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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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준(G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1월 26일 (수) 11:2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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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노(金炳魯)
출처 :
 
한글명 김병노 한자명 金炳魯 영문명 Kim Byung-ro 가나명 이칭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
성별 남자 생년 1888년년 몰년 1964년년 출신지 전라도 순창군 복흥면 하리 전공 성리학, 법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법조인, 초대 대법원장이다.

초대 대법원장으로 사법부의 법적 기틀을 다지고, 법전편찬위원장으로서 민법·형법·형사소송법 등 기본 법률안을 기초하였다. 소신 있는 법관, 강직한 공인으로서 자세를 철저히 지켰으며, ‘법조인의 스승’, ‘사법부의 초석’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치하에서 애산(愛山) 이인, 긍인(兢人) 허헌과 더불어 3인이라고[8] 불리며 민족, 인권 변호사로 유명세를 떨쳤다. 광복 이후에는 사법부의 기틀을 세우는 데 큰 공헌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사법·법제·입법·법조윤리의 네 기둥이 전부 그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법조계에서는 ‘사도법관’ 김홍섭 전 서울고등법원장, ‘검찰의 양심’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과 더불어 이른바 법조3성(聖)이라고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생애


탄생부터 광복전

1888년 순창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가장으로서 전우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웠으며, 17세에는 최익현의 의병 부대에 가담해 항일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 메이지대, 주오대 등에서 법학을 공부했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아 일본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으나, 식민지 출신이라는 이유로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1915년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교수 생활을 거쳐 잠시 판사로 일했으나 곧 사임하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독립운동 관련 사건을 무료로 변론하며 법정 투쟁을 벌였고, 허헌, 이인과 함께 '민권변호 삼총사' 혹은 '삼인(三仁)'이라 불렸습니다. 또한 신간회 활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상 조사 등 사회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진 1932년부터는 양주로 낙향하여 광복 때까지 13년간 농사를 지으며 은둔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창씨개명과 총독부의 배급을 모두 거부하며 끝까지 지조를 지켰습니다.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김성수가 재단을 인수하도록 도와 훗날 고려대학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제목2


제목3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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