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동맹

pattern
이동: 둘러보기, 검색

몽골동맹

공동의 적을 공격하기 위한 군사 작전 행위, 서로 아끼고 이해하는 파트너.

대동운부군옥

김부일이 일찍이 팔관치어를 지을 때 즉석에서 입으로 불렀더니 예종이 크게 기뻐하며 항상 그것을 사용하고 바꾸지 않았다.
송나라 사람이 돌아가 그 가사를 황제 앞에서 외워보였다.
이자량이 조회하러 원나라에 들어가자 황제가 '팔관치어구호'를 누가 지은 것이냐고 물었으니 진실로 가상히 여겨 드러낸 것이다.
고려 원종 15년(1274)에 1월에 원나라 세조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김방경 등에게 조칙을 내려 합포현에서 전함을 만드는 것을 살피게 하고, 10월에 전함 9백 척으로 일본을 정벌하러 갔다가 일기도에 이르러 패하고 돌아왔다.
본관은 진주. 유학으로 드러났다.
일찍이 서장관으로 일본에 사신 갔었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 길을 안다는 이유로 또 가게 되었다.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병사들이 번갈아 자꾸 물에 빠져 죽었다.
돌아와서는 다시는 벼슬하지 않았다.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유학을 일삼지 말라고 하였다.
조충이 몽고 장수 합진과 함께 거란의 군대를 강동에서 격파하였다.
고려 고종 때 거란 병사가 강동성에 들어가 지키니, 김취려가 몽고 장수 합진과 함께 장차 병사를 합하여 공격하려 할 때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을 운반하는 길이 막혔다.
적군은 성벽을 견고히 하여 아군을 고달프게 하니 합진이 근심하였다.
김취려는 성 아래 이르러 동문, 서문, 남문에 모두 해자를 파서 적이 달아날 길을 막고 드디어 병사를 합하여 공격해서 크게 격파시켰다.
충렬왕 6년에 원나라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려고 할 때 사신을 보내어 비단 2만 필을 가지고 와서 쌀을 사서 군량에 충당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고자 고려국에게 전함 900척과 병기와 의장 등 군수물품 일체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제주도에서 전함 100척을 건조하게 하였는데, 고인탄이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때맞추어 요구에 부응함으로 모자람이 없게 하였다.
이에 특별히 명위장군에 임명되었다.
충렬왕 때 국내에 기근이 들어서 사신을 원나라에 보내어 쌀을 보내줄 것을 고하니 가을이 되어서 곡식이 도착하였다.
고구려 충숙왕 때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이연송이 원나라에서 쌀을 사올 것을 건의하여 쌀 3만여 섬을 청구하여 몸소 친히 구휼했다.
원나라 황제가 김방경을 보내 다시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정벌군이 일기도에 이르자 군중에서 역병이 나돌아 죽은 자가 3천여 명이 되었으며 여러 번 싸웠으나 불리하여 돌아왔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려 함에 우리나라로 하여금 전함과 군량과 기계를 갖추게 했다.
원나라 장수 흔도가 감독함이 매우 심하니, 힘들고 지쳐서 능히 결딜 수 없었다.
박항이 황제에게 아뢰어 김방경을 원수로 삼아 권한이 객의 손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니, 당시에 그 능함을 칭송했다.
몽고 장수 합진이 김취려의 모습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기고서는 함께 앉아 말하기를 "내가 6 나라를 정벌하러 다니면서 귀인을 많이 보았지만, 형의 용모를 보니 어찌도 그리 기이한가?"라 하였다.
원나라가 김방경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케 하였다.
대명포에 이르자 문득 큰 바람이 불어서 군사들이 많이 빠져서 죽었다.
포구가 그 때문에 막혔다.
원나라 군사로서 돌아가지 못한 자가 10만도 넘고 우리나라 군사로서 돌아오지 못한 자는 7천 명이었다.
원나라 세조가 김방경에게 명령하여 수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는데 김취려가 몽고 장수 합진과 약속하여 강동에서 거란병을 정벌하였다.
