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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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李克魯)
LeeGeuk-Ro.png
출처 : 동아일보 1930년 9월 30일자 기사
 
한글명 이극로 한자명 李克魯 영문명 Lee Geuk-Ro 가나명 Kolu Li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893년 몰년 1978년 출신지 경상남도 의령군 전공 국어학


개요

국어학자. 한글운동가. 1893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만주 동창학교와 백산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 상해 동제대학에 입학하였다. 동제대학 예과를 마친 뒤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중국의 생사 공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을 시찰한 뒤 1929년 귀국하여 조선어학회 간사장 등을 맡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였다. 1928년 파리대학에서 조선어 음성 실험에 참여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實驗 圖解 朝鮮語 音聲學』(1947)을 편찬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 조선건민회 대표로 참석한 뒤 평양에 잔류하여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타계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생애

출생과 성장

1893년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태어났다. 자서전 『고투사십년』(1947)에 따르면 [1]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와 서모 밑에서 자랐다. 독일어로 쓴 이력서에 따르면 자신이 “의사 이근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데, [2] 이극로의 아버지는 전문적인 의원은 아니었지만 동네에서 의원 일을 보았다고 한다.[3]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집은 가난한 농가였고 농사일을 하다가 짬을 내어 글을 몇 자씩 배우며 주경야독하였다고 한다. 8세 이후부터 한시를 짓는 데 재능을 보였다. 동리에서 공동으로 보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하고, 가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출하여 머리를 깎고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한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보통과 1년, 고등과 1년으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2년 4월[4] 이극로는 서간도 신흥강습소로 향한다. 경성역과 안동현을 경유한 뒤 강원도에서 서간도로 향하는 이주민들과 동행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회인현에 도착한다. 한편 회인현으로 가는 여정 중에 이극로는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아침밥을 먹게 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고추장’을 청했으나 듣는 사람은 평북 방언 ‘댕가지장’으로만 알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이극로가 표준어 사정 등 어문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만주와 시베리아에서의 생활

이극로는 만주 회인현 내 독립운동 연락기관인 동창점 여관에 묵게 된다. 여관의 경영자이자 동창학교의 교장인 이원식의 소개로, 신흥강습소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동창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한다. 동창학교에서 이극로는 박은식의 등사 일을 돕고 윤세복을 알게 되었으며 대종교에 귀의하였다.[5] 또한 동료 교원이자 주시경의 제자였던 김진과 교유하는데, 김진은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 연구의 좋은 참고서를 많이 가져왔기에 이극로는 그를 만나고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었다고 회고한다.
1913년 동창학교를 떠나 유하현으로 간 이극로는, 당시 서간도에서 문사로 유명했던 『신흥교우보』의 주간 강일수를 만난다. 강일수는 문학을, 이극로는 육군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함께 가기로 계획한다. 1914년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난다. 시베리아 남동부 치타에 당도한 이극로는, 모자라는 여비를 구하기 위하여 치타에 있는 감자 농장에서 일한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에서의 계획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다시 회인현으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신채호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1915년에는 윤세복, 의병대장 이석대‧김동평과 함께 백두산 산록에 있는 무송현으로 이주하여 독립군 양병에 참여하고 백산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 중국 마적단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윤세복의 권유로 1915년 겨울에 무송현을 떠나 서울로 향하게 되는데, 안동현까지 당도하여 여관에 머무르던 중 이우식이 자신의 공부를 후원해주리라는 정보를 듣고 서울 대신 상해로 가게 된다.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 생활과 모스크바행

이우식의 후원은 어렵게 되었지만 신규식의 주선으로 학비를 마련하여, 1916년 4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독일인 경영 대학인 동제대학에 입학하였다.[6] 당시 공과 4학년이던 중국인 조후달(赵厚达)의 주선으로 이극로는 면비생으로 공부하게 된다. 우등의 성적을 가질 것과, 조후달의 타자기 찍는 일을 도와준다는 조건이었다. 또한 상해에서 이극로는 김두봉과 함께 한글을 연구했으며, 김두봉의 창안인 한글 자모분할체 활자를 만들기 위해 상무인서관 인쇄소에 함께 다니며 교섭하였다. 상해 유학생회 총무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각 단체와 학생층 연락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7]
1920년 2월 예과를 졸업한 뒤, 의과와 공과 중 선택해야 했기에 공과에 입학하였으나 소질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자퇴한 후 독일 베를린 유학을 계획한다. 북경에 있는 신성모의 집에 머물다가, 의사 이태준과 동행이 되어 북경을 떠나려고 하지만 장자커우에서 자동차 길이 막혀 귀환한다. 1921년 4월에는 신채호가 작성한, 이승만 위임통치청원을 반대하는 ‘성토문’에 김원봉, 오성륜, 장건상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8] 상해의 이동휘에게서 전보가 온 것을 계기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의 분쟁 해결을 위해 국제공산당 3차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던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박진순과 동행하여 1921년 6월 해로를 통해 모스크바로 가는 여정에 오른다.[9] 이극로는 이때 중국어와 서양어의 통역을 담당하게 된다.[10] 이들은 홍콩, 베트남 사이공, 싱가포르, 스리랑카 콜롬보, 지부티,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이집트 포트사이드 항에 도착한다. 카이로에서 이틀 간 머문 뒤 알렉산드리아 항을 출발하여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항구 시라쿠사와 카타니아를 거쳐 나폴리에서 이틀, 로마에서 사흘 간 머무른 다음 밀라노, 스위스 베른, 제네바를 구경하고 베를린으로 직행한다. 이들은 1개월 간 베를린에 머물다가 독일 공산당 대표 빌헬름 피크(Friedrich Wilhelm Reinhold Pieck)와 동행하여 슈테틴[11] 항구에 가서 배를 타고 에스토니아 탈린에 도착한다. 이후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구경한 뒤 모스크바로 직행하였다. 모스크바에서 3개월 간 머물며 건설 중에 있는 새 수도의 모습을 구경한다.[12] 통역 업무를 마친 이극로는 유학 생활을 위하여 라트비아 리가, 리투아니아, 폴란드를 지나 1922년 1월 베를린으로 돌아온다.[13]

