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적 교육서 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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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家學)

임천(林川) 조(趙) 가학(家學): 졸수재 조성기부터

아무리 작은 마을에도 인재는 있다

김만중 vs 조성기

백탑파(白塔波)

백탑파 데이터

교육의 실학

실학사상과 교육

실학적 지식과 저술의 형태 -『迂書』․『雜同散異』․『林園經濟志』

본고는 2019년 9월 21일에 ‘실학의 문헌학적 저변 검토’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모임에서 기조 발제했던 논문을 수정, 보충한 것이다. 실학관계의 문헌 3종을 분석대상으로 잡았다. 1)유수원의 『우서』를 실학의 각성과 개혁 논리로 인식2)안정복의 『잡동산이』를 지식의 탐구와 박학으로 인식3)서유구의 『임원경제지』를 士의 현실과 삶의 총체적 설계도로 인식위와 같이 각각 관점을 세워 분석하여 내용을 파악하고 각기 실학적 성과를 평가하였다. 특히 『임원경제지』에 비중을 두었던바 한국실학사의 큰 두 경향으로서 ‘경세실학’에 대비되는 ‘생활실학’이라는 개념으로 규명, 새롭게 부각을 시킨 것이다.

실학의 전개

유서(類書)

조선 후기 유서(類書)와 서학(西學)―『성호사설』과 『오주연문장전산고』를 중심으로―

유서(類書)는 단편적인 지식들을 정리하는 수준을 넘어 개별적 지식들에범주를 부여해 분류하고 평가하려는 능동적인 지식 재배치의 결과물이다. 당연히 지식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사회의 변화나 지적 조건의 변화는 지식의 정렬과 재배치, 위상이나 범주의 변경 등의 결과로 이어진다. 그런 맥락에서 유서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요인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 시대, 한 사회 지식장의 표현형으로서, 이를 통해 시대의지적 조건과 지적 지향이 바뀌는 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 類書類 문헌의 儒家 經典 이해―『五洲衍文長箋散稿』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유서류 문헌의 출현은 “지식의 축적”과 “박학 지향”이라는 특성을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축적되어온 방대한 지식을 이해하는 데 있어 유가 경전을 빼놓을 수없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대표적 유서류 문헌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초점을 맞추어, 유가 경전에 대한 지식이 박학적 관심 위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며, 나아가 그것이 주자학적 경전 연구가 심화되고 비판적으로 극복되고 있던 조선 학계에 어떠한 형태의 진전된 유가 경전 해석의 시야를 열어주었는지 살펴보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구성된 유가 경전 관련 지식은 중국과 조선의 주자학적 경전 이해를 경학사의 일부로 다룸으로써 결과적으로 그것을 상대화시키는 지평을 열어준다. 19세기초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경학 지식을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 유가 경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 類書의 종류와 발달

類書란 百科全書式 資料匯集의 특성을 지니는 것을 가리킨다. 본고는 기존의 국내 연구나 목록들이 類書를 넓게 정의하여 왔으나, 본고는 사물의 장실과 기원을 검색하기 위한 공구서[文獻用語事典]만을 類書로 한정한 뒤, 중국의 類書가 국내에 수용된 양상을 개괄하고, 전근대시기 한국의 지식사회에서 類書를 참조하고 新撰한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폈다. 그리고 주로 조선후기의 類書들을 중심으로 ① 어휘 중심의 유서 ② 인물ㆍ일화 중심의 유서 ③ 박물학적 유서 ④ 경학, 성리학 관련 유서 ⑤ 역사 관련 유서 ⑥ 변증을 겸한 유서 ⑦ 국가제도 전고 종합 유서 ⑧ 실용백과전서 ⑨가정지침서의 類書 ⑩ 아동교과서의 소형 類書 등 아홉 종류로 나누어 대표적인 예들을 각각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유서 지식의 성격

