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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遇千戶許淸於路上。是日大雨。子半。臣等因爲里人所驅。路經一高阜。松竹成藪。遇有自稱隱儒姓王名乙源者。憐臣冒夜衝雨。艱楚被驅。止里人少住。問臣所從來。臣亦告以漂風之故。乙源惻然。卽呼酒勸臣。臣曰。我朝鮮人守親喪。不飮酒食肉茹葷及甘旨之味。以終三年。蒙饋酒。感恩則已深矣。然我今當喪。敢辭。乙源遂饋臣以茶。饋從者以酒。因問曰。你國亦有佛否。答曰。我國不崇佛法。專尙儒術。家家皆以孝悌忠信爲業。乙源握臣手眷顧相別。其里人驅臣等至一大嶺。臣足如繭。不能前進。里人擁挽臣臂。前引後推而過。又遞至二十餘里。其里中有大橋。里人皆揮稜杖。亂擊臣等。肆虣劫奪太甚。吳山者負臣馬鞍。有一人敺擊攘去。臣等被杖前驅。顚仆哭泣。過二嶺。見遞他里。向曙。問其有大橋之里。則人曰。仙岩里也。自登陸以來。道傍觀者。皆揮臂指頸。作斬頭之狀以示。臣等莫知其意。行至蒲峯里。雨少止。有官人率軍吏而來。問臣曰。你是何國人。怎麽到此。臣曰。我乃朝鮮國人。再登文科。爲 國王近臣。奉國事巡海島。奔喪出陸。遭風漂到于此。飢渴萬死之餘。僅續殘命。復爲里人所驅。辛苦萬端之極。得遇官人於此。是我得生之時也。其官人卽先饋臣以粥。隨以飯具。又令臣從者做飯以吃。臣問官人姓名職事。有王适者曰。此乃海門衛千戶許淸也。守塘頭寨。聞倭犯界。專爲捕獲而來。汝其愼之。臣困臥路周。四肢莫擧。許淸謂臣曰。我大唐法度嚴切。你別處人。不可久在此亂。爲攪擾良民。令軍吏等疾驅臣等。行五里許有官廨。乃唐頭寨也。過一長堤。可十餘里。雨復大作。臣跛行蹣跚。全未動脚。中途僵仆曰。我之筋力竭矣。將及於死。早知若此。莫如死於海上之爲便。程保以下。亦對臣痛哭。被軍吏甚督。莫能少留。李楨,孝枝,尙理,玄山等身實者。相遞負臣以行。過二嶺。幾至三十餘里。有人居甚繁盛。前有佛宇。天將暮。雨不止。故許淸欲留臣等于佛宇以經夜。其里人皆以謂不可。許淸謂臣曰。此方人皆疑你爲劫賊。故不許留。你雖艱步。不可不行。令軍吏驅臣等。過一大嶺。夜二更。至一川邊。李楨等亦力盡。身且不保。不克負臣。從者等亦皆疲羸不能行。許淸親執臣手以起。臣之兩足尰蹇。不運一步。高以福大怒。指臣曰。此漢此漢。無乃病狂歟。汝若艱苦。宜委四肢。莫之能起可也。臣辱其言。自以謂我寧至死。宜死於此地。復臥不起。從者率皆顚臥狼藉。許淸令軍吏或督或敺。而不得驅焉。良久。又有一官人領兵擁炬而至。甲冑鎗劍彭排之盛。嗩吶哱囉喇叭錚鼓銃㷁之聲。卒然重匝。拔劍使鎗。以試擊刺之狀。臣等驚駭耳目。喪魂褫魄。罔知所爲。官人與許淸。整軍威驅臣等。可三四里。有大屋舍。繚以城郭如關防然。問之則乃於瀆場見桃知所。或云。批驗所也。城中又有安性寺。止臣等于寺。許留宿焉。臣問其官人爲誰。則有僧云。此乃桃渚所千戶也。聞倭人犯境。領器械以備于此。因許千戶之報。率兵往驅你輩以來。然未知你心眞詐。明日到桃渚所。將訊汝。



천호(千戶) 허청(許淸)을 노상에서 만났습니다.

이 날은 큰 비가 내렸습니다.

한밤중에 신 등이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서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은사(隱土)를 자칭하는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신이 밤에 비를 맞으며 고생스럽게 마을 사람에게 내몰려 온 것을 불쌍히 여겨, 마을 사람을 제지시켜 조금 멈추게 하고는 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습니다.

신은 풍랑에 표류된 사연을 고하였습니다.

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을원은 마침내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이어서 묻기를,“당신 나라에도 불법(佛法)이 있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을원은 신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면서 작별하였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신 등을 몰아 큰 고개에 이르렀습니다.

