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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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

고려를 배신한 자, 고려를 위해한 자.

대동운부군옥

유청신은 본래 '고이부곡' 사람인데 눈치 빠르게 잘 변신하였다.
원나라에 들어가 왕을 배반하고 심왕 고에게 붙었다.
그 당시 "묘부곡 사람이 조정에 벼슬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예언이 나돌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묘'를 고이(고양이)라고 한다.
채하중이 조적과 죄를 지어 원나라에 도망갔다.
그곳에서 심왕을 아부하여 섬기면서 고려국의 허물을 엿보아 왕위 찬탈을 도모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이추가 꾸며댄 말을 믿고서 사신을 보내 본국 고려에도 없는 금실을 요구하였다.
이후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원나라에 들어가 멋대로 금칠이 본국에서 난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와서 급히 이것을 구하였다.
왕이 먼저 열 항아리를 보내었으나, 본국에서는 나지 않는 물건이었다.
유주는 자량의 손자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본국을 배반하고 원나라 황제에게 말하여 고려로 하여금 일본을 정벌하게 했다.
김흔이 그것을 꾸짖으니 유주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 왕은 바로 진흙으로 만든 부처와 같을 따름이다"라고 했다.
원종 때 이추가 원나라에 도망가 거짓으로 황제에게 아뢰기를 "등석이 고려국에서 생산됩니다"라 하였다.
이에 황제가 그 말을 믿고 사신을 보내어 와 요구했다.
최원이 왕을 원망하여 자기의 형 최유와 함께 원나라로 도망가서 모국 고려를 혼란에 빠뜨릴 것을 도모하였는데,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백안과 고용보는 모두 고려의 환관으로 원나라 조정에 총애를 얻어서 충선왕을 무고로 참소하여 토번에 귀양 보내고 충혜왕을 몰래 참소하여 악양의 화를 이루었다.
김의가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이고 북쪽으로 원나라에 달아났다.
뒤에 권근이 명나라에 사신을 가다가 의진주에서 김의를 만났다.
그가 스스로 "명나라 지휘 벼슬이 되어서 남만을 정벌하여 승리하고 돌아왔다"고 말하였다.
이때 김의의 어머니는 살아있었는데 그가 어머니의 안부를 물어보기는 하였지만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권한공은 충숙왕을 원망하여 도당에 글을 올려 심왕 고를 세우려고 하였다.
민종유가 탄식해서 말하기를 "신하 된 사람은 임금을 위해서 숨겨주는 것이 정직이다.
내 어찌 차마 우리 임금을 보고 짖겠는가?"라고 하고는 끝내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 심왕의 무리들이 국가의 일을 조목 조목 적어 장차 원나라에 호소하려고 했을 때 최성지는 '서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 주동자가 녹사로 하여금 서명할 것을 요청하자 최성지가 말하기를 "나는 재상의 자리만 채운 사람이지만 녹사를 시켜 나를 협박하려느냐?" 하니 뭇 사람들이 모두 기를 잃었다.
최원이 왕을 원망하여 불손한 말을 하자, 왕이 그를 순군옥에 가두어 국문하게 하였다.
최원이 감옥에 들어가려 하지 않아 강제로 끌어넣고 꿇어앉게 하였는데, 최원이 굴복하지 않고 도리어 소매를 뿌리치고 나갔다.
마침내 원나라로 달아나서는 고려를 소란스럽게 할 것을 도모하여 남쪽 고려를 정벌할 군사를 징발하자고 요청했다.
원나라 세조가 신백천을 보내 관음송 위에 고인 물을 요구하였다.
수소문을 해보니 낙산 위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본래 없는 것이고 황당한 이야기이다.
신백천 등이 본국을 등지고 원나라로 달아났는데 본국을 해치는 일이면 하지 않는 짓이 없었다.
고려 말에 윤이, 이초 등이 원나라 황제에게 고하기를 "고려가 병사를 움직여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합니다"라고 하니, 대간이 청하여 윤, 이의 무리를 국문하고 이색 등을 청주 옥에 가두었는데, 모두 불복했다.
홀연히 우레와 비가 크게 일어나 앞 내가 갑자기 넘치니 성중이 한 발 남짓 수침되었다.
문에 압각수[은행나무] 수십 그루가 있었는데, 옥관이 창황하게 나무를 잡고 올라가 화를 면했다.
왕은 수재로써 하교하여 이들을 석방했다.
충숙왕이 복위하여 정승 윤석을 하옥한 뒤 네 가지 죄목으로 국문케 하였다.
왕이 원나라에 있을 적에 행저에 전곡을 억지로 중지케 한 것이 첫 번째 죄다.
소인들이 정치를 어지럽히는데도 정승으로서 말하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죄다.
전왕과 함께 원나라에 모반한 것이 세 번째 죄다.
내수와 결탁하여 왕의 부자를 이간한 것이 네 번째 죄다.
이현이 몽고병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달로화적이 되었다.
군중에서 노획한 재물은 모두 자기의 소유로 했는데, 은비녀가 한 상자에 가득 할 정도였다.
충렬왕 때의 내시 박인평은 간교함으로써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원나라에 가게 되자 드디어 왕을 배반하고 도리어 비밀스러운 일을 심왕에게 하소연하였다. 그래서 시종들이 모두 이반하게 되었다.당시 사람들이 "인평은 사람 고양이다.왕을 그릇되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이리라" 하였다.
그릇 보잘 것 없는 집안의 자식을 따르다가 스스로 찬역의 그물에 걸려들었다. 덕흥군이 일찍이 승려가 되어 있었는데 당시 원나라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을 세우려 하였다.
홍복원이 죄를 얻어 몽고로 달아났는데 황제가 그를 발로 차서 죽이라고 하였다. 그의 아들 다구가 본국을 모함하여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적이 원나라 내관들과 관계를 맺어 권력이 중외를 기울일 정도였다. 충선왕이 즉위함에 미쳐서 그들과 더욱 친밀하여 채하중과 함께 도당에 글을 바쳐 임금에 대해 하소연하기를 마지 않았다.
활을 잡고 칼을 차고 몰려다니면서 사람들을 협박하였다.
역모를 꾀하여 난리를 일으켰다가 드디어 복주되었다.
임박이 원나라에 갔다. 덕흥군이 총랑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돌아오자 왕이 "덕흥군이 좋은 벼슬로 꾀었는데도 네가 따르지 않았으니 나도 좋은 벼슬로 그대를 포상하리라" 하고 바로 중서사인을 제수하였다.

