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자 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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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 최부

《금남표해록》은 역사학계와 문학계에서 주로 연구되어왔다. 그리고 이 책은 명나라 표해를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조선 시대의 많은 표해 기록 중에서 왕명으로 간행이 이루어진 것은 최부의 표해록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보아도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그러나 최부는 그의 문필가로서의 생애보다 사상가이자 교육자로서의 삶에서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 금남 최부는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림관료학자이자 호남 교육계의 원류 중 한 사람이었다.


해남 정씨[1]는 금강동(현 해리)에서 살았는데 해남 정씨와 통혼한 다섯 가문도 모두 금강동에 자리 잡아 이후 금강동은 해남 사족들과 학문의 중심지로 부각된다. 최부는 이곳에 와서 관서재를 열어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금남 최부를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면, "해남은 본디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옛날에는 문학과 예의(禮儀)도 없었고 거칠고 누추한 고을이었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처가인 해남에서 노닐면서 우선 세 제자를 길러냈다"고 했다. 첫째는 진사시에 합격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 둘째는 조선 중기의 대문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의 숙부인 임우리(林遇利), 셋째는 유희춘 자신과 자신의 형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큰 명성을 얻었던 유성춘(柳成春)의 아버지인 성은(城隱) 유계린(柳桂隣)이었다. 호남을 대표하는 세 가문이 바로 금남의 문하에서 나왔음만 보아도 그의 교육자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가 짐작할 수 있다. [2] 해남 정씨와 결혼해 해남인이 된 금남 최부는 호남의 4대 학맥 중 한 맥인 최부 학파를 형성하며 해남의 학문 시대를 열었다. 최부는 《소학》이 도학의 교과서로 인식되었던 당시 후학들에게 도학을 가르치던 대표적인 사림의 교육자였다. 최부의 도학적 강직함과 공명정대함은 지지당 송흠과의 일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당대 도학 교육자가 찬술한 최부의 표해록은 교육 서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하다.



내래이터 최부

최부는 글쓰기에 강했다는 평을 들었다. 1487년 최부가 남긴 서사시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을 보면 그의 역사적, 지리적 지식이 제주의 풍속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은 1653년의 이원진의 《탐라록》에 삽입되어 전해지며, 또 1681년에는 이증도 《남사일록》에 옮겨 놓고 있다. 한 예로 허벅으로 물 긷는 기록 '허벅진 촌 아낙네 물 길러 샘으로 가고(負甁村婦汲泉去)'라는 구절은 15세기에 허벅을 지고 물을 긷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허벅은 물 긷는 용구로서 비교적 먼 거리를 왕래해야 하기 때문에 목이 좁다. 대구덕 안에 허벅을 앉히고, 물이 든 허벅의 입구를 새(茅)로 틀어서 막는다. 돌길이기 때문에 찰랑대는 물이 밖으로 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허벅의 구멍을 막는 것이다. 또 허벅은 다른 용도로도 쓰인다. 만일 사돈집에 상(喪)이 났을 때 상가에서 수고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팥죽을 쑤어갈 때도 허벅은 한몫을 한다. [3] 제주도 연등절에 관한 기록으로 현재 가장 오래된 것도 <탐라시삼십오절(耽羅詩三十五絶)>에 남아있다. 여기에는 15세기 후반 사찰에서 연등이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4]


嫌將歲月虛抛擲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기 싫어
照里鞦韆傳自昔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예부터 전해오고
僧刹了無香火時 절에는 향화가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騈闐簫鼓燃燈夕 연등 저녁이면 퉁소와 북 소리도 패를 지어 가득하네.

최부는 연등날 밤 사찰에서 행해지는 제주도의 연등 풍속을 묘사하였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가 예로부터 전해져 지금도 시행되는 모습에서 세월은 헛되이 버려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듯이, 연등회의 풍속도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연등날 저녁이면 절을 찾는 사람들로 향불이 끊이지 않고 피어오르고 퉁소와 북을 동원하여 잔치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득하다고 하였다. 절에 모여 향을 공양하고 악기를 동원하여 왁자지껄한 연등날 저녁을 즐기는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는 백희가무로 온 나라가 잔치 분위기였던 고려시기 연등회의 풍속이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표현해주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상원연등회가 금지된 시기였으나 민간에서는 고려시기의 연등 풍속의 특징을 잃지 않고 북과 퉁소로 흥을 돋우며 사찰에서 놀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줄다리기와 그네뛰기는 풍작을 기원하는 놀이였다. 그네뛰기는 봄이 되면 여자들이 생산의 의미나 풍작의 주술적 의미를 담고 하던 놀이였다. 고려시대에는 궁중과 상류사회에서 성행하였고 백희가무에서 그네뛰기를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양반층에서 체통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멀리하였으나 민간에서는 평상시에도 즐겼다. 줄다리기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풍작을 기원하는 농경의식이다. 제주도 연등 풍습을 표현한 최부의 시각에서도 연등회가 제천기농(祭天祈農)의 성격을 이어가고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5]


최부가 지은 시(詩)로는 조선 중기 때 문인 許筠(1569~1618)이 편찬한 《國朝詩刪》에서 〈讀宋史(독송사)〉가 유일하게 전한다.

이 시는 송나라가 오랑캐 나라에게 빼앗기자 삼백 년 사직이 안타깝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허균은 이 시에 대해 평하기를 “슬프면서도 그 감정을 억눌러 씩씩하고 장하지만 기세가 갑자기 꺾여 사람으로 하여금 다시 보게끔 한다”(許筠, 《國朝詩刪》, 悲壯頓挫 令人改觀.)고 했다. 이는 송나라 역사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과 동시에 그가 《東國通鑑》이라는 역사책을 편찬한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후일 南龍翼(1628~1692)이 엮은 詩選集인 《箕雅》와 張志淵이 엮은 《大東詩選》에도 같이 전하고 있다. 최부는 그의 시에서도 역사적인 소재를 내러티브로 연출했다. 이를 보면 최부가 주로 역사적인 소재 로 자신의 이념을 전달하려고 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挑燈輟讀便長吁 책 읽다가 등심지 돋우며 길게 탄식하노니
天地間無一丈夫 천지간에 대장부 하나 없었을까
三百年來中國土 삼백 년 이어온 중국땅을
如何付與老鮮 어찌 교활한 선우에게 주었던가



내러티브 교육자 최부

내러티브라는 교육방식 활용해서 그만의 교육철학을 실현하려고 했던 최부의 의지가 《금남표해록》에 나타난다. 《금남표해록》 전체 151일의 일정 중 도학 교육자 최부가 도학을 통한 조선인 교화를 목적으로 전하는 도학정신, 선비정신, 조선정신이 드러나는 63일(41%)동안 최부의 도학 교육자적 면모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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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남 최부 묘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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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참고

  1. 해남과 초계정씨(草溪鄭氏), 해남군민신문, 2015.11.28
  2. 비극적인 삶 마친 조선의 마르코폴로 '최부(崔溥)'처가 따라 해남 행, 어초은 윤효정 등 해남육현 길러내, 표해록, 고전기행문학의 백미이자 15C 말 중국 문물 연구의 보고, 해남신문, 2012.03.19
  3. 허벅을 지고 가는 제주 여인을 그리다, 제민일보, 2011.11.22
  4. 김찬흡 외 옮김, **역주탐라지**(푸른역사, 2002), p.24-25.
  5. 제주도 영등굿의 유래-연등회에서 영등굿으로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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