독일 베를린에서의 유학 생활과 항일 활동

1922년 4월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14] 철학부에 입학하였다. 『고투사십년』에 따르면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 정치학,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인류학·언어학을 부과로 하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극로가 작성한 독일어 이력서에는 민족경제학, 법학, 철학, 종족학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5] 이극로는 4년 간 정식 학생으로, 1년 간 연구생으로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에리히 해니슈(Erich Haenisch)[16]에게 몽골어를 배우다가, 함께 공부하던 독일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틈틈이 알려주게 되었는데 그들의 요청으로 정식으로 1923년 10월 조선어강좌를 창설하게 된다. 이극로는 1926년까지 3년 간 조선어과 강사를 무보수로 맡았으며,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인 학생 등이 강좌를 수강했다. 이때 수강생들이 조선어의 철자법 통일과 사전 편찬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의구심을 드러냈는데, 이는 이극로가 조선어 사전 편찬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17]
베를린에서 결성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 유덕고려학우회에서 이극로는 1923년과 1924년에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18] 유덕고려학우회는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고 ‘한국 내 일본의 유혈 통치’라는 인쇄물을 독일어(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 영어(Japan’s Bloody Rule in Korea)로 배포하였다.[19] 글의 내용은 일본의 침략사, 일본 관동대지진과 한인 학살 실상, 한인지지 호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20] 글의 하단에 이극로, 고일청, 김준연이 대표로 서명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경우 다음 주소로 찾아오기를 바란다며 이극로의 주소가 적혀 있다.[21]
1924년 2월, 이극로는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라는 본문 32쪽의 책자를 율리우스 지텐펠트(Julius Sittenfeld)사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22]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이 작은 책자는 4000년 이상 정치적인 독립과 높은 문화를 누려 왔던 한 민족이 어떻게 처음으로 외세의 지배에 놓였으며 다시 독립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23]라며 일본의 조선 침탈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유럽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간행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1927년 2월에는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24]에 황우일, 이의경(이미륵), 김법린, 허헌 등과 함께 참가한다. 이극로는 ‘조선 대표단 결의안’(Resolution der Koreanischen Delegation)을 제출하였다.[25] 또한 한국 대표단은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한국의 문제’라는 자료를 각국의 대표에게 배포하였다.[26] 베를린의 인쇄소 살라드룩운트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에서 인쇄된 이 자료는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12쪽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은 독일어 4쪽, 영어 4쪽으로 구성되어 있다.[27] 표지에는 ‘한국의 문제’가 영어·프랑스어·독일어(The Korean Problem, Le Problème Coréen, Das Koreanische Problem)로 적혀 있다.[28] 대회가 반영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한국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극로의 강력한 항의로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논의할지의 여부를 표결에 부쳤으나 결국 부결되어 무산되었다. 3개월 후인 1927년 5월에 이극로는 Korea und sein Unabhängigkeitskampf gegen den japanischen Imperialismus(한국,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투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한다.[29] 머리말에 따르면 1924년 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 주로 정치적인 면을 자세히 다루었던 데 비해 이 책자는 경제적·문화적 관계에도 주목하고, 계속 추가된 정치적 운동의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첫 번째 소책자를 보강하는 성격을 지닌다.
1927년 5월 이극로는 중국의 생사 공업(“Die Seidenindustrie in China”)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논문은 지도교수 헤르만 슈마허(Hermann Schumacher)의 추천으로 빌헬름 크리스티안 출판사(Wilhelm Christians Verlag)에서 출판되었다.[30] 당시 상해에 있던 김두봉에게 편지하여 한글 자모 활자를 받은 뒤, 이를 본떠 독일 국립 인쇄소의 허가로 4호 활자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첫 시험으로 1927년 이광수의 『허생전』 일부를 인쇄하여 동방어학부연감(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에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한 조선 지식인의 삶 한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하였다.[31]

런던에서의 유학 생활과 음성학 연구

이극로는 1927년 6월, 고향 친구 신성모를 따라 영국 런던으로 향한다. 1927년 11월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 청강하였다.[32] 상해에서 친하게 지나던 정환범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최린, 공탁(공진항)과 교유하였다. 영국에서 이극로는 시오니스트이자 작가였던 이스라엘 코헨(Israel Cohen)을 방문하기도 하였다.[33] 또한 이 시기 이극로는 식민지 사람들도 자유롭게 독립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고, 영국의 언론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1928년 1월 런던을 떠나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 이극로는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 음성학 실험실 프란츠 베틀로(Franz Wethlo)의 지도로 조선어 음성을 실험하고 연구하였다.[34] 런던에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1928년 5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약 1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대학 음성학연구소 실험실에서 위베르 페르노(Hubert Pernot), 체코슬라바키아 출신 에마누엘 슈라메크(Emanuel Šrámek)의 요청으로 조선어 음성 실험에 참여한다.[35]
이극로는 파리에 머무르던 시기 파리대학에 재학 중이던 공진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하였다. 공진항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이극로는 민족에 남는 일을 무엇인가 하고 싶다고 공진항에게 의논을 해 왔으며 이때 공진항은 한글운동을 독려했다고 한다.[36]

구미 시찰과 전국 일주

파리에서의 연구와 시찰을 마친 후 다시 런던으로 간 이극로는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를 시찰할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떠난다. 맨체스터를 구경하고, 아일랜드 더블린에 도착한 뒤 아일랜드 교육부를 방문한다. 이극로는 아일랜드인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과 간판 등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귀국 후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에 한평생을 바치자고 결심한다.[37] 뒤이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에든버러를 거쳐 런던에 도착하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倫敦大學”이라고 지칭한다.

