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개화기 과목별 교사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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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학교 일람

성경

  • 전덕기: 상동청년학원
  • [내한 선교사]

유치원

교육학

영어

  • 개화기의 영어교육
  • 영어달인
  • 윤치호 영문일기
  • 오중현(중국), 당소위(중국): 동문학
  • 고영철(조선): 동문학
  • 김란사: [http://www.jamill.kr/news/articleView.html?idxno=55442 광무 10년인 1906년 마침내 10여년의 미국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남대문 상동감리교회에서 스크랜튼(Mary F. Scranton) 대부인이 설립한 영어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이 학교는 불우한 형편의 여성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기혼여성들을 위해 설립한 학교였다. 이 학교는 이후 감리교협성여자신학교에서 지금의 감리교신학대학이 됐다. 1907년부터 그는 이화학당(梨花學堂)의 총교사(현재의 교감에 해당됨)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엄격히 지도하였다. 1910년 9월 이화학당(梨花學堂)안에 대학과가 신설되면서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이 실시되었을 때 김란사는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교수로 취임하여 4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편 부인성서강습, 교회활동, 어머니 육아교실 운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앨버슨과 함께 학생들을 지도하여 거리와 농촌으로 나가 전도하는 활동도 열심히 하였다. 1911년부터는 매일학교, 애오개여학교, 종로여학교, 동대문여학교, 동막여학교, 서강여학교, 왕십리여학교, 용머리여학교, 한강여학교에서도 지도교사를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신흥우, 안창호, 김춘기, 고종, 엄귀비, 손정도, 현순, 최창식, 미국 성공회 책임자 베커,
  • 초당영어학교지(草堂英語學校趾)
건립일자	1906년 설립, 1909년 폐교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104(강릉고교 내)
건립기관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
  • 윤정원: 1907년 3월 윤정원은 10년 동안의 일본 유학을 마치고 “국내 최초의 여자 일본 유학생”( 황성신문 1907년 3월 13일자)으로서 귀국했다. 1908년 칙령 22호로 최초의 관립 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되면서 윤정원은 1909년 3월 4일자로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로 서임(敍任)됐다.

국어

  • 주시경: 이화학당·흥화학교·기호학교·융희학교·중앙학교·휘문의숙·배재학당 등에서 강의. 대한국어문법
  • 남궁 억: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배화학당(培花學堂)의 한글, 역사, 가정 교사

국사

  • 남궁 억: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배화학당(培花學堂)의 한글, 역사, 가정 교사

세계사

지리

  • 유옥겸
  • 문일평: 평양의 대성학교, 의주의 양실학교, 서울의 경신학교, 박달학원, 부인 김씨를 정신여학교로 보내 신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 경신학교 교장이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학감 김규식과 교류했고 최남선이 설립한 광문회와 상동교회 내의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최남선은 상동청년회에서 역사를 가르쳤고 문일평은 지리를 가르쳤다. 아오야마학원 중학부에 창강생으로 입학했다. 미사노리 학교에 입학했는데 이 곳에서 홍명희와 이광수 등을 만났다. 이후 일본어가 익숙해진 문일평은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편입했으며 서북 지방 출신들이 주도한 '태극학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1912년 가을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에 진학하여 1학기 동안 공부하면서 김성수, 안재홍, 송진우 등과 교유함. 문일평은 상하이와 난징에서 조소앙, 홍명희, 정인보 등과 함께 기숙하면서 중국신문사 대공화보(大共和報)에서 사원으로 근무하는 동시에 신규식이 설립한 동제사(同濟社)라는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다.문일평은 상하이에서 중국 혁명당 지도자 및 청년 외교관들과 교유 관계를 맺었고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홍명희 등과 교류함.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문일평은 3월 8일 오후 안동교회의 김백원(金百源) 목사를 만나 독립 문제에 관해 논의한 뒤 기미독립선언서의 후속으로서 또 하나의 문서를 작성하기로 했다. 3월 11일 오전 작성된 문서를 김백원에게 보낸 문일평은 3월 12일 오전 서린동의 한 중국 음식점에서 김백원 목사, 승동교회의 차상진(車相晋) 목사, 조형균(趙衡均), 문성호(文成鎬), 김극선, 백관형(白觀亨) 등과 함께 논의했다. 3월 23일 오후 문일평은 '김백원과 차상진 등 12인'의 애원서(哀願書)를 발표했다. 서울 중등학교, 개성 송도중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등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 역사 교사 생활을 청산함.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1932년 8월까지 임시 교사로 근무함.

