇,尹庭用。相繼修補。用石板甃砌。扣以鐵錠。灌以石灰。故若此堅且固矣。夜至汴,泗交流之會留泊。
서주를 지났습니다.
이 날은 비가 내리고 큰바람이 불었습니다.
새벽에 구녀총(九女塚)과 자방산(子房山)을 지나 운룡산(雲龍山)에 이르렀습니다.
운룡산 위에는 석불사(石佛寺)가 있었는데 매우 화려하였습니다.
그 서쪽에는 희마대(戱馬臺)[1]와 발검천(拔劍泉)이 있었습니다.
또 황충집(堤蟲集)·부창(夫廠)·광운창(廣雲倉)·국저문(國儲門)·화성묘(火星廟)를 지나 팽성역(彭城驛)에 이르렀는데 등용문(登庸門), 진사주헌(進士朱軒)은 팽성역 앞에 있었습니다.
서주부성(徐州府城)은 팽성역 서북방의 2-3리에 있었습니다.
서주는 옛날의 대팽씨국(大彭氏國)으로, 항우(項羽)[2]가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자칭하고는 이곳에 도읍을 정했었는데, 성의 동쪽에는 성을 보호하는 제방이 있었습니다.
또 황루(黃樓)의 옛터가 있었으니, 이는 소식(蘇軾)[3]이 서주의 지주(知州)였을 때 세운 것이었습니다.
소철(蘇轍)에겐 〈황루부(黃樓賦)〉가 있어 지금까지 칭송되고 있습니다.
신 등은 팽성역(彭城驛)에서 부창(夫廠)을 지났는데, 부창은 두 강물이 서로 만나서 흐르는 그 사이에 있었습니다.
백보홍(百步洪)을 지나가니 사수(泗水)·수수(洙水)·제수(濟水)·문수(汶水)·패수(沛水)가 합류하여 동북방으로부터, 변수(汴水)·수수(唯水)는 합류하여 서북방으로부터 서주성 북쪽에 이르렀습니다.
사수는 맑고 변수는 흐렸으나 한곳에 모여 흘러 남쪽으로 이홍에 들어가는데, 홍의 물이 빨리 흐르는 곳이 비록 여량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지만 그 험준한 것이 더욱 심하여 난잡한 돌이 뒤섞여 많이 쌓여서 범의 머리나 사슴의 뿔과 같았으니, 사람들이 이를 배를 뒤집어엎는 바위 번석석[飜船石]이라고 불렀습니다.
물 흐르는 기세가 급하게 흐르다가 꺾이어 구부러지면서 막히기도 하고 세차게 부딪치면서 빠르게 흐르고 솟아오르면서 급류가 되어 벼락 치는 소리처럼 진동하고 물보라를 뿜어내며 맞부딪치며 뚫려 흐르다 엎어져 쏟아지니 배를 움직이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신의 배는 공부분사(工部分司) 청풍당(淸風堂)의 앞에서 인부 100여 명을 써서 양쪽 언덕의 좁은 길을 따라 대로 꼰 새끼로 배를 얽어매어 당기면서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신은 부영 등과 함께 언덕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걸어 가다가 돌을 단단하고 가지런히 깔아 놓은 것을 보고 부영에게 묻기를,
“이 길을 닦은 사람은 후세에 공로를 남긴 것이겠지요!”라고 하였습니다.
부영이 말하기를,
“옛날에는 이 길이 지형이 낮고 좁아서 조금만 물이 불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으며, 물이 물러가면 흙은 사라지고 돌이 솟아나와 걸어가기가 고생이었습니다. 근년에 곽승(郭昇)과 윤정용(尹庭用)이 서로 잇달아 보수하여 석판(石板)을 깔고 이어 철정(鐵銃)을 두드려 박고 석회로 땜질을 한까닭에 이같이 단단하고 굳게 된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밤에 변수와 사수가 서로 만나 흐르는 곳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3rd Day. Passing Hsü-chou. This day it rained, and there were high winds.
[We went from Chiu-nü-chung to Peng-ch'eng Station, two or three li southeast of Hsü-chou Prefecture.] Hsü-chou was the old Ta-p'eng-shih-kuo. When Hsiang Yü called himself Dictator King of Western Ch’u, he put his capital west of that wall. There is a levee to protect the wall, and there are the old foundations of the Yellow Tower, which was built when Su Shih was governor of Hsü. Su Che [wrote) a Yellow Tower Fu, praised to the present day. From the station we passed workers' quarters that were at the junction of two rivers and came to Hundred-Yard Flood. From the northeast the Ssu, Chu, Chi, Wen, and Pei rivers flowed together; and from the northwest the Pien and Sui flowed together. Arriving north of Hsü-chou wall, the Ssu, Ch’ing, Pien, and Cho converged and flowed south into this flood. The swift part of the flood, though not as long as that of Lü-liang, was extremely dangerous. Great numbers of rocks, like tigers' heads and deers' antlers, lay scattered in disorder. People called them the Boat-tipping Rocks. The water ran swiftly, twisting and turning past obstacles, turbulent with startling rushes, rumbling and shaking like thunder, and spuming like sleet and hail. It burst through some places and seeped through others, making it very hard for boats to pass.
From in front of Ch’ing-feng Hall, a local post of the Ministry of Works, it took over one hundred laborers, following the tow-paths on both banks, to pull the boats upstream with bamboo ropes that had been fastened to them. I, Fu Jung, and others climbed onto the bank and walked along the tow-path. I saw that the paving-stones were firm and in good repair, and I asked Fu Jung about them: “I imagine that the people who made this path must have bestowed a blessing on later generations.” Fu Jung said, “In olden times, this path was low and narrow. When the river rose a little, there was no path that could be used. When the water receded, the earth came away and the stones came out, and it was hard to walk. In recent years, Kuo Sheng and Yin T'ing-yung in turn have repaired it. They used stone slabs laid in layers, fastened them with iron bolts and cemented them with lime. That is why they are as strong and firm as they are.” At night we came to the junction of the Pien and Ssu and stayed there.
初三日
过徐州。是日雨,大风。晓过九女冢、子方山至云龙山。山上有石佛寺,甚华丽。其西有戏马台、拔剑泉。又过蝗虫集、夫厂、广运仓、国储门、火星庙至彭城驿。登庸门、进士朱轩在驿前。徐州府城在驿西北二三里。徐州,古大彭氏国,项羽自称西楚霸王定都于此。城之东有护城堤,又有黄楼旧基,即苏轼守徐时所建。苏辙有《黄楼赋》至今称道。臣等自驿过夫厂,厂在两水交流之中。过至百步洪,泅、洙、济、汶、沛水合流自东北,汴、睢二水合流自西北,至徐州城北,泗清汴浊会流,南注于是洪。洪之湍急处虽不及梁之远,其险峻尤甚。乱石错杂,磊砢如虎头鹿角,人呼为翻船石,水势奔突,转折壅遏,激为惊湍,涌为急溜,轰震霆,喷霰雹,冲决倒泻,舟行甚难。臣船自工部分司、清风堂之前,用人巭百余,徇两岸牵路,以竹索缚舟,逆挽而上。臣与傅荣等上岸由牵路步行,见铺石坚整,问于荣曰:“治此路者其有功于后世乎!”荣曰:“在昔,此路湫隘,稍遇水涨,无路可寻,水退则土去石出,艰于步履。近年,郭升、尹庭用相继修补,用石板甃砌,扣以铁锭,灌以石灰,故若此坚且固矣。”夜至汴泗交流之会,留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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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해록역주 p.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