투옥과 전향

1938년 5월부터 이청원은 다시 잠적한다. 식민지 조선의 미디어에 대한 투고도 그 무렵에서 중단된다. 자서전에 따르면 1937년 12월에 검거되었다가, 1938년 2월에 풀려나 잠시 요양을 한 뒤, 1938년 5월부터 일본 나가노 현수력전기발전소 건설 공사에 종사했다고 한다. 1937년에 검거되었다는 기술은 다른 기록이나 정황에 비추어 사실이 아닌 것 같다. 다만 1938년 5월에 일본 나가노 현으로 갔다는 기술은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38]
일본 관헌 기록에 따르면 이청원은 1940년 5월 14일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경찰은 이청원을 ‘조선인 공산주의 운동의 거두’라고 불렀다.[39] 반파쇼전선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공산주의자 구로다 젠지 및 중국 인민전선파 銭厓, 玉道源 등과 연락하고, 조선인 좌익 그룹을 지도한 사실이 밝혀져 12월 3일에 검찰에 넘겨졌다.[40] 1941년 1월 27일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41]
그해 9월 27일에는 보석으로 풀려났다.[42] 12월 13일 제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의 실형(미결 100일 통산)이 언도되었다.[43] 1942년 9월 6일 상고를 취하함으로써 형이 확정되었다.[44]
중일전쟁기 내선일체가 선전되는 가운데 조선이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는 역설이 벌어진다. 조선 연구에 대해 부정적이던 임화는 중일전쟁기에 들어서자 1930년대의 ‘고유한 문화 고전과 전통에 대한 관심’을 ‘이식성과 국제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재평가했다.[45] 임화는 1938년 가을 학예사를 창립하고 1939년 1월부터 ‘조선문고’를 간행한다. 임화는 1939년 가을부터 ‘신문학사’를 집필하는데, 일찍이 백남운이 제시한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중시하는 역사상이 뼈대를 이룬다.[46] 먼저 역사적 배경을 서술하는 「신문학의 태반」의 ‘물질적 배경’이라는 항목에서 ‘자주적 근대화 조건의 결여’를 설명하면서 “백남운, 이청원, 김광진, 김태준, 고 하야카와 지로, 모리타니 가쓰미, 이우진 씨 등의 조선사 과정에 관한 견해는 전연 상이하나 이 점에서는 모두 일치한다.”[47]고 밝혔다.
역시 카프 맹원 출신으로 임화와 쌍벽을 이룬 비평가이자 소설가였던 김남천도 중일전쟁기 조선의 현실에 착목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문화계를 강타한 아시아적 특수성, 조선적 특수성의 문제를 구체적 현실 속에서 살피고자 했다. 김남천은 장편 소설 『대하』(1939)의 창작 과정을 설명하면서, 참고한 서적으로서 “인정식 씨 저 『조선농촌기구의 분석』, 이청원 씨 저 『조선역사독본』, 동 씨 저 『조선독본』의 일부분, 백남운 씨 저 『조선사회경제사』의 일부분, 성천읍지 두 권”을 열거했다.[48]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의 조선 연구가 중일전쟁기 문학자의 조선이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을 뒷받침했음을 엿볼 수 있다.
중일전쟁기 신문과 잡지에서는 일본이 제기한 동아협동체론에 고무 받아 식민지 조선의 지위 향상을 꾀하는 통제경제론민족협화론이 터져나왔다. 중일전쟁기 내선일체의 위협 속에 조선이라는 주체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1930년대 중반 조선연구의 문제의식, 즉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대한 고민을 굴절된 형태로 계승한 셈이다. 중일전쟁기 조선이라는 주체에 착목한 임화나 김남천의 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성과에 입각했다. 그러나 정작 이청원이나 백남운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는 감옥에 갇힌 상태였다. 백남운도 1938년 3월 체포되어 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중일전쟁기 이청원의 생각은 전향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1941년도 사상특별연구원 판사 樋口勝 보고서’인 「좌익 전력자 전향문제에 대하여」에는 다른 일본인 전향자와 더불어 이청원이 ‘예심 판사에게 상신한 전향의 심경’을 분석하고 있다.
이청원은 전향서에서 통제경제를 옹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총동원법령은 사유재산, 생산, 분배, 배급 등에 대해, 또한 자유주의적 경제기구에 대해 하나의 커다란 제약을 부여하는 동시에, 한편에서 새로운 건설적 태도, 경제 도덕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는 빈부의 균형화로 방향 지어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내가 일찍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총동원법령 제11조의 발동을 중심으로 하는 재계와 군부의 의지의 차이는 내게 군부의 초계급적 존재와 그 신체제에서 추진적 역할을 충분히 인식시켜 주었습니다.”[49] 일본의 전시 통제경제가 자유경제를 제약하는 상황, 특히 재계와 갈등하며 신체제를 추진하는 군부의 역할에 기대를 걸었다.
다음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이다. 이청원은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지나 민족주의의 승인”한 점을 높게 평가하고 ‘우리 조선 민족’도 “동문동종이고 또한 도의성에 의해 표징되는 일본 국체를 신용하여 동양공동체를 보다 높은 수준으로 고도화하기 위해 이 공동체의 일 구성분의 역할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청원은 일본인의 토지 독점, 조선인 의무교육 결여, 일본으로의 도항 규제 등을 열거한 뒤 “일시동인이라는 아시아 민족의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왜 이러한 차별이 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고 조선인에게 ‘문화와 빵’을 줌으로써 궁극적으로 ‘협화적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했다.[50]
1938년 가을 우한, 광둥을 점령한 뒤에도 중국 국민정부가 굴복하지 않자, 일본 정부는 화평을 통한 전쟁 종결을 모색하게 된다. 그 해 10월 일본 정부는 중국에 대해 ‘공동방공...’을 제안하는 이른바 동아신질서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의 민족주의를 인정하고 일본이 주도하고, 만주국, 중국이 참여하는 일종의 연방국가를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일본이 중국의 민족주의를 승인한 것을 평가하는 이청원의 주장은 명백하게 동아신질서론을 의식한 것이다. 이청원은 이를 ‘동양공동체’라고 받아들인 뒤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일본, 만주국, 중국 외에 조선도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의 의도를 넘어서는 주장이었다. 이청원은 일제가 내세운 내선일체를 ‘차별로부터의 탈출’를 위한 기회로 삼고자 했다. 나아가 조선 민족의 말살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주체를 ‘동양공동체’의 일원으로 세우려는 주장이었다.
일본 검찰은 이청원의 이러한 태도를 놓고, “총동원법령의 중요성을 그 빈부의 균형화라는 면에서 강조하거나 재계와 군부를 비교해서 후자의 초계급성 등을 운운하는 데 오히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일단 계급적 입장으로 환원하여 판단하려는 습관 –그것은 일종의 좌익적인 상식이다- 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일시동인이나 협화적 통일이라는 것이 온갖 차별을 무시한 평면적 절대 평등의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것은 새삼 말할 것도 없”다고 경계했다.[51] 일본 관헌은 조선인 전향자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른바 전향 좌파와 일본 관헌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 관계가 남아 있었다.
자서전에 따르면 이청원은 1944년 6월까지 도쿄의 도요타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출옥 후 반년 정도 도쿄에서 요양을 한 뒤 12월에 귀국했다. 자서전에 따르면 귀국 후에는 함경남도 단천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부근 탄광 노동자들과 접촉했다고 한다. 1945년 5월에는 사회주의자 최익한(崔益翰)의 딸 최분경과 결혼했다.[52] 최익한과 이청원의 인연은 확실하지 않다. 최익한은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활동하다 1928년 2월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35년 12월에 출옥한 후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관계하면서 정약용을 비롯한 한국사 관련 글을 발표했다. 같은 시기 이청원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한국사 논문을 다수 발표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자서전에서는 “8·15 해방 직전에 정세를 알려고 서울시에 갔다가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고 적었는데, 결혼 시점과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는 알기 어렵다.

북한에서의 활동과 숙청

해방 직후 이청원은 장안파 공산당에 참여했다. 장안파 공산당은 직접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내건 박헌영 주도 재건파 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로 비판받기도 했다. 이후 이청원은 북한 정권에 참여하여 1947년 2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설치한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에 올랐다. 1947년에 이청원이 집필한 『조선근대사연구』는 러시아어, 중국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되어 건국 초기 북한 역사학을 대표하는 성과로 인정 받았다. 이청원은 과학원 역사연구소의 기관지인 『력사과학』 책임편집위원을 맡는 등 북한 역사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서 활약했다. 다만,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연안파소련파에 대한 공격이 거세지면서, 이청원은 연안파 지도자인 최창익 일파로 몰렸다.
이청원은 1955년 가을에 『력사과학』 제9호와 제10호에 상하로 나누어 「반일 민족 해방 투쟁에 있어서의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같은 해 이를 엮어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이라는 단행본을 출판했다. 이청원이 식민지기에 민족부르주아지에 대해 고립정책을 폈다고 서술한 데 대해, 김일성조국광복회에서 보듯 민족부르주아지와 연대하는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폈기 때문에 애국적 역량을 모을 수 있었다면서, 이청원을 교조주의 혹은 형식주의라고 비판했다. 민족통일전선을 둘러싼 식민지기 이래의 대립이 이청원 숙청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운 셈이다. 가지무라 히데키는 이청원의 숙청을 놓고 “구래의 연구와 공화국 민중에게 필요한 자국사 상 사이에 어긋남이 생긴 것”[53]이라고 분석했다.

