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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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석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5월 25일 (화) 16:03 판 (새 문서: {{인물정보 |사진= |사진출처= |대표명=이청원(李淸源) |한글명=이청원 |한자명=李淸源 |영문명=Lee Cheong-Won |가나명= |이칭=李靑垣 |성별=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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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원(李淸源)
출처 :
 
한글명 이청원 한자명 李淸源 영문명 Lee Cheong-Won 가나명 이칭 李靑垣
성별 남성 생년 1914년 몰년 ?년 출신지 함경북도 북청군 전공 역사학


개요

사회주의 운동가. 경제사학자. 1914년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193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토목건축 노동에 종사하며 사회주의 운동에 관여했다. 1935년 무렵 도사카 준 등과 함께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했다.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조선사회사독본』(1936) 등을 발표해 백남운과 논쟁을 벌였다. 해방 이후 북한 정권에 참여하여 조선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과학원 사회과학부문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조선근대사연구』(1947)가 중국어, 러시아어, 일본어 등으로 번역 출판되는 등 건국 초기 북한 역사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나,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 이후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1955)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숙청당한다.

생애

출생과 성장

1914년 함경남도 북청군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북한에서 작성한 자필 이력서와 자서전에 따르면, 1914년 2월 6일 함경남도 북청군 이곡면 초리(현 함경남도 덕성군) 외가에서 출생했고 본적은 함경남도 북청군 북청면 동리이다.[1]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14년 4월 18일에 출생했고, 본적은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신풍리 59(咸鏡南道 豊山郡 里仁面 新豊理 59, 현 양강도 김형권군 김형권읍)이다.[2] 1922년 외조모 사망 후 부모가 있는 풍산군으로 이주했다.[3] 가정 형편에 대한 언급은 엇갈린다. 북한에서 작성한 자서전에는 ‘극빈한 빈농으로 그날그날의 호구도 걱정되는 정도’였다고 적었지만,[4] 1940년대 일본 관헌에 제출한 전향서에는 ‘상당한 농가’에서 태어났다고 적었다.[5]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알기 어려우나, 상황에 따라 말이 바뀐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풍산공립보통학교를 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작성한 이력서와 자서전에는 1923년 4월에 풍산 ‘인민학교’에 입학해 1929년 3월에 졸업했다고 적었다.[6] 다만 풍산군 이인면에 소재한 풍산공립보통학교는 1925년에 개교했다.[7] 어려서는 기독교 신자였다. 1930년 8월 잡지 『宗敎敎育』에 조선 교회에 관해 투고한 것이 확인된다. 『宗敎敎育』 1-8호(1930.8.)의 「紙上討論 續論: 금일 조선교회의 발전에는 인물이냐? 금전이냐?」는 독자 투고란에 ‘咸南豊山 李靑垣’ 이름으로 금전보다 인물이 중요하다는 의견을 실었다. 「‘금전은 악마의 무긔’란 우리의 슬로간(표어)」이라는 제목으로, “우리의 스왈라지를 돈으로는 사지 못 한다”는 간디의 말을 인용하며, 조선의 난국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루터와 가튼 인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전향서에도 “원래 기독교 신자”라고 적었다.[8]