문일평은 일본 식민학자들이 설립한 청구학회에 참여했다가 1932년 탈퇴했고 1934년 5월 이병도 등이 설립한 식민사관 성향의 진단학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그가 왜 이런 행보를 보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현재까지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쟁거리로 거론되고 있다.-->이만규와 비슷. 현채와도 비슷. 반일에서 일본쪽으로 기운 사람들.

세계지리

  • 주시경은 1893년 배재학당의 강사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 산술과 만국지지(역사, 지리)를 배웠다.

수학

  • 주시경은 1893년 배재학당의 강사 박세양과 정인덕을 찾아 산술과 만국지지(역사, 지리)를 배웠다.
  • 헐버트는 1892년 육영공원 교수로 직접 기하학, 천문학, 윤리학, 지질학
  • 이상설: 1886-1887년경에 <수리 數理>라는 책을 썼다. >성균관장으로 임명된 이상설은 1896년 성균관의 교과과정에 수학과 과학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하였으며, 학부 편집국장 이규환의 부탁으로 정부가 편찬하는 교과서가 된 수학책을 발간하였다. 1900년 7월 20일 발간한 <산술신서> 상 1권, 2권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근대수학책이며 동시에 한성사범학교에서 예비교사 교육용으로 쓰였듯이 순환소수, 순열 등을 포함하는 책으로 이후로 나오는 많은 초등학교 입문 수준의 책과 차별화된 조선어 수학책으로 볼 수 있다.


과학

박물

경제

체육

가정

  • 남궁 억: 1910년(융희 4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이 체결되자 배화학당(培花學堂)의 한글, 역사, 가정 교사

미술

  • 고희동: 중앙고등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보성학교, 중동학교의 교원으로서 유화를 가르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때 가르친 제자로는 소설가이자 시인인 이상, 화가 도상봉, 간송 전형필이 있었다. 특히 간송 전형필을 위창 오세창에게 소개하면서 간송이 문화재 수집의 길에 접어드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도쿄미술학교 유학생이었던 고희동과 이한복은 각각 1910년대 후반과 1920년대에 휘문고보에서 도화교사로 있었다. 그밖에도 화가 이마동, 이영일, 서진달, 서동진 등도 도화교사로 활동하며 근대적인 미술수업을 하였다. 고영철(高永喆)의 셋째 아들, 1899년 13세의 나이로 관립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다. 1904년 궁내부 주사, 예식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대한제국의 궁내 프랑스어 통역, 문서 번역을 담당하였다.


  • 안중식: 제자=이상범,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최우석, 박승무. 장승업의 화풍을 배웠고 서화미술회강습소를 개설
  • 소림 조석진
  • 차향 정대유
  • 위사 강필주
  • 청운 강진희
  • 소호 김응원
  • 관재 이도영
  • 근대서화
  • 이당 김은호: 송병준의 초상을 그린것이 인연이 되어 덕수궁의 고종황제 어진을 그리게 되었다. 고희동의 1918년 서화협회에 함께 함. 독립운동 서대문 형무소에서 최남선, 한용운 만남.
  • 청전 이상범
  • 심산 노수현
  • 묵노 이용우
  • 정재 최우석
  • 정재 오일영
  • 무호 이한복
  • 묵로 이용우
  • 이도영 『도화임본』의 원화를 그린 이도영이 1906년 휘문의숙에서, 1910년대에는 보성중학교에서 도화교사로 활동하였다.
  • 이마동
  • 이영일
  • 서진달
  • 서동진
  • 노수원
  • 변관식
  • 동연사
  • 1907년 7월16일 '황성신문'에 교육서화관 학생모집 광고가 났다. 교육서화관은 서화 뿐만 아니라 사진·음악 등을 가르치는 종합 예술교육기관을 표방했으며, 평안도·함경도 출신 지식인들의 애국계몽단체인 서우학회의 부설기구였다. 조선왕실의 도화서(圖畵署)가 폐지된 이후 설립된 최초의 미술교육기관이기도 했다.
  • 근대 한국미술의 시대별 주요작가
  • 일제강점기 후반기는 당대 ‘역사화가’로 불리워졌던 이여성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유년필독』의 역사인물화는, 안중식과 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제작된 것이라 판단해볼 수 있었다. 『유년필독』의 역사인물화는 실력양성과 국권수호의 명료한 목적의식과 붓과 펜의 혼용과 같은 東西ㆍ新舊양식의 절충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도서기ㆍ구본신참의 구호로 집약되는 광무연간의 시대 이념과 맥락을 같이하는 개화기 양식의 대표적 예임을 알 수 있었다. 한국 근대 역사인물화 박계리 미술사학연구회미술사학보美術史學報 第26輯2006.06