연구

내재적 발전론에서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기소유보 처분으로 풀려난 1934년 말부터 다시 잠적하게 되는 1938년 중반까지 조선 역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명 ‘李靑垣’ 대신 새롭게 ‘李淸源’을 필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물론연구』를 비롯한 일본 미디어에 투고했으나, 1935년 9월부터 조선의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실었다. 논문 발표 공간을 일본에서 조선으로 옮긴 이유는 확실치 않다.
첫 역사학 논문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 대한 서평이었다.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봉건제로 보고, 원시공산제 → 노예제(삼국시대) → 봉건제=아시아적 생산양식(통일신라~이조)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백남운의 역사상과 동일했다. 또한, 사노 마나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적 한국사 인식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을 지지했다.[54]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독자적인 사회형태가 아니라 ‘봉건제도의 동양적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히라노 요시타로(平野義太郎)에 대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하나의 사회구성체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 유물론과 모순된다고 비판했다.[55] 이청원은 마자르 학파를 ‘트로츠키주의적 편견’을 가졌다고 비판하고, 그 ‘정치적 결론’은 “동양에는 봉건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당면한 정치적 과정은 이른바 시민적인 그것이 아니라 노동자적인 그것이다”가 될 거라고 지적했다.[56] 중국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 트로츠키주의로 받아들여지면서 반(反)봉건이라는 과제 즉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경시한다고 비판받은 상황을 의식한 언급이었다.
이청원은 한국사에서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중시했다. 19세기 말까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존속했다는 김광진의 이론을 비판하고, ‘내재적 모순의 발전’에 따라 조선 중기부터 봉건제 즉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서 제한적이나마 ‘매뉴팩처’가 존재한 점과 더불어 “상공업의 지방화, 보편화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사회적인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설명했다.[57] 고대 사회에 대해서도 금속 사용은 중국에서 전해졌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원시 사회 생산력의 내적 필연에 바탕한 발전 그 자체여서 외부에서 전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58] 또한,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의 역사 인식을 봉건제 결여론이라고 지적하고 후쿠다 도쿠조(福田徳三)의 “낡은 교리를 노예적으로 복사했다”고 비판했다.[59]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던 이청원은 1936년 들어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전환한다. 먼저 봉건제 붕괴의 내재적 요인으로서 주목하던 상인자본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이청원은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이 양반과 직접 결부되어, 박해를 받기는커녕 법규적 보호를 받았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봤다.[60] 이청원은 1936년 4월 『朝鮮社會史讀本』을 펴냈는데,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고려)→봉건제(이조)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61] 이 책의 특징은 고려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 없이 한국사를 정체성론적으로 이해한 데 있었다.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歷史學硏究』에 쓴 서평을 통해 고려 노예제론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설명 부족을 비판했다.[62] 김우헌(金佑憲)은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한 서평에서 고려 노예제론을 비판하고 이청원이 사용한 사료만 가지고도 이청원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다면서『조선사회사독본』의 모순을 지적했다. 상업 발달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도 “결코 상업 발달은 상층계급의 정언적・명령적 의도에 의해서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내에 이미 발달된 요소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라고 비판했다.[63]
이청원은 1934년 말에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1937년 3월에는 “전형적인 로마 희랍적인 노예사회를 그대로 조선의 역사 발전 행정에 적합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구출할 수 없는 결점은 공식주의’라고 비판했다.[64] 백남운은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1937) 서문에서 이청원의 고려 노예제론을 ‘소아병적 희화술(戱畵術)’이라고 비판했다.[65]
이청원은 1937년에 『조선사회사독본』에 근대사 부분을 추가하여 『조선역사독본』을 펴냈다. 여기서는 “이양선 출몰 이전 아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을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선 사회는 한번 외국 자본주의의 강요적 개국에 부딪히자마자 그 봉건적 구성은 갑자기 취약하게도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66] 백남운과 이청원 자신이 비판했던 “商業資本도 發生되지 못한 舊社會가 「異樣船」의 侵入으로 突然히 崩壞되엇다”는 김광진의 정체성론과 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가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는 쪽으로 전환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청원이 참가한 유물론연구회에는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등 일본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서구 사회와 다른 아시아 사회의 특수성, 정체성에 주목하는 강좌파 역사학자들이었다.
이청원이 『朝鮮社會史讀本』(1936) 서문에서 감사의 뜻을 밝혔고 또 개인적인 교류도 있었던 구로다 젠지는 사쿠 다쓰오(佐久達雄)라는 필명으로 『日本古代社會史』, 『東洋古代社會史』(모두 白揚社, 1934)를 펴낸 역사학자였다. 이청원을 유물론연구회로 이끈 고리로 판단되는 이북만은 「조선에서 토지소유형태의 변천」 등의 논문을 일본 좌파 역사학의 아성인 『歷史科學』에 세 차례나 게재한 사회경제사 연구자였다.[67] 그리고 구로다 젠지, 이북만의 역사상 역시 아시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이청원은 『朝鮮社會史讀本』(1936)의 서문에서 “여러 명의 공동연구 성과도 반영하여 고심을 거듭했으므로 충분히 계몽적 의의를 지닌다”고 밝혔다. 당초 이청원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에 관심을 가졌지만, 유물론연구회 등에서 일본 학자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국사에 대한 정체성론적 인식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朝鮮社會史讀本』에 드러난 검열의 흔적

『朝鮮社會史讀本』은 1936년 4월에 발행되었는데, 불과 한 달 후인 5월에 ‘改訂’ 판이 나왔다. 선행연구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발행 금지를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했지만,[68]出版警察報』 1936년 5월호에 실린 「内地出版物取締狀況」을 통해 부분 ‘삭제 처분’을 받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삭제 대상은 242쪽, 247쪽, 249쪽인데 모두 “내선융화 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는 이유였다.[69]
삭제 대상으로 『出版警察報』에서 적시한 것은 242쪽의 “이 무렵 일본 거류민의 조선인에 대한 소치는 실로 극히 ××(참혹)하여 조선인이 빌린 돈이나 외상값을 내지 않을 때는 그 조선인의 문에 못 질을 했다. 그게 점점 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 조선인을 잡아 와 그 안에 넣고 가족이나 친구가 돈을 갚기를 기다려 비로소 풀어 줬다”라는 부분이다. 이렇게 242쪽에서는 ‘中井錦城’라는 일본인 관리의 ‘朝鮮回顧録’를 인용하여 한국병합 전에 벌어진 재조 일본인의 고압적인 행위를 고발하면서 “착착 식민지화에의 준비 공작을 진행해 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47~249쪽에서는 청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했다고 서술하고, 갑오개혁을 설명하면서 “大韓萬歲! 自由·平等·友愛!”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이 ‘개혁’에 대한 동의는 그리고 협력은 조선 자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식민제도를 전제로 하여 그리고 그 발전적 완료를 위해 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다”라고도 서술하였다. 여기서 ‘×××’는 ‘일본의’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청전쟁의 참화가 한국의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삭제 처분은 발행일인 4월 5일에서 아흐레 지난 4월 14일에 내려졌다. 그렇다면 책이 이미 유포된 뒤의 삭제 처분은 어떻게 행해졌을까. 다음 달인 1936년 6월호 『出版警察報』에 실린 「差押其の他執行狀況」에 따르면 北海道에서 九州에 걸쳐 처분이 집행되어 약 20%의 ‘差押率’을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경찰 측도 “다수 부현(府縣)의 집행이 우선 주목할 만하다”라고 실적을 평가했다.[70]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초판본(2011년 2월에 東京의 고서점에서 구입)은 241~242쪽과 247~250쪽이 잘려 나간 상태다. ‘삭제 처분’ 흔적으로 판단된다.

일본의 『朝鮮社會史讀本』 검열 양상(241~242쪽 잘려나감)

일본 전국 도서관을 중심으로 소장이 확인되는 초판본을 ‘전수 조사’한 결과 전체의 약 30%에서 해당 쪽이 잘려나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사회사독본』은 초판이 내용 일부에 대해 ‘삭제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정판을 낸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사회사독본』 초판 삭제 처분 실행 여부 ※ 1~19는 ‘ CiNii Books’에서 검색한 결과를 토대로 도시샤대학 도서관을 통해 전국 도서관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이다.
번호 소장처 소장처상세 삭제상황 특이사항
1 BerlinStabi 미확인
2 九大
3 京大法 受入: 1936.12.8.
4 京大経 経済図 受入: 1936.12.8.
5 和光大
6 天津図 日本文庫 미확인
7 山口大 受入: 1936.6.20.
8 弘大 本館
9 東大文 韓国朝鮮 잘려나감 붉은 글자로 다음과 같은 기재. 240쪽 좌상에 ‘241 242’, 243쪽 우상에 ‘二頁抹消’, 249쪽 우상에 ‘247 248 抹消’. 249~250쪽은 잘려나가지 않았으나 목 부근에 두 곳 찢어져 있음.