도일과 노동운동

1930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막노동 등을 전전하다 공산주의를 접하고 노동운동에 가담했다. 전향서를 분석한 일본 검찰 보고서에 따르면, 보통학교 졸업 후 1930년 6월에 상경해 낫토 행상, 막노동, 고물상 등을 전전하다가 공산주의를 신봉하기에 이르러 1930년 말 간토 자유노동조합 신주쿠반에 가입하고 실천 운동의 첫걸음을 내딛었다.[9] 이미 1931년 2월에는 ‘요주의’ 인물로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1931년 2월 16일부터 ‘소재 불명’으로 당시 주소는 “淀橋町 柏木 三一六 新納隆輔方”(현 東京都 新宿区 北新宿)였다. 1931년 10월에 도쿄 부근에서 열린 ‘와타마사의 날(渡政デー)’ 데모에 참가했다가 고지마치 경찰서(麹町署)에 검속되기도 했다.[10] ‘와타마사의 날’은 1928년 경찰에 쫓기다 자결한 일본공산당 지도자 와타나베 마사노스케(渡邊政之輔)를 기념하는 날이다. 일본 경찰 문서에 따르면 다시 1932년 7월 31일부터 ‘소재 불명’으로 당시 주소는 “牛込区 加賀町 一ノ三 全栄変方”였다. 같은 문서에서는 직업 낫토 행상, 별명 이현규(李炫奎), 키 5척 3촌, 보통 몸집에 머리 길고 둥글고 흰 얼굴에 눈썹 짙으며, 공산주의자로서 다수의 투쟁 경력 있다고 파악했다.[11] 1934년 9월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당시 ‘공청 중앙부 조직’,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도쿄지부 재건준비회 조사이(城西)지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12] ‘공청, 반제, 전협’ 소속 이청원은 1934년 12월 일본 검찰에서 기소유보 처분을 받았다.[13]
북한에서 작성한 이력서에 따르면 1930년 5월에 도쿄로 이주하여 토목건축 노동에 종사했다. 7월에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에 가입하고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도쿄시 성서지구 위원을 맡아 11월까지 활동했다. 이어 일본 반제동맹 도쿄시 성서지구 위원을 1932년 11월까지 맡았다. 1931년 2월에는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다. 1932년 12월부터 1933년 1월까지 일본 공산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조사자료부 지도원을 맡았다. 1933년 1월에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2월에 풀려났으나 고문으로 얻은 병 탓에 요양을 해야 했다. 1934년 5월부터 1937년 12월까지는 다시 토목건축 노동에 종사하면서 혁명 운동에 참가하고,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 서서 저술 활동을 했다.[14]
일본 관헌 기록과 스스로 작성한 이력서는 상호 보완적이다. 반제동맹,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등에서 활동한 기록은 이력서 쪽이 자세하다. 다만 관헌 기록에서 공산청년동맹 가입은 확인돼도 공산당 가입에 대한 언급은 없는데, 이력서에는 일본 공산당에 가입했다고 적었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검거 시기도 이력서는 1933년이고 일본 관헌 기록은 1934년으로 차이가 있다. 기소유보 처분은 통상 전향 의사를 밝힌 자에게 적용되었다.[15]이청원으로서는 이력서에 밝히기 싫은 사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청원이 도일한 1930년 5월은, 1928년 코민테른 제6회 대회 이후 확립된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을 해체와 전협 즉 일본노동조합 전국협의회 가입이 결정된 이후였다.[16] 이청원이 전협과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등에서 활동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한편 1933년 공산당 지도자 사노 마나부(佐野學)와 나베야마 사다치카(鍋山貞親)가 전향을 발표하자,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실질적으로 궤멸에 이를 정도의 대량전향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무렵 일본에서 활동한 조선인 사회주의자에 대한 일본 관헌의 조사를 보면, “한 사람의 전향자도 없고 오히려 內地人의 전향을 계급적 타락 내지 변절로 보면서 맹렬히 활동을 개시해 전향, 검거에 의해 조직 진영 내에 있어 內地人 구성분자의 감소에 반해서 조선인은 점차 조직 내에서 중요하게 되고 있다”는 내용이 보인다.[17] 이청원이 공산청년동맹 ‘중앙부 조직’ 등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중추에서 활약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

이청원은 후일 작성한 전향서에서 “기소유예 처분 후는 실천 운동에서 손을 뗐지만, 유물론연구회, 조선고대사연구회 등에 관계”했다고 밝혔다. 전향서를 해설한 일본 검찰 보고서에서는 1935년 8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고 적었는데, 1934년 12월의 기소유보 처분과 어떤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6쪽.

