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우

North Korea Humanities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지원(C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송진우(宋鎭禹)
송진우.jpg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81/0003359238』online
 
한글명 송진우인물 한자명 宋鎭禹 영문명 Song Jin-woo 가나명 송진우 이칭 고하(古下)
성별 남성 생년 1887년(고종 24)년 몰년 1945년년 출신지 전라남도 담양 전공 동경 메이지대학 법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 [1] 전남 담양 출생으로 동경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강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2],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21년,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브나로드운동 등을 추진.[3]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하고 지지하며 대일협력 거부.[4] 광복 후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여 한국민주당의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었다.[5]


생애


출생 및 학력

송진우는 1887년(고종24) 전남 담양에서 송훈(宋壎)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6] [7] 1907년 전라도 장성 백양사의 말사 청류암기관에서 공부를 하던 중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군산 금호학교기관에서 수학하였다.[8] 같은 해 10월 김성수인물와 함께 새 학문을 연마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기관와 긴조중학교[錦城中學校]기관를 거쳐 1910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기관에 입학했으나 일제강점에 충격을 받고 귀국하였다. [9] 이듬해 동경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기관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여 유학생 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일을 맡았다.[10] 김병로인물 등과 함께 유학생회의 기관지인 학자광을 펴내며 1915년 졸업했다.[11]


동아일보 창간 참여 및 언론 활동

1921년 동아일보사기관가 주식회사로 되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12]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하였다.[13] 1922년 동아일보를 통해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14][15]을 시작하며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16][17] 1923년 재외동포위문회를 조직하여 위문금품의 모집운동을 개시하였다.[18] 1924년 4월 동아일보사 사장을 사임, 10월에 동아일보사 고문에 취임한 후, 다음해 주필에 취임하였다.[19] 1926년 3월 국제농민본부에서 보낸 3.1절 기념사 관계로『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 당하고 이때 주필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20] 옥 살이 중, 1927년 2월 일본이 새로운 왕의 즉위로 특사로 출옥하여 1927년 10월 다시 동아일보사기관 제6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21] 1931년부터 4년간 동아일보사기관를 중심으로 문맹퇴치를 위해 방학에 브나로드운동[22][23] 1934년 『동아일보』의 사설로써 신사참배 거부와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였다.[24] 1936년 8월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25]의 운동복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하여 무기정간 당하고 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 사장을 사임했다.[26]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폐간의 부당함을 역설하였지만 귀국 중 구속되어 같은 해 8월 강제 폐간됐다.[27]


민족주의 계열 지도자로서의 정치활동

16세에 신학문을 접하고, 18세 때인 1908년 도일, 유학해 서구 근대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이성적 판단과 조선 민족의 도덕성에 기반을 둔 평화 추구의 민족주의로 발전했다. [28] 당시 일본에는 다이쇼 시대가 시작되어 자유민권과 주권재민과 같은 서구 사상이 대거 유입됐기에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결합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체제를 체득하여 그러한 독립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염원과 강한 의지를 갖게 됐다. [29] 1919년 현상윤인물과 함께 독립운동을 일으키기로 하고 천도교[30], 기독교[31], 불교[32]가 참여하면서 3대 종교 중심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했다.[33] 하지만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지속시키며 수감 중인 사람의 가족을 돕는 등 2선에서 활동했다.[34] 결국 3월 중순쯤 체포되어 경성감옥에서 20개월 옥고를 치뤘다.[35] 3.1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15인을 합쳐 '민족대표 48인'라고 불리었다.[36]


해방 직후 정치 활동

1945년 8월 11일 일본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을 제안 받았으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하였다.[37] 1945년 8월 16일 몽양 여운형인물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기관를 발족하였지만 역시 참여를 거부하였다.[38]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기관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39] 1945년 12월 28일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인물 미국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다.[40] 미군정청과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왔지만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공간자택에서 습격을 받았다.[41]





연구


실력양성론 연구

1910년대 교육과 산업진흥론으로 구성됐다.[42] 특히 실업교육과 과학교육이 강조되었는데, 애국계몽운동기의 교육론과 비교하면 실업교육이 강조된 점은 같으나, 국가의식이나 민족혼을 강조하는 교육론은 소홀히 되고 있었다.[43] 반면 산업진흥론에 큰 비중을 두어, 한국인들에게 사회의식, 사회관습의 개혁 등을 제시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곧 해산됐다.[44] 실력양성론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산업진흥론을 위한 신교육 보급론이었다면, 구사상.구관습 개혁론은 산업과 교육의 진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건의 조성을 주장했다.[45] 실력양성론을 주도했던 신지식층들은 조선 유교를 가능한한 버리고 서양의 신사상을 대신 가져야 할 것을 연구하여 제안했다.[46]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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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3.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5.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6.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송진우(宋鎭禹)」,『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onlin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어머니는 양(梁)씨
  8.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9.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10.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1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12.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13.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14.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국산품 애용과 민족기업 육성을 통해 경제적 자립을 추구한 범국민적 경제운동이다.
  15.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020
  16. 1920년대 초 조선인의 손으로 직접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전개한 모금운동이다.
  17.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1900
  18.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19.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20.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2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22. 1~3까지는 브나로드 운동으로 불렸으나 4회 때는 계몽운동이라 불렸다.
  23.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2010
  24.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25.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eh/view.do?levelId=eh_n0900_0010
  26.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27.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28. https://www.munhwa.com/article/11503986?ref=naver
  29. https://www.munhwa.com/article/11503986?ref=naver
  30. 최린인물
  31. 이승훈인물
  32. 한용운인물
  33. https://www.munhwa.com/article/11503986?ref=naver
  34. https://www.munhwa.com/article/11503986?ref=naver
  35. https://www.munhwa.com/article/11503986?ref=naver
  36. https://www.munhwa.com/article/11503986?ref=naver
  37.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38. https://www.munhwa.com/article/11503986?ref=naver
  39.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40.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41.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73
  42.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2300&code=kc_age_40」,『우리역사넷』online,우리역사넷
  43.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2300&code=kc_age_40」,『우리역사넷』online,우리역사넷
  44.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2300&code=kc_age_40」,『우리역사넷』online,우리역사넷
  45.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2300&code=kc_age_40」,『우리역사넷』online,우리역사넷
  46.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2300&code=kc_age_40」,『우리역사넷』online,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