유서는 지식의 회집, 항목화, 분류, 변증이라는 문체 성격을 공유하는 것으로서, 임란 이후 지식의 팽창을 적절히 반영해 낼 수 있었다. 주자학은 원칙적으로 박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조선에서 박학에 대한 도학적 경계는 지식이 증대하면서 함께 강화되었다. 18세기 중반 이후 박물 또는 명물도수에 대한 관심이 일부 지식인들에게 확산되면서 양측의 입장과 지향 차이는 좀 더 분명해졌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바로 그런 과정의 성취 가운데 하나였다. 유서는 한편으로 한대 이래의 명물학 전통에 기대어 있었다. 명물학은 고전을 지식 변증의 기준으로 끌어들이고 만물 사이의 위계적 질서 관념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이르러 박물학에 대한 관심과 병행하여 만물의 수리 질서에 대한 재인식이 나타났다. 그것은 분명 서학의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상수학의 외피를 걸치고 있었고, 그나마도 아직 저작 전체를 관통하는 학문방법론 차원의 새로운 함의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유서의 ‘물리’는 아직 전통적인 지식체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임원경제지』의 찬술 배경과 類書로서의 특징

『임원경제지』는 농업을 중심으로 복식, 천문, 식생활, 건축, 의학, 미술, 음악 등 다양한 학문 영역을 분야별로 수록한 類書이다. 그 편찬자인 서유구가 살았던 18∼19세기는 활발한 인적 교류와 함께 각종 서적들이 대량으로 출판되면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들이 대량으로 유통되던 시기이다. 그런데 여기서 유통된 지식과 정보들은 전통적인 문집에 수용하기 힘든 여러 가지 내용과 형식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그 지식과 정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말하자면 『임원경제지』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안고 찬술된 서책이며, 서유구의 삶과 학문이 도달한 일종의 귀결처였다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러한 생각에서 서유구의 박학과 목록학이 『임원경제지』의 유서적 특징과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다. 유서란 결국 지식의 체계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우선 축적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박학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박학이란 단순히 ‘많은 것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시대나 분야 혹는 특정 서적이 담지하고 있는 지식의 총량에 대한 이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 이해된 지식의 총량들이 목록화 과정을 거쳐 체계화되는 것이다. 『임원경제지』의 경우 이 과정에서 도표를 활용하거나, 상호참조의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체계화의 다음 단계는 검색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임원경제지』는 특히 「仁濟志」에서 색인 기능을 마련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임원경제지』는 단순 박학자의 소행이 아니라, 지식의 분류에 대한 목록학적 안목을 기반으로 하여, 지식의 검색 기능까지를 감안한 매우 완정한 형태의 유서가 아닌가 생각된다.

조선 후기 類書의 전통과 『松南雜識』

『松南雜識』는 1855년(哲宗 6), 趙在三(1808~1866)에 의해 편찬된 백과전서적 성격의 類書이다. 이 책은 총 14권 7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권마다 5~6부류로 나누어져 33類를 이루고, 각 부류의 세부항목은 총 4,432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항목들은 천문・세시・지리・관혼상제・과거・농경・의식주・음악・종교・사상・언어・동식물 등의 내용을 담고 있어 인문학과 관련된 지식뿐만 아니라 민속학이나 종교학, 천문・지리학에서 농학・병학・한의학・복식사・음악사・과학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18세기 이후 조선의 학계는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여 이념적 학술의 범주에서 벗어나 실체를 드러낸 실증적 학문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학문적인 방법으로 名物度數之學을 표방한 많은 지식인들이 博學과 考證學을 전범으로 삼아 박물학적인 학문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송남잡지』의 학문적 연원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유서라는 형태의 저술이 오래전부터 그 명맥을 유지하며 이어져왔고, 고려 이래 끊임없이 전래된 중국 유서의 영향하에 조선에서는 필기적 특성을 담아낸 고유한 유서문화를 형성해왔다. 『송남잡지』는 중국 유서의 체계적 형식을 유지하고, 전대의 필기류 전통을 계승하면서 조선의 박물학적 지식을 총괄하고 있는 저작이라 할 수 있다. 『송남잡지』는 지식을 활용하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藝文類聚(예문유취)』와 같은 중국 유서의 전형적인 방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국내외의 문헌 자료를 다각적으로 선별하여 폭넓은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조선 후기 유서의 지형도 안에서 그 위상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교육서 송남잡지: 분류, 어원, ‘아하! 순간’, 정체성