1935년에 이청원은 유물론연구회 사회과학부 주최 연구회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과 조선 봉건 사회사」(3월 9일), 「조선 봉건 사회사」(5월 11일)를 발표했다.[18] 같은 내용을 기관지 『유물론연구』에 게재하기도 했다.
유물론연구회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의 핵심적 단체였다. 이청원은 어떻게 유물론연구회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1928년 결성된 나프(NAPF, 전일본무산자예술연맹→전일본무산자예술단체협의회)는 1930년을 전후한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전성기를 이끌었는데, 1931년 11월 예술가의 공산주의화를 내걸고 코프(KOPF,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로 개조된다. 카프 도쿄지부, 무산자사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은 역시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코프에 가입하여 코프 조선협의회를 결성하게 된다. 코프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 최후의 빛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활동의 상당 부분이 조선협의회에 결집한 재일조선인에 의해 이루어졌다.[19]
코프 조선협의회는 기관지로 『우리동무』를 발간했는데, 이청원은 제3호(1933.1.1.)에 「新興? 「滿洲國」에 朝鮮農民의 生路, 民族改良主義策動을 粉碎하라!」를 투고했다.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의 중심에는 이북만이 있었다. 나카노 시게하루가 쓴 시 「비내리는 품천역」(『改造』 1929.2.)에 부친 “이북만, 김호영에게 보낸다”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북만은 프롤테타리아과학연구소 조선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유물론연구회는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진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를 대체한 것으로 보통 받아들여진다. 이청원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과 재일조선인 문화 운동이 만나는 지점 가까이에 있던 셈이다. 이북만은 스스로 역사학자이기도 했다. 기소유보 처분을 받고 풀려난 이청원이 1935년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하며 역사학 논문을 발표하게 된 데는 이와 같은 인연이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청원은 『朝鮮社會史讀本』(1936)의 서문에서 책 출판을 도운 “黑田, 李北滿 및 戶坂潤, 朴容七” 등에게 감사의 뜻을 밝혔다. 도사카 준(戸坂潤)은 당대 일본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유물론연구회의 리더였다. 도사카는 유물론연구회 활동의 하나로서 이청원의 논문 발표를 든 바 있다.[20] ‘黑田’는 사회주의 활동가이자 역사학자인 구로다 젠지(黑田善次)를 가리킨다. 구로다 역시 유물론연구회에서 활동했다. 박용칠은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하던 조선인 유학생이다. 1936년 6월에 ‘朝鮮留學生硏學會’을 만드는 재동경 조선인 유학생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다.[21] 이청원의 역사학 연구는 이북만, 박용칠 등 재일조선인 문화운동과 도사카, 구로다 등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문화 운동의 접점에서 이루어졌음을 엿볼 수 있다.
이청원은 1936년 11월 구로다 젠지가 인민전선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중국에 건너가는 것을 알고, 조선에 관한 자료로서 동양협회 발행 잡지를 건네고 그를 격려했다.[22] 1936년 12월 10일 재동경 조선유학생연학회에서 「조선경제의 현단계」라는 강연을 했다. 출석자는 140명이었다.[23] 1937년 5월부터 1938년 7월 사이에는 조선인 학생들에게 마르크스의 ‘지대론’ 등의 좌익 문헌을 읽도록 권하고, 조선 사회운동을 공산주의적 입장에서 해설하여 좌익의식을 높이려고 했다.[24]
후일 한국의 비전향 장기수가 되는 이인모는 193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공업고등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이인모는 자서전에서 그 무렵 이청원의 도쿄 생활에 대해 적고 있다. 이인모는 이청원을 “외삼촌과 비슷한 연배의 고향 분”으로 언급했다. 이인모의 고향은 함경남도 풍산이다. 이인모에 따르면 이청원은 우에노(上野) 역 앞에서 구두닦이를 했는데 벌이가 좋아 가끔 용돈을 받아 썼다고 한다. 하루는 경시청 내선과의 고위층이 찾아와 “선생님이 이런 데서 구두닦이를 하면 우리가 마음이 놓이질 않습니다. 좋은 직업을 주선해 드릴 테니 제발 이 일을 그만두시는 게 어떻습니까?”라고 하는 걸 들었다고 적었다.[25]
이청원은 일본의 사회주의운동과 좌익 문화운동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면서, 한국과 일본의 미디어에 조선 역사에 관한 논문을 다수 발표했다. 그런 이청원을 조선인 일본 유학생들은 존경하면서 따랐고, 일본 경찰은 ‘조선인 공산주의운동의 거두’[26]로서 경계했다.

내재적 발전론에서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기소유보 처분으로 풀려난 1934년 말부터 다시 잠적하게 되는 1938년 중반까지 조선 역사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본명 ‘李靑垣’ 대신 새롭게 ‘李淸源’을 필명으로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유물론연구』를 비롯한 일본 미디어에 투고했으나, 1935년 9월부터 조선의 신문과 잡지에 글을 실었다. 논문 발표 공간을 일본에서 조선으로 옮긴 이유는 확실치 않다.
첫 역사학 논문은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에 대한 서평이었다.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봉건제로 보고, 원시공산제 → 노예제(삼국시대) → 봉건제=아시아적 생산양식(통일신라~이조)이라는 시대구분을 제시했는데, 백남운의 역사상과 동일했다. 또한, 사노 마나부의 타율성론, 정체성론적 한국사 인식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을 지지했다.[27]
이청원은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독자적인 사회형태가 아니라 ‘봉건제도의 동양적 변형’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히라노 요시타로(平野義太郎)에 대해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하나의 사회구성체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사적 유물론과 모순된다고 비판했다.[28] 이청원은 마자르 학파를 ‘트로츠키주의적 편견’을 가졌다고 비판하고, 그 ‘정치적 결론’은 “동양에는 봉건주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당면한 정치적 과정은 이른바 시민적인 그것이 아니라 노동자적인 그것이다”가 될 거라고 지적했다.[29] 중국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 트로츠키주의로 받아들여지면서 반(反)봉건이라는 과제 즉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경시한다고 비판받은 상황을 의식한 언급이었다.
이청원은 한국사에서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중시했다. 19세기 말까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존속했다는 김광진의 이론을 비판하고, ‘내재적 모순의 발전’에 따라 조선 중기부터 봉건제 즉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로서 제한적이나마 ‘매뉴팩처’가 존재한 점과 더불어 “상공업의 지방화, 보편화는 봉건제도의 붕괴와 자본주의 발생의 역사적 사회적인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설명했다. 李淸源, 「朝鮮封建社會史(二)」, 『唯物論硏究』 31, 1935.5., 125쪽.