성호사설

고려 원종(元宗) 10년에 임연(林衍)이 왕을 쫓아내고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웠을 때에 몽고에 가서 허위로 보고하기를, “고려에서 북계(北界) 모든 성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려 한다.” 하였다.
또 《고려사》 조이전(趙彛傳)에 상고하니, 원(元) 나라 승상(丞相) 안동(安童)은 김유(金裕)의 속이는 말을 옳게 듣고 송고병(松膏餠) 30근(斤)을 구하려고 사람을 보내 왔었다.
고려 조이전(趙彝傳)에, “김유(金裕)란 자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도망쳐 원(元) 나라로 들어가서 속이기를, ‘바다 동쪽 삼산에 약물(藥物)이 있는데, 나를 돌려보내 주면 구해 올 수 있다.’고 하였다.
원 나라 초기에 학경(郝經)이 국신사(國信使)가 되어 송 나라로 들어갔다. 이때 가사도(賈似道)는 악주(鄂州)의 포위를 해산시킨 것을 자기의 공으로 돌리려고 애를 쓰고 있던 중, 학경이 이르면 그의 사실이 탄로될까 두려워하여 학경을 진주(眞州)에 가둬 두었는데 지원(至元 원세조의 연호. 1264~1294) 11년(1274)에 백안(伯顔)이 남쪽을 정벌하다가 〈이를 만나〉, 예로 대접하고 데리고 돌아와 연경(燕京)에서 죽었다.
이보다 먼저 김의(金義)가 명 나라 조사(詔使)를 죽이고 북원(北元)으로 도망친 사실이 있었다.

송남잡지

《고려사(高麗史)》의 "고종 때에 몽고가 조휘를 총관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이것이다.
최탄 등이 임연을 주벌한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군영에 들어가 웅거하고, "고려가 북쪽 변경 여러 성의 사람을 죽이려한다"라고 몽고를 속였다.
충렬왕 16년에 몽고 황제가 동녕부를 혁파하자 최탄이 처형되었다.
감창사 이승진이 괴상하게 생각하고 비밀로 해두었는데 그들이 과연 몽고에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