受入: 2004.11.30.

10 法大 多図
11 滋県大① 受入: 2004.3.31.
12 滋県大② 잘려나감 受入: 2004.3.31.
13 神大社会
14 神市図 미확인
15 神戸市外大
16 立命館 잘려나감 241~242쪽은 잘려나간 내용을 손으로 다른 종이에 써서 붙임. 247~250쪽은 일단 잘려나간 쪽을 그대로 다시 붙임. ‘梗石韓吉彦蔵書之印’ 날인.
17 立大 잘려나감
18 静大
19 早大中央
20 서울대 心岳文庫
21 연세대 국학자료실 잘려나감
22 홍종욱 잘려나감 ‘難波所蔵’ ‘学書 号’ 날인.
23 미즈노 나오키 저자가 改造社에 보낸 증정본. 여러 곳에 저자에 의한 수정 흔적.

조선연구와 민족통일전선

1930년대 조선 연구 붐이 찾아왔다. 그 중심에는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조선학 운동이 있었다. 1931년 5월에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가 창립되었고, 1932년 5월에는 동아일보가 단군릉 수축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1934년에는 정약용을 기리는 다산 서세 99주년 기념사업이 벌어졌다.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통해 우리 역사에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관철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자 백남운도 1935년의 다산 서세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가했다. 백남운은 1935년 7월 『동아일보』의 ‘정다산 서세 백년 기념’ 지면에 정인보, 현상윤과 함께 기고했고, 8월에는 『신조선』에 안재홍, 정인보, 백낙준 등과 함께 글을 실었다. 김태준은 1933년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가요개설」을 70회 이상 연재했고, 1935년 7월에는 『조선일보』 ‘다산 선생 백년제 특집’에 참가했다.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강조는 1930년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71] 소련에서는 10월 혁명 이래 러시아 민족주의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1930년대 들어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다.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반파시즘인민전선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론은 대중의 민족 감정,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1930년대 초반 찾아온 조선 연구열은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혹은 반제 민족통일전선론적 성격을 가졌다.[72] 식민지 조선의 사회운동은 1930년 전후에 정점을 맞은 뒤 침체에 빠졌다. 계급지상주의, 국제주의에 대한 비판 속에 조선이라는 주체가 새로운 저항의 근거로 떠오른 것이다. 백남운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족적 대립과 자본주의적 대립이 거의 서로 일치한다”고 민족통일전선의 근거를 밝혔다.[73]
사회주의 운동 주류에서는 조선 연구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카프(KAPF)의 서기장을 지낸 바 있는 임화는 ‘조선학의 수립’, ‘조선문학의 재건’, ‘조선적 현실의 분석’ 등 말뿐인 ‘과학적 환상’이 ‘비관주의와 패퇴 정신’을 은폐한다고 지적하고, ‘모스크바에서 조선으로’라는 풍조 비판했다.[74] 김남천은 “이순신의 백골을 땅 속에서 들추어서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 속에서 찾아다가 사당간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을 하수구 속에서 찬양하는 사람” 등을 비판했다. 이순신, 단군, 정약용을 좇는 1930년대 조선 연구열을 비꼰 셈이다.[75] 프로핀테른 극동부에서 파견되어 비합법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던 권영태(權榮台)경성제대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와의 협의에서, ‘사회민주주의’, ‘민족개량주의’와 더불어 백남운의 『朝鮮社會經濟史』를 들어 조선인 사이에 “이상한 충동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76]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태도는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청원은 1938년 5월 이후 다시 비합법 공산주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朝鮮革命論」을 집필했다.[77]「朝鮮革命論」에서는 “토착 부르주아 자신이 상업자본적 고리대적 흡혈귀적 존재로서 농촌에서 봉건적 제관계와 연결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한 축이 되어야 할 건전한 민족부르주아지의 존재를 부정한 셈이다. 혁명운동을 통해 세워야 할 “정권의 성질은 당연히 소비에트적 형태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라고 주장했다. 통일전선의 필요성도 언급하지만 “본문의 주지와 모순되는 혹덩어리 같은 것”[78]이었다.
이청원은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비관적이었다. 1936년 『조선사회사독본』 서문에서는 ‘조선학’을 ‘유교 훈화적, 정책적, 반봉건적’이라고 지칭하고, “그 공식의 천재는 ‘단군’을 분식하고 그 전체적인 영웅은 ‘이순신’의 옷을 빌려 입고, 그 재간 있는 사람들은 ‘정다산’의 가면을 쓰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79] 1937년 11월 동아일보에 실은 글에서는 “지금 서구 천지에서는 문화전통의 옹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와 사정이 다른 우리의 경우는 문화전통 옹호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옹호할 문화의 토대 즉 현실적 지반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발견은 없다. (중략) 우리는 부정하고 비판하고 극복할 문화전통밖에 없다.”고 밝혔다.[80] 1937년 11월 동아일보에 실은 글에서는 “지금 서구 천지에서는 문화전통의 옹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와 사정이 다른 우리의 경우는 문화전통 옹호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옹호할 문화의 토대 즉 현실적 지반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발견은 없다. (중략) 우리는 부정하고 비판하고 극복할 문화전통밖에 없다.”고 밝혔다.[81]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부정은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부정과 연동했다. 이러한 이청원의 태도에 대해 민족주의자들 역시 거리를 두었다. ‘蓮湖亭人’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文化領域에 顯現되는 惡質的 諸流에 抗하야」(『批判』, 1937.2.)라는 글에서는, 안재홍이 『신조선』을 편집하면서 사회주의자로서 조선학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던 이청원, 한흥수 두 사람의 논문을 ‘보이콧트’했다고 고발했다.[82] ‘蓮湖亭人’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연호정(蓮湖亭)이 울진에 있는 정자임을 고려하면, 울진 출신의 사회주의자로서 조선 연구에도 깊이 가담한 최익한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최익한과 이청원의 인연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북한에서의 연구