고대 사회에 대해서도 금속 사용은 중국에서 전해졌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원시 사회 생산력의 내적 필연에 바탕한 발전 그 자체여서 외부에서 전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30]
또한, 모리타니 가쓰미(森谷克己)의 역사 인식을 봉건제 결여론이라고 지적하고 후쿠다 도쿠조(福田徳三)의 “낡은 교리를 노예적으로 복사했다”고 비판했다.[31]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강조하던 이청원은 1936년 들어 아시아적 정체성론으로 전환한다. 먼저 봉건제 붕괴의 내재적 요인으로서 주목하던 상인자본에 대한 평가가 바뀌었다. 이청원은 상인자본과 고리대자본이 양반과 직접 결부되어, 박해를 받기는커녕 법규적 보호를 받았다고 비판적으로 바라봤다.[32] 이청원은 1936년 4월 『朝鮮社會史讀本』을 펴냈는데, 원시공산제→노예제(삼국시대~고려)→봉건제(이조)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했다.[33] 이 책의 특징은 고려까지를 노예제 사회로 보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대한 비판 없이 한국사를 정체성론적으로 이해한 데 있었다.
하타다 다카시(旗田巍)는 『歷史學硏究』에 쓴 서평을 통해 고려 노예제론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고 설명 부족을 비판했다.[34] 김우헌(金佑憲)은 『朝鮮中央日報』에 연재한 서평에서 고려 노예제론을 비판하고 이청원이 사용한 사료만 가지고도 이청원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다면서『조선사회사독본』의 모순을 지적했다. 상업 발달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도 “결코 상업 발달은 상층계급의 정언적・명령적 의도에 의해서만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체내에 이미 발달된 요소와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라고 비판했다.[35]
이청원은 1934년 말에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를 높게 평가한 것과 달리, 1937년 3월에는 “전형적인 로마 희랍적인 노예사회를 그대로 조선의 역사 발전 행정에 적합시켰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구출할 수 없는 결점은 공식주의’라고 비판했다.[36] 백남운은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1937) 서문에서 이청원의 고려 노예제론을 ‘소아병적 희화술(戱畵術)’이라고 비판했다.[37]
이청원은 1937년에 『조선사회사독본』에 근대사 부분을 추가하여 『조선역사독본』을 펴냈다. 여기서는 “이양선 출몰 이전 아직 자본가적 생산양식을 볼 수 없었던 우리 조선 사회는 한번 외국 자본주의의 강요적 개국에 부딪히자마자 그 봉건적 구성은 갑자기 취약하게도 와해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폈다.[38] 백남운과 이청원 자신이 비판했던 “商業資本도 發生되지 못한 舊社會가 「異樣船」의 侵入으로 突然히 崩壞되엇다”는 김광진의 정체성론과 같은 입장이 되어 버렸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가 내재적 모순의 발전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는 쪽으로 전환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이청원이 참가한 유물론연구회에는 유물론연구회에는 아이카와 하루키(相川春喜), 하야카와 지로(早川二郎) 등 일본을 대표하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도 참가했다. 이들은 서구 사회와 다른 아시아 사회의 특수성, 정체성에 주목하는 강좌파 역사학자들이었다.
이청원이 『朝鮮社會史讀本』(1936) 서문에서 감사의 뜻을 밝혔고 또 개인적인 교류도 있었던 구로다 젠지는 사쿠 다쓰오(佐久達雄)라는 필명으로 『日本古代社會史』, 『東洋古代社會史』(모두 白揚社, 1934)를 펴낸 역사학자였다. 이청원을 유물론연구회로 이끈 고리로 판단되는 이북만은 「조선에서 토지소유형태의 변천」 등의 논문을 일본 좌파 역사학의 아성인 『歷史科學』에 세 차례나 게재한 사회경제사 연구자였다.[39] 그리고 구로다 젠지, 이북만의 역사상 역시 아시아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이청원은 『朝鮮社會史讀本』(1936)의 서문에서 “여러 명의 공동연구 성과도 반영하여 고심을 거듭했으므로 충분히 계몽적 의의를 지닌다”고 밝혔다. 당초 이청원은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에 관심을 가졌지만, 유물론연구회 등에서 일본 학자들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한국사에 대한 정체성론적 인식을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판단된다.