참고서 송남잡지

박(물)학

『오주서종박물고변』저술의 성격과 이규경의 박물관(博物觀)

이 논문에서는 이규경의 저술 중 과학기술서로 분류되는 『오주서종박물고변』의 성격과 책이 집필되었던 시대적 배경을 고찰하여 『오주서종박물고변』의 사전적 전문저술이라는 특징을 확인해보려 한다. 이규경은 『오주서종박물고변』을 쓰면서 자기 학문의 핵심 방법으로 주장했던 박물의 의의를 잘 정립했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이규경의 저술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책은 백과전서식 저술인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이 책은 다루는 영역이 매우 넓고, 경험적 지식을 넘어 자신의 상상과 주관적 견해가 덧붙여진 부분이 많아, 전문 지식서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반해 『오주서종박물고변』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객관적 측면에서 정확성과 전문성이 높고 당 시대에서 실제 생활과 관련한 실용서로서 가치가 높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부분들을 살펴보면 이규경의 박물관(博物觀)이 더욱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오규 소라이의 교육구상 -박학, 모방과 습숙의 교육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1666∼1728)의 학문과 교육론은 주희(朱喜)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斎)의 리학적(理學的) 사고에 대한 대항과 이상적인 것을 고(古)에서 찾으려는 고학(古學)에서 비롯된다. 소라이는『政談』과 <學寮了簡書>에서 안사이의 강석주의(講釈主義)의 비판에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는데 이것은 리학의 극복과 고학의 지향이 강석주의 비판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소라이의 학습론은 고문사(古文辞)를 체득하기 위한 방대한 독서에서 시작된다. 독서를 위한 회독(會読)과 간서(看書)가 중요한 학습방법으로 기능하고 있다. 한편 소라이의 교육론은 후천적인 학습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교육으로 인성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논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 때의 변화는 이미 <육경(六経)>에 확정되어 있는 성인(聖人)의 도(道)로의 습숙(習熟)을 통해 가능해진다. 모방과 습숙이 교육의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방과 습숙에 의한 지의 체득 방법은 어떤 정해진 틀에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가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정해진 틀이라는 것을 확장한다면 정치권력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소라이의 교육론은 정치권력에 좌우될 수 있는 ‘인간’의 교육에 시선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The 19th Century Korean Novel: An Exhibition Center of Knowledge

이 논문은 19세기 한국 고소설과 ‘지식’의 관련성에 초점을 두고 연구된 것이다. 18,19세기가 되면 淸과의 교류로 서적이 많이 유입되고, 그를 토대로 지식과 박학에 대한 열망이 생겨난다. 지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식을 담은 서적이 간행되면서 소설에도 지식이 수용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지식을 수용한 소설을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먼저 <삼한습유>와 <옥선몽>을 들 수 있다. 이들은 한문소설인데, 여기에는 당대의 책에 담겨 있거나 지식인들이 갖고 있었던 거의 모든 지식들이 수용되어 있다. 이러한 지식 소설이 창작된 것은 지식을 과시하고 지식을 습득하려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었다. 지식은 한글소설에도 수용되었다. 그러한 작품으로는 <명행정의록>과 <삼강명행록>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궁중여성이나 양반여성들이 향유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언해 한시, 지리서, 각종 생활백과 등이 대량으로 삽입되어 있어서, 여성 독자들에게 폭넓은 지식과 교양을 제공할 수 있었다. 지식에 대한 관심이 확산됨에 따라 <두껍전>이나 <춘향전>처럼 한글을 깨우친 일반 대중들이 향유했던 소설에도 지식이 수용되었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관심이 사회 전 계층에 확산되었음을 의미한다. 지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지식을 담은 소설이 창작 유통된 것은 지식의 ‘힘’에 대한 믿음이 19세기 사회에서 하나의 사회적 이념으로 존재했음을 말해준다.

