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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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

고려가 원나라를 사대하는 모습.

대동운부군옥

충렬왕이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따오기 고기를 연달아 바쳤다.
고려 때 원나라에 가서 공물을 바치는데 사사로이 금이나 은을 가지고 가는 것을 금하였다. 신우 때에 위견이 금령을 위반하여 머리를 베어 조리돌렸다.
충렬왕 때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미녀를 바치게 하자 전국에 혼인을 금하는 조칙을 내렸다.
충렬왕이 황서를 원나라에 보내어 '금으로 그린 자기'를 바쳤다.
원나라를 섬긴 이래로부터 태평한 날이 오래 계속되어 '문신들이 느긋하고 무신들은 놀며 지냅니다'. 대궐을 지킬 사람이 없어, 호군 등의 관직을 설치하여 대권을 지키는 임무를 대신하고 있으니 조종 때의 팔위 제도는 모두 헛되이 설치한 것이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요서를 침략하니 수나라의 황제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였다. 왕 고원이 두려워 표를 올려 사죄하며 '요동의 분토신 원'이라 일컬었다.
충렬왕이 원나라를 섬긴 이래로 국사가 창졸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많아서 첨의와 밀직이 매양 도평의사에 모여서 의논하였는데, 상의라는 이름이 또한 만들어져 국정에 참여한 자가 6,70명이 되었다.
충렬왕이 원나라 황제를 배알하니 황제가 고려가요를 부르게 하였는데 이에 왕이 쌍연곡을 연주하였다.
김방경이 원나라 진봉사가 되었다. 출국하면서 가져간 금은 등 국신은 혹 상대편 관원이 궐직이 되어 받을 사람이 없으면, 사신이 마음대로 쓰게 되어 있다. 그러나 공은 물품을 가지고 돌아와 국신고에 반납하였다.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사신을 보내 연이어 환관을 바쳤다.
충렬왕이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 새매를 바치니 황제가 그것을 받았다.
그 뒤에도 연이어 사신을 보내 새매를 바쳤다.

성호사설

이제현(李齊賢)은, “고종이 큰 나라를 대항하려는 어림없는 시도를 해 보았으나 마침내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끝내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단독 결정을 내려 마침내 태자인 전(倎)을 시켜 표문[表]을 받들고 몽고에 가게 했으며, 국내의 재산을 통틀어서 예물에 충당시켰다.
이제현(李齊賢)은, “고종이 큰 나라를 대항하려는 어림없는 시도를 해 보았으나 마침내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고, 말년에 이르러서는 끝내 대항할 수 없음을 알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단독 결정을 내려 마침내 태자인 전(倎)을 시켜 표문[表]을 받들고 몽고에 가게 했으며, 국내의 재산을 통틀어서 예물에 충당시켰다.
우리나라는 고려 때로부터 요(遼)ㆍ금(金)ㆍ원(元) 3대국만 차례로 섬기면서 거의 보존하지 못할 형편이었다.
이 일은 원 세조(元世祖)에게 조짐(兆朕)이 나타났고 고려 충정왕(忠定王)에게서 아얼(芽孼 재앙의 싹)이 돋은 것이었다.
  짐도 본래 원(元) 나라 백성으로서 천하가 그처럼 혼란할 줄은 실상 생각조차 않았던 것이다.
지금 신민(臣民)들이 혹 짐의 뜻을 모를까 염려하여 이 조칙(詔勅)을 선포한다.
” 하였다 짐은 반드시 원 나라 자손을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여러 왕들을 섬으로 보낸다.
공민왕 18년(1369)에 원 나라의 재인(梓人)이었던 원세(元世) 등을 제주(濟州)로 불러들여서 공주(公主)의 영전(影殿)을 짓도록 했던 때문이었다.
원세가 도당(都堂)에서, “원 나라 임금은 토목(土木) 역사 일으키기를 좋아하다가 민심을 잃고는 끝내 사해(四海)를 보전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던 것이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는 명 나라 황제가 원 나라 양왕(梁王)의 자손 애안첩목아(愛顔帖木兒) 등을 모두 탐라에 안치(安置)시켰었다.
여기에 의거하면 그들을 모두 탐라에 안치시킨 것은 실상 원 나라 임금의 뜻에 따라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는 성심껏 원 나라를 섬긴 관계로 여러 대를 지나도록 사랑을 받아 오다가, 그들이 하루아침에 멸망되어 도망쳤다는 소문을 듣고 벌써 명 나라와 통사(通使)할 것을 의논한 다음, 갑자기 지정(至正 원 순제(元順帝)의 연호. 1341~1367)이란 원 나라 연호를 못 쓰도록 하였다.
세조(世祖)가 나라를 세우기 전에 남쪽으로 송(宋) 나라를 치면서 양양(襄陽)에서 군사를 훈련시킬 때는 그의 아우 아리 발가(阿里孛哥)가 사막 북쪽에서 변을 일으키자 제후(諸侯)들은 모두 걱정하고 의심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때 원종(元宗)은 세자(世子)가 되어 원(元) 나라에 가서 항복을 자청하였다.
바로 그때에 동진(東眞)이 공갈하면서도 감히 움직이지를 못했고, 일본이 늘 엿보면서도 감히 침입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원 나라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이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이 원 나라 사람에게 준 편지에 상고하니, “고종(高宗)은 충헌왕(忠憲王), 원종(元宗)은 충경왕(忠敬王)이라 이르고, 묘호를 일컫지 않은 것은 참례(僭禮)의 혐의를 염려한 때문이다.
” 하였다 추측컨대, 이는 충렬왕 이후부터는 공주와 원 나라 사람이 늘 나라 안에 머물러 있어서 감히 묘호를 쓸 수 없었던 것인 듯하나, 마땅히 다시 상고해 보아야겠다.
그후에 한 조서(詔書)에도, “짐(朕)도 본래 원 나라 백성이다.
천하의 혼란은 실상 짐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 하였으니, 그 말이 겸손하고 그 의리도 바르다.
원 나라 사람은 비록 중국 퐁속과 더불어 구별이 있다 할지라도 이미 1백 년 동안 신하로 복종하여 군신(君臣)의 분의가 정해졌고 은우(恩遇)도 두루 흡족합니다.
만약 화이(華夷)가 일통(一統)으로 되고 사예(四裔)가 모두 복종[賓服]한다면 신도 역시, ‘잇달아 주(周) 나라의 훌륭한 덕을 보려고 한다[紹周見休].’는 말과 같이 원 나라를 섬기던 것으로써 폐하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면 명 황제도 반드시 의리를 지킨다고 생각하여 우리나라에 갑자기 쳐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원(元) 나라를 성심껏 섬긴 지 이미 오래되었다.
공양왕(恭讓王) 3년(1391) 겨울에 이첨(李詹)이 왕에게 여쭈기를, “원 나라 말기에 순제가 북쪽 상도(上都)로 파천(播遷)했을 때 달려가 문안하기를 오직 부지런히 했습니다.
이는 신등(臣等)이 친히 목도한 것인데, 이렇게 신절(臣節)을 굳이 지킨 것은 딴 나라가 따르지 못했습니다.
”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헛말이겠는가? 급기야 충렬왕이 왕위를 계승하자 원 나라의 총서(寵婿)가 되어 말만 하면 들어주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또 왜국을 정벌할 것을 꾀했는데 일은 비록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중세(中世) 이상에는 국가가 왜에 대한 근심이 없었던 것은 이를 힘입은 때문이었다.

송남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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