음악

  • 장악원-교방사(1900)-장악과(1907)-장악부(1908)-이왕직아악대(1911)-이왕직아악부(1913)-구왕궁아악부(1946)-국립국악원(1951)
  • 1909년 설립된 민간 전문 음악 교육 기관이었던 조양구락부: 조양구락부의 교과목이 성악부분의 가곡·가사와 기악부분의 거문고·가야금·단소·양금 등의 풍류합주를 위한 악기들이 포함
  • 정악유지회(正樂維持會)는 조양구락부의 후원회
  • 조선정악연습소의 가곡·가사를 가르쳤던 가악 교사였던 하순일과 학감 및 양금교사, 그리고 분교실인 다동조합인 기생조합의 가곡·가사 교사였던 하규일, 그리고 가야금 교사였던 명완벽 모두는 17세기 이래 중인들의 시회의 전통을 둔 가단(歌壇)과 관계가 있는 장우벽(張友壁, 1730~1809)의 계보로 이어진 사람들이다.
  • 담헌 홍대용(湛軒 洪大溶)이 자기 집에서 판을 벌려 운영하였던 '유춘오 악회'를 들 수 있다. 이 악회는 홍대용과 같은 양반 신분의 동료 뿐만이 아니라 중인 출신이었던 김억(金檍, 당대 거문고와 양금의 명인), 천민 출신이었던 김성기(金聖器, 당대 거문고 명인)와 보안(普安, 당대 생황과 양금의 명인) 등이 함께 판을 벌였던 것이다. 이러한 악회에 악공들이 함께 참여하여 풍부해진 정악 기악곡은 근대까지 그 맥이 이어져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영산회상 등의 정악기악곡을 가르치게 된다.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가야금교사로 활동하였던 명완벽은 시회와 기회의 전통을 이어 가객으로 계보를 형성한 장우벽 계보에서 박효관의 뒤를 이은 인물로, 그 계보의 다른 인물들이 모두 중인 계층의 풍류객집단이었던 점과는 달리 전문 악생 출신이다.

윤리

  • 헐버트는 1892년 육영공원 교수로 직접 기하학, 천문학, 윤리학, 지질학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실학