19세기 장편 한문소설과 청말 재학소설의 지식 제시 방식 - <옥선몽(玉仙夢)>과 <경화연(鏡花緣)> 비교를 중심으로 -

본고는 <옥선몽>과 <경화연>의 지식 현시 방식과 그것이 지닌 의미를 살폈다. 두 작품은 19세기를 전후한 시기 지식인에 의해 창작된 작품이다. 이들 작품은 소설사적 배경, 창작 시기, 작품 구조, 박학주의적 성향 등에 있어서 유사한 면모를 많이 지니고 있다. 두 작품의 지식 현시 방식 대비를 통해 19세기 한․중 양국의 소설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볼 수 있다. 지식 현시 방식은 현시의 주체와 그 내용의 측면에서 살폈다. <옥선몽>과 <경화연>의 박학주의적 성향과 작가의 의도적 지식 노정이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지식 현시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옥선몽>은 일대기 구조라는 유기적 전개 과정에 따라 실제 현실과 밀접하게 관련된 지식을 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에 <경화연>은 액자구조 안에 나열적 삽화의 제시를 통하여 현실과 일정한 거리 확보하고 이를 박학과 풍자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옥선몽>과 <경화연>의 지식 현시 방식이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작가가 현실과 어떤 관계 하에 있는가에 따른 것이다. <옥선몽>의 저자 탕옹은 이미 구축된 질서의 세계인 현실에 참여하여 지배층으로 자리하고자 했던 반면에 이여진은 현실에 대해 지향과 비판이라는 모순된 태도를 지녔기 때문으로 보인다. 즉 <옥선몽>의 작가 탕옹이 마주한 현실과 이여진이 마주한 현실의 무게와 질곡에 대한 인식이 각기 달랐음을 의미한다. <옥선몽>과 <경화연>은 동일한 문화권 내부에서 유사한 문학적 특징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이 산생된 구체적 문학 환경과 작가 의식의 차이는 지식 현시 방식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한중 소설이 거시적 측면에서 유형적 공통점을 보이면서도 미시적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까닭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된 제반 측면에 대한 연구가 좀 더 진행된다면, 한중 소설사의 전개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동아시아의 백과전서파 실학과 황윤석

유서는 지식 전체를 일정한 부문체계에 따라 재편해 독자에게 제시하는 저술형식이다. 17세기 이후 동아시아 삼국에서는 의리와 이념에 치중된 성리학에 대한 반성과 함께 현실을 실용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실학적 풍조가 일어나면서 유서의 편찬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유서와 비슷한 형태의 저술을 서양에서는 백과전서라고 부른다.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유사한 형식과 내용을 지니고 있다. 양자의 공통점은 기존의 지식의 위계성에서 탈피하거나 해체를 지향한 점이다. 유서 편찬 자체가 지식의 집중과 분류를 통해 대중에게 쉽게 보급하고자 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상업적 출판의 발전과 함께 불특정다수의 독자를 위해 지식의 평준화를 지향하였고, 독자의 요구에 부응해 나갔다.
18세기 조선 사상계의 주요변화상은 도덕담론인 주자성리학에서 지식담론인 고증학․박학으로 변화해 간 것이다. 후자의 지식인들은 경학보다 박학을 중시하였고, 도보다는 기예(지식과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성리와 의리보다는 명물도수와 격물치지를 더 중시하였고, 연구방법에서는 고증과 실측을 강조하였다. 백과전서파라고 불리는 이들은 거대한 학술사적 전환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주자학일변도의 풍토에서 기존의 학문적 위계를 일부 해체하여 자연과학의 독자적 가치를 긍정하였고, 서학의 수용을 통해 독자적인 지식체계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현실에 대한 개혁을 도모하였던 실학파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가 백과전서파적인 성향이다. 이것은 그들의 실용적인 학문적 지향과 직결될 뿐만 아니라 박학성 그 자체로서 이미 그것을 경시하였던 당시의 정통주의적 학문 경향에 대한 적극적 대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즉 박학에는 단순한 지식의 집적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사상운동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18세기 경화사족 金用謙의 삶과 교유