논점

세계사적 보편성은 선이고 아시아적 특수성은 악인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강조한 백남운아시아적 특수성을 주목한 이청원을 놓고 보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백남운과 그렇지 못한 이청원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달리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에서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고려했다. 나아가 해방 직후인 1946년의 글에서는 원시공산사회와 고대사회 사이에 ‘초(初)계급사회’로서 아시아적 단계를 상정하고, 이후 아시아적 노예제, 아시아적 봉건제가 이어진다고 서술했다. 일찍이 자신이 비판했던 1930년대 일본 강좌파 역사학의 시대 구분을 수용한 셈이다. 다만 북한 정권에 참여한 후에는 고조선을 전형적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등 사적 유물론의 기계적 적용으로 회귀했다. 신생 독립국의 국민사 서술이라는 시무에 쫓겨, 세계사적 보편성과 아시아적 특수성의 조화라는 과제는 중단된 것이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높게 평가하는 등 내재적 발전의 모순을 중시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의 좌파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점차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렇게 변화된 역사상은 『조선사회사독본』(1936)에 담겼다. 이후 이청원과 백남운은 날 선 비판을 주고받았다. 백남운이 내재적 모순 발전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했다면, 이청원은 아시아적 정체성을 직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해방 후 한국사 연구에서도 아시아적 특수성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했다. 자칫 공식주의에 빠지기 쉬운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 온 미야지마 히로시 님, 이영훈 님의 연구를 생각한다면, 세계사적 보편성은 선이고 아시아적 특수성은 악이라는 단순한 규정을 내리기는 어렵다.“일찍이 미야지마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입각한 조선사의 시기 구분을 시도하여,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준으로 ‘이조기’를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宮嶋 1984b, 64)으로 규정한 바 있다. 나아가 소농사회론의 다른 한 사람의 유력한 논자인 이영훈은 미야지마의 주장을 발전시켜, 소농민 경영의 안정성에 바탕한 지주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중시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였다(이영훈 1987, 93-94). 흥미로운 사실은 미야지마의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간의 소농사회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스스로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했던,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영훈에 의해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되었던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를 ‘초기 근대’(宮嶋 2004, 180)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홍종욱, 「내재적 발전론의 임계 –가지무라 히데키와 안병태의 역사학-」, 강원봉 외 편,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아연출판부, 2014, 98~99쪽.

제국의 사회주의자 이청원

이청원은 식민지 사회주의자라기보다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정영환 님은 재일조선인 운동사를 설명하면서 1930~1955년을 “일본 공산당 입당기”라고 파악했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조선인들은 1930년 무렵 조선인 독자 조직을 해체하고 일본인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바로 이청원이 걸었던 길이다. 1920~30년대 비식민화(decolonization)의 방향을 둘러싸고 제국 내 비식민화와 탈제국 비식민화가 길항했다. 전자가 동화(자치?)라면 후자는 독립(자치?)이었다. 이청원처럼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인과 같은 조직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은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일본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선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연대하여 제국의 부르주아지에 맞서고자 한 이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민족부르주아지와의 연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45년 이후에도 미국의 일본 점령, 중국의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으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 1955년 재일조선인들은 북한의 해외공민이라면서 일본공산당을 탈퇴하여 총련 즉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결성했다. 도베 히데아키 님은 1955년의 변화를 ‘일본공산당의 국민화’라고 정의했다. 북한에서는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소련계와 연안계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동아시아 제국 질서의 해체와 국민국가 체제의 확립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제국의 사회주의자 이청원의 역사 인식은 설 자리를 잃었다.

논저 목록

이청원 논저 목록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
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
일자
분류
李靑垣 외 今日朝鮮敎會의 發展에는 人物이냐? 金錢이냐?
: 紙上討論 續論
宗敎敎育 1(8) 朝鮮主日學校
聯合會
193008 雑誌
李靑垣 新興? 「滿洲國」에 朝鮮農民의 生路,
民族改良主義策動을 粉碎하라!
우리동무 3 193301 雑誌
李靑垣 日本에 잇서서의 經濟恐慌은 어듸로 가나 新階段 1(8) 朝鮮之光社 193305 雑誌
李靑垣 世界經濟恐慌과 國際經濟會議
-國際經濟會議는 무엇을 할까?-
新階段 1(9) 朝鮮之光社 193306 雑誌
李靑垣 資本主義 第三期와 石油
-石油을 支配하는 者는 世界을 支配한다-
大衆 1(3) 大衆科學
硏究社
193306 雑誌
李靑垣 朝鮮農業の根本問題 大衆經濟 193401 雑誌
李淸源 朝鮮に於ける小作農の狀態と
小作令の制定(資料)
經濟評論 1(3) 193411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讀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雑誌
李淸源 朝鮮に於ける階級分化に就いて 文化集團 3(2) 193502 雑誌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朝鮮封建社會史 唯物論硏究 30 193504 雑誌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は何か 生きた新聞 1(5) 193505 雑誌
李淸源 朝鮮封建社會史(二) 唯物論硏究 31 193505 雑誌
李淸源 朝鮮の火田民とは? 勞働雜誌 1(3) 193506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の硏究について 社會 4(6) 193507 雑誌
李淸源 朝鮮原始氏族共産體硏究 東亞 8(7) 193507 雑誌
李淸源 亞細亞的生産樣式에 關하야 新東亞 47/5(9) 新東亞社 193509 雑誌
李淸源 震檀學報 第三卷을 읽고(上)(中)(三)(完) 東亞日報 193511
09석3,
12석3,
13석3,
14석3
雑誌
李淸源 朝鮮人思想에 잇어서의
「아세아的」形態에 (對하야)(一)-(五)
東亞日報 193511
30석3,
1201석3,
03석3,
04석3,
05석3
雑誌
李淸源 昨年朝鮮學界의 收穫과 趨勢一考(1)-(10) 朝鮮中央日報 19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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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조(4),
14조(4),
15조(4),
16조(4),
18조(4),
21조(4),
22조(4),
23조(4),
24조(4)
雑誌
李淸源 昨年中 日本學界에 나타난
朝鮮에 關한 論著에 對하야(一)(二)(三)(完)
東亞日報 193601
01기10-1,
04기1-1,
05,
06
雑誌
李淸源 災害朝鮮의 救濟策/朝鮮은 災害의 땅!/
克服策의 再檢討, 自然의 暴威 征服은 무엇으로?
社會的 條件의 緩和는 어떠케?
//「問題는 本質把握 社會的條件 認識必要」
東亞日報 19360101기4 雑誌
李淸源 古典硏究의 方法論
-(먼저)文化遺産에 對한 批判的 態度-(1)(2)(3)
朝鮮日報 193601
03석(3),
06석(3),
07석(5)
雑誌
李淸源 現代文化에 對하야 朝鮮中央日報 19360206 雑誌
李淸源 時事小感
-두가지 問題에 對하야-(1)(2)(3)
朝鮮日報 193602
15석(5),
16석(6),
19석(5)
雑誌
李淸源 朝鮮原始社會硏究 批判 4(1/2) 批判社 193603 雑誌
李淸源 檀君神話에 對한 科學的 批判
-懷古的 文辭의 流行을 보고서-(一)(二)(完)
朝鮮中央日報 193603
05조(4),
193603
06조(4),
193603
07조(4)
雑誌
李淸源 朝鮮農業의 生産規模(一)(二)(三) 批判 4(3),
29,
35
批判社 193604,
06(부분결),
3702
雑誌
李淸源 朝鮮經濟의 特殊性
-現階段朝鮮經濟機構의 側面的硏究-
批判 4(8) 批判社 193610 雑誌
李淸源 「朝鮮의 얼」의 現代的 考察 批判 5(3) 批判社 193703 雑誌
李淸源 「人乃天主義」의 現代的 考察
-人乃天主義의 歷史的生成의 分析-
批判 5(3) 批判社 193703 雑誌
李淸源 文化의 特殊性과 一般性
-그(것의) 成立過程에 對한 解明-(1)(2)
朝鮮日報 193708
08석(5),
193708
10석(5)
雑誌
李淸源 朝鮮의 文化와 그 傳統(一)(二)(三) 東亞日報 193711
02조(4),
03조(4),
05조(4)
雑誌
李淸源 古代社會新羅의 花郞制度再批判(一)(二)(完) 東亞日報 193802
06조(4),
08조(4),
09조(4)
雑誌
李淸源 朝鮮에 잇서서의 封建的 構成의 成立過程(一)(二)
-高麗의 社會的 性格-
批判 6(5),
6(6)
批判社 193805
,06
雑誌
李淸源 朝鮮에 잇서서의 封建的 構成의 成立過程(三)
-(六)(完)-麗末의 社會的 性格-
批判 6(7),
6(8),
6(9),
6(11),
6(12)
批判社 193807,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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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청원 력사 과학의 현상과 전망(1)-(4) 민주조선 194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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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원 臨政의 貨幣政策 國民日報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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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청원 10월 혁명의 동방 식민지 피압박 민족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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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원 김두봉론 조선인민보 19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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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맑스와 民族問題
-그의 記念日을 맞이하야-(上)(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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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日本共産黨의 朝鮮人指導者 金天海論 新天地 1(6) 서울新聞社出版局 194607 雑誌
李淸源 變動되는 國際情勢와 朝鮮 新天地 1(7) 서울新聞社出版局 194608 雑誌
李淸源 파시즘이 乱舞하는 南朝鮮 朝蘇文化 2 조선노동당출판사 194609 雑誌
李淸源 解放第一年回顧 其四 朝鮮經濟의 動向 新世代 1(4) 서울타임스社 194609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의 基底로서의 半封建的 農業關係 朝鮮經濟 1(5) 朝鮮經濟社 194609 雑誌
李淸源 朝鮮民族文化에 對하여 文化戰線 2 194611 雑誌
李淸源 民主主義와 靑年 民主主義
十二講
友印書館 19461115 雑誌
李淸源 農民戰爭으로서의 東學亂
-發生의 歷史的 條件-
朝蘇文化 3 194612 雑誌
李淸源 建國思相總動員運動의 社會的 根據 人民 2(1) 194701 雑誌
李淸源 十月革命은 全世界 勤勞人民들을 團合시켯다 朝蘇文化 8 194711 雑誌
李淸源 강화조약의 력사적 교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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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諸問題 1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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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08 雑誌
李淸源 김일성장군 빨지산투쟁의 력사적 의의 歷史諸問題 2 朝鮮歷史
編纂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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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갑오농민전쟁의 성격과 그 력사적 의의 歷史諸問題 3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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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二十世紀初 朝鮮의 對外關係와 國內情形 歷史諸問題 4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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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청원 반일 민족 해방 투쟁에 있어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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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序文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04 単行本
李淸源 發行者序(序文은 중복) 朝鮮社會史讀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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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序文 朝鮮讀本-朝鮮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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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の読者のみなさまへ 朝鮮近代史 大月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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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원 朝鮮近代史硏究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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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 単行本
리청원 미제의 조선 침략사 국립 출판사 19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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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원사
리청원 저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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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単行本
리청원 조선 민족 부르죠아지의 특질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1955 単行本
Ли Чен Вон ; перевод с корейского под редакцией Сон Дин Фа 서문 Имдинс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592-98 г.г. Пхеньян : Типография издательства Новая Корея 19550128 単行本
리청원 임진조국전쟁
(一五九二-一五九八)
국립출판사 19550128 単行本
李淸源 서문 壬辰衛國戰爭(195501) 19550128 単行本
리청원 조선은 왜 과거 일제의
식민지로 되였었는가
조선
로동당
출판사
195512 単行本
리청원 조선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의
조국광복회의 역할
조선
로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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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자료