몽고 장수가 김취려의 사람됨을 훌륭하게 여기고 이별할 때 문밖에까지 나와서 겨드랑이를 받들어 말에 태워주었다.
김취려가 몽고, 동진국과 함께 거란을 토벌할 적에 몽고 장수 합진이 말하기를 "과연 우리와 함께 우호를 맺었으니 먼저 몽고 황제에게 절하고, 다음에 만노 황제에게 예를 갖추자"라고 하자, 김취려가 말하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으니, 천하에 어찌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몽고 황제에게만 절하고, 만노에게는 절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만노는 동진국의 황제로 금나라 선무포선만노가 요동을 점거하여 천왕이라 참람하게 일컫고 나라 이름을 대진이라 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장차 홍건적과 고우의 적을 토벌하려 할 때 고려에 사신을 보내어 날래고 용감한 군졸을 모집하여 정벌을 돕도록 청했는데 고려왕이 군직을 많이 베풀어 주니 이를 상군정이라 했다.
원나라 황제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라고 명하니 김방경이 홍다구와 전선 만드는 것을 감독했다.
오랑캐 배의 모양을 본받을 것 같으면 드는 비용이 너무 많고 또한 기일에 맞출 수가 없었다.
공이 사신을 보내어 문의하여 성(省)의 답서를 받아 동국의 배모양을 써서 만드는 일을 감독하여 능히 이루었다.
고려 원종이 원나라 황제의 칙명으로 김방경을 보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할 적에 군사들이 합포에 이르러 송악의 작은 언덕 위에 주둔하였다.
이 언덕에서 송악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 고을 사람이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다.
충선왕이 세자였을 때 원나라 황제가 불러 보고 수정으로 된 술잔을 내려주며 총애하였다.
충렬왕 때 원나라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자 백성들은 군량을 수송하는 데 곤궁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농사의 때를 놓쳐 기근에 이르게 되었는데 원나라 황제가 이 이야기를 듣고 중국 강남의 쌀을 배에 실어 와서 구제하게 하였다.
원나라가 충렬왕에게 명해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고 혼도로 하여금 감독하기를 매우 급하게 하여 본국이 피폐해져서 힘이 감당할 수 없었다.
고려 충렬왕 18년(1292)에 본국이 거란 병사로 인하여 농민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나라 안팎이 주리고 곤궁하니, 원나라 황제가 안타까워하여 강절행성에 명하여 양식 10만 석을 운반해 백성을 구원하여 살리도록 했다.
고려에서 원나라를 섬긴 이래 왕은 원나라 사신과 동서로 마주 대하였다.
충렬왕 7년에 원나라에서 흔도 등을 파견하여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여 했는데, 이 일을 의논할 때 왕이 남면하니 흔도 등이 동면하여 감히 대등하게 대하지 못하였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고자 할 때에 김륜이 합포에 주둔하여 병마를 씩씩하게 훈련시키고 호령이 엄정하니 원나라 사신이 와서 보고 공경을 다했다.
원나라 세조가 친히 내안을 정벌함에 충렬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 정벌을 도왔다.
행차가 평양에 이르러서는 먼저 유비를 파견하고서는 오윤부에게 점을 치게 하였다.
이에 오윤부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모일에 유비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고, 왕도 이로부터 왕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라 하였다.
그 날짜가 되어 왕이 뒤 언덕에 올라가 오랫동안 북쪽을 바라보다가 농담으로 오윤부에게 말하기를 "너의 점이 틀린 게 아닌가?"라 하니 오윤부가 나아가 말하기를 "오늘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으니, 조금 더 기다려봅시다"라 하였다.
조금 후에 역마가 먼지를 날리며 오는데, 보니 과연 유비였다.
