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권

North Korea Humanities

진성원(S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10일 (수) 10:45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진성원(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서정권(徐廷權)
출처 : 서정권,"[1]", 『독립운동인명사전』online, 독립기념관.
 
한글명 서정권 한자명 徐廷權 영문명 SEO Jung-kwon 가나명 이칭 복싱의 신
성별 생년 1912년 몰년 1984년 출신지 전라남도 순천 전공 복싱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 복싱선수. 1912년 전라남도 순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복싱의 창시자 와타나베 밑에서 수련하면서 무역학교에 다녔다. 1930년 10월 제 5회 전일본선수권대회 플라이급 결승전에서 고토히로를 1회 TKO로 물리쳤으며, 이를 시작으로 많은 경기에서 연승하였다. 특히, 일본의 우상인 라이트급 챔피언 피스톤 후리구치를 4회 KO로 물리쳐버리자 일본의 제일인자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권 상실하에서 암울한 시기를 지내던 우리민족에게 커다란 기쁨과 감격을 안겨주어,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획득한 것과 유사한 성원을 받았다. 1931년에 프로로 전향, 같은 해에 당시 전일본 플라이급 챔피언 가시와 우라코로와의 대전에서 1회 KO승의 신기록을 수립하여 화제가 되었다. 그의 무서운 펀치가 전 일본에 알려져 ‘복싱의 신’이라 불렸으며, 그 뒤 적수로 대전할 선수가 없어 고심하던 중 1932년에 프로권투선수로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미국원정을 하게 되었다. 원정경기에서 잭카노와 대전하여 TKO로 물리친 뒤 계속 매시합에서 3연속 KO승을 거두어 미국에서도 그의 명성이 드높았다. 1936년에는 세계챔피언인 양도미와 3번에 걸친 경기에서 1승1무1패로 세계 6위에 올랐는데, 이 경기는 무승부처럼 보이지만 적지에서 단신으로 싸운 입장에서 본다면 승리와 다름없다는 당시의 평을 받았다. 대전료는 모두 고향으로 보내어 선산과 제각(祭閣)을 마련, 주위의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4년 동안의 미국원정을 마치고 귀국, 후진육성과 권투발전에 여생을 보냈다.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한 후 1911년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1919년 3.1운동 때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1] 같은 해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 수립될 때 내무부비서국장을 역임하였다.[2]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이사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26년 임시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고, 1932년에는 윤봉길 의거의 주모자로 잡혀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 출옥하였다.[3]


생애


출생 및 어린시절


1910년대 - 신민회단체


1920년대 - 임시정부단체 활동


1920년대 - 한국노병회단체 등 활동


1930년대와 1940년대





연구


무명의 독립운동가

이유필은 1919년 이후부터 임시정부기관의 여러 요직을 차지하고 다양한 독립운동 활동을 했을 정도로 거물이었기 때문에, 1936년 3월 감옥생활을 마치고 나왔을 때 언론에서는 '상하이 독립운동의 거두의 출옥'이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 하였지만, 해방 후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1945년 남한으로 내려오던 중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어 남한에서 활동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무명의 독립운동가로 남게 되었다.[4]


억울한 친일 누명

1933년 3월 9일 이유필은 중국 상하이에서 윤봉길 의거사건의 관련자로 일본 헌병에 강제 연행되었는데, 이는 중국 국적이었던 이유필을 체포했기 때문에 국제 관례상 국권침해로 일본은 '이유필 본인이 자수했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냈다. [5] 이후 이유필은 평안북도 경찰부로 이송된 후 다음달에 석방되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서는 이유필이 석방된 이유가 변절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이유필은 결국 제명되었다.[6] 그러나 이유필은 석방된 후 가택연금을 당했고, 4개월 뒤에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되어 3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지만, 그것마저도 3년 밖에 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모종의 타협이 있었을 것이라는 비난의 시각이 있었다.[7] 이미 1926년 일본 헌병에 붙잡히고 풀려난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8] 이후 1990년대 초 일본 정부의 비밀문서에 '이유필을 처벌하는 것보다 차라리 석방하여 이를 이용하면 도리어 한국통치상 유리하다'는 문구가 알려지며 이유필의 친일 의혹이 해소되었으며, 3년 형도 결코 가벼운 형벌이 아니라는 것도 확인되었다.[9]


윤봉길 의사와의 관계

윤봉길 의사의 거사 하루 전 윤봉길 의사는 이유필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유서에서 이유필과의 친분을 거론할 정도로 친밀했는데, 이는 1931년 5월 윤봉길 의사가 한국독립당기관의 당원으로 가입하며 당의 총무이사였던 이유필과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10]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던지며 체포됐을 때 윤봉길 의사는 '이춘산'이라는 한국인에게 폭탄과 돈을 받았다고 나오는데 여기서 춘산이 이유필의 호일 정도로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이유필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1]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이계초(李啓初)(혹은 이기초(李基初)) Person: 이유필 A hasSon B
Person: 이유필 Person: 김경희 A hasSpouse B
Person: 이유필 Institution: 법학강습소 A graduates B
Person: 이유필 Institution: 보광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유필 Institution: 경성전수학교 A graduates B
Person: 이유필 Group: 신민회 A isMemberOf B
Person: 이유필 Group: 임시정부 A isMemberOf B
Person: 이유필 Group: 한국독립당 A isMemberOf B
Person: 이유필 Group: 한국노병회 A isMemberOf B
Event: 안악사건 Person: 이유필 A isRelatedTo B
Event: 만세운동 Person: 이유필 A isRelatedTo B
Event: 윤봉길 의거 Person: 이유필 A isRelatedTo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이현희,"이유필(李裕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이현희,"이유필(李裕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이현희,"이유필(李裕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5.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6.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7.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8. "이유필(李裕弼)", 『나무위키』online,나무위키.
  9. 허성호, "일제 극비문서로 친일 누명 벗은 춘산 이유필 선생",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10. 허성호,"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
  11. 허성호,"애국지사 이유필 선생 아들과 윤봉길 의사 조카, 77년만의 첫 만남" 『조선일보』online, 조선일보,작성일:2009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