  1.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미즈노 나오키(水野直樹) 소장본). 저자 이청원의 改造社 증정본 : 저자 서명 및 수정 흔적 있음.
  2.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에 대한 검열 처분 : 「内地出版物取締狀況」, 『出版警察報』 93, 1936.6.
  3.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에 대한 검열 처분 : 「差押其の他執行狀況」, 『出版警察報』 94, 1936.7.
  4. 일본의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 검열 흔적(홍종욱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감
  5. 조선의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 검열 흔적(연세대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감
  6.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의 리쓰메이칸(立命館大學)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간 부분을 손으로 다시 씀
  7. 일본 경찰이 이청원을 요주의·요시찰인물로 관리한 기록 : 「豊特高秘第1700號 要注意鮮人所在不明手配ノ件」(1932.6.24.)(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8. 이청원의 전향 기록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思想研究資料 特輯 第九十五号 左翼前歴者の転向問題に就て』, 司法省刑事局, 1943.8.(『社會問題資料叢書 第1輯』, 1972)
  9. 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 ① 이청원 사진1, ② 이청원 사진2, ③ 간부이력서, ④ 자서전 외 여러 문서 합철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력사연구소, 「서문」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집』, 과학원출판사, 1955. : 숙청 후 이청원 이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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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임영태, 「북한의 권력과 역사학 북으로 간 맑스주의 역사학자와 사회경제학자들 - 김광진, 김석형, 김한주, 박문규, 박시형, 백남운, 이청원, 인정식, 전석담」, 『역사비평』 6, 역사비평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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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송찬섭, 「월북 이후 최익한의 학문과 집필활동」, 『역사학연구』 70, 호남사학회, 2018.
  5. 홍종욱, 「북한 역사학 형성에 소련 역사학이 미친 영향」, 『인문논총』 77(3),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2020.