또 원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병사를 돌아가게 하니, 왕이 오윤부를 더욱 믿게 되었다.
조충이 몽고 장수와 강동성을 토벌하기로 약속했다.
몽고 장수는 술을 잘 마셨는데, 조충과 우열을 겨루어 이기지 못하는 사람은 벌을 받기로 약속하였다.
조충은 얼마 동안 마셔도 취한 빛이 보이지 않다가 마지막 잔에 이르러 잔을 들고서 마시지 않고 말하기를 "이 술을 내가 못 마실 바는 아니나 약속대로 한다면 공이 반드시 벌을 받게 될 것이니, 주인이 손님을 벌주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몽고 장수가 그 말을 중히 여겨 대단히 기뻐하였다.
원나라에서 김방경 등에게 명하여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여, 일기도에까지 이르렀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거란의 병사가 강동성에 침략하니 김취려, 조충이 몽고 장수 합진과 함께 거란을 토벌하기로 약속하니, 합진이 주연을 베풀고 풍악을 울렸다.
몽고 풍습에 칼끝으로 고기를 찔러 주인과 손님이 서로 먹으며 주고받음에 눈을 깜작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김취려와 조충은 꿇어앉고 일어나며 받들고 맞이하는 동작이 매우 익숙하니 합진이 매우 기뻐했다.
금관부 금강사에 산다수가 있는데 무성하여 뜰을 덮었다.
원나라 황제가 고려로 하여금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게 하니, 충렬왕이 합포[마산]에 이르렀을 때 이 나무 아래 수레를 머물게 하고 '장군수'라고 불렀다.
김방경이 흔도 등과 함께 다시 일본을 정벌했는데 대명포에 도착하여 큰 풍랑을 만나 몽고군이 패하여 반 이상 익사하니 군대를 되돌렸다.
그 군졸 가운데 배가 부서져 육지에 있는 자들을 공이 모두 무기와 말을 버리게 하고 여러 배에 나누어 싣고 돌아오니 다 1,070여 명이었다.
충렬왕 17년에 합단병이 철령을 넘어 교주도에 침략해오자 원나라 황제가 병사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였다.
충렬왕은 장군 한희유 등을 원의 장군을 따라가서 합단병을 연기 정좌산 아래에서 섬멸케하였다.
원나라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정벌하려 했는데 윤수가 말하기를, "제생 가운데 과거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한 자는 모두 일본을 정벌하러 가는 군대에 넣을 것이다"라고 하니, 제생이 두려워하여 모두 나오지 않았다.
조충이 몽고의 동진과 강동의 적을 토평하고 일찍이 은황을 엮어 청요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원나라 황제가 본국에 명하여 동쪽으로 일본을 치게 하였다.
패하여 돌아옴에 미쳐서 김주에 진변만호부를 설치케 하였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다가 실패하고 돌아와서 김주 등지에 진변만호를 설치하였다.
인후를 소용대장군 진변만호로 삼고 호부와 도장을 하사하였다.
원나라가 장차 동쪽으로 일본을 치려 하였다.
충렬왕이 중방으로 하여금 한가한 직책에 있는 사람을 모두 뽑아 정동군에 충당케 하였다.
그들 가운데 이따금씩 가재 도구를 거두어서 도망하기도 하였다.
도망하는 것을 고발하지 않은 이웃에게는 두 근을 징수하였다.
고려 원종 때 원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고자 하여 합포를 정동행성으로 삼고 홍다구와 김방경에게 조칙을 내려 전함 만드는 것을 감독하게 하였다.
일기도에 이르러 패배하고 돌아왔다.
그 뒤 황제가 다시 명령하여 일본을 정벌하게 하였다.
그래서 왕이 친히 합포에 이르러 열병하였다.
조선조 태조가 동녕위를 공격할 때 원나라 추밀사 한배주를 보고는 자기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에게 입혀주고 그와 함께 돌아왔다.
원나라 황제가 용향행성을 설치하여 좌우사사를 두어서 본국의 일과 동쪽으로 일본 정벌을 주관하게 했다.
김취려와 몽고 장수 합진이 함께 거란을 쳐서 평정하고는 드디어 형제의 맹세를 했다.
조충이 몽고 장수 합진과 간동의 적을 토벌하기로 약속했는데, 합진이 공의 호칭을 형으로 하여 자기 위에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공과 영결하기에 이르러서는 공의 손을 자고 눈물을 떨구며 오열했다.