신은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또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그 마을에는 큰 다리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모두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신 등을 마구 치면서 함부로 겁탈함이 너무 심하였습니다.

오산이란 자는 신의 말안장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오산을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신 등은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체송(遞送)되니,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큰 다리가 있었던 마을의 이름을 물었더니,“선암리(仙岩里)이오.”라고 하였습니다.

육지에 오른 이후 길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을 지어 보였으나 그 의미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가다가 포봉리(蒲峯里)에 이르니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관인(官人)이 군리(軍史)를 거느리고 와서 신에게 묻기를,

“너희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이곳에 도착하였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곧 조선국 사람으로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 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해도를 순찰하던 중 친상을 당하여 육지로 나오다가 바람을 만나 표류해서 이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기갈로 사경을 헤매던 나머지 잔명(殘命)을 겨우 이어오다가 다시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천신만고 끝에 관인을 이곳에서 만나게 되었으니 살길을 찾은 듯합니다.”

그 관인은 곧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이어 밥 지을 그릇을 주어 신의 종자들에게도 밥을 지어서 먹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관인의 성명과 직업을 물으니 왕괄(王适)이란 자가 말하기를,

“이 분은 곧 해문위 천호(海門衛千戶) 허청(許淸)인데, 당두채(塘頭寨)를 지키다가 왜적(倭賊)이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잡기 위해 왔으니 당신들은 조심해야 하오”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피곤하여 길가에 드러누워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대당(大唐)의 법도는 엄격하니, 당신들 딴 지방 사람들은 이곳에 오래 머물러 양민들을 어지럽게 해서는 안 되오!"라고 하였습니다.

군리(軍吏) 등에게 신 등을 빨리 내몰게 하였습니다. 5리가량을 가니 관해가 있었는데 바로 당두채였습니다.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신은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걷다가 전연 다리를 움직일 수 없어 중도에서 넘어지면서 말하기를, “나의 근력이 다하였으니 곧 죽겠구나. 이럴 줄 일찍 알았더라면 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라고 하였습니다.

정보 이하가 신을 마주하고 통곡하였습니다.

그러나 군리들이 심히 독촉하므로 조금도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이정, 효지, 상리, 현산 등 몸이 튼튼한 자들이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인가가 매우 많고 그 앞에는 불사(佛寺)가 있었습니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허청은 신 등을 불사에 머물러서 하룻밤을 지내게 하려고 하였으나, 그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허청이 신에게 말하기를, “이 지방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당신이 비록 걷기가 힘들더라도 가지 않을 수 없겠소”라고 하였습니다.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밤 2경에 어느 한 냇가에 이르자 이정 등도 또한 힘이 다하여 자기 몸도 가누지 못하였으니 신을 업고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종자들 또한 모두 피곤하여 걷지 못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신의 두 다리가 절룩거려 한 걸음도 옮겨 놓을 수 없었습니다.

고이복이 크게 성을 내며 신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아! 이 사람아! 미쳐버린 것이겠지! 당신이 그렇게 힘들다면 사지를 뻗어버리고 일어서지도 못해야 할 것 아니겠나?”라고 하였습니다.

신은 그 말에 굴욕을 느끼고, '내가 차라리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면 마땅히 여기서 죽으리라' 하고 다시 드러누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종자들도 모두 쓰러져 여기저기 드러누워 버렸습니다.

허청이 군리들을 시켜 독려하기도 하고 구타하기도 했지만 몰아갈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 후에 또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갑옷, 창검, 방패의 위세와 쇄납(瑣吶)(태평소의 일종)[1], 발라, 나팔, 징, 북, 총통(銃痛)의 소리와 함께 갑자기 겹겹 둘러싸더니, 칼을 빼고 창을 써서 치고 찌르는 동작을 해 보였습니다.

신 등은 눈과 귀가 몹시 놀라 넋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관인은 허청과 함께 군사의 위용(威容)을 정돈하고 나서 신 등을 몰았습니다.

3-4리쯤 가니, 큰 옥사(屋舍)가 있고, 성곽이 빙 둘러서 관방(關防)과 같기에 물었더니,

곧 두독장(杜瀆場)으로 현재 도지소(桃知所) 도조서라고도 하고 비험소(批驗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성안에 안성사(安性寺)란 절도 있었는데, 신 등을 절에 머물러 유숙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은 그 관인이 누구인가 물으니,

어떤 중이 말하기를,“이 분은 곧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고 무기를 가지고서 여기에서 대비하고 있었는데, 허천호(許千戶)의 보고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당신들을 몰고 온 것이오.