주석


  1. 이극로의 생애 중 <출생과 성장>부터 <구미 시찰과 전국 일주>까지는 이극로의 자서전 『고투사십년』(을유문화사, 1947)의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를 기본 자료로 참고하였다. 해당 부분에서 인용 표시가 없는 문장은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에서 가져온 정보임을 밝혀둔다.
  2.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34쪽(Kolu Li, “Lebenslauf”).
  3. 차민기,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 『지역문학연구』 2, 1998, 9쪽. 이는 이종무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종무는 이극로의 맏형 이상로(李祥魯)의 장손이며 배제학교 재학 당시 이극로의 집에서 수년 간 기거하였다고 한다. 차민기, 같은 책, 10쪽.
  4.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1912년 4월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정황상 1911년으로 추정된다는 지적도 있다. 차민기,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 연구」,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96쪽.
  5.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84쪽.
  6. 이극로가 진학할 당시의 교명은 ‘사립동제의공전문학교(私立同济医工专门学校)’였으며 이 학교는 독일 의사 에리히 파울룬(Erich Paulun)이 1907년 설립‧경영한 학교이다.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67쪽.
  7. 이극로, 「(三一運動의 追憶) 上海에서 留學生總務로」, 『朝光』 12-1, 1946.3.
  8.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68-69쪽.
  9.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28쪽.
  10.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가 말하고 있는 ‘서양어’란 독일어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시기 이극로는 중국어와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였고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3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75-76쪽.
  11. 1945년까지 독일령 ‘슈테틴’이었으며 현재는 폴란드령 ‘슈체친’으로 부른다.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1쪽.
  12. 이극로, 「中國上海의 大學生活:中國上海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5, 1936.5, 148쪽.
  13. 이극로, 「中國上海의 大學生活:中國上海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5, 1936.5, 148쪽.
  14.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白林大學”(베를린대학)이라고 지칭한다. 이극로가 입학할 당시 교명은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였다.
  15.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289쪽(Kolu Li, “Lebenslauf”);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0쪽.
  16.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쪽.
  17. 이극로, 「朝鮮語辭典과 朝鮮人」, 『別乾坤』 4-7, 1929.12; 「玉에서틔골르기 縷心刻骨半生獻身, 한글標準語査定에는 으뜸되는殊勳者 朝鮮語辭典編纂에血汗勞心: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조선일보』, 1937.1.1;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89쪽.
  18. 홍선표,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 446-447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0쪽.
  19.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
  20.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
  21.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9쪽, 151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473쪽.
  22.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66-196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38-34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4쪽.
  23.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41쪽(Kolu Li,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
  24. 이극로가 ‘세계약소대회’라고 회고하는 이 대회는 반제국침략주의대연맹이 개최한 ‘Kongresses gegen Koloniale unterdrückung und Imperialismus’(영문 공식 명칭은 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국제 반식민압제·제국주의 대회)이다.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151쪽.
  25.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1쪽.
  26. 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정규화,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 범우, 2012, 71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에서 재인용.
  27. 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
  28.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
  29.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10-12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6-477쪽.
  30.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44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76쪽.
  31.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35쪽;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8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47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8쪽(Li Kolu,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 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 Jg.30, Berlin : Ostasiatische Studien, 1927, pp. 99-110.).
  32.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倫敦大學 政治經濟學部”라고 지칭한다.
  33.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3-484쪽.
  34.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0쪽, 307쪽.
  35.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1쪽. 1928년 5월 15일에 육성으로 녹음한 레코드(석지훈 발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홈페이지에 남아 있다.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3m.media,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3m/f2.media,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27.media에서 청취 가능하며 이는 각각 Alphabet et sons du coréen (1), Sons du coréen (2), L'homme est dieu : extrait de Thyon-to-kyo-ri(조선 글씨와 조선 말소리(1), 조선 말소리(2), 인내천: 천도교리 발췌)이다. http://egloos.zum.com/veritasest/v/1964446; 조준희, 「고투 13년 : 『이극로 전집』 집필 회고와 유럽 정보」, 『근대서지』 20, 2019, 133-134쪽; 양효경, <"조선 글씨는 28자 올시다"…최초 한글 음성 자료>, MBC 뉴스 데스크, 2019.8.15. 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52012_28802.html
  36. 공진항, 「잊지 못할 일 생각나는 사람들」, 『이상향을 찾아서』, 탁암공진항희수기념문집간행위원회, 1970, 603-604쪽.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96쪽에서 재인용.
  37.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401-40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4-115쪽.
  38.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39.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0),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1쪽).
  40.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0),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6쪽).
  41.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1),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57쪽).
  42.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1), 『特高月報』(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62쪽).
  43.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6쪽.
  44. 內務省警保局, 「在日朝鮮人運動日誌」(1942), 『社会運動の状況』(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四卷』, 三一書房, 1976, 1094쪽).
  45. 林和, 「教養과 朝鮮文壇」, 『人文評論』 1939.11.(임화문학예술전집 편찬위원회 편, 『임화문학예술전집5 평론2』, 소명출판, 2009, 185쪽).
  46. 임화가 신문학사를 집필한 의미와 백남운 등에게서 받은 영향에 대해서는 장문석, 「임화의 참고문헌: 「개설 신문학사」에 나타난 임화의 “학술적 글쓰기”의 성격 규명을 위한 관견(管見)」, 『관악어문연구』 34, 2009.12., 참조.
  47. 임화, 「개설 신문학사」, 『임화문학예술전집2 문학사』, 22쪽.
  48. 김남천, 「작품의 제작과정」, 『조광』 44, 1939.6.(정호웅·손정수 엮음, 『김남천 전집 Ⅰ』, 박이정, 2000, 499쪽).
  49.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7쪽.
  50.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200~203쪽.
  51.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9·203쪽.
  52.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53. 梶村秀樹. 1977c(1993). “日本帝国主義の問題.” 『梶村秀樹著作集 第2巻 朝鮮史の方法』. 東京: 明石書店. 318쪽.
  54.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読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55.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朝鮮封建社會史」, 『唯物論硏究』 30, 1935.4.
  56. 李淸源, 「亞細亞的生産樣式에 關하야」, 『新東亞』, 1935.9., 52·56쪽.
  57. 李淸源, 「朝鮮封建社會史(二)」, 『唯物論硏究』 31, 1935.5., 125쪽.
  58. 李淸源, 「朝鮮原始氏族共産體硏究」, 『東亞』 8-7, 1935.7., 113쪽.
  59. 李淸源, 「昨年中 日本學界에 나타난 朝鮮에 關한 論著에 對하야(一)(二)(三)(完)」, 『東亞日報』, 1936.1.1~6.
  60. 李淸源, 「朝鮮農業의 生産規模(一)(二)(三)」, 『批判』, 1936.4.・1936.6.・19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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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 旗田巍, 「批判と紹介:李清源著朝鮮社会史読本」, 『歴史学研究』 6(9), 1936.9.
  63. 金佑憲, 「李清源氏著 『朝鮮社會史讀本』를 읽고(1)~(10)」, 『朝鮮中央日報』 1936.7.2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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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李北滿, 「朝鮮に於ける土地所有形態の変遷」, 『歴史科学』 1-4, 1932; 「日清戦争論」, 『歴史科学』 2-4, 1933; 林田朝人, 「李朝末葉の経済状態に関する若干の考察: 特に資本制生産様式への転化の基本的前提条件の欠如に就いて」, 『歴史科学』 5-12, 1936.
  68. 広瀬貞三, 「李清源の政治活動と朝鮮史研究」,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 7, 2004.3, 38쪽.
  69. 「内地出版物取締狀況」, 『出版警察報』 92, 警保局圖書課, 1936.5., 136쪽.
  70. 「差押其の他執行狀況」, 『出版警察報』 93, 1936.6., 132·170쪽.
  71. 소련, 유럽, 코민테른의 민족에 대한 강조는 홍종욱, 「반파시즘 인민전선론과 사회주의 운동의 식민지적 길」, 『역사와현실』 118, 2020.12., 336~337쪽.
  72. 쓰루조노 유타카(鶴園裕)는 조선학운동을 일종의 ‘통일전선적 학문운동’으로 평가했다. 鶴園裕, 「近代朝鮮における国学の形成-「朝鮮学」を中心に」, 『朝鮮史研究会論文集』 35, 1997.10.
  73. 白南雲, 「朝鮮経済の現段階論」, 『改造』 1934.4., 69쪽.
  74. 임화, 「역사적 반성에의 요망」, 『조선중앙일보』 1935.7.4.-16.(『임화문학예술전집2 문학사』, 360쪽).
  75. 김남천, 「이광수 전집 간행의 사회적 의의」(1935.9.5.-9.7.)(정호웅·손정수 엮음, 『김남천 전집 Ⅰ』, 박이정, 2000, 127쪽).
  76. 「三宅城大教授の赤化運動事件」, 『思想彙報』 2, 1935.3., 37쪽.
  77. 일본 관헌은 이청원(李青垣), 송군찬(宋君瓚), 황병인(黄炳仁) 세 명의 공동 저작이라고 판단했다. 「朝鮮革命論」, 『思想彙報』 19, 1939.6.
  78.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던선-』, 역사비평사, 1991, 158쪽.
  79.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 1~2쪽.
  80. 이청원, 「朝鮮의 文化와 그 傳統(一)(二)(三)」, 『東亜日報』, 1937.11.2.~5.
  81. 이청원, 「朝鮮의 文化와 그 傳統(一)(二)(三)」, 『東亜日報』, 1937.11.2.~5.
  82. 蓮湖亭人, 「文化領域에 顯現되는 惡質的 諸流에 抗하야」, 『批判』, 1937.2., 112쪽. 조형열,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의 학술문화기관 구상과 “과학적(科學的) 조선학(朝鮮學)” 수립론」, 『역사학연구』 61, 2016.2.,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