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외방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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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입국

1825년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인 교우들의 편지를 접하게 된 교황은 1827년 9월 1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 내에서는 외국인의 입국을 금지하였고, 파리 외방전교회 역시 프랑스혁명 때문에 회원이 10여명밖에 없었고 돈도 없었기 때문에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방콕의 보좌주교이던 브뤼기에르(Bruguiere, 蘇) 주교는 한국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그는 1831년 9월9일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나 3년이 지난 뒤 만주에 도착하였지만 한국 입국의 많은 어려움 때문에 1835년 10월 한국을 바라보면서 만주의 교우촌 마가자(馬架子)에서 사망하였다.

그러나 1836년 모방(Maubant, 羅) 신부, 1837년에 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Imbert, 范) 주교와 샤스탕(Chastan, 鄭) 신부가 입국하였다.

그들은 곧 파리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에 보내 교육을 받고 사제서품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배출되었다.

이에 앞서 1839년 1월 기해박해(己亥迫害)가 시작되면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고 1839년 9월에는 마침내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3명도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그 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의 입국을 시도하여 1845년 10월 3대 조선대목 페레올(Ferreol, 高) 주교, 다블뤼(Daveluy, 安) 신부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충청도 강경(江景)에 도착하였다.

1846년 병오(丙午)박해를 치른 뒤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를 비롯하여 메스트르(Maistre, 李),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푸르티에(Pourthie, 申), 페롱(Feron, 權),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볼리외(Beaulieu, 徐), 도리(Dorie, 金), 위앵(Huin, 閔) 신부 등이 계속 입국하였다.

하지만 1866년 병인년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고, 10년이 지난 1877년이 되어서야 다시 한국에 입국할 수가 있었다.

조선 내에서의 주요 활동

1836년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처음 한국에 입국한 뒤 제일 먼저 한국인 성직자 배출을 위하여 3명의 신학생을 선발하여 유학보낸 후 1853년 충청도 배론[舟論]에 신학교를 설립하여 성직자 양성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는 오래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1885년 10월 강원도 원주땅 부흥골에 다시 신학교를 설립한 후 1887년 서울 용산(龍山)에 예수성심신학교(聖心神學校)를 개설하였다.

즉 오늘날 서울 혜화동(惠化洞)에 소재한 가톨릭대학 신학부의 모체가 된 것이다.

아울러 1914년 대구교구에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설립하여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한국인 성직자를 배출하여 한국 천주교회의 근간을 이루게 하였다.

신학교 교육뿐만 아니라 일반교육에도 참여하여 1922년 ‘남대문상업학교’를 시작하였고, 1924년에는 이 학교 내에 을조(乙組)를 편성하여 소신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박해시대 때 회장과 공소(公所)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면서 회장들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볼 수 있는 한글본 신심서적(信心書籍)들을 저술해냈다.

1864년대에는 ≪신명초행≫(神命初行), ≪성찰기략≫(省察記略),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등의 목판본들을 간행하였는데 이와 같은 간행사업은 꾸준히 계속되어 1880년에는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 의해 ≪한불자전≫(韓佛字典)이, 1881년에는 ≪한어문전≫(韓語文典)이 각각 간행되었다.

이들 모두는 한국 최초의 것들로서 한국의 언문(言文)에 있어서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일본 나가사끼(長崎)에 있던 성서활판소(聖書活版所)를 서울 정동(貞洞)으로 이전함으로써 오늘날의 가톨릭출판사가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