그러나 아직 당신 마음이 진실된지 거짓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내일 도저소에 이르면 당신들을 심문할 것이오”라고 하였습니다.




18th Day. An Encounter with Chiliarch Hsü Ch’ing on the Road. This day it rained hard.

By midnight, then, as we were driven on by villagers, the road passed over a high hill, where pines and bamboo grew thickly. We met a man, named Wang I-yüan, who described himself as a recluse scholar. He pitied us for braving the night and the rain and being driven on painfully. He stopped the villagers briefly and asked me what had happened, and I informed him, too, of the circumstances of our being blown adrift by the wind. I-yüan grieved for me; he called for wine and urged it on me. I said, “When we Koreans observe mourning for parents, we do not drink wine or eat meat, garlic, oniony plants, or sweet things for fully three years. I am deeply grateful for your kindness in offering me wine, but I am in mourning now, and I venture to decline.” l-yuan then served me tea and my staff wine. He asked, “Does your country have the Buddha, too?” I answered, “My country does not revere the Buddhist law, it honors only the Confucian system. All its families make filial piety, fraternal duty, loyalty, and sincerity their concern.” I-yüan took my hands and looked at me compassionately, and we parted.

The villagers drove us on, and we came to a large mountain range. My feet were swollen like cocoons, and I could not go forward. The villagers seized my arms, pulled me from in front, pushed me from behind, and over we went. We were passed on for over twenty li [and came to another village, where] there was a big bridge. The villagers, who struck us indiscriminately with crooked sticks, were recklessly cruel and plundered greedily. O San was carrying my horse saddle, but a man beat him off, seized it, and took it away. Beaten forward with sticks, we fell down and wept. We crossed two ranges and were turned over to another village. It was approaching dawn. When I asked what the vilļage with the big bridge had been, a man said, “Hsien-yen Village.” Ever since we had landed, all the onlookers by the road had sawed their arms across their throats, making gestures at us as if to cut off their heads, and we did not know what they meant. We reached P’u-fêng Village. The rain let up a little. An official came with military officers and asked me, “What is your nationality? How did you come here?” I said, “I am a Korean. I have placed in the examinations twice and am a minister close to the King of the country. I had been given the state duty of touring an island, but hurrying into mourning, I put out from land, encountered a wind, and drifted here. Through hunger and thirst enough for dying many times, I have barely clung to life. I have been repeatedly driven on by villagers. In this extremity of suffering, I am fortunate enough to meet an official here, making it the moment of my rescue.”

The official first served me congee and then solid food. He also ordered my staff to prepare food and eat. When I asked the official's name and position, one Wang Kua said, “He is Hsü Ch’ing, Chiliarch [Ch’ien-hu] of Hai-men Garrison [Wei].29 He defends T’ang-t’ou Stockade; having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coast, he came specifically to take them prisoner. Take care.” I lay down exhausted at the side of the road; my four limbs would not move. Hsü Ch’ing said to me, “The laws of China are strict. You strangers may not stay here long upsetting the law-abiding people.” He ordered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quickly. When we had gone about five li, there was a public office, which was T’ang-t’ou Stockade. We passed a long embankment, somewhat over ten li long. Rain fell heavily again.

I hobbled along, crippled, moving my legs hardly at all. I fell in the road and said, “My strength is gone, I am going to die. If I had known earlier that it was to be like this, it would have been easier to die at sea.” Chòng Po and those below him wept bitterly for me again. We were urged on by the military officers and could not delay a moment. Yi Chong, Hyo-ji, Sang-ni and Hyon San, men with sound bodies, took turns carrying me along.

We crossed two ranges, and when we had gone almost thirty li, there were many houses, in front of which was a Buddhist temple. Since it was about to get dark and the rain did not stop, Hsü Ch’ing wanted to put us up in the temple. All the villagers felt that could not be permitted. Hsü Ch’ing said to me, “All the people here suspect that you are bandits and, therefore, will not let you be put up. Though it is hard for you to walk, we have no choice but to go on.” He ordered the military officers to drive us on.

We crossed a large range and in the second watch of the night came to the bank of a river. Yi Chong and the others had also exhausted their strength and could not take care of themselves, nor could they carry me. My whole staff, too, were weary and wasted and could not go on. Hsü Ch’ing himself took my hands and raised me. Both my feet were swollen and lame, and I could not move them a step. Ko I-hok was enraged. He pointed at me and said, “These Chinese! They must be mad! If you are really at the end of your strength, you had better just drop and not get up.” I agreed with what he said. I would rather die, I felt, and it was just as well to die here, so I lay down again and did not get up. Most of the rest fell down helter-skelter. Hsü Ch’ing ordered the officers to urge some of us on and strike at others, but they could not make us move. After some time, another official came with soldiers carrying torches. They were impressive with their armor and helmets, their spears, swords, and shields. Their gongs, drums, and firearms30 made a tumult. Without warning they surrounded us, drawing their swords and handling their spears in motions as if to practice attacking and cutting. The shock to our eyes and ears terrified us, and we did not know what to do.