성호사설

고려 충렬왕 때에 김방경(金方慶) 등이 몽고병과 만병(蠻兵)과 합세하여 일기도(日岐島)에 가서 3백여 명을 죽이고 다시 싸우다가 패전하였고 큰 바람을 만나서 전선(戰船) 3천 5백 척과 만병 10만 명이 모두 물에 빠져죽었다.
  고려 원종(元宗)은 원 세조(元世祖)에게 큰 공로가 있어서 은총을 받은 것이 보통이 아니었고 충렬왕(忠烈王)에 이르러서는 원(元) 나라의 부마(駙馬)가 되어 비할 데 없는 사랑을 받았으므로 말만 하면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때는 원 나라의 위령(威令)이 동서에 떨쳐 복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으므로, 순제(順帝) 이전에는 왜(倭)도 감히 고려를 건드리지 못하였고 해구(海寇)도 감히 침략하지 못하였으며, 서쪽 변방에 있는 금(金) 나라의 유민(遺民)인 동진(東眞)의 만노(萬奴)도 큰소리는 쳤으나 감히 깊이 침입하지 못했으니, 이는 모두 원 나라의 덕이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원 세조(元世祖) 때를 당하여 공주를 맞아 들여 부마가 되었으므로 그 말하는 바를 모두 좇았으니, 비록 나라 일을 주장하지는 못했으나 국운(國運)이 장원하였던 것은 또한 그 힘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정지가 또 아뢰기를, “이제 수군들이 모두 수전에 익숙하여 충렬왕 7년, 즉 신사년 동정(東征)할 때의 배에 익숙하지 못하던 몽ㆍ한병(蒙漢兵)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적당한 시기를 틈타 순풍을 기다려 군사를 일으킨다면 성공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 하였는데, 신사년의 동정이란 원세조(元世祖)가 군사를 출동하였다가 일기도에서 대패한 것을 지적한 것이니, 몽ㆍ한병이 비록 강성했으나 수전에 익숙하지 못했으므로 불리했던 것이다.
원(元) 세조(世祖)가 일본(日本)을 정벌하려고 했을 때 군함을 만들고 군량을 쌓은 것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공급했던 것이다 대국(大國)에서 내리는 명령을 비록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얼마 후에 또 원 나라 임금에게 사랑받는 사위로 되어서 무슨 일이건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던 터인데, 군사를 해산시킨 후에 그 방어와 수비를 걷어치우고 후한 폐백으로 통신사(通信使)를 보내서 서로 저자를 열고 화친(和親)을 약속하여 전일의 일은 본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도록 했다면 그들도 역시 그 재물을 이롭게 여겨서 전일의 원수를 잊고 좋게 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듬해에는 원수(元帥) 조충(趙冲)과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 등이 몽고ㆍ동진 군사와 합세하여 공격하여서 글안이 항복하게 되었다.
합진은 통사(通使)를 시켜 취려에게 “과연 네가 우리들과 화친을 맺으려면 몽고와 금의 두 황제(皇帝)를 향해 멀리 절을 해야 할 것이다.
” 하였다.
취려는 대답하기를,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것이다.
” 하고 몽고에게만 절을 하고 만노에게는 절을 하지 않았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원 세조(元世祖)는 고려에서 요청한 여섯 가지의 일을 모두 허락해 주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의관(衣冠)은 본국 풍속을 그대로 따르고 고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왕(王)은 병란을 피해 강화(江華)로 들어가기까지 했으나 원 나라의 후원을 힘입어 그들을 소탕시켰다.
나중에 몽고(蒙古)가 일어날 때에도 군사를 출동하여 그들을 도와 주었다.
고려 충렬왕(忠烈王)은 원 세조(元世祖)의 사위가 되어 받은 사랑과 은혜가 비할 데 없었다.
이때 우리나라 장수 조충(趙冲), 김취려(金就礪) 등이 몽고ㆍ동진(東眞) 두 나라 군사와 함께 공격하여 3년 만에 겨우 섬멸시켰다.
21년을 지나 충렬왕(忠烈王) 16년(1290)에 이르러서는 원 나라에서 동녕부를 혁파하고 북서쪽 모든 성은 우리나라로 되돌려 주었다.
이는 그때 충렬왕이 원 나라 공주(公主)에게 장가들어 은총을 받은 때문이었다.
이는 원 나라에서 옛날 의리를 잊지 않고 그냥 공급해준 데에 불과했을 것이다.
고려 원종(元宗) 원년에 몽고 황제가 여섯 가지 일을 윤허하며 조서(詔書)하기를, “의관(衣冠)만은 본국의 풍속을 따른다.
” 하였고, 3년에 또 조서하기를, “무릇 아뢰는 바는 모두 다 들어 주겠으며 의관에 대한 것도 변경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대개 이미 의관을 변혁한다는 명이 있었는데 본국에서 간청하여 허락을 얻은 것이다.

송남잡지

고려 충렬왕 때 합단이 침범하자 왕이 원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다.
원나라 세조가 평장(平章) 설암간(薛闇干)을 파견하여 구원하게 했는데, 이곳에서 합단의 군사를 격파하고 주둔했기에 원수산이라 한다.
그래서 몽고, 동진과 협격하여 삼년만에 겨우 무찔렀다.
살펴보건대,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김방경(金方慶) 등이 몽고군, 남만군(南蠻軍)과 합세해서 일기도로 진군하여 삼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조충과 김취려가 군대를 인솔하고 몽고∙동진과 연합하여 거란의 침입을 평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