측량

  • 교사진은 일본의 동경공수학교 졸업자인 김택길과 김두섭, 일본의 동경참모본부에서 측량학을 공부한 이주환 등: 수진측량학교

경제

항해술

  • 이운(利運)학교


행정

  • 최광옥: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종교부 간사. 태극학회·서북학회 등 신학문에 열의를 가진 청년들의 모임에 참여하였고, 신민회(新民會)에 들어가 안창호(安昌浩)·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이승훈(李昇薰)·김구(金九) 등과 함께 국권수호운동에도 힘을 썼다.1907년에는 안악면학회(安岳勉學會)라는 장학기구를 조직, 첫 사업으로 일본어책을 번역한 『교육학』(1907)과 자신의 저서인 『대한문전(大韓文典)』을 출판하였다. 평안북도 의주의 양실학교(養實學校)에서 잠시 교원 및 교장으로 봉직하였고, 1909년에는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대성학교(大成學校)의 제3대교장으로 취임.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에 관여하기도 하고, 배천군수(白川郡守) 전봉훈이 설립한 사범강습소를 맡아 후진양성에 힘쓰기도 하였다.
  • 여준: 신흥무관학교 교장
  • 여병현: 서울 YMCA(1903.10.28),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rancis W. Schofield)
  • 덕원부사 정현석(鄭顯奭): 원산학사, 『고종실록』권20, 20년 10월 14일(신유), 1883년 8월에 학교 설립을 정부에 보고하여 정식으로 승인
  • 이용익: 보성학교(현재의 고려대)(1905)
  • 안창호: 대성학교를(1907-1912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폐교)
  • 이승훈: 강명의숙(講明義塾), 오산학교(지금의 오산중, 고등학교)
  • 차미리사: 배화여학교 교사 및 기숙사 사감으로 재직, 조선여자교육협회(1920), 순회여자강연단(1921), 종교교회, 안창호, 양주삼, 상하이,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 3.1운동 비밀연락책,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덕성학원),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 상동교회에서 세례.
  • 민영환: 흥화학교(1898년 11월 5일-1911), 심상과(尋常科)·특별과·양지과(量地科)로 나누고, 영어·일어·측량술을 가르쳤다. 설립 초기 주·야학 과정을 개설하고, 입학시험을 통해 국·한문 해득자(解得者) 위주로 학생을 선발하였다. 초등교육보다는 중등교육을 목적으로 영어, 산술, 지지, 역사, 작문, 토론, 체조 등을 교육하였다.
  • 안창호: (1899) 평안남도 강서(江西)에 세운 초등과정의 학교. (1907)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점진’적으로 ‘대성’하는 인재를 양성한다는 뜻을 표현하였다. 안창호_미주한인사이트
  • 남궁 억: 현산학교(1907.7),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1912~), 모곡학교(1919.9)
  • 김규식: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초대간사 겸 청년회 학관 교사, YMCA 간사, 교사가 됐다. 그 뒤 청년회학관 학감
  • 김윤식: 영선사 담당. 동문학 책임.
  • 고영철: 동문사 주사.
  • 어윤중(魚允中): 한성여성고등학교 초대 교장.
  • 이완용: 서화미술회 1911년 이완용을 교장
  • 핼리팩스(영국): 육영공원 교감
  • 허치슨(Hutchison)(영국): 육영공원 인계(1894) 관립한성외국어학교가 됨.
  • 메스트르(Maistre) 신부: 배론신학당(1855),(제천), 1861년에 성요셉 신학교라는 명칭을 사용, 신부(천주교 사제)양성을 목적, 한문, 라틴어, 수사학 등의 언어, 역사, 지리, 동식물학, 의학, 천주교 교리를 포함한 철학과 신학, 성가를 위한 음악을 가르쳤다. 1866년에 병인박해로 교장신부가 체포되어 순교됨에 따라 폐쇄되었다. 그 이후로 1887년에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었고 이 학교는 지금의 가톨릭대 신학부와 성신고등학교이다.
  • 아펜젤러(미국), (북감리교): 배재학당(1885)(지금의 배재중, 고, 대학)을 설립, 한문, 영어, 쉐필드의 만국역사 등을 가르쳤고, 본과는 영어과, 한문과, 지리과(지금의 대학 학과).
  • 스크랜튼(Scranton)(미국): 이화학당(1886)(지금의 이화여대), 언문의 읽기, 쓰기, 편지쓰기, 영어와 재봉, 침공, 수예 가르쳤다.
  • 언더우드: 언더우드학당(=경신학교)(지금의 경신고)
  • 알렌: 광혜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 애니 엘러스 벙커(Dr. Annie Ellers Bunker)(미국 북장로회): 1887 서울 정동(貞洞), 1895년 현재의 학교가 있는 연지동으로 교사(校舍)를 옮기고 연동여학교(蓮洞女學校)라 칭하였다. 1903년 연동여자중학교라 개칭하였다가, 1909년 구한국(舊韓國) 학부(學部)로부터 인가를 받아 사립정신여학교로 또 다시 개칭하였다. 가장 영향력이 컸던 교사로는 신(辛)마리아·김마리아·딘(Miss lillian Dean)·겐소(Mrs, Mable Genso)·김원근(金瑗根) 등이다.
  • 길맹세(吉孟世)(프랑스인): (1897), 우무학당(郵務學堂) 기술 주임
  • 밀윤사(密倫士)(덴마크): (1897), 전무학당(電務學堂) 기술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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