The official and Hsü Ch'ing drew their forces up in formation and drove us on. In about three or four li, there was a big house, surrounded by a wall like a fortified pass. I asked about it. It was Yü-tu-ch’ang, the present T'ao-chih Chiliad;31 some said it was P’i-yen Chiliad.32 Inside the wall was An-hsing Temple. They stopped us at the temple and let us stay there for the night. When I asked who the official was, a priest said, “He is the Chiliarch of T’aochu Chiliad. He heard that Japanese were raiding the borders and had weapons brought here and set up. Then, receiving Chiliarch Hsü’s report, he led soldiers out to drive you on and bring you here. But he does not know yet whether you are honest or dishonest. Tomorrow you will reach T’ao-chu Chiliad, and he will question you.”




十八日

遇千户许清于路上。是日大雨。子半,臣等因为里人所驱,路经一高阜,松竹成薮。遇有自称隐儒,姓王名乙源者,怜臣冒夜冲雨,艰楚被驱,止里人,少住。问臣所从来。臣亦告以漂风之故。乙源恻然,即呼酒劝臣。臣曰:“我朝鲜人守亲丧,不饮酒、食肉、茹荤及甘旨之味,以终三年。蒙馈酒,感恩则已深矣,然我今当丧,敢辞。”乙源遂馈臣以茶,馈从者以酒。因问曰:“你国亦有佛否?”答曰:“我国不崇佛法,专尚儒术,家家皆以孝悌忠信为业。”乙源握臣手,眷顾相别。其里人驱臣等至一大岭。臣足如茧不能前进。里人拥挽臣臂,前引后推而过。又递至二十余里,其里中有大桥,里人皆挥棱杖乱击臣等,肆虣劫夺太甚。吴山者负臣马鞍,有一人殴击攘去。臣等被杖前驱,颠仆哭泣,过二岭,见递他里。向曙,问其有大桥之里,则人曰:“仙岩里也。”自登陆以来,道旁观者皆挥臂指颈作斩头之状,以示臣等,莫知其意。行至蒲峰里,雨少止。有官人率军吏而来,问臣曰:“你是何国人?怎么到此?”臣曰:“我乃朝鲜国人,再登文科,为国王近臣,奉国事巡海岛,奔丧出陆,遭风漂到于此。饥渴万死之余,仅续残命,复为里人所驱,辛苦万端之极,得遇官人于此,是我得生之时也。”其官人即先馈臣以粥,随以饭具,又令臣从者做饭以吃。臣问官人姓名、职事,有王适者曰:“此乃海门卫千户许清也,守塘头寨,闻倭犯界,专为捕获而来。汝其慎之!”臣困卧路周,四肢莫举。许清谓臣曰:“我大唐法度严切,你别处人不可久在此乱为,搅扰良民。”令军吏等疾驱臣等,行五里许,有官廨乃塘头寨也。过一长堤,可十余里,雨复大作。臣跛行蹒跚,全未动脚,中途僵仆,曰:“我之筋力竭矣,将及于死。早知若此,莫如死于海上之为便!”程保以下亦对臣痛哭。被军吏甚督,莫能少留。李帧、孝枝、尚理、玄山等身实者,相递负臣以行。过二岭,几至三十余里,有人居,甚繁盛,前有佛宇。天将暮,雨不止,故许清欲留臣等于佛宇以经夜。其里人皆以谓不可。许清谓臣曰:“此方人皆疑你为劫贼,故不许留你。虽艰步,不可不行。”令军吏驱臣等过一大岭。夜二更,至一川边。李帧等亦力尽,身且不保,不克负臣。从者等亦皆疲羸不能行。许清亲执臣手以起,臣之两足尰蹇,不运一步。高以福大怒,指臣曰:“此汉,此汉!无乃病狂欤?汝若艰苦,宜委四肢,莫之能起可也。”臣辱其言,自以谓我宁至死宜死于此地,复卧不起。从者率皆颠卧狼藉。许清令军吏或督或殴,而不得驱焉。良久,又有一官人领兵拥炬而至。甲胄、枪剑、彭排之盛,唢呐、哮罗、喇叭、铮鼓、铳熥之声,卒然重匝,拔剑使枪,以试击刺之状。臣等惊骇耳目,丧魂褫魄,罔知所为。官人与许清整军威驱臣等,可三四里,有大屋舍缭以城郭,如关防然。问之则乃杜渎场,见桃渚所,或云批验所也。城中又有安性寺,止臣等于寺,许留宿焉。臣问其官人为谁?则有僧云:“此乃桃渚所千户也,闻倭人犯境,领器械以备于此。因许千户之报,率兵往驱你辈以来。然未知你心真诈,明日到桃渚所将讯汝。”