『朝鮮社會史讀本』에 드러난 검열의 흔적=

『朝鮮社會史讀本』은 1936년 4월에 발행되었는데, 불과 한 달 후인 5월에 ‘改訂’ 판이 나왔다. 선행연구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발행 금지를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했지만,[40] 『出版警察報』 1936년 5월호에 실린 「内地出版物取締狀況」을 통해 부분 ‘삭제 처분’을 받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삭제 대상은 242쪽, 247쪽, 249쪽인데 모두 “내선융화 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는 이유였다.[41]
삭제 대상으로 『出版警察報』에서 적시한 것은 242쪽의 “이 무렵 일본 거류민의 조선인에 대한 소치는 실로 극히 ××(참혹)하여 조선인이 빌린 돈이나 외상값을 내지 않을 때는 그 조선인의 문에 못 질을 했다. 그게 점점 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 조선인을 잡아 와 그 안에 넣고 가족이나 친구가 돈을 갚기를 기다려 비로소 풀어 줬다”라는 부분이다. 이렇게 242쪽에서는 ‘中井錦城’라는 일본인 관리의 ‘朝鮮回顧録’를 인용하여 한국병합 전에 벌어진 재조 일본인의 고압적인 행위를 고발하면서 “착착 식민지화에의 준비 공작을 진행해 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47~249쪽에서는 청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했다고 서술하고, 갑오개혁을 설명하면서 “大韓萬歲! 自由·平等·友愛!”라는 표현을 사용하했다. “××× 이 ‘개혁’에 대한 동의는 그리고 협력은 조선 자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식민제도를 전제로 하여 그리고 그 발전적 완료를 위해 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다”라고도 서술하였다. 여기서 ‘×××’는 ‘일본의’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청전쟁의 참화가 한국의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247~249쪽에서는 청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했다고 서술하고, 갑오개혁을 설명하면서 “大韓萬歲! 自由·平等·友愛!”라는 표현을 사용하했다. “××× 이 ‘개혁’에 대한 동의는 그리고 협력은 조선 자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식민제도를 전제로 하여 그리고 그 발전적 완료를 위해 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다”라고도 서술하였다. 여기서 ‘×××’는 ‘일본의’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청전쟁의 참화가 한국의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삭제 처분은 발행일인 4월 5일에서 아흐레 지난 4월 14일에 내려졌다. 그렇다면 책이 이미 유포된 뒤의 삭제 처분은 어떻게 행해졌을까. 다음 달인 1936년 6월호 『出版警察報』에 실린 「差押其の他執行狀況」에 따르면 北海道에서 九州에 걸쳐 처분이 집행되어 약 20%의 ‘差押率’을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경찰 측도 “다수 부현(府縣)의 집행이 우선 주목할 만하다”라고 실적을 평가했다.[42]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초판본(2011년 2월에 東京의 고서점에서 구입)은 241~242쪽과 247~250쪽이 잘려 나간 상태다. ‘삭제 처분’ 흔적으로 판단된다.
일본 전국 도서관을 중심으로 소장이 확인되는 초판본을 ‘전수 조사’한 결과 전체의 약 30%에서 해당 쪽이 잘려나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사회사독본』은 초판이 내용 일부에 대해 ‘삭제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정판을 낸 것으로 판단된다.

주석


  1.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2. 「豊特高秘第1700號 要注意鮮人所在不明手配ノ件」(1932.6.24.)(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76쪽).
  3.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4.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5.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思想研究資料 特輯 第九十五号 左翼前歴者の転向問題に就て』, 司法省刑事局, 1943.8.(『社會問題資料叢書 第1輯』, 1972), 195쪽.
  6. 이청원 이력서 및 자서전(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7. 朝鮮總督府學務局 編, 『大正十五年 朝鮮諸學校一覽』, 1927, 289쪽.
  8.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6쪽.
  9.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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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豊特高秘第2686號 要視察要注意鮮人並要視察臺湾人所在不明手配ニ関スル件」(1932.10.8.)(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108쪽).
  12. 內務省警保局, 『社会運動の状況』(1934)(朴慶植編, 『在日朝鮮人関係資料集成 第三巻』, 三一書房, 1976, 129~1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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