嘐嘐齋 金用謙(1702-1789)은 그리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의 문제적 지식인들은 그와 막역하게 교유하였고, 그와의 관계를 특별하게 기억하고기록으로 남겼다. 이 글은 18세기 후반의 청년들이 왜 김용겸의 주변에 모여 들었는가 하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그의 삶과 교유관계를 추적하였다. 김용겸은 장동김문이라는 노론 세가에서 출생하여 누대에 걸쳐 만들어진 노론 낙론계의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런 배경을 둔 김용겸은 정통적인 도학자, 예학자의 면모를 갖춘 노론 낙론계 학자였다. 그러나 김용겸은 당시의 학풍을‘假道學’이라고 규정하고 古禮에 천착하면서 博學을 통해 ‘眞道學’을 추구하였다. 박학은도학을 위한 학문적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도학보다는 박학이라는 방법론이 그의 학문적 위상을 대변하게 되었다.
김용겸이 청년들의 이목을 끈 것도 이 지점이다. 그는 기성의 학계에 피로감을 느낀청년들과 문제 인식을 공유하고 長幼와 貴賤을 가리지 않는 개방적인 태도로 젊은이들과 학문적으로 교유하였다. 이를 통해 청년들과 김용겸의 교유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김용겸과 청년들의 교유에는 전승해야 할 학문적인 의제도 없었고, 그 관계를 사제관계로 규정하지도 않았다. 나아가 김용겸이 그 중심에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서로의관심사에 따라 어울리며 서로를 통해 지식과 정보를 얻고 스스로의 인식을 확장해 갔을 뿐이다. 박학을 매개로 하는 이 같은 학문적 네트워크의 존재를 18세기 후반 한양지식인계의 주요한 속성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원과 이덕무의 文 교환에 대하여 - 박지원의『산해경』 東荒經 補經과 이덕무의 注에 나타난 지식론의 문제와 훈고학의 해학적 전용 방식, 그리고 척독 교환의 인간학적 의의

李德懋가 26세(1969년)때 『耳目口心書』6편을 이룬 뒤 朴趾源이 그 책을 빌려 다 열람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해학적 내용의 尺牘을 교환하였다. 그리고 박지원은 『산해경』東荒經 補經을 짓고 이덕무는 주(注)를 지었다. 『산해경』보경과 주는 18세기 지식론의 한 단면을 드러내주는 戱文으로, 한문산문에 訓學의 방법을 轉用하는 전통을 형성하였다. 또한 그들의 척독 교환은 知人들 사이의 흉허물없는 對面인 晤言을 보완하고 촉발하는 계기로서 기능하였다.이덕무는 ‘귀로 들음(耳聞)’을 중시하였는데, 그것은 ‘道問學’과 ‘尊德性’의 두 공부 가운데 ‘도문학’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이덕무의 識解博聞强記를 일정하게 평가한 것이나, 그 자신도 객관사실의 해부적 묘사와 실증적 분석에 중점을 두었던 것도 같은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희문을 통하여, 그들이 인간과 역사(현실)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유력한 방법으로 博學의 가치를 재평가한 지향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산해경』등 자부의 서적들을 널리 읽음으로서 사유세계를 확장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