  • 사건: 쫓김(마을 사람들이 신의 팔을 당겨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면서 지나갔습니다, 각진 몽둥이를 휘둘러, 때리고 빼앗아 갔습니다, 몽둥이에 얻어맞으며 앞으로 내몰렸고 넘어져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습니다, 신 등에게 팔을 휘두르고 목을 가리키며 머리를 베는 시늉, 마을 사람들에게 쫓기어, 군리를 시켜 신 등을 몰아,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구타하기도 했지만, 한 관인이 횃불을 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르렀습니다, 신 등을 몰았습니다)
  • 제도(관직): 천호, 관인(官人), 군리(軍史), 도저소천호(桃者所千戶)
  • 인명: 허청, 성은 왕(王), 이름은 을원(乙源)이란 사람, 왕괄(王适)
  • 기후: 큰 비, 비가 조금 그쳤습니다
  • 시간: 한밤중, 새벽녘, 날은 저물어 가는데, 밤 2시
  • 식물: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지리: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여러 곳을 거쳐서 20여 리를 갔습니다, 두 고개를 지나서 다른 마을로, 두 고개를 지나서 거의 30여 리를 가니, 큰 고개 하나를 넘게 하였습니다, 냇가, 3-4리쯤 가니
  • 풍경: 어떤 높은 언덕을 지나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 심리: 동정(을원은 가엾게 여기고 곧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허청이 몸소 신의 손을 잡아 일으켰으나)
  • 의전: 술을 가져다 신에게 권하였습니다, 신에게는 차를 대접하고, 종자들에게는 술을 대접하고는, 신에게 먼저 죽을 주었고
  • 풍습(음식)-중국: 술, 차
  • 토목: 큰 다리, 긴 제방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길이는 10여 리쯤 되었습니다
  • 행정: 체송(遞送), 대당의 법도는 엄격하니,
  • 지명: 선암리, 포봉리(蒲峯里), 해문위, 대당(大唐), 두독장(杜瀆場)=도지소(桃知所)=도조서=비험소(批驗所)
  • 기물: 밥지을 그릇, 갑옷, 창검, 방패, 쇄납(瑣吶), 발라, 나팔, 징, 북, 총통(銃痛)
  • 건축물: 당두채(塘頭寨)
  • 사회: 왜적, 사람들이 모두 당신들을 해적으로 의심하는 까닭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군요, 왜인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
  • 제도(관직): 군리
  • 기후: 비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비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 풍경: 인가가 매우 많고
  • 불교: 불사, 안성사
  • 사건-조선: 친상을 당하여, 표류
  • 사회-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 풍습(음식)-조선: 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 유학-조선:우리 조선 사람은 친상을 당하면 술과 고기, 훈채(董菜) 및 맛있는 음식을 들지 않고 삼년상을 마치게 됩니다. 술을 내려주시니 은혜에 깊이 감사드리지만 저는 지금 상중(喪中)이므로 감히 사양하겠습니다
  • 사회-조선: 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번갈아 신을 업고 갔습니다,
  • 유학-조선:우리나라는 불법은 숭상하지 않고 오로지 유술(儒術)만 숭상하므로, 집집마다 모두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국사에 관한 명령을 받들고
  • 비유-조선: 발이 누에고치처럼 퉁퉁 부어,
  • 인명-조선: 오산, 정보, 이정, 효지, 상리, 현산
  • 기물-조선: 말안장
  • 제도(시험)-조선: 두 번 문과(文科)에 올라,
  • 행정-조선: 해도를 순찰하던 중
  • 제도(관직)-조선:국왕(國王)의 근신(近臣)이 되었는데,
  • 심리(최부): 좌절, 허탈(바다 위에서 죽는 편이 나았을 텐데), 굴욕,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 심리(고이복): 분노, 놀람(몹시 놀라 넋을 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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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강명관 칼럼 사마천의 궁형과 스스로 환관이 된 사내, 국제신문, 2016.09.08]
  3. [1]
  4. 역사 속 환관 가문의 상속, 신동아, 2018.10.07
  5. [2]
